♣복음말씀의 향기♣ No3811
3월29일[주님 수난 성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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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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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의 고통, 기쁨의 십자가!>
젊은 사제 시절 저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소규모 아동 양육 시절 책임자로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담당했던 역할은 각 집에서 사고뭉치 아이들, 문제아들이 생기면 본부로 데리고 와서 모아서, 같이 지내는 일이었습니다.
학교 보내면 백 퍼센트 땡땡이치고, 선생님들 괴롭히고, 제가 모아서 공부를 좀 시키려 하면 즉시 졸아버리고, 저는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공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에 온종일, 일 년 사시사철 아이들과 놀았습니다.
아침 먹고 축구하고, 점심 먹고 농구하고, 저녁 먹고 게임하고, 주말 되면 피시방, 노래방, 등산 낚시 다니고, 정말이지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한번은 아이들 네 명을 데리고 동네 목욕탕을 갔습니다. 들어가기 전에 절대로 크게 떠들거나
장난치면 안 된다고 단단히 주의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냉탕 속에서 수영하고, 물장구를 치고, 크게 떠들고 싸우고,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어르신 몇 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여기 아이들 보호자 누구요?”
그때 저는 온탕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너무 창피한 나머지 몸을 더 깊숙이 탕 속으로 담구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저에게 다가와서 그러는 겁니다.
“이 신부님이 우리 아빠예요!”
그러자 어르신들이 눈이 휘둥그래지며 그러셨습니다.
“세상 말세네. 요즘은 신부님들도 장가를 가시나?”
돌아보니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때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매알 아이들 때문에 상습 피로에 시달렸습니다. 저는 그때 늘 1톤 트럭에다가 아이들 생필품 싣고 각 집에 배달을 다녔는데,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오면 자정이 넘었습니다.
어떤 때 운전하다가 심각한 차량 정체가 생기면, 너무 피곤한 나머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려놓고, 일 분, 이 분,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다가 뒤차가 빵빵 하면 일어나서, 다시 운전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늘 온몸이 피곤하고 뻐근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그때 겪은 고통은 괴로움의 고통이 아니라 기쁨의 고통이었습니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을 하면서 겪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오늘 성금요일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고통 역시 그런 고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내 한 몸, 몸이 으스러지도록 고통스럽지만, 나로 인해 너희는 살겠구나, 너희는 구원받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겪는 기쁨의 고통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살떨리는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 고통 잠시 후면 끝날 것이고, 내 인내와 희생으로 너희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기쁨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이었음을 확신합니다.
고통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고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고통에 가치와 의미가 부여되면, 그 고통은 다시는 고통이 아니라 은총이요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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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klS3SKXo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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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진리란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하느님 자녀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더는 진리가 무엇인지 찾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우리나라 정식 첫 세례자는 1784년 북경 사신으로 갔다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1777년부터 시작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이끌던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주교와 사제직을 맡아가며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 보고 배우고 온 것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해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의 신앙을 전파했던 한국 초대교회 창설자들은 몇몇 유생의 고발로 사형에 처하게 되고 어떤 분들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북경 주교의 명령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대놓고 제사를 거부하여 1791년 그들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이 돼서야 겨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여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집을 옮겨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는데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발각되면 그를 모시던 회장들이 사제복장을 하고 관아에 끌려가 대신 순교를 함으로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3명의 회장이 순교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강완숙 골롬바가 6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주 신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강완숙 골롬바까지 잡혀가 문초를 당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만 없어지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혀가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이 생명을 부지하여 천주교가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날 밤, 주 신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양 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와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내가 주문모 신부요!’ 하고 자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때가 1801년 4월 19일이니 주문모 신부는 약 6년간 조선교회를 위해 일하셨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순교자가 됩니다.
그 후 33년 동안 사제가 없는 암흑의 신앙생활을 하고 모진 박해가 있었음에도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참조: 김길수 강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주문모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 결혼도 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의 행복도 알고 허무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에서 편하게(?) 사목 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제’라는 정체성, 신원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사제다.’라는 정체성을 목숨으로 지켜내신 것입니다.
요한의 수난기에서는 두 인물이 대비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임을 포기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이 두 인물을 대비하며 하느님 자녀로서의 신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 자녀는 십자가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라도에게 말씀해 주시려던 진리입니다. 유다인 입으로 이 진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하느님의 자녀로 자처하려면 죽어야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피 흘림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위대한 성인으로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訶川要産)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사 직전에 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구출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1909년 성탄절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고독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 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신조는 이것이라 합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피 흘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처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줍니다. 그러면 우리 살과 피가 이웃을 정화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1, 7)
사랑을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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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재임 중에 한국을 2번 방문하였습니다. 1984년 5월에는 103위 시성식을 위해서 방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여의도에서 시성식이 있었고, 저는 현장에서 자리를 정리하는 질서요원으로 봉사했습니다. 1989년에는 제44차 성체대회를 위해서 방한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신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여의도에서 파견미사가 있었고, 저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참가자들에게 행사장소로 안내하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 신학교에서 미사를 하였을 때입니다. 저는 중앙 통로 자리에 있었고,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져서 하혈이 멈추었던 것처럼 교황님의 제의가 제 발에 스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발을 살짝 통로 쪽으로 내어 놓았습니다. 어쩌면 사제가 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제게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제가 되었고, 33년 동안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2005년 4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떠났습니다. 그때 교황님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2009년 2월에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세요.” 교황님과 추기경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복음을 전하셨고, 말씀과 표징으로 새로운 권위를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7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 일곱 가지 말씀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삶을 통해서 꼭 실천하도록 권고합니다. 오늘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나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는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3번이나 넘어지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극한의 고통 중에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그러니 절망 중에, 고통 중에 예수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짐을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노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목마르다.’입니다. 2000년 전에는 제자들의 배반 때문에 목이 마르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외침 때문에 목이 마르셨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 때문에 목이 마르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목이마르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신앙인들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기 보다는 취미 활동과 재물에 더 관심이 있는 사제들 때문에 목이 마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목마름을 우리들이 희생과 선행으로 채워드려야 합니다. 네 번째는 ‘다 이루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 중에는 ‘이만하면 되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는 신앙의 길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 번째는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성모님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는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던 죄인은 삶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 죄인은 구원받았습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평가는 절대평가입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커다랄지라도,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유다는 희망을 버렸고, 구원의 길에서 멀어졌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고,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 중에는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새도, 들의 꽃도 다 헤아리시는 분입니다. 일곱 번째는 ‘어머니 이 사람이 아들입니다. 이분이 어머니시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제자를 아들로 돌보아 주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성금요일입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의 ‘가상칠언’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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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왔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게 하십시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은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돈 때문에 친구를 배반합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은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까지 위험하게 합니다. 명예는 지킬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은 희생과 나눔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정당화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신앙인에게 진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사다리를 타고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삶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을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절망에서 희망을 보았고, 슬픔에서 위로를 받았으며, 또 다른 세상을 보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달리 새로운 권위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병약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천국의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숨을 거두신 ‘성 금요일’ 예식을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 생의 한 가운데서 가장 부끄럽고, 가슴 아팠던 순간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분은 친구를 배반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고 짓밟은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다른 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아내 모르게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날들의 기억 중에서 꼭 용서를 청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저 역시도 사제의 길을 걸으면서 말과 행동으로 많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성금요일 전례를 함께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생각합니다.
나는 또다시 그 옛날 베드로처럼 유다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니 예수님을 팔아넘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가 또 다시 주님께 모욕을 드리고, 조롱을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십자나무 세상 구원이 여기에 달려 있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깊은 경배를 드립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일어나 갑시다.’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이 외로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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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8,1-19,42: “다 이루었다.”
인간은 범죄로 인해 자신의 능력으로는 하느님과 화해를, 즉 구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지은 죄를 안고 죄 중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죄의 용서와 더불어 죄의 죽음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마련해 주셨다. 이것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아드님의 희생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한 순명과 아버지께 대한 사랑으로 이루어 주셨다. 즉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이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 여기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크고 희생적인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십자가 앞에 서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영광을 감추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시어 사셨고, 이제 순명의 극치인 십자가 위에서 죽기까지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의 성업을 완성하실 시간에 가까이 이르신다. 이때 그분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겟세마니 동산으로 가시어 밤이 늦도록 땅에 엎드려 당신이 당하실 수치스러운 고통과 모욕, 죽음을 내다보시면서 피와 땀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신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그분은 이렇게 탄식하며 기도하셨다.
그리고는 악당들에게 강도처럼 붙잡혀 갖은 조롱과 매를 맞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이렇게 제자인 유다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또한 베드로 사도에게도 세 번이나 ‘그를 모른다.’라는 말로 배반을 당하셨고, 온몸은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관을 쓰고, 어깨에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세 번이나 넘어졌고, 결국, 갈바리아 언덕에 끌려가 온몸이 벌거숭이가 되어 굵은 쇠못으로 네 수족이 못 박혀 십자가 위 허공에 달려 강도들 사이에 돌아가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회개하는 강도를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자에게 맡기심으로써, 당신의 어머니를 우리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 이제 교회는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들을 잉태하고 자녀들을 낳아주는 어머니가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을 낳아주신 마리아는 교회의 모습이 되셨다. 이렇게 당신의 사랑을 아버지께 모두 바치시고 이제는 “목마르다!”(19,28) 하신다. 지금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목말라 하신다. 그러면서, “이제 다 이루어졌다.”(19,30) 하신다. 그리고는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루카 23,46). 즉 당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심으로써, 이제는 더 당신의 영이 당신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모든 인간 위에 부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께 맡기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후에도 이제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셨듯이, 십자가 위에 잠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이제 예수님의 구원을 세상에 전파하고, 그 구원을 완성으로 인도하면서, 항상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면서 순례의 길을 갈 것이다. 이렇게 심장이 한 군사의 창에 찔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써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인류 구원의 속죄물로 희생되셨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성부께 드리신 순종이오, 우리를 천국에 초대하시어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며 감사하여야 하겠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잠시 묵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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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미리내 성모성심 수녀회)]
인간은 좋은 가르침이나 교육만으로는 바뀌지 않습니다. 혹독하게 주입된 정보나 지식이 우리를 결코 참다운 인간으로 변모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학력 사회인 대한민국 어디에서나 쉽게 확인되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누군가의 정직한 희생과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성숙과 성장은 ‘주입’이 아닌 ‘발견’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이유는, 죽음까지 넘어서는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그분의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면서도 변하지 않던 제자들은, 십자가의 온전한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의 흉한 몰골에 많은 이가 질겁하고,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의 처참함을 받아들이는 사랑, 우리의 병고와 고통을 짊어지는 사랑,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는 사랑,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을 위하여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라고 기도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만날 때 비로소 인간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불행해하지 않게 됩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충만하여지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다 이루어졌다.”라는 구절이 라틴 말로 “Cosummatum est!”(다 소모되었다, 완전히 소진되었다)인 것을 읽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비논리적이고 비효율적이며 소모적인 신비입니다.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조차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다 써 버린 사건을 기념하는 성금요일, 이날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완성과 승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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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십자가>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 4,14-16;5,7-9)
<여기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라는 말은, 뜻으로는 “순종하심으로써 고난을 겪으셨습니다.”입니다. 순종이 무엇인지 몰라서 고난을 통해서 그것을 배우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셨기 때문에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직역이 아니라 의역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 사도들이 ‘십자가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고 깨닫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이해할 수 없는 일, 받아들일 수 없는 일, 말도 하기 싫은 일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깨달음과 믿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고 정리했습니다.(히브 2,17)>
이제 우리도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아니라, 그렇게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면, “십자가는, 이미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겪으셨던 일”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셨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 아닌가? 왜 자꾸만 십자가 사건을 회상하고 기념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셨지만, 우리의 회개와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반복해서 묵상하는 것인데, 그것은 십자가를 거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 십자가는 거기까지 가는 과정이고 방법일 뿐입니다.
2)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십자가의 신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어야만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옛날의 어떤 죄수의 사형집행일 뿐일 텐데, 믿는 우리에게는 부활로 가는 과정이고,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통로입니다. <십자가가 나타내는 모든 의미와 가치와 상징들은 부활 때문에 생생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부활이 없다면, 십자가는 아무 의미 없는 ‘허망한’ 고통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부활을 믿으면 인내할 수 있지만, 안 믿으면 인내할 이유도 없고, 인내할 힘을 얻지도 못합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왜 꼭 십자가이어야만 했는가?”라고, 또는 “왜 꼭 그렇게 참혹하게 고난을 겪고 돌아가셔야만 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은 “모른다.”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니, 십자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든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많은 방법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 가장 적합한 방법을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다는 정도로 정리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0.14-15.17-18) 단순하게 표현하면,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죽음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죽음 속으로 들어가신 일’이 곧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완전히 물리치고 정복하셨음을 드러내는 일이 부활입니다.
4) 성금요일의 십자가 경배는 십자가라는 물건을 경배하는 일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겠다고, 또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다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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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 수난 예식은 매우 간소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수난을 겪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되새겨 보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건조함은 교회 공동체가 다 같이 그리스도의 고통 속에 잠기게 합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허전함은 교회 공동체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도록 초대합니다. 주님 수난 예식의 고요함은 교회 공동체가 한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간절히 희망하게 합니다.
이 같은 분위기를 위하여 말씀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를 묵상합니다.
제1독서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의 노래입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제2독서는 자비로운 대사제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한편 요한이 전하는 그리스도의 수난기는 그 자체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매우 풍성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하며 구원해 주셨다는 의미, 그리고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어 주셨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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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명 파트리시오 신부님]
오늘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고통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고 죽음을 당하신 ‘주님 수난 성 금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살인의 도구였지만, 예수님께서 매달려 죽으심으로써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는 생명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기 전에 이미 당신이 어떻게 고통을 겪고 죽으실 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쎄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하느님 아버지께 이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기에, 그 처참한 고통과 모욕과 소외와 버려짐과 죽음의 십자가를 피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고통 받고 죽으셔야만 다시 살아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기도하시면서 그 수난의 잔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하나뿐인 아드님을 제물로 내어놓으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님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녀를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 고통이 정말 얼마나 클지 우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고통과 죽음의 길을 걷는 아들 예수님도 정말 고통스럽겠지만, 그것을 바라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 성모님의 마음은 정말 어떻겠습니까! 한없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말로도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느님과 똑같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생전에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그 큰 사랑을, 이제 직접 당신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이 큰 사랑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시는데,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십자가들을 기꺼이 짊어지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십자가들을 피하려 하고, 거부하고, 불평 불만을 터뜨릴 때, 결국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실 분은 예수님 밖에 없게 됩니다. 또 다시 그분 홀로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들이 나를 무겁게 누를 때마다, 조용히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고, 저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으시고, 결국 그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음을 생각할 때, 우리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이 나의 고통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계신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한 번 예수님 홀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으러 가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도 스승님의 뒤를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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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부제서품을 받은 뒤, 동기 부제들과 교수 신부님들과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났을 때를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 그분이 밟으셨던 땅, 그분이 맡으셨던 공기. 이 모두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순례는 참으로 의미 있고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저희는,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길을 하는 내내 차마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가 기도를 하고 있었지만 그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넓지 않은 길 가장자리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 소리 지르는 사람, 물건을 사기 위해 흥정하는 사람, 바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여행객. 그야말로 시장통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비록 종교가 다를지라도 기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는 그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대에 대한 존중이 없을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정신없는 십자가의 길이 끝난 뒤, 함께 동행하신 교수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말씀은, “이천 년 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시던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하시던 그 순간의 분위기도 오늘의 이러한 분위기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례 안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집중하고 묵상하므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시선이 온통 예수님을 주목하고 있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참하게 고통 받고 모욕을 당하던 그 날, 누군가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아이를 학교에 보냈을 것이고 장사를 했을 것이며, 거리에 빨래를 널었을 것이고 가족들이 먹을 식사를 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다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예수님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를 듣고는 그에게 침을 뱉었을 수도 있고 저런 죄인은 지긋지긋하다며 무관심했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예수님이 잡혀가던 순간부터 지독하게 그를 괴롭히고 모욕을 주었을 테지만 또 다른 상당수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인류가 지어온 죄의 용서를 위해 극심한 고통 중에 누군가 대신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특별한 기회가 없어도 계기가 없어도, 내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내 생활에만 열중하다 보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오늘은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고 그분의 부재를 체험하는 날입니다. 오늘만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 외에는 모든 성사가 금지되고, 1년 중 유일하게 미사가 없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는 묵묵히 개인적으로 미사를 드려 온 사제들조차 성체성사를 거행하지 않고 미리 축성해 놓은 성체만 영할 뿐입니다. 그리고 지금하고 있는 간단한 예식을 통해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이 예식 안에서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사제로써, 수도자로써, 평신도로써, 미사도 성실히 참석했고, 특별히 큰 죄는 저지르지 않았어. 그나마 지었던 작은 죄들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 받았지.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직접 불러온 이스라엘 사람들과 죄질이 같지는 않을 거야.’ 이러한 우리의 모습은, 결정적인 예수님의 죽음의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뒷짐 지고 자신의 할 일만 하던 이들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지도 모욕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과 나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인 마냥 자신의 할 일만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모습 역시 그러했습니다. 학업, 일, 일상생활 중에 예수님은 종종 나와는 관계없는 분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들의 사소한 욕심, 욕구, 이기심, 질투심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모든 죄를 떠안으신 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이 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라고 절규하십니다. 그리고 급기야 십자가 위에서는, “주님 왜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율 속에서도 잊지 않으시는 말씀이 있으니, 그것은 “주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라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우리가 범하는 죄가 무엇인지 미처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용서 받아야 할 일이었고, 그리하여 오늘 예수님은 이 모든 죄를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의 용서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와 땀으로 얼룩진 눈을 감으며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어졌다.”
적어도 오늘 이 밤은, 세상에서 빛이 사라진 순간, 악이 선을 집어삼킨 밤입니다. 우리 사제단이 반드시 그분과 같은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던 젊은 청년 예수는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수녀님들이 마음모아 사랑을 고백하며 돕겠다고 결심했던 하느님의 아들은 이제 세상에 없습니다. 미사 중에, 그리고 일상 안에서 은총과 축복을 느끼며 우리 모든 신자들이 의지하고 기도했던 자비의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 없습니다. 리고 지금 이 밤은 그 사라져버린 빛이 언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지, 미처 예상할 수 없는 밤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살아계시는 동안 나를 위로하시고 용서하셨던 그 사랑, 이웃을 사랑하라고 초대하셨던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보편지향 기도 후 우리 앞에 드러나게 될 십자가는 바로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 경배를 하면서,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내려다보시며 슬퍼하시고 아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의 아픔을 깊이 통감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신음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십자나무를 보십시오. 여기에 세상 구원이 달려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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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1)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19, 28. 30)
고통에 낯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긴 삶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묻게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가장 오랜 질문은 고통은 ‘왜?’라는 질문이지만, 우리는 이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또한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몇 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한 소녀가 울면서 교황님께 이와 비슷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교황님의 답변은 이러했습니다. “소녀는 대답이 있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진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것도 말이 아닌 눈물로써 표현했어요. 울 수 있을 때만 너의 질문에 가까이 갈 수 있단다. 어떤 사실들은 눈물로 씻은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성금요일의 시선은 온통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으며 저의 시선 역시 동일합니다. 그 까닭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분에 대한 관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의 신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느님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이나 개념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사실이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만져지고 체험되는 삶이었고 죽음이며 부활입니다. 그분은 들을 수 있는 말씀이며 관상할 수 있는 사건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역사입니다. 저희 창립자이신 십자가의 성 바오로는 자기 실존의 자리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가슴에 자리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창립자는 예수의 십자가가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하고 놀랄 만한 업적임을 또 그분의 고통은 하느님 사랑의 기적 중의 기적, 순수한 사랑의 업적임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립자 십자가의 성 바오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고통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 둘은 서로를 입증하고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가장 거룩한 고통의 바다는 하느님 사랑의 바다에서 흘러나온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 이 두 바다는 진실로 하나일 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성 바오로가 예수의 고난이 사랑의 일이며 하느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업적임을 직관한 첫 번째 사람은 아닙니다. 성 요한은 이미 이를 이렇게 단순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16)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예수의 고난이 지닌 이 차원을 잃어버렸고 망각되어 왔습니다. 구세사는 한마디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왜 사랑이신지 그리고 이 사랑이 무엇인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특별히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그분 수난의 십자가 여정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가 들려준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성 아오스딩은 그의 서간집에서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높이 못 박혀 있는 십자가의 횡목은 그분이 행하신 선한 일들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위에 팔과 손이 펼쳐져 있다. 십자가의 꼭대기에서 아래에까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은 마치 인내의 가치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시는 것처럼 똑바로 선 자세로 계시다. 십자가의 횡목이 종목을 가로지르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머리가 앞으로 나오는 그 지점에서부터 십자가 꼭대기 부분,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 땅에 박혀 보이지는 않지만, 십자가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이 부분은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의 깊은 뿌리를 의미한다.』
분명히 하느님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죄의 무서운 징벌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궁극적인 결과까지 감수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1코15,3) 라는 말의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손상된 하느님의 영예를 위해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구체적으로 악과 죄라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현실의 한계와 구체적인 충돌의 결과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과거 그리고 오늘의 많은 예언자가 그랬던 것처럼 종교 지도자와 정치가들에 의해 단죄받고 죽으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 평화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이 모든 고난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은,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3,16)는 말씀의 실현이며, 그것의 시작도 사랑이며 마침도 오직 사랑에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외침이 있습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15,34) 이 외침은 하느님 아버지의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침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만 외아들 예수와 함께 고통당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외아들 예수와 함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아드님을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유롭게 풀어 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그대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오로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예수와 동행하며 그의 고통과 절망을 겪으면서 다만 아들에게 용기를 갖도록 함께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셨다.” (요3,16) 는 표현 이상으로 하느님의 마음과 그 태도를 잘 설명하는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마지막까지 자신의 전부를 내어준 아드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반영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현실을 향하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이 사랑이다, 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하고 중요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즉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부활을 관상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우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인간의 고통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현존하고 있다는 체험과 그 믿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고 고난 속에서 부활을 관상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사랑의 역설을 삶으로 증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목마르다.”(19,28) 하고 말씀하심은 바로 우리 사랑의 응답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제 시선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그리고 세계 여러 곳에 일어나고 있는 재난과 지진으로 죽어간 이들과 난민들에게 쏠려 있습니다. 전쟁과 지진으로 나약한 아이들과 여성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남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 삶 가운데 현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기억합시다.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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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마르다.”, “다 이루어졌다.”(19, 28.30)
성금요일 전례는 말씀의 전례 곧 예수님의 수난기가 중심이 되는 전례입니다. 이후 예수님수난의 압도적인 표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경배 예식이 첨가되면서 더 풍부하고 풍요로운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이 완결完決되었습니다.
오늘 수난기와 십자가 경배의 중심 장소는 ‘해골터’라는 곳으로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합니다. (19,17) 골고타는 예수님께서 못 박히시고 죽으신 곳으로, 또한 예수님께서 묻히시고 부활하신 곳이기도 하며, 훗날 헬레나 성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한 곳입니다. 현재는 예수님의 무덤 성당이 있는 곳이 바로 골고타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기의 시작은 어두운 밤중 게세마니 동산에서 출발하여 태양이 뜨겁게 비추는 한 낮 해골터라는 골고타에서 마칩니다. 예수님의 투옥과 고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수난기를 들으면서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당한 숱한 모욕, 그 수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때론 많은 영화에서 폭력적인 고문의 장면들이 재현되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벌거벗겨진 채, 채찍질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며,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모습들이 성가 「보았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노래한 흑인 복음성가의 음률과 함께 아픔으로 밀려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19,7)라고 하자,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죄명 폐를 달았던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숱한 놀림의 대상, 무죄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님의 겉옷을 벗겨 네 몫으로 나누어 가지고 속옷을 가지고는 제비를 뽑는 그들의 저 무모함과 무심함이 역설적으로 이 순간의 고통을 더 강렬하게 말한 듯싶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주님의 침묵과 인내는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침묵을 깨뜨리시고 남긴 일곱 말씀에서 주님의 관심은 당신이 당하신 고통보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시고 위로하셨음에 참으로 감동과 전율을 느낍니다. 자신보다 하느님을 먼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이타성은 어머니를 보살필 사랑하는 제자를 선택하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예수님은 “목마르다.”(19,28)는 말씀을 통해서 고통에 따른 무거운 탄식을 쏟아내시지만 이는 당신의 목마름보다 사랑과 생명으로 타는 목마름과 갈증을 느끼는 우리의 상태를 일깨우신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지금도 사랑의 선교 수녀회 성당 감실 위에는 목마르다, 는 말씀이 새겨진 것은 바로 오늘 세상의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목마르다, 는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의 갈망을 통해 세상의 갈망을 드러내신 것이라 느껴집니다. 요한은 지상에서 예수님의 존재와 삶의 모든 활동을 상징적인 한 말씀으로 귀결 짓는 “다 이루어졌다.”(19,30)라고 외치시고,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모든 말씀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너무나 아파하고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신 것입니다.
이런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교회는 훗날 “참하느님에게서 나신 참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상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습니다.”(니케아 신경)라고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참 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로마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치욕스럽고 혐오스러운 사형 방법이었으며, 그러기에 교회가 십자가를 굴욕의 상징에서 희생적인 사랑과 구원의 상징으로 받아들인 시기는 무려 4세기가 되어서야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라고 노래 부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십자가 경배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으로 가져온 사랑과 구원에 감사와 찬미 그리고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온갖 수치심과 슬픈 고통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신 그날과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시 기억하며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바로 그 시간이 바로 구세사의 특이점의 순간이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시간 나는 어디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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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6.25 전쟁 때, 외국에서 파견된 한 군의관이 추운 겨울에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리 밑에 벌거벗은 한 여인을 발견했습니다. 몹시 추운 겨울이었기에 동사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품에서 한 아기가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 여인은 자기의 모든 옷을 벗어 아이를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다리 밑 양지바른 곳에 여인을 묻어주고, 이 갓난아기를 자기의 양녀로 삼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기가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 군의관은 성인이 된 양녀를 데리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다리 밑 무덤을 찾아가서, 무덤의 주인공이 너의 생모였고 너를 살리기 위해 얼어 죽었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딸은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잠시 뒤에 자기 재킷을 벗어 무덤을 덮으며 말했습니다.
“엄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어머니의 사랑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사랑이 중첩됩니다. 주님께 우리도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그때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어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특별히 수난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얼마나 외롭고 아프셨을까요?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는 복되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고 뺨을 때리는 멸시와 배척을 표시합니다. 무한한 사랑만을 전해주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그대로 되갚아 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악의에 찬 목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결국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십니다. “다 이루어졌다.”라는 한 마디만 남기시고 말입니다. 멸시와 배척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또 악의에 찬 목소리에도 묵묵히 계십니다.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묻히십니다. 주님의 고통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본받아 우리 역시 완벽한 사랑의 실천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보답하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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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마르니 참으로>
“목마르다.”(요한 19,28)
빛이
빛이기에
꺼뜨려지는 순간에도
여전히 빛에 목마르니
참으로 빛이다
사랑이
사랑이기에
버림받는 순간에도
여전히 사랑에 목마르니
참으로 사랑이다
베풂이
베풂이기에
빼앗기는 순간에도
여전히 베풂에 목마르니
참으로 베풂이다
섬김이
섬김이기에
짓밟히는 순간에도
여전히 섬김에 목마르니
참으로 섬김이다
살림이
살림이기에
죽임당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살림에 목마르니
참으로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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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존재하지 않으며 십자가는 제대 위에 항상 놓아두어야 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그분 스스로 짊어지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는 패배요, 절망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차마 피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쳤고 의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길이었기에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님은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하고 콜로새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언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상에서 오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 하고 기도한 순간들이 헛구호가 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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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순종의 대사제답게, 진리의 왕답게-
오늘 수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평생 삶이 보입니다.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인간 만물상 같습니다. 여러분 얼굴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정과 죽음을 통해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요한의 수난복음은 물론 두 독서를 보면 초대교회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믿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은 저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처럼 “주님의 종답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종으로서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의 전생애와 수난과 죽음을 통해 그대로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실현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모습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가 환히 드러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때문이었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온전히 “우리를 위해서”라는 주님의 종, 예수님의 삶입니다. 죄로 이지러진 우리의 실상을 거울처럼 보여주는,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주님의 종의 모습입니다. 바로 오늘 수난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깊이 감지되는 무죄하면서도 참된 사람으로서 주님의 종의 모습이 우리를 회개에로 이끕니다. 주님의 종처럼, 섬김의 종으로서 이웃을 위해 주님의 종답게 살도록 우리를 분발케 합니다.
둘째, 예수님처럼 “대사제답게” 사는 것입니다. 대사제답게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제자로 산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모두 주님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수난과 부활을 통해 대사제 예수님을 발견했고 그들의 고백은 옳았습니다. 히브리서의 고백은 우리에게도 용기백배 힘을 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우리의 곤궁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대사제 예수님은 철저히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 새삼 우리 인생은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전 생애를 요약한다면 섬김과 순종일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의 종으로서 일관하셨고, 순종의 대사제로 일관된 삶이셨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고난을 순종의 계기로 삼으셨으며 순종하는 모든 이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오늘 수난복음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삶은 순종이자 순종의 여정입니다. 일상의 고난 중에 크고 작은 순종의 여정에 충실할 때 대사제 예수님처럼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처럼 왕답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 수난기에서도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답게, 진리의 왕답게 자신의 고통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십시다. 진리가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되어갈수록 자유로운 왕다운 삶입니다. 진리의 왕이신 주님을 닮아 진리의 연인으로 불리기를 원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요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한 베네딕도 16세 교황입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가 우리에게는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진리가 무엇이오?”
새삼 화두처럼 주어지는 빌라도의 “진리는 무엇이오?”라는 물음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진리가 무엇이냐 묻는 빌라도는 바로 무지를 반영합니다. 진리이신 주님을 사랑하고 알아갈수록 예수님처럼 진리의 왕다운 삶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주님의 섬김의 종답게”, “순종의 대사제답게”, “진리의 왕답게” 참사람이 되어 살아갈 제자리는 어디일 까요? 바로 수난복음 후반부에 나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머물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성모님을 모시고 평생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언같은 당부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매님들은 “어머니의 딸입니다.”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당부는 믿는 모든 이들에 해당됩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어머니 성모님을 모신 애제자가 상징하는바 우리 믿는 모든이들입니다. 바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주님의 종답게, 대사제답게, 왕답게 참사람이 되어 살아가야할 영원한 삶의 자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과 함께 뿐임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는 대로 죽습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잘 살아야 잘 떠나는 선종의 죽음입니다. 오늘 수난 복음중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가 예수님의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요약합니다. 참사람이 되어 잘 살다 잘 죽고 싶습니까? 미리 묘비명이 될 임종어를 정해놓고 좌우명 삼아 사시길 추천합니다. 제 경우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임종어가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하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과 죽음이 되게 합니다. 평생 진리에 목말라했던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진리이신 하느님을 목말라했습니다.
“목마르다”
그리고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한 삶이요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께 맡기는 삶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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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 이루어졌다."(요한19,30)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후 세 시 경'에 돌아가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성찬 전례가 없는 날입니다.
파스카 성삼일의 둘째 날인 오늘, 교회는 어젯밤부터 시작된 밤샘 조배를 이어갑니다. 오후 3시에 함께 모여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저녁에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합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요한 18,1-19,42)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시고'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십니다.
오늘 독서(이사 52,13-53,12)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우리를 위해 수난 받으시고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그의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이사 52,1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 53,3)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이사 53,4-5)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이사 53,10)
예수님, 잘못했습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브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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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tpC5bTGD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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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 19, 30)
주님께서는
삶의 마지막을
십자가에서
마치십니다.
십자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기꺼이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십니다.
살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만납니다.
십자가가
구원을
안고 갑니다.
모든 구원의
역사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집니다.
삶의 가치를
십자가에서
다시 찾고
만납니다.
하느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로
죄와 죽음을
지우십니다.
소금기둥이
아니라
십자가로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십자가로
우리는
주님을 모르고
살았던 우리가
주님을 알게되고
우리를
알게되었습니다.
사랑할수록
함께할 수 있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사랑을 고백하고
십자가의
목숨으로
하느님의
생명을 다시
쓰다듬습니다.
십자가는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자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열쇠입니다.
묶여 있던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따라
번지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수난 받으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의 수난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수난 앞에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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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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