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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빛낸 10인의 남성 성악가
선정 개요
제174-1998년-8월호 객석
객석의 창간 14주년 특집 연재로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남성성악가 등을 살펴보며
진행되어온 '20세기를 빛낸 음악가들'이
이번 호에는 그 마지막 순서로
'10인의 여성 성악가'를 선정해 소개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연주가들을 살펴보고 있는
객석의 창간 14주년 특집 연재
'20세기를 빛낸 음악가들'편이 이번 호에는
'10인의 남성성악가'를 선정해 소개한다.
이번 선정에는 국내 음악평론가,
칼럼니스트 외에도
성악가들이 선정위원으로 참여했다.
선정위원은 김길영, 김범수, 김상곤, 김상현,
김용만, 김인혜, 노승종, 류태형, 문유진, 박세원,
박종호, 서동진, 송영택, 송하윤, 유윤종,
유정우, 유형종, 윤정열, 윤현주, 이석렬,
이성일, 이순열, 이재준, 임정근, 임화섭,
장국현, 장일범, 조성진, 최갑주, 최현수(가나다순) 등
모두 30명이었다.
성역이나 전문 분야별로 구분하지 않고
20세기에 활동한 남성 성악가
전체를 대상으로 집계한 이번 선정의 결과는,
1.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T)
2.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T)
3.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 T)
4.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Dietrich Fischer-Dieskau, Br)
5.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 T)
6. 프리츠 분덜리히(Fritz Wunderlich, T)
7. 표도르 샬리아핀(Feodor Chaliapin, B)
8. 헤르만 프라이(Hermann Prey, Br)
9. 호세 카레라스(José Carreras, T)
10. 페터 슈라이어(Peter Schreier, T)
그리고, 11. 유시 비욜링(T),
12. 티토 곱비(Br),
13. 베냐미노 질리(T),
14. 체사레 시에피(B-Br),
15. 프랑코 코렐리(T),
16. 한스 호터(B-Br),
17. 토머스 햄슨(Br),
18. 존 비커스(T),
19. 주세페 디 스테파노(T),
20. 호세 반 담(Br),
21. 브라인 터펠(B-Br),
22. 니콜라이 갸우로프(B),
23. 에른스트 헤플리거(T),
24. 카를로 베르곤치(T),
25. 티토 스키파(T),
26. 니콜라이 겟다(T),
27. 에토레 바스티아니니(Br),
28.제라르 수제(Br),
29. 로베르토 알라냐(T),
30. 볼프강 빈트가센(T)의 순으로 나타났다.
(T : 테너, Br : 바리톤, B-Br : 베이스-바리톤,
B: 베이스)
선정 결과 테너,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전문으로 하는 테너들이
초강세를 보였다.
상대적으로 기악 쪽에서 우세를 보이던
러시아와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성악가들은
약세를 나타냈는데,
이는 지금까지 다른 분야의 선정 결과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이다.
이는 20세기에도
18,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가 큰 인기를 끌었고,
따라서 이탈리아 성악계의 '벨 칸토'와
'스타 시스템'이 계승되면서
계속해서 발전해왔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이탈리아 성악에 대한 선호도가
비교적 높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한편 10위 안에 든 인물들이
20세기 초반의 전설적인 성악가들인
카루소와 샬리아핀,
요절한 천재 분덜리히, 델 모나코,
지난 7월 23일 급서한 프라이를 제외하면
모두 현존하는 음악가들이라는 사실도
다른 분야의 집계결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스리 테너', 파바로티, 도밍고, 카레라스는
모두 10위 안에 들어
이들이 대중적 인기와 상업성,
그리고 음악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10인의 남성 성악가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20세기를 빛낸 10인의 남성 성악가
1.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 )
파바로티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테너'로서
첫 손가락에 꼽혀온 가수다.
성악은 목소리가 악기이기에
그 무엇보다도 타고난 목소리의
탁월함을 필요로 한다.
목소리의 양감, 질감, 색감이 뛰어나고,
고르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면
일단은 훌륭한 가수가 되는 데
지극히 유리하다.
파바로티는 일단 멀리 뻗어나가는
고르고 큰 성량과 목소리의 고운 질감,
맑고 깨끗한 색감 면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
테너로서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요건─
테너 성부의 고역을 노래할 때,
위와 같은 성질들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욱 빛난다는 장점을 갖고 있으므로
그가 '최고의 테너'로 꼽히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그는 카라얀과 더불어
20세기 후반에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클래식 음악가다.
1935년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한 살 어린 미렐라 프레니와
같은 유모 밑에서 자랐다고 한다.
유모에게서 섭취한 영양분이
특수했던 탓일까.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목소리를 지니고
화려하게 성악계에 등장했다.
프레니가 63년 스칼라에
데뷔한 것에 비한다면
파바로티가 스칼라 무대를 정복한 것은
조금 늦은 감이 있는 1965년,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었다.
그 이전인 61년,
레초 에밀리아의 아키레 페리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같은 도시 가극장에서
로돌포를 불러 오페라 가수로서 데뷔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그가 20세기 후반을 풍미하는
대가수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63년에 빈 국립가극장에
역시 로돌포 역으로 데뷔했고,
코벤트가든에는 디 스테파노의 대역으로
역시 로돌포를 불러 데뷔했다.
연주활동 초반에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은
'바로 파바로티 그 자신'으로서
인식되었을 정도다.
97년 3월호 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로돌포'도 역시 파바로티였다.
이렇게 먼저 이탈리아 밖에서 인정을 받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64년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65년에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데뷔한 그는 이후 정상급 무대에 뒤늦은 데뷔를 보상이나 받으려는 듯, 거의 철인적인 활약을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울리는 리리코 배역은 물론, 리리코 레지에로까지 자유자재로 소화하며 빛나는 목소리로 가는 곳마다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당시의 주요 레퍼토리는 로돌포를 비롯, 에드가르도('람메르무어의 루치아'), 알프레도('라 트라비아타'), 만토바 백작('리골레토'), 핑커튼('나비부인'), 이다만테('이도메네오') 등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 도니제티, 벨리니, 베르디 등 거의 모든 벨 칸토 오페라의 배역을 소화하다시피 한 그는 80년대 들어 좀더 무게 중심이 낮아진 목소리를 바탕으로 드라마틱한 역까지 자신의 레퍼토리 영역으로 끌어 당겼고, 베리스모 오페라까지 손을 뻗쳤다.
81년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를 창설한 그는 90년대 들어서 몇십만, 몇백만 규모의 대군중을 동원하는 야외 공연의 개념을 확립해 나갔다. 상업적이라는 이유로 구설수에도 올랐던 이 공연은 월드컵, 그리고 다른 두 테너와 결합해 '스리 테너'로서 모습을 바꿔 이어지고 있다.
그의 음반은 거의 모두가 데카에서 나온 것들이다. 프레니와 함께한 '라 보엠'(72년, 카라얀-베를린 필)이 역시 대표적인 음반으로 꼽힌다. 메타 지휘의 런던 심포니, 그리고 서덜랜드와 함께한 푸치니 '투란도트'도 좋다. 역시 서덜랜드와 함께한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70년), '람메르무어의 루치아'(71년) 등도 빼놓을 수 없는 벨칸토의 명반.
2. 엔리코 카루소(1873∼1921)
'카루소'라는 노래가 있다. 파바로티가 부르는 루치오 달라의 '카루소'는 무척이나 애절하게 들린다. 이 노래의 가사는 카루소의 일생을 압축해서 담고 있다. 그렇다면 카루소의 일생은 그렇게도 슬프고 불행했을까. 겉만 보면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는 20세기 초에 가장 유명한 가수였다. 카루소가 활약할 당시는 지금과 같이 상업적인 대중음악이 아직 발달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카루소는 지금에 비하면 '마이클 잭슨' 정도의 세계적인 명성을 누린 가수였다. 따라서 돈도 따랐다. 개런티는 '백지수표'에 자신이 써넣으면 될 정도였다. 그가 생전에 레코딩으로 벌어들인 돈은 약 200만 달러.
그가 그토록 유명세를 누리며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노래를 잘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역사상 최고의 테너 가수'라는 칭호가 뒤따른다. 지금 들으면 19세기적 가창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지만 그의 노래에 담긴 희로애락의 현과 묘한 뉘앙스의 변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풍기는 카리스마는 '그의 노래 그 자체' 외에 다른 무엇으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다.
카루소는 나폴리의 빈민가에서 7남매의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창고 인부였다. 술주정뱅이였고, 음악은커녕 자녀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도 안하던 사람이었다. 10세부터 공장에 나가 자신의 밥벌이를 해야 했던 카루소는 저녁시간에 몰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15세가 되어 정식 음악수업을 시작한 그는 베루지네라는 성악 코치에게서 배웠다. 베루지네는 카루소의 타고난 재능을 간파하고 그를 이용해 돈을 벌려 했다. 1894년, 베루지네가 성급하게 데뷔시키려 했던 무대에서 망신만 당하고 내려선 카루소는 이듬해 다행히 나폴리 테아트로 누오보에 별 무리없이 데뷔했다.
지휘자 빈센초 롬바르디를 만나며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되었다. 베리스모 오페라의 신봉자이던 롬바르디는 카루소에게서 참다운 베리스모의 구현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에게 많은 무대를 맡겼다.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카루소에게 베리스모 오페라는 체질적으로 잘 맞았을 것이다. 그의 가창도 목소리도 이를 계기로 새롭게 탄생했다.
1900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스칼라 가극장 무대에 오른 그는 30세가 되던 190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등장한 이후 절정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1904년에 프로듀서 가이스버그에 의해 이루어진 유명한 레코딩은 레코드의 역사를 바꿔놓았다. 폭발적으로 팔려 나가며 레코드를 상업성을 가진 매체의 자리에 확고히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상업적인 성공과 대중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이야말로 불행의 시작이었다. 당대의 스타들 중에서도 '황제 스타' 격의 위치에 오른 그는 특급 호텔 한 층을 모두를 숙소로 쓰고, 수많은 보조자와 하인들을 거느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그의 개런티는 무대에서의 부담을 더해주었다. 그는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음악에서만큼은 '개런티에 걸맞는 훌륭한 연주를 해야 한다'는 완벽주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시즌에 한두 편 주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만 빼고 다 맡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소화해야 했고, 무대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했기에 그에 따른 정신적, 육체적 소진으로 너무 일찍 쓰러지게 되었다.
47세가 되던 1920년에 은퇴했지만 이미 늦었다. 이듬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늑막염이라는 사실은 카루소가 성악가로서의 자신을 얼마나 혹사시켰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60세가 넘은 지금도 별 무리없이 노래하고 있는 파바로티가 '카루소'를 부른다는 사실 또한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의 자취를 담은 음반은 RCA의 12장짜리 전집과 펄의 12장짜리 전집이 유명하다.
3. 플라시도 도밍고(1941∼ )
우리 말로 '즐거운 일요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플라시도 도밍고. 그는 가끔 '20세기 후반의 테너 중 누가 가장 뛰어난가'를 가리는 논쟁에서 파바로티와 함께 늘상 도마 위에 오른다. 이 경우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발언을 잘 들어보면 개인적인 선호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파바로티와 도밍고는 세부적으로 나눠볼 때,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뚜렷이 서로의 전문 분야를 나눠서 점하고 있다. 같은 작곡가의 경우라도 좀더 리릭한 작품은 파바로티가, 드라마틱한 작품은 도밍고가 나은 것이 당연하다.
파바로티가 천부적인 미성과 시원스런 고음의 뻗침을 자랑한다면, 원래 바리톤이었던 도밍고는 이런 점에서는 밀리지만 탁월한 극적 표현력과 드라마틱한 가창을 장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밍고는 자신의 의지로 고음을 점령한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 그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탁월한 배역 소화와 뛰어난 연기라는 측면에서도 도밍고를 능가할 인물은 드물다.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8세 때 멕시코로 건너간 도밍고의 부모는 스페인의 민속 오페라, 사르수엘라 가수 겸 극단장이었다. 멕시코 시티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배우다 나중에 성악으로 전향한 그는 16세가 되던 57년, 사르수엘라 극단에서 바리톤 가수로 데뷔해 젊은 스타 가수로 인기를 모았다. 20세가 되던 61년, 멕시코 시티 가극장에 역시 바리톤 가수로 데뷔했고, 같은 해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테너로서도 데뷔했다. 파바로티와 같은 해에 본격적인 테너가수로 데뷔했으니 활동기간으로 치면 두 사람이 같은 꼴이다. 하지만 도밍고는 당분간 바리톤도 병행했다.
62년부터 67년까지 텔아비브, 마르세유, 뉴욕 등의 극장들을 전전하던 그는 68년에 이르러 기회를 잡게 되었다. 프랑코 코렐리의 역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마우리치오 역으로 데뷔해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이후 베르디가 창조한 돈 카를로, 오텔로, 라다메스 등의 역할, 푸치니 및 베리스모 주요 작품, 프랑스 레퍼토리들에서 빛을 발하며 메트와 빈 국립 가극장, 스칼라 극장, 로열 오페라 극장 등을 누볐다. 따라서 도밍고는 파바로티보다 레퍼토리 면에서 폭이 넓다고도 할 수 있다.
사르수엘라에도 계속 출연했고, 리사이틀도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80년대 들어서는 어린 시절 잠시 공부했던 지휘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 오페라뿐만 아니라 교향악단의 지휘대에도 섰다. 90년대 들어서는 '라 토스카' '라 보엠' 등의 오페라 지휘 중심으로 선회했다.
90년에는 아바도 지휘의 빈 국립 가극장 무대에 로엔그린으로 등장하며 바그너에까지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바그너로 선회한다는 것은 성악 역사상 드문 일로 마치 무슨 금기를 깨는 것처럼 받아들여졌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도밍고는 의욕적으로 바그너에 도전, 91년 메트에서 레바인이 지휘하는, 그리고 빈 국립 가극장에서는 홀스트 슈타인이 지휘하는 '파르지팔'에 출연했다. 급기야 92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해 레바인 지휘의 '파르지팔'에 출연했고, 이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현재 '발퀴레'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까지 도전한 상태다.
도밍고의 '오텔로'와 '아이다' '돈 카를로' 등은 역시 어떤 것을 들어보아도 수준급이다. '오텔로'는 정명훈 지휘로 바스티유 극장에서 녹음한 최근의 음반(DG)이 있다. 아바도 지휘로 스칼라 극장에서 녹음한 '돈 카를로'(DG)와 '아이다'(DG) 역시 오래되지 않은 녹음. 영화배우 같은 외모, 연극배우 같은 연기를 과시하는 영상물도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 마젤 지휘, 프랑스 국립 가극장과 함께 한 비제의 '카르멘'이 가장 유명하다.
4.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1925∼ )
피셔 디스카우가 금세기 최고의 리트가수라는 데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공로와 업적은 오페라, 바흐, 현대곡 초연, 그리고 음악저술의 영역에서도 빛나고 있다. 지난 92년 공식적인 은퇴 공연을 가졌던 그는 다행히 금세기 안에 평가를 받게 되었고, 세기의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남았다.
베를린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나치와 히틀러의 치하와 전쟁의 와중에서 보냈다. 이미 전쟁이 진행 중이던 41년, 게오르크 발터에게 성악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헤르만 바이센보른을 사사했다. 전쟁이 극에 달하던 1943년, 불과 18세이던 그는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 성악가의 꿈을 접어두고 총을 잡은 그는 다행히 죽음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미군의 포로로 잡힌 그는 수용소 음악회로 첫 공연을 기록했다.
47년에 다시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 복교해 바이센보른의 문하로 들어갔다. 22세의 나이로 다시 시작하는 '늙은 학생'이었으나, 극한의 상황을 겪고 많은 생각을 한 4년의 공백기가 그에게는 오히려 훗날 예술적 완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재능만은 남달랐던 그는 같은 해 리트 독창회를 갖는다. 48년 베를린 시립 가극장에서 단역으로 오페라 데뷔를 기록한 그는 같은 해, 같은 곳의 수석 바리톤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60년대 중반까지는 작곡가의 국적, 시대를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오페라에 출연하며 한계를 모르는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51년, 26세 때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하는 빈 필과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를 협연했다. 당시 녹음은 음반화되어 역사적인 명반(EMI)으로 남았다. 이미 독일의 전후세대 최고의 음악가로서의 자리를 굳혔던 것이다. 1954년, '탄호이저'의 볼프람 역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데뷔했다. 이후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바리톤으로서 자리를 굳힌 그는 61년 한스 베르너 헨체의 '젊은 연인들을 위한 엘레지', 62년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의 초연 독창자로 나섰다.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전성기에 그의 활동의 면면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67년에 그동안 호흡을 맞춰오던 제랄드 무어의 은퇴공연에 참여했고, 71년에 이스라엘 순회 공연을 가졌다. 이는 전후 최초로 이스라엘에서 공연한 독일인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동안 세계주요 가극장을 거의 모두 섭렵했다. 77년에 16년 차이가 나는 루마니아 태생의 소프라노 율리아 바라디를 세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80년대 들어 그는 20세기 작곡가들의 작품 초연에 집중했다. 그가 초연한 작품 수는 일일이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그 중의 상당수는 그를 염두에 두고 작곡된 곡들이었다. 92년 가수로서 은퇴했지만 93년부터 지휘자로서 여러 페스티벌에서 지휘했고, 마스터 클래스도 지속적으로 열고 있다.
피셔 디스카우의 음반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다. 그는 일곱 번의 공식 레코딩을 통해 음반을 남겼다. 그중 62년 제랄드 무어와의 연주(DG)가 가장 완성도 높은 명반으로 꼽히고 있다.
5. 마리오 델 모나코(1915∼1982)
델 모나코의 영역은 파바로티보다는 도밍고와 많이 겹친다. 97년 3월 <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오텔로'인 그를 도밍고가 바짝 뒤따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가 카라얀, 테발디와 함께 공연한 '오텔로' 음반(데카)은 명실상부한 명반.
20세기를 대표하는 드라마티코로서 그의 목소리는 힘차고 굵은 질감을 자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흔히 '황금의 트럼펫'이라 불렸는데, 그의 목소리가 그 어느 테너보다 시원하게 뻗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는 비음이 강한 그의 목소리의 음색에 대한 선호의 차이일 뿐이다. 오히려 발성법상의 문제로 디테일한 표현이 불가능하고 음정도 부정확하다는 면이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된다.
그는 베르디 이전의 레퍼토리와 이탈리아 오페라 외의 레퍼토리는 거의 부르지 않아 레퍼토리 면에서도 약점이 있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는 드물게 볼 수 있는 훌륭한 목소리를 지닌 예술성 높은 테너였음에 분명하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그는 13세 때 아역으로 마스네의 '페자로'에 출연했다. 1935년, 20세 때에는 그를 눈여겨본 대지휘자 세라핀이 로마 가극장의 연구소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해 그곳에 잠깐 있었다. 이후 음반을 통해 독학하는 길을 택한 그는 41년에 밀라노 푸치니 극장에서 '나비부인'의 핑커튼 역으로 데뷔했다.
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그는 리리코 스핀토와 드라마티코의 배역들을 섭렵하며 당대의 대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역시 그의 본령은 드라마티코였다. 위에서 언급한 '오텔로'를 비롯, '아이다' '일 트로바토레' '안드레아 셰니에' '팔리아치' 등에서는 '당대의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부를 수 없다'는 평가를 얻었다.
비극적인 부분의 심리적인 표현에서는 묵직하고 어둡기까지 한 목소리와 그에 걸맞는 가창으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더했다. 따라서 베리스모 오페라의 대표작인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의 투리두 역이나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의 카니오 역은 그의 대표적인 명연으로 꼽힌다.
이 두 오페라를 담은 음반(데카, 세라핀 지휘, 산타 체칠리아) 또한 명반. 이 외에도 델 모나코가 남긴 음반은 다른 가수들에 비해 많지 않아 모두가 소중한 유산으로 꼽힌다. 위에서 언급한 음반들을 제외한 전곡 음반은 '운명의 힘' '일 트로바토레' '안드레아 셰니에' '페드라' '외투' '토스카' '노르마' '메피스토펠레' 등이다.
6. 프리츠 분덜리히(1930∼1966)
분덜리히. 모차르트를 유난히 잘 불렀던 가수. 그리고 모차르트와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 세상에 머물렀던 그다. 36년간의 짧은 생을 산 그의 목소리를 피셔 디스카우의 표현을 빌려 한마디로 말하자면 '녹아 들 듯 사랑스런 음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초견이 빨랐고, 악보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도 빨랐다.
독일의 크셀에서 첼리스트이자 군대 밴드의 악장이던 아버지와 바이올린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맥주도 팔고 영화도 상영하는 카페를 운영하던 부모는 나치가 집권하자 반대파로 분류되어 숙청대상에 올랐다. 카페는 문을 닫았고, 홧병에 걸린 아버지는 분덜리히가 다섯 살이 되던 35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레슨으로 연명하던 모자는 전쟁발발로 더욱 어려워졌다. 분덜리히는 12세의 나이로 마을 밴드에서 아코디언과 트럼펫을 연주하며 어머니를 도왔다.
전쟁이 끝나고 10대 후반에 접어든 그는 동네 댄스 밴드에서 연주하고 노래했다. 그의 목소리는 당시에도 매혹적이었다. 요제프 뮐러 블라토라는 교수가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듣고 그에게 성악공부를 하라고 권유했다. 그런데 정작 오디션 당일 날 그는 기차를 놓쳐버렸다. 우유배달마차를 얻어 타고 간신히 오디션 시간에 맞췄고, 성악 수업이 시작되었다. 동네 악사에 영원히 머물 뻔한 그의 인생을 바꾼 이 사건은 1950년의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 호른을 전공하려고 했다. 폐활량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생의 권유로 성악과 호른을 병행했다. 호른에 의한 호흡조절은 그가 후에 긴 악절을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55년에 이르러 그는 공부를 마치고 슈투트가르트의 뷔르템베르크 오페라단에 입단했다. 다른 많은 음악가들의 데뷔가 그렇듯, 그도 역시 주역의 갑작스런 병에 의해 대역으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타미노 역이었는데, 다행히 주위에서 당장에 타미노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분덜리히밖에 없었다. 그가 타미노로 무대에 서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후 그는 타미노의 분신으로 통했다. 지난 97년 3월호 <객석>이 선정한 '최고의 타미노'가 분덜리히였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성공적인 데뷔 이후 독일-오스트리아계 오페라와 바흐에서 빛을 발하던 그는 59년 잘츠부르크에 데뷔했고, 60년에 뮌헨 국립 가극장과 계약했다. '가장 이상적인 독일 벨 칸토'란 평을 들었던 그는 가곡 분야에서도 명반주자 후베르트 기젠을 만나 일취월장했다.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잘츠부르크를 오가며 화려한 활동을 펼치던 그는 '행복하고, 화창한' 가창으로 많은 이들을 감동의 세계로 이끌었다. 1966년 8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기젠과 함께 가곡과 '마술피리' 아리아로 리사이틀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던 그는 돌계단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다쳤다. 그리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그가 출연하는 '마술피리'의 전곡은 칼 뵘 지휘의 베를린 필 버전(DG)이 남아 있다. 슈만의 '시인의 사랑'과 함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가곡을 수록한 음반(DG)은 기젠과 합작한 것으로 역시 이름 높다. 칼 리히터 지휘의 바흐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아르히브)는 그가 참여한 바흐 녹음 중 최고의 것이다.
7. 표도르 샬리아핀(1873∼1938)
카루소와 동년배인 샬리아핀. 지금은 카루소와 마찬가지로 '전설'로 통하는 그다. 20세기 아니, 음악 역사상 가장 낮고 묵직한 저음을 구사한 베이스였다는 그의 목소리는 '영혼을 울리는' 소리로 했다. 합창음악을 들어봐도 자고로 베이스가 가장 강하고 낮게 깔리는 러시아 베이스 전통의 화신이 바로 샬리아핀이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가졌던 그는 벨 칸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그의 저음을 더욱 강화시켰다.
혁명 전 러시아의 카잔에서 태어난 그는 티프리스에서 드미트리 우자토프에게 배운 후, 여러 마을을 돌며 공연하는 작은 극단에서 노래했다. 1890년에 정식 데뷔한 그는 1893년 티프리스 극장과 계약을 맺고 구노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 역으로 절찬을 받으며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파나예프 가극단과 계약해 모스크바에서도 공연하며 이름을 날렸다.
아직 20대이던 1901년, 처음으로 러시아 밖으로 나가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한 그는 '신비의 베이스'로서 이미지를 굳혔다. 당시 보이토의 '메피스토펠레'도 크게 호응을 얻었지만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이탈리아의 청중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밝은 태양 아래 맑은 대기를 가르며 뻗어나가는 화려한 벨 칸토 창법의 고음밖에 몰랐던 그들은 차가운 대기의 분위기를 싣고 묵직하게 아래로 깔리는 저음의 비극성이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907년 메트로폴리탄에 역시 '보리스 고두노프'로 데뷔했으나 당시 카루소의 노래하에 지배당하던 미국 청중들의 귀는 그의 가창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의 청중들은 그저 '벼룩의 노래' 정도에 귀가 혹할 정도였다.
'보리스 고두노프' 외에도 '이고르 공'과 '호반쉬나' 등의 러시아 오페라에서 특히 힘을 발휘했던 그는 로시니의 '세빌랴의 이발사' 가운데 바질리오 역도 장기로 했다. 한편 '돈키호테', 그리고 위에서 소개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도 주요 레퍼토리였다. 한편 러시아 가곡 분야에서의 그의 업적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샬리아핀 명창집'(EMI), '샬리아핀 아리아와 가곡집'(EMI) 등이 '전설'을 확인시켜주는 음반들이다.
8. 헤르만 프라이(1929∼1998)
헤르만 프라이라는 이름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라이는 지난 7월 23일, 전날 밤에 찾아온 갑작스런 심장발작을 이겨내지 못하고 뮌헨 교외의 크라일링의 자택에서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7월 19일, 뮌헨의 한 극장에서 가진 연주회가 마지막 연주회가 되었다. 마지막까지 무대를 지킨 성악가로서 드문 기록을 남긴 것이다.
<객석> 97년 3월호에서 로시니 '세빌랴의 이발사'의 '최고의 피가로'로 선정되었던 프라이는 그 오페라에 나오는 '나는 이 거리의 제일가는 이발사'라는 아리아에서처럼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독일 가곡, 모차르트 오페라, 독일계 오페라와 오페레타, 바흐, 바그너의 악극, 민요, 이탈리아 오페라, 현대 오페라 등, 성악에서 각기 다른 분야로 치는 이 모든 영역을 섭렵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한때는 오페라 지휘에까지 손을 뻗쳤고, TV에 자신이 진행하는 '헤르만 프라이 쇼'라는 프로그램까지 가지고 있었다.
살아 생전에 프라이는 피셔 디스카우와 자주 비교되었다. 20세기 독일을 대표하는 바리톤으로 손꼽히던 두 사람이었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의 영역이 상당부분 겹쳤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는 주로 프라이가 부르고 백작은 주로 피셔 디스카우가 불렀던 것은 두 사람의 스타일을 극명하게 구분해주는 예이다. 피셔 디스카우가 지적이고 냉철한 목소리와 가창을 지녔다면, 프라이는 그에 비해 낙천적이고 윤기가 흐르는 가창을 선보였다.
피셔 디스카우의 출생지인 베를린에서 그보다 4년 늦게 태어난 프라이는 유복한 상인 집안 출신으로, 베를린 모차르트 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48년 베를린 음대에 들어가 귄터 바움을 사사했다. 51년에 에센 방송국 주최 콩쿠르에서 입상했고, 에센 주립 가극장의 단원이 되었다. 이듬해 이 가극장에서 데뷔한 그는 이어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마이스터징거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53년에 함부르크 주립 가극장에 스카웃된 그는 60년까지 이곳에서 노래하며 통상적인 레퍼토리 외에도 리버만, 달라피코라, 헨체 등의 현대 오페라도 많이 불렀다. 57년 빈 국립 가극장에, 58년 바이에른 주립 가극장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데뷔하며 최고의 바리톤의 자리를 굳혔다. 그런 와중에도 그의 가곡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56년에는 독일 가곡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가졌을 정도다. 여러 일류 가극장에 일급 가수로서 활동하며 가곡을 병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프라이만은 예외였던 것이다.
60년에 '탄호이저'의 볼프람 역으로 뉴욕 메트에 데뷔했고, 65년 바이로이트에 데뷔했다. 73년에 코벤트가든에 데뷔하며 세계 주요 가극장을 모두 점령했다. 빈과 뉴욕에 '슈베르티아데'를 만들어 슈베르트 가곡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던 그는 지난해 슈베르트 200주년을 기념해 세계 순회공연을 갖기도 했다.
칼 뵘 지휘로 베를린 도이치 오퍼와 함께한 '피가로의 결혼'은 최고의 배역진과 연주의 명반(DG). 역시 뵘 지휘의 빈 필과 함께한 모차르트의 '코지 판 투테'(DG, 74년), 아바도 지휘, 런던 심포니와 함께 한 로시니 '세빌랴의 이발사'(DG, 71),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로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에서 연주한 요한 슈트라우스의 '박쥐'등도 빼놓을 수 없다. '겨울 나그네'는 EMI와 필립스의 것이 명반의 대열에 올라 있다.
9. 호세 카레라스(1946∼ )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태어난 그는 전형적인 리리코였다. 바르셀로나 음악원에서 배운 그는 68년 바르셀로나의 리세오 가극장에서 도니제티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데뷔했다. 상대역은 역시 스페인 출신의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였다. 71년 베르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이후 그는 무척 바쁜 일정을 보내며 빠르게 성장했다. 30대에 이르기 전인 75년,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 푸치니의 레퍼토리를 거의 다 소화하고 스칼라에 등장했을 때는 '디 스테파노의 재래'로 평가받았다.
30대 이후 목소리에 힘이 붙은 그는 당시에 이미 확고히 자신의 영역을 굳히고 있던 파바로티, 도밍고에 비견되며, 또 다른 테너의 전성시대를 이끄는 '3두 마차' 체제를 구축했다. 76년 카라얀의 눈에 띄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돈 카를로'에 출연했고, 77년 '라 보엠', 78년 '운명의 힘' '돈 카를로'로 스칼라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나머지 30대는 코벤트가든을 중심으로 '나비부인' '사랑의 묘약' '라 보엠' '롬바르디아 인' '가면무도회' 등의 완성도 높은 공연을 이끌며 국제적인 명성을 공고히 했다. 79년에는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 지휘의 '아이다'에서 라다메스 역으로 출연할 정도로 목소리에 중량감이 붙었다.
41세가 되던 87년, 한창 뻗어나가던 그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파리에서 '라 보엠'의 영상 촬영 도중 쓰러진 그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팬들이 기증한 골수를 이식하고 최고의 의료진이 달라붙어 치료한 결과 이듬해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하지만 목소리를 잃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지만 예전의 목소리를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었다.
이후로는 무대에 서는 횟수를 줄이고 꼭 필요한 공연에만 집착해 좋은 결과를 낳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실질적인 음악감독 역할로 큰 공로를 세운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후 '스리 테너' 공연의 성공을 이어오고 있지만 최근에는 체력적인 한계가 눈에 띈다.
카레라스의 목소리는 신선한 청량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정통 벨 칸토와는 약간 다른 듯하면서도 배역에 따라서는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과의 베르디 '돈 카를로'(EMI , 78년), 콜린 데이비스 지휘, 코벤트가든에서의 마스네 '베르테르'(필립스, 80년) 등도 좋지만 카라얀, 아그네스 발차, 베를린 필과 공연한 비제의 '카르멘'은 명연(DG, 82년)으로 평가받았다.
10. 페터 슈라이어(1935∼ )
구동독 태생의 인물로서 현대 독일을 대표하는 테너인 슈라이어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그가 없었다면 빛나지 못했을 레퍼토리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높은 가창의 완성도를 가진 독일계 테너가 금세기에는 너무나 부족했기에 그의 희소성은 더욱 가치를 발한다.
마이센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슈라이어는 어린 시절 드레스덴 십자가합창단에 보이 소프라노로서 입단하며 음악공부와 활동을 시작했다. 거기서 루돌프 마우에르스베르거에게 배운 것이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변성기가 지나서는 라이프치히에서 프리츠 폴스타를 사사했다. 이후 드레스덴의 베버음악원에 입학해 성악과 지휘를 배웠다. 재학 중에 이미 오페라 무대에 올랐던 그였지만 59년에 졸업하면서 정식으로 데뷔무대를 가졌다. 61년에 드레스덴 국립 가극장의 정단원이 되었고, 63년에는 베를린 국립 가극장으로 옮겼다.
66년에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데뷔했고, 이후 스칼라와 메트 무대에도 섰다. 오페라 가수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그는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하는 독일 오페라를 주요 레퍼토리로 삼으며 이탈리아 오페라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도주'(DG, 칼 뵘), '돈 조반니'(DG, 뵘), ' 코지 판 투테'(유로디스크, 오트마르 스위트너), '마술피리'(자발리슈, EMI)는 물론 베버의 '마탄의 사수'(DG, 카를로스 클라이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DG, 칼 뵘),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데카,스위트너),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DG, 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EMI, 카라얀), 오토 니콜라이의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DG, 클리) 등의 수준급 녹음들은 그가 없었다면 전체적인 완성도가 반감되었을 음반들이다.
70년대 들어 그는 종교음악과 가곡에 치중하며 지휘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80년대 들어 베를린 국립 가극장으로부터 '궁정가수'라는 칭호를 얻고 각 분야에서 골고루 활약했다. 90년대 들어 활동이 조금 뜸해진 양상을 보였으나 지난해 독일에서 슈베르트 200주년을 기념하는 가곡 연속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오페라 외의 음반으로, 우선 슈만의 '시인의 사랑'(DG),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DG)를 빼놓을 수 없다. 마우에르 스베르거가 지휘하고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음반(데논)은 명반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