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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hoyony.tistory.com/m/218
[책읽기] 인간 존재에 대한 물음 빅퀘스천 / 김대식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인류의 모든 전설과 신화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떠나는 자에게는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떠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이 바로 헤어짐이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과 이별한 자에게는 도전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바로 성숙이다. 떠남을 통해 성숙한 자는 다시 익숙한 세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자는 더 이상 떠나기 전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귀향이다.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뤄 진다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하고 이야기한다.
원인이란 무엇인가
주데아 펄은 아들 죽음의 핵심적인 원인을 '개입'이라고 결론 내린다. 상호관계는 원인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반복해서 존재들에 개입하고 간섭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내리는 비의 양을 조절하면 비가 오는 만큼 땅이 젖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땅이 젖도록 아무리 조작한다 해도 비는 더 내리지 않는다. 반복된 관찰이 아닌 반복된 개입을 통해 우리는 드디어 존재 간의 상호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을 제대로 산 인생이라 부를 수 있을까. 손으로 공을 잡아야 이길 수 있는 농구라는 게임의 좋은 행동이 축구라는 게임에서는 나쁜 행동이 되는 것처럼 좋은 삶과 나쁜 삶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우리가 살아야 할 우주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태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들이 만든 생물, 환경, 우주 시뮬레이션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반복되거나, 의미 없거나, 배울 것이 없거나, 재미없는 시뮬레이션은 시간낭비다. 전원을 끄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는 것이 정답이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 세상이 만약 누군가 타인의 시뮬레이션이라고 가설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차별된 재미있고 의미 있으며 흥미로운 인생을 사는 게 좋을 것이다.
친구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공감이 필요한 것일까? 위험과 불확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 인간은 끝없이 예측해야 한다. 내 행동이 적절한 것일까? 갑에게 나는 을질을 잘하고 있는 것일까? 내 아래 을에게 갑질은 잘하고 있는 것인지? 1시간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 일은? 다음주에는? 내년에는?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수많은 질문에 인간은 확신이 필요하다. 확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와 공감하는 나의 친구들은 어쩌면 나의 아바타일 수도 있겠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비트겐슈타인은 그래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했다. "x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정해진 범위 y 안에서 x 의 용도 또는 x가 y에게 줄 수 있는 결과들의 합집합이다.
예를 들어 벽과 못이라는 범위 안에서 망치의 의미는 무언가를 두들려 벽에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삶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 시시포스와 같은 벌을 받는 이유는 장미나 거북이와 달리 우리는 자아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고, "왜"라고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질문을 짊어진 무거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현재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은 해마다 약 1000억 톤의 탄소를 필요로 하는데 그중 오로지 5억 톤 정도만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나머지 995억 톤의 탄소는 죽은 생명체의 시체들을 재활용해 만들어진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에 필요한 탄소의 200분의 1만 만들어지고 죽음 없는 세상에서는 새로운 삶이 200배 덜 가능해진다
운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선택이라는 실질적 점들을 연결해 그린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는 존재이며, '나'라는 허상은 '선택의 자유'라는 그럴싸한 스토리를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 하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바로 '나'라면, 어쩌면 인류의 모든 선택들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꿈일지 모른다.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세상에 지각 능력이 없는 존재들만 있다면 '정의로운 세상'은 무의미. 돌멩이와 지렁이 사이에는 '정의'라는 단어가 필요 없다.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모두가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면, 역시 정의는 무의미. 정의는 인지, 감정, 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정된 것을 나눌 때 느끼는 분배의 패턴의 정당성이지 나누는 그 자체는 아니다.
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서양의 세계정복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레판토 해전을 무한으로 반복할 수 있어야 한다. 치열한 경쟁, 과학, 법치주의, 의학, 컨슈머리즘, 근로윤리, 총, 균, 쇠, 지중해.. 이 모든 변수들을 차례로 바꿔가면서. 물론 역사는 논리도 과학도 아니다. 반복할 수 없기 때문. 더구나 대부분의 역사는 아무 이유가 없는 사소한 우연들의 집합. 로또 1등에 당첨된 A라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A는 정답을 맞혀 거액의 상금을 받고,나머지 수천만 명 중 한 명인 B라는 사람은 못 받는다. A와 B의 차이는 무엇일까? A는 특정 지역에서 태어나 특정 교육을 받았으며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나타났다. A의 뇌는 특정 신경세포 들을 자극했고, 자극받은 오른손 힘줄은 A에게 특정 번호를 선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명은 단순히 A의 과거행동을 반복, 재생할 뿐. 서양과 완벽하게 동일한 우연, 역사, 철학, 지형, 사람을 가졌다면 오스만 제국도 역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터키가 완벽하게 서양과 동일했다면' 고로 '서양이 서양이라면'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라는 논리적 난센스가 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인간의 몸은 수십 조의 세포들로 구성. 세포들은 주기 적으로 만들어지고 분열하고 죽는다. 허파세포는 2~3주, 간세포는 5개월에 한 번씩 만들어진다. 창자 세포들은 2~3일 걸리고, 4개월에 한 번씩 중고 적혈구들은 새로운 적혈구들로 바뀐다. 피부세포들은 시간당 3만~4만 개씩 죽어 매년 3.6kg이나 되는 세포가 몸에서 떨어져나간다. 창문을 열어놓지 않았는데도 바닥에 하얗게 쌓인 먼지 대부분이 바로 얼마 전까지 씻고, 만지고, 감각한 우리들의 한 부분이다.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이 언어와 역사와 스토리로 정해진다면, 결국 한 민족의 정체성은 언제든지 재해석 되고 재활용될 수 있을 것. 변하지 않는 나만의 정체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시대의 해석과 조작으로부터 자유롭고 객관적인 민족의 혼이나 민족의 정체성은 환상일 뿐.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인가?' 보다 '우리는 누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다.
소유란 무엇인가
사냥한 먹이는 어떻게 분배해야 할까? 어떠한 윤리 도덕, 법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노력한 구성원들과 나눠야 할까? 물론 자연은 법에도, 도덕에도, 윤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윤리와 도덕은 현실과 상황에 맞춰 정착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사후에 우아한 문장으로 정당화하는 언어일 뿐. 최적의 분배 전략은 참여 구성원의 수와 생산의 효율성에 따라 달라진다
인간은 왜 외로움을 느끼는가
지구에서 가장 외롭지 않은 자는 누구일까? '나'를 완벽하게 희생한, 아니 '나'라는 존재 그 자체가 무의미한 개미들은 절대 외로울 이유가 없다. '우리'가 모든 '나'들을 정복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는 외친다. '나'는 무의미하지만 '우리'는 영원하다고, 그래서 나치는 매년 수십만 명의 당원을 뉘른베르크에 모아놓고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과 천년제국 숭배를 호령했고, 집단의 힘을 상징하는 소비에트 궁전의 거대함 앞에서 소련 공산당원들은 기죽어 고개를 뚝 숙이고 걸어 다녔다. 그들은 집단을 위한 희생을 존재의 가장 큰 행복으로 느끼는 개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 남은 '나'의 뇌는 또다시 명령한다. 빨리 우리'로 돌아가라고. 파스칼은 '팡세'에서 질문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대답은 혼 자만의 지루함.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이 설문하는 홀로된 지루함을 찬양했지만, 인간은 대부분 혼자 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지루함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생각은 종종 이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게임, 도박, 클럽, 스포츠, 막장 드라마. 오락의 역사는 지루함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가망 없는 투쟁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할 것. 우리는 화가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처럼 다 함께 홀로, 탈출할 수 없는 지구라는 우주선을 타고 은하를 돌고 있는 것.
인간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
수학자 유진 위그너는 자연을 설명하는 자연과학에서 수학의 지나칠 정도의 효율성에 놀라고는 했다. 손으로 던진 돌은 지구 중력의 영향 아래 포물선을 그리면 날아간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움직인다.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은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왜 인간은 우주의 법칙을 숫자들 간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일까? 자연의 법칙을 수학이라는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아니면 플라톤이 주장한 대로 숫자들은 이미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이며, 그들의 관계가 결국 우주의 법칙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노화란 무엇인가
어린나이에 치명적 질환을 만들어내는 특정 유전자가 돌연변이로 나타나면 이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될 확률은 매우 낮다. 유전자를 가진 자들이 대부분 번식하기 전에 죽기 때문. 하지만 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는 다르다. 번식이 끝난 뒤에야 영향을 주는 병인 노인성 질환은 진화적으로 중립적. 노인성 질환이 있건 없건 번식 확률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 노화는 근본적으로 불가피한 진화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노화는 '자연의 무관심'의 결과물일 뿐.
마음을 가진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뇌는 언제나 변화와 다양성을 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코, 귀 모두 한정된 해상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 특정 크기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듯, 뇌는 지각 가능한 해상도 내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이렇게 본 세상은 대부분 무의미하고 랜덤한 신호 가운데 가끔, 반복되는 예측 가능한 신호들이 발견되고, 대다수 사람들에게 비슷하게 관찰된 패턴들은 전통과 합의를 통해 개, 고양이, 정의라 불리게 된다. 그런데 진돗개, 시츄, 그레이하운드를 비교해봤자 반복되는 패턴을 찾기는 쉽지 않다. 만약 한정된 해상도를 여러 층계로 나눠본다면, 가장 아래 층에서는 섬세한 차원들의 교집합이 자리. 점, 선 같은 것들을 통해 통계학적 관계들. 더 위의 차원에서는 조금 더 복잡한, 네모, 세모, 원 같은 모양들이 반복되는지 알아볼 수 있다. Deep Learning 이론은 지능과 마음이 결국 계층적으로 반복된 교집합들을 찾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뇌는 10개 정도의 층계.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10배 더 복잡한 통계학적 관계들을 이해하고 더 고차원적으로 반복된 패턴들을 예측할 수 있기에 더 큰 슬픔과 더 큰 기쁨을 느끼고 더 깊이 생각한다. 마음은 신경회로망 계층들을 지나 가장 높은 층인 전두엽으로 모이는 정보들의 형태이다.
인간은 왜 필요한가
부장, 과장과 달리 기업의 오너는 자신의 필요성을 증 명할 필요가 없다. 18, 19세기 유럽인들 역시 식민지의 90% 통치 아래 사는 아프리카, 아시아인들의 쓸모를 고민 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존엄은 애초에 질문 대상이 아니었다. 존재적 걱정은 언제나 약자의 과제. 강자는 존재의 정당화가 필요 없다.
먼 우주에서 바라본 창백한 푸른 점 하나, 칼 세이건이 말했듯 인류의 모든 역사, 모든 행복, 모든 싸움은 우주에서 찍은 사진 속 단 하나의 픽셀 안에서 일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 하나의 픽셀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유일한 고향. 다른 종보다 더 크고 발달된 뇌 덕분에 지구의 정복자가 된 인간은 이 작고 창백한 푸른 점 안에서 대장이었고, 알파 동물이며, 강자였다 그런데 만약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나타난다면? 우리가 지구의 모든 것을 도움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고 분리한 것처럼, 그들 역시 우리의 필요성을 묻지 않을까? 인간은 왜 필요한가?
https://naver.me/GwpgYh4H
김대식의 빅퀘스천 - 김대식 (1)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해 각계 해석이 요약적으로 나온다.
모든 존재의 원인에 대해 오메가라고 생각해서 종교적으로 그 최종을 '신'이라고 도달한 것이 굉장히 와닿았다는 의견이 있었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은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19쪽)
다음 부분에서는 페니키아에서 추방 당한 여왕 디도 이야기가 나온다.
근데 여왕인 디도는 왜 추방 당한 걸까?
캠벨은 이렇게 인류의 모든 스토리들이 헤어짐, 성숙, 그리고 귀향으로 이뤄진다고, 이 과정이야말로 인류 공통의 '단일신화monomyth'라고 이야기 한다. (27쪽)
우리가 떠나는 진정한 이유는 어쩌면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28쪽)
(33쪽)
뭐야, 쫓겨난 건 이브 탓이 아니잖아! 왜곡된 거였어! 물론 먼저라고 해서 진실은 아닐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뱀과 이브 탓을 한, 결국 먹은 건 저 아담인 주제에... 그 얘기가 무척 불편하기에.
인생은 싸움이고 전쟁이다. 힘들고, 치사하고, 고통스럽고, 곧잘 자존심 상한다. 기쁨과 행복 사이에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굴욕 사이 아주 가끔 조금 덜 불행한 날들이 허락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2,500년 전 그리스 권투선수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존재한다.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는 상처투성이의 몸과 마음을 달래며 직장으로, 학교로, 거리로 나선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질문한다. "왜 내 인생만 이렇게 불행한 걸까? 왜 나만 어렵게 살아야 할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잘사는 방법을, 나만 모르고 있는 걸까?"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Adams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 나오듯, 대부분의 지구인들은 우습게도 거의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왜 나만 이럴까?" 하지만 나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나만 나 자신이기에, 나의 질문을 누구보다 더 잘 느끼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동의도 허락도 없이 태어났고, 또 대부분 허락도 동의도 없이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사실 하나뿐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변치 않는 두 점 사이 매달려 있는 '인생'이라는 실.(42~43쪽)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폭력성은 일제의 잔재도, 자본주의의 결과도, 레드 컴플렉스 때문도 아니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삼국시대, 청동시대 그 언제도 절대 권력층 1%를 제외한 대부분의 구성원에게는 그다지 즐겁거나 행복한 시대가 아니었다. 1%와 99% 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법과 문명과 과학과 항생제와 마취약을 가진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을 뿐이다.(55쪽)
'세계의 모든 사실들은 생각이라는 틀 안에 갇힌 논리적 그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61쪽)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104쪽)
모든 인간은 원본입니다. 자신을 톱니바퀴 같은 복제품이 아닌 우주에 단 하나뿐인 원본임으로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라는 원본의 아우라 중 하나가 바로 피할 수 없는 책임감이라는 걸 이해하게 될 겁니다.(135쪽)
https://naver.me/xBw2SHZu
세상은 왜 존재하는가
세상은 유(有)라는 강력한 증거는 "유라는 사실자체"라는 내용
지은이 : 짐 홀트(Jim Holt)
프롤로그가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한다.
숨 가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무(無) 대신 유(有)가 존재해야 한다는 신속한 증명
세상에 무(無)가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아무런 법칙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법칙도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다.
모든 것이 허용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무가 존재한다면, 무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무는 그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한다.
증명 끝.
이 증명을 알았다면 책을 덮어도 좋다.
저자는 500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책에서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방정식에는
우주가 팽창 또는 수축을 함축한다고 되어 있다.
이 사실에 아인슈타인 본인이 먼저 당황했다고 한다.
이것을 사제(司祭) 르메트르가 계산했고,
허블이 우주의 팽창을 입증했다.
우주는 어느날 빵! 하고 터졌다.
이것이 "빛이 있으라!"한 창조의 증거라고 종교는 잽싸게 주장한다.
무(無)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설의 근거다.
혼돈(chaos) 속에 창조되었다는 소리는 쏙 들어가 버린다.
혼돈 자체는 유(有)가 아닌가!
왜 유에서 창조했다는 것을 버리고 무에서 창조했다고 하느냐 하면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무에서 창조했다고 해야 더 그럴 듯해 보인단다.
과학자들은
"빅뱅 이전(以前)은 없다.
시공간 조차도 없다.
그러니 신이 개입할 틈도 없다."
라고 주장한다.
빅뱅은 우주생성소멸 순환의 한 사건이다.
우주 팽창은 언젠가 멈추고 다시 수축한다.
그래서 다시 우주 대반동(大反動 Big Bounce)이 온다는 거다.
이러니 우주는 영원하다고 한다.
세상은 무(無)가 아니고 무언가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유(有)하다는 사실자체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즉 무(無)가 아닌
순전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자체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한다.P377
"왜 세상은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하는 것은
과학 영역이 아니라 철학이고 종교의 영역이다
B 러셀은 명확한 지식은 과학에 속하고,
명확한 지식을 초월한 교리는 신학에 속한다고 했다.
이 근본 수수께끼에는
철학과 종교 또는 과학과 종교가 첨예하게 맞붙어 있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양쪽의 이론적 배경은 더욱 정치(精緻)하게 다듬어진다.
그래서 학문은 이렇게 해서 발전하는가 싶다.
문제는 어느 측도 승복하지 않는데 있다.
거증책임(擧證責任)은 어느 쪽에 있을까?
"있다"는 측인지, 아니면 "없다"는 측인지?
일반적으로 "있다"고 주장하는 측에 거증책임이 있지 않나?
그렇다면 신이 있다고 하는 종교가 신을 증명하면 논쟁은 끝난다.
종교에서는 신을 입증했다고 주장하고
과학에서는 그게 무슨 입증이냐 궤변이지 해버린다.
종교는 꾸역꾸역 입증이라고 우긴다.
두 영역이 서로 붙은 것 자체가 잘못이다.
과학은 과학의 길이 있고,
종교는 종교의 길이 있는데 서로가 갋고 있다.
과학은 창조를 믿지 않는다.
종교는 창조만이 이 우주를 가장 잘 설명한다고 한다.
우리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한다.
인간의 인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모조리 신의 뜻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모르는 현상을 신의 뜻으로 돌릴 때 발전은 막혀버린다.
빅뱅을 창조의 증거라고 선언한 종교는 성급했다.
최근에는 양자요동이 우주탄생의 기원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양자론은 인과관계가 아닌 원인 없는 생성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입증되면 그 때는 종교가 또 말을 바꾸어야 한다.
도킨스는 창조론자들과 공개토론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론적으로 이길 수 없기 때문이 아니고
말도 되지 않는 창조론자와 둘이서 토론하면
시청자(청중)들은 창조론자와 진화론자를 동등하게 생각한단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어떻게 동등하게 취급당해야 하는가
그래서 공개된 양자토론을 거부한다고 한다.
무게감이 맞지 않다는 거다.
책을 쓴 저자는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창조론과 과학을 동등하게 기술한 듯 하다.
도킨스에 의하면 이것은 격이 맞지 않다고 하겠다.
제15장이 이 책의 끝이다.
빙빙 돌아서 "다시 무로 돌아가서"가 이 장의 제목이다.
죽음을 말하고 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무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죽은 후에 무로 돌아가는 주체는 영혼일 것이다.
영혼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긴 글을 통하여 저자는
"무가 정말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해 놓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 두렵다고 하다니!
무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 우주에 무는 없다.
없는 무를 죽어서 만나려고 하니 두렵단다.
로봇에 전기가 끊어지면 움직이지 못한다.
즉 죽음이다.
죽음도 전기가 나간 즉 죽은 로봇과 같다.
뇌 기능의 정지가 죽음이다.
여기에 영혼은 없다.
그래서 없는 영혼이 없는 무와 대면할 수는 없다.
"왜 세상은 무가 아니고 유인가?"
존재사실자체가 유의 강력한 증거다.
그러므로 무언가가 존재한다.
https://naver.me/GEXf3kZs
과학철학자 아돌프 그륀바움은 종교적 믿음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설명하는 일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륀바움은 인간의 정신이 제시하는 문제들은 매력적이지만, 의식의 존재 자체는 물을 필요도 없다고 했다. 반면 종교철학자 리처드 스윈번은 유신론자였다. 중세 수도사와 같은 풍모의 그는 "실체에 대한 묘사는 그 단순함의 순서대로 정리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세상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가설은 "모든 것의 뒤에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이었다.
과학사상가 데이비드 도이치는 양자역학의 전문가다. 그는 실체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가능하진 않지만,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존재의 근거에 대해선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할 수 있겠지만, 언제나 그 답을 넘는 다른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게 보이는 우주가 아주 작은 공간, 아주 작은 점 안에 압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빅뱅 이론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물론 업다이크가 빅뱅 이론의 방정식을 반박한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는 과학조차도 상당 부분 믿음의 문제라고 보고 있었다.
첫댓글 세상은 왜 존재한가 - 짐 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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