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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월 27일 서울 정동 왜송골에서 중추도사(中樞都事)를 지낸 아버지 남궁영(南宮泳, 자는 景涵)과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서 12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열(咸悅)이며,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이름은 억(檍)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운 생활이라 글방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동무들이 공부하고 있는 이사과(李司果) 댁 담 밑에 가서 종일 서성거렸다.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어머니는 이사과 댁을 찾아가서 배울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여 승낙을 받았다.
이렇게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8, 9년간 교육을 받으며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많은 고서를 탐독하여 한학에 조예가 깊어갔다.
16세 되던 1878년 두 살 연상인 양혜덕(梁惠德)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아들 남궁염은 후에 미국 뉴욕 총영사를 지냈고,
장녀 남궁숙영은 일찍 혼자 되어 친정에 돌아와 아버지를 받들어 집안 살림을 보살폈으며,
둘째딸 남궁자경은 윤치호의 아들 윤광선의 부인이 되었다.
한문공부에 이어서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영어 실력을 알아본 친구 아버지의 도움으로 1883년 9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립된 영어학교
동문학(同文學)에 입학하였다.
당시 21살로 함께 영어 공부를 하던 친구들은 송달현(宋達顯), 주우남(朱雨南)이었으며,
영어를 배운 지 1년도 안되어 회화를 구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크리스토교를 비롯한 서양문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84년 6월 동문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1886년 내아문(內衙門) 부주사(副主事)로 임명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통역관이자 황제의 어전통역관으로 고종을 알현하였다.
1887년 조민희를 유럽 5개국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파견할 때 통역서기관으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제물포항을 출발한 일행은 청국 측의 완강한 반대로 홍콩에 체류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2년간 지내면서 민영익을 만나 국내외의 변화와 정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홍콩에서 머물다 돌아온 후 1889년 1월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4년간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봉직하였다.
1893년 4월 4일 경상도 칠곡부사에 임명되었다.
칠곡부사 재임시절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몸소 겪었는데,
동학군을 무사히 평정한 공을 높이 평가받아 순무사(巡撫使)에 임명되었다.
당시 청렴하게 관직에 임하므로 1895년 가을 칠곡 유림회와 군민회가 500냥을 들여 그의 송덕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그 비석은 한국전쟁시 폭격을 맞아 없어졌지만 비문의 내용은 칠곡의 유지이자 친구였던 배석하(裵錫夏)의 일기
『일신와만록(日愼窩漫錄)』 상권에 전해진다.
1895년 2월 칠곡부사를 사임하고 궁내부 토목국장에 임명되었다.
토목국장 재임 시 한성의 종로통과 정동 일대 및 육조 앞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확장 정비하고, 근대식 탑골공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단발령이 시행됨에 따라 백성들에게 망건 대신 단발을 적극 권장하였다.
토목국장 당시 낮에는 관직에 충실하였으며,
밤이면 흥화학교(興化學校) 교사로 영문법과 한국사를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외국어와 선진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내부대신 남정철의 모함으로 1897년 8월 27일 면직되었다.
1896년부터 독립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독립협회의 시작은 서재필이, 협회장은 안경수, 이완용에 이어 윤치호가 맡았으며, 실질적인 살림살이를 책임졌다.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는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두 번 발행하는 한 페이지짜리 신문이었으나 곧 세 번으로 늘어났다.
한글판과 영문판 두 종류를 발간하였는데,
한글판은 주시경이, 영문판은 그가 편집하였고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기사를 모았으며, 배재학당 삼문인쇄소에서 인쇄를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문판은 발행한 지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1896년 12월 31일에 종간되었다.
이어서 『대조선독립협회회보』라는 반월간 잡지를 1896년 12월에 간행하였는데,
구국사상의 일환으로 물리 ・ 화학 ・ 기술 ・ 실업 등의 실용적인 내용을 담은 잡지로 지령 제18호로 종간되었다.
독립협회 활동 시 토론회에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말부터 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주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들로 토론 과정에서
그를 비롯한 소장 위원들이 국가의 정치 문제에 대해 비판을 더하면서 고위관료들과 의견 대립이 생겼다.
당시 그는 35세의 소장신진파로서 민중 계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더욱이 1898년 2월 20일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함으로 소장신진파를 중심으로 인사 개편을 단행하였다.
당시 부회장이던 이완용이 회장에, 윤치호가 부회장에, 이상재와 윤호정이 회계를 맡았고, 이때 서기가 되었다.
『독립신문』을 통해 언론의 힘을 경험한 그는 1898년 9월 주식회사로서 황성신문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민간 매일신문인 『황성신문』을 창간하였다.
1898년 9월 5일자로 창간호를 발행한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지식층 독자를 확보하였는데,
필진으로는 당시 한학과 유학의 조예가 깊었던 장지연 ・ 유근 ・ 박은식 ・ 신채호 ・ 남궁훈 등이 참여하였다.
1902년 러일협정 의정서의 부당함과 일제의 간계를 폭로한 기사를
『황성신문』에 게재하여 총무 나수연과 함께 구속되어 경무청에 구금되어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경무청 감방 앞에서 17살 아들 남궁염이 아버지의 석방을 요구하며 14일을 단식투쟁하였다.
평리원의 심사를 마친 후 8월 8일 석방되었고, 총무 나수연은 9월 11일 석방되었다.
1903년 3월 경영의 어려움으로 황성신문사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1905년 3월 성주목사(聖州牧使), 1906년 1월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청렴한 지방관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양양군수 시절 동헌 뒷산에 중등학교 정도의 현산학교를 설립하여 순수 민간차원에서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현재 양양초등학교의 전신인 현산학교는 1906년 9월 8일 개교식을 거행하였으며,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강원도 근대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907년 11월 대한협회를 조직하고 1908년 2월 8일 제4회 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어 그해 12월까지 재임하였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1908년 4월 25일 『대한협회회보』를 발간하였다.
두 차례 논설을 실었는데, 제2호(1908. 5. 25)에는
「사상과 능력의 상수(相須)」를, 제3호(1908. 6. 25)에는 「사회조화」란 글을 발표하였다.
이외에 인민의 교육계몽과 민족교육에 앞장서기 위해 전국적으로 지역별로 단체들을 조직하였는데,
강원도 출신들로 관동학회를 조직하여 1908년 4월 2일 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8년 6월 25일 대한협회에서 국민교육과 사회계몽을 실행하기 위해 『교육월보』를 창간하여 10개월 동안 발행하였다.
이 잡지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발행한 우리나라 교육사상 최초의 교육잡지이며, 통신 강의록이었다.
크리스토교 입교 동기는 『윤치호일기』에 의하면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요량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돈이었던 윤치호의 영향이나 권유를 받아 감리교인이 되어 1910년 11월 종교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 그리고 1915년 남감리회 매년회에서 ‘본처전도사’라는 직책을 받았는데, 1929년,
30년 매년회 회록에선 ‘임명받지 아니한 본처전도사’로 나오고 심문조서에는 ‘명예전교사’ 또는 ‘명예전도사’라는 직분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1918년 홍천으로 내려갈 때까지 배화학당에서 8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교사 시절 학생들 상황에 맞게 적당한 교재를 손수 만들어 가르쳤다.
크리스토교의 진리를 기초로 배화학당의 이념과 ‘현모양처주의’ 교육사상과 애교심을 강조한 배화학당의 교가도 직접 작사하였다.
배화학당 교사시절 가정교과서인 『가정교육』을 저술하여 가정에서 주부 역할의 중요성과 유아법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한글 궁체를 봉서방(奉書房) 나인들에게서 얻어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쳤으며,
1914년 12월에는 『신편언문체법』을 발행하였다.
또한 배화학당 시절 조선 13도를 무궁화로 수놓은 자수본을 고안하여 무궁화보급운동을 시작하였다.
무궁화 자수본은 집집마다 벽에 걸고
혹은 선물로 미국이나 하와이 등지로 나가는 등 전국적으로 유행하여 사람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었다.
배화학당 교사시절 상동청년야학원에서도 교사로 일하였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신민회 사건으로 체포당하여 고문 후유증으로 더 이상 재기할 수 없게 되자
50세에 상동청년야학원 원장을 맡았다. 낮에는 배화학당에서 야간에는 당시 젊은 학생들의 정신적 신앙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8년 12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 홍천 보리울로 낙향하였다.
그리고는 춘천에 주재하고 있는 선교사에게 전도인을 보내줄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사택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엔 사재 3,900환으로 대지를 매입하고 현재 한서기념관 자리에 예배당을 지었다.
이곳에서 교사 4명이 마을 아이들 100여 명을 모아놓고 4년제 보통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모곡학교(牟谷學校)의 시작이다.
모곡학교는 학교 겸 교회로 사용되었고 1923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23년 춘천 주재 남감리교 선교사 스톡스(M.B.Stokes) 목사의 도움과 유지들의 힘을 모아 모곡학교 교실과 기숙사를 건축하였다.
이곳에서 크리스토교 복음을 전하는 일과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민족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한편, 보리울에서는 100여 곡의 노래를 작사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특히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1928년 합동찬송가에 수록되었고 통일찬송가 371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보리울에서도 학생들에게 한국역사를 비밀리에 가르쳤는데 그런 중에 1924년 겨울에 역사책 『동사략』 전 4권을, 5년 후인 1929년 4월에는 인찰지 1,290쪽 분량의 『조선니약이』전 5권을 집필하였다. 『동사략』이 성인용이라면 『조선니약이』는 어린이용으로 한국역사를 쉽게 풀어쓴 책이었다. 신라 박혁거세부터 3・1운동기까지를 담고 있으며, 각 권은 군왕부, 정치부, 문예부, 절의부로 나누어 인물 중심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처럼 배화학당에서 무궁화 자수본을 통해 무궁화 사랑을 시작하였고,
모곡학교에서는 손수 무궁화 보급운동을 통해 나라사랑의 의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던 중 모곡학교 운영 후임자 선정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정구환과 모곡지서 순사 정도일이 함께
무궁화보급운동을 홍천경찰서에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11월 4일 홍천경찰서에서 8명의 사복경관이 나와
학교는 물론 인근 교사와 청년들의 가택을 수색하여 28명의 남녀 청년들을 붙잡아갔다.
이때 여고사 남궁경숙, 모곡교회 유자훈 목사 등과 함께 끌려갔다. 이것이 바로 ‘보리울 무궁화사건’이다.
이 사건이 확대되어 강원도 경찰부에서는 무궁화 나무를 전부 없애버리라는 긴급지시를 내렸고
모곡리 일대 무궁화는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무궁화사건’으로 감시가 한층 삼엄해진 홍천지역에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춘천 선교부 ‘십자가당사건’이다.
홍천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던 교사 김복동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비밀결사인 십자가당이 발각되었다.
십자가당(‘크레스트당’)은 1933년 4월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일원의 감리교계 목사와 신자들이 ‘공존공향(共存共享)의 지상 천국’을 건설하고자 기독교사회주의 이념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1933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춘천교회 허문리예배당에서 제3차 동부연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기간 중 연회 회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아래층 춘천여자관에서 연회와 별도의 비밀 회합이 이루어졌다. 목회자로는 인제구역 담임 남천우(南天祐) 목사와 홍천서구역 담임 유자훈(劉子勳) 전도사, 가평서구역 담임 이윤석(李胤錫) 전도사 등과 평신도 대표로 연회에 참석했던 창촌교회 어인손, 모곡교회 김복동, 후동교회 남궁식 등이 항일 비밀결사 ‘십자가당’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조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조직을 통하여 비밀리에 신규 회원을 늘려가는 단계에서 평소 모곡학교를 중심으로 ‘불온한 사상’이 떠도는 것을 예의 주시하던 홍천주재소 순사들이 발각한 것이다. 이로서 홍천지역 독립운동의 실체를 파악한 일제에 의해서 십자가당 당원 전원과 함께 붙잡혀서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 십자가당 사건에 연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감리교인이었으나 십자가당에 가담한 적은 없었다.
일제 경찰에게 혹독한 조사를 받고 구속된 사람들 가운데 16명은 면소(免訴)되었고, 1933년 12월 14일에 12명만 서울로 송치되어 총독부 검사에게 심문을 받았다. 그 결과 1934년 8월 3일 유자훈, 남천우, 김복동 등과 함께 공판에 회부되었다.
붙잡힌 후에도 조금도 굴복함 없이 당당하게 대처하였다. 1년 6개월간 옥고를 겪고 병보석으로 풀려난 뒤 잠시 서울에 머물다 보리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보리울에서 다시 교회일에 힘쓰며 모곡교회의 새로운 진흥운동에 힘을 보탰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옥중에서의 고문과 부실한 섭생으로 망가진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 1939년 4월 5일 오전 몇 마디 유언을 남기고 향년 77세로 숨을 거두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궁억(南宮憶) (1863-1940)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교육가
호는 한서. 20세까지는 한문을 공부했고 1884년에 재동의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했다.
1889년 고종의 어전통역,
1892년 경북 칠곡 부사, 1895년 궁내부 토목국장을 역임했다.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에 참여했고, 중추원 의관, 독립협회의 수석총무를 맡았다.
1898년 황성신문의 초대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필화로 2번이나 구속되었다.
1905년 성주 목사, 1906년 양양 군수를 지낸 뒤
1907년 12월 오세창·유근·장지연 등과 대한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듬해 4월부터 〈대한협회회보〉를 발행했고 광동학우회를 조직하여 〈교육월보〉도 발간했다.
일제강점 이후 배화여학교에서 9년간 영어를 가르치다가
1918년 강원도 홍천의 모곡으로 내려가 교회와 모곡학교를 세우고 교육에 전념했다.
1933년 '반일 애국사상과 무궁화사건', '십자가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이듬해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학교는 폐쇄되었다.
1863년 12월 27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서소문계 왜송골(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남궁영과 어머니 덕수 이씨 사이에서 12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 중 9명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그를 비롯한 누이 2명만이 살아남았다.
7세 되던 1870년부터 13세 되던 1876년까지 한문을 수학하고,
1884년 관립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을 수료하였다.
이후 1884년 경성 총해관 서기를 시작으로
내부아문 부주사, 칠곡군수 등으로 일하였으며 1894년 내부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한성부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1896년 7월 서재필,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 유근 등과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해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 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해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 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익명서 사건에 연루되어 16명의 지도자와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이승만이 배재학당 학생들을 이끌고 경무처와 평리원에서 밤샘 농성을 벌여 석방시켰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군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06년 2월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체결해 침략 정책을 강화하자 사임하고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에 노력하여 1910년 10월 배화학당 교사가 되었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강원도 홍천군으로 내려갔으며
1919년 9월 모곡학교를 설립하고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는
남궁억이 설립한 한서감리교회와 한서초등학교 등이 있으며 교회 옆에는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초등학교 뒷편에는 남궁억의 묘역이 있고 초등학교 주변에는 보기 힘든 무궁화 나무가 무리지어 있다.
1933년 11월 개신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 결사인 '십자당'을 조직해 활동하다 홍천경찰서에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10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1940년 4월 5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찬송가의 유래 찬송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유래 작사: 남궁 억 (1863∼1939) 독립운동가·언론인·교육자. 작곡: G. Donizetti (1797~1848) 음악가. 찬송가 580장은 겨레의 위대한 애국자 남궁 억 선생이 1907년에 작사한 것으로 애국가와 같은 찬송가이다. 그는 민족이 일제 침략 하에서 갖 은 수모를 겪기 시작할 무렵에 이 가사를 지었 다. 가사 내용에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차고 넘친다. 이 노래는 곧 유명해져서 민족의 가슴 에 깊이 스며들었고 찬송가에 정식으로 편입되어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내용이 간단해 익히기가 쉬웠고 계몽적인 색채도 농후했다. 이는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큰 경각심을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지배자인 일제당국에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래서 일제는 1937년 3월에 이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금지령까지 내렸다. 곡의 주된 내용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할 일이 많으니 일하러 가자는 것이다. 2절에는 봄이 돌아와 밭을 갈 때니 사방에서 일꾼을 부르고 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국민의 80%정도가 농민이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민족의 자각심을 높이기 위한 표현이었다. 3절 역시 2절과 마찬가지로 왜 일꾼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농사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이 찬송의 멜로디는 가에타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의 오페라 ‘라머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re)’ 제2막 8장에서 루치아의 결혼 축하객들이 축하 합창을 부르는 부분을 편곡한 「크라리온(CLARION)」곡이다 작사자 남궁 억 장로는 서울 왜송골(현 정동)에서 남궁영(南宮泳) 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덕수 이씨인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고생스럽게 자라났다. 용모가 준수하고 머리가 뛰어났던 그는 어깨너머로 공부를 시작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21세가 되던 1883년에 문중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였다. 1905년 성주목사로 임명받은 남궁 억은 을사보호조약을 맞아 큰 충격을 받고 이제 나라를 구할 길은 인재를 기르는 데 있다고 생각, 교육에 뜻을 두었다. 그는 역사교육과 진보적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는데, 영어를 가르치다가도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으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 꽃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를 수본(繡本)으로 만들어 수를 놓게 했으며, 태극기도 그렇게 수놓게 하였다. 또한 야간에는「상동청년학원」에서 영어와 영문법을 가르쳤으며, 한때 상동청년학원 야간부 원장까지 맡기도 하였다. 1922년,「봄 돌아와 밭 갈 때」가 곧 온다는 조국광복의 찬가를 만들어 온 교회에 새로운 소망을 불러일으켰으니, 이 찬송이 바로「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다. 일제가 애국성이 농후하다 하여 부르지 못하도록 금한 제1호 찬송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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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의 창가(唱歌)에 나타난 민족정신 연구
민성숙 ・ 2025. 10. 11. 11:42
1. 들어가는 말
구한말 누구보다도 기울어가는 조선을 안타까워하며 관료로 언론인으로 계몽 구국운동가로 활동하고,
일제강점기에 교육가로 사회운동가로 시인으로 작곡가로
애국 가사를 보급하며 한글 서체를 창안하는 등 폭 넓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한서 남궁억 선생.
한서 선생이 1918년 고향 홍천 모곡으로 낙향한 때는 그의 나이 50대 중반이었다.
지금도 50대 중반이면 적은 나이가 아닌데,
그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뒷방에 나 앉아 손자들의 재롱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할 나이였다.
하지만 한서 남궁억 선생은 낙향하여 크게 세 가지 일을 했다.
첫째는 신앙생활이다. 그는 5천 2백 평의 터를 마련하고 이를 교회에 증여했다.
크리스토교의 진리가 “평화”라는 점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평화는 인류가 함께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가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평화를 강탈당했다.
신앙인으로서 한서 남궁억 선생은 이를 구하고 이루는 일이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모곡교회에서 아내 양혜덕과 맏딸 숙경, 손녀 장재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한서 선생이 당시의 심정을 노래한 “기러기 노래” 3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반드시 독립의 날을 주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평화가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평화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고난의 길을 간 것이다.
둘째는 교육이다.
1907년 일제의 조선강탈이 노골적으로 전개되던 때 “대한협회”가 결성 되었다.
이 협회의 초대 회장이 한서 남궁억 선생이며 주요 사업은 교육이었다.
전국적으로 70개 지부를 둔 이 회의 창간사에서 한서는 “능력이 없는 사상은 쓸모가 없으니사상에 능력을 더해야 한다.”고 했다. 교육이 구국의 열쇠라는 걸 강조한 것이다.
실제로 대한협회는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학교운동을 전개했고,
이 운동으로 도처에 세워진 사립학교가 훗날 삼일운동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그랬던 그가 낙향과 함께 세운 교회에서 교육 사업을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교실이 여섯 칸이나 되고 150여명의 학동들이 공부하는 모곡학교에서,
한서 남궁억 선생은 나이와 남녀 차별이 없이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는 교육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곳에서 “일하러 가세”와 같은 창가를 쓰고 역사책을 펴내어 독립의 길을 열어 간 것이다.
셋째는 무궁화운동이다.
모곡에 무궁화동산을 만들어 무궁화를 키우고 전국에 무궁화 묘목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한서 선생이 시작한 그 무궁화 운동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에 나라꽃을 사랑하며
애국하는 마음을 심어주고 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한 사람의 지식인이 험악한 시절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인지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좋은 표본이라 하겠다.
올 해는 선생께서 낙향한지 10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그동안 한서선생의 교육적인 철학과 의미에 대한 고찰, 무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회자 되었다.
그러나 한서 남궁억 선생이 계몽교육 활동 중 남긴 여러 애국적인 창가들에 대해서는 다소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음악을 통한 교육, 특히 노래만큼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 메시지 전달은 없을 것이다.
멜로디와 가사가 주는 깊은 감동은 잠든 의식을 깨워주고 행동을 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본 논자는 이 글을 통하여 선생께서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김으로서 그 분이 당시에 국민들의 가슴에 심고자 했던 고귀한 뜻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창가 채보와 논문의 제한
한서의 창가들 중에는 비교적 널리 알려진 노래도 있지만 대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이다.
한서가 세운 교회(현 한서감리교회)에서 한서의 뜻을 이어서 목회하고 있는 현재호 목사(1995년 부임, 제1회 한서 대상 수상자)의 선친이 한서의 제자라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목사 선친의 벗들인 모곡학교 남궁억 선생의 제자들을 통하여 선생께 직접 배운 노래들을 채보하는 일이 있었다.
이복득(당시 87세), 이기순(당시 77세), 김복순(당시 77세)을 찾아가 노래를 부르게 하고,
채보는 한서감리교회의 이여재 사모와 광원감리교회 김현령 사모가 했다.
이 노래들에 대한 채보는 현재호 목사가 부임한 다음 해인 1996년에 이루어졌다.
이로서 묻힐 뻔 했던 한서의 귀중한 창가가 세상에 소개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이 때 주일학교가, 기러기노래, 조선의 노래, 조선지리가, 운동가, 시절 잃은 나비, 무궁화동산, 조선의 꽃,
이렇게 총 8곡의 귀한 노래가 채보되었다.
한서 선생이 낙향하여 독립의 길을 걸어가면서 수많은 창가를 작사하고 작곡했지만
이 논문에서는 1996년에 채보 된 8곡의 창가와,
한서 선생의 대표적인 노래로 알려진 ‘일하러 가세’ 즉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찬송가와 어린이들의 놀이동요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총 10곡의 노래를 중심으로 한서 선생의 애국적인 창가에 나타난 민족정신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3. 한서 선생이 남긴 창가 10곡 분석
(1) 찬송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그 누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한서가 남긴 대표적인 노래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일하러가세’라는 찬송가(새찬송가 580장, 통일찬송가 371장)이다.
이 찬송가는 이태리 작곡가인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오페라 ‘람메르루어의 루치아(Lucia de Lammermoor)’ 제2막에 나오는
결혼축하객의 합창곡(Chorus of wedding guests)으로 그 멜로디에 남궁억 선생이 노랫말을 써서 붙인 노래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한서는 1922년 어느 날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마태복음 9장 35∼37절)라는 성경구절을 묵상하는 가운데
예수 크리스토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유대인을 바라보며 한탄 한 것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서는 그 날 밤에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봄 돌아와 밭을 갈 때’가 곧 온다는 조국 광복의 시를 쓰고 이 찬송가를 만들게 된 것이다.
1928년 찬송가집에 수록된 이 노래는 한서의 하나님 사랑과 나라사랑이 그대로 드러난다.
바장조로 빠른 행진곡풍의 이 노래는 나중에(1935년)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일하러가세’라고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데 애국성이 짙다하여 일제가 금지곡으로 규정했고,
이 노래는 제1호 금지찬송가가 되었다.
(2) 놀이동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어릴 때 이 놀이를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래가 나무나 벽에 손을 짚고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면, 뒤에 줄지어 있던 아이들이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술래가 있는 쪽으로 재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만약 술래가 뒤돌아 볼 때 움직이면 걸리어 술래와 손을 잡고서 긴 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 술래와 연결 된 줄을 끊으면 모두 달아나는 놀이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다.
음은 모두 3음(미, 솔, 라)을 사용하고 있어 단순하고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다’는 이 놀이가 처음부터 당연히 우리나라 놀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놀이는 본래 일본 어린이들의 놀이다. 즉, ‘다루마상가 고론다’ 라는 놀이인데,
이것을 우리말로 하면 ‘오뚜기(달마)가 넘어졌습니다.’라는 놀이이다.
이 일본놀이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바뀐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궁화 보급에 힘써 온 한서 남궁억 선생은 여러 번 왜경에 끌려가 옥고를 치러야했다.
그렇게 옥고를 치르던 중 1935년 72세 때 병이 깊어져 석방 되었는데,
어느 날 골목에서 아이들이 우리말과 글은 물론 우리 놀이를 놀지 못하고
일본놀이인 ‘다루마상가 고론다’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한서 남궁억 선생은 놀고 있는 아이들을 오라고 하여 따뜻하게 말 했다.
"너희들이 일본놀이를 놀 수밖에 없지만 내가 알려 주는 방법으로 말만 바꾸어 놀아 보아라."하고는
놀이의 말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바꾸어 놀게 했다.
이 놀이동요는 나라를 잃은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놀이를 통해 애국하는 마음을 심어주고자한,
독립을 향한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 끊임없이 노력했던 남궁억 선생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3) 모곡학교 교가 - 주일학교가
동막산과 강구비 앞뒤 둘렀고
모곡구역 모곡리는 우리 집이라
세상 영화 누릴 자는 우리들이며
그 가운데 뜻 부칠 손 모곡학교라(주일학교라)
금동여야 모여서라 새 동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어 입적한 우리
구조님 은혜를 더욱 감사해
천국낙도 바라보는 십자동무야
굳거라 너희 믿음 변았(하)지 마라
마음과 뜻이 거룩하게 실행하여서
죽고 살고 화와 복을 상제께 바쳐
천당 배를 타고 가자 우리 동무야
주 예수 흘린 피로 죄 씻음 받고
영생 소망 그대 줄로 기쁨을 삼아
싸워 이겨 저 언덕에 노래 부를 때
퍼지리라 온 세상 하나님 나라
한서 남궁억 선생이 낙향하여 나라 잃은 백성의 울분이 찰 때면 새벽 산에 오른 곳이 다름 아닌 유리봉이었다.
그 유리봉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며 선생은 먼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후대를 가르쳐 독립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는 용기를 냈다.
그래서 모곡에 열 칸짜리 한옥 예배당을 짓고, 그 예배당 건물에서 모곡학교를 시작하였다.
모곡학교가 개교하자 인근의 어린이와 청소년들 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선생의 명성을 듣고 많은 청년들이 모곡학교로 입학해 왔다고 한다. 이때 교가가 지어져 학생들이 힘차게 부르면서 한서의 가르침대로 이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것을 다짐하였을 것이다. 모두 4절로 되어 있는 이 노래는 4분의 2박자로 다장조이다.
물론 멜로디는 찬송가에서 따 왔고 남궁억 선생이 가사를 지은 것이다.
(4) 기러기 노래
포스터가 작곡한 미국민요를 번안하여 윤석중이 시를 붙인 ‘기러기’라는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나요.
고단한 날개 쉬어가라고 갈대들이 손을 저어 기러기를 부르네.’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1863~1939)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윤석중(1911~2003)은 아마도 한서의 영향을 받아
‘기러기’라는 시를 쓴 것 같다. 한서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원산 석양 넘어 가고 찬이슬 올 때 구름사이 호젓한 길 짝을 잃고 멀리가
벽공에 높이 한소리 처량 저 포수의 물 총대는 너를 둘러 겨냥해
산남 산북 네 집 어디 그 정처 없나 명사십리 강변인가 청초우근 호수 인가
너 종일 훨훨 애써서 찾되 네 눈앞에 태산준령 희미한 길 만리라
곡간 없이 나는 새도 기를 자 뉜가 하늘위에 한 분 계셔 네길 인도 하신다
너 낙심 말고 목적지 가라 엄동 후는 양춘이요 고생 후는 낙이라
말리 창천 먼 지방에 묻고 난지가 난일화풍 편한 곳에 기쁜 생활 끝없다
여기서 먹고 저기서 자며 여러 동무 같이 앉아 갈대 속에 집 좋다
이 노래는 남궁억 선생이 배화학당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때 지어졌다.
당시 한서는 낮에 배화학당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상동교회 안에 있는 청년학원장으로 학생들에게 항일 구국 교육을 하고 있었다.
세상일이 점점 더 슬프고 분한 일이 쌓여만 가고, 한서는 서울 생활을 접고 낙향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우울 할 때마다 이 노래를 학생들과 함께 불렀다고 한다.
어쩌면 이 노래 덕분에 한서가 모곡으로 낙향을 하게 되었고,
낙향과 더불어 무궁화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펼쳐지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5) 조선의 노래
금수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무궁화 화원에서
꽃피려하는 배달의 어린동무 노래 부른다
세상의 부러울 것 무엇이냐
라리랐다 라라라리라리라 라리랐다 라라라리라리라
라리랐다 라라라라리라리라 라리랐다 라라라리라리라
동천의 둥근 홍일 그 빛 찬란코
바다의 어별들의 양떼들 같이 태극기는 창공에 펄펄 날리고
빛나게 잘 살아라 우리의 조선
라리랐다 라라라리라리라 라리랐다 라라라리라리라
라리랐다 라라라라리라리라 라리랐다 라라라리라리라
‘조선의 노래’는 찬송가 350장 ‘우리들이 싸울 것은’의 멜로디에 한서가 시를 써서 붙인 곡이다.
노래만큼 구심점이 되는 것이 있을까?
무궁화 화원에서 꽃이 피려한다는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서가 이 노래를 만들어 학생들과 부른 때는
모곡으로 낙향하여 모곡학교를 세운 때 일 것이다.
한서는 이 노래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무궁화 정신을 일깨우고 태극기와 함께 겨레를 사랑하여 하나로 뭉쳐 동포 모두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심어주고자 했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공동체를 위해 공부하고 빛나게 모두 잘 살자는 가사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매우 귀감이 되는 정신이다.
특히 이 노래의 후렴구는 특별한 가사가 없이 즐겁게 스켓(Scat)으로 부르게 하였는데, 스켓 창법이란 가사 대신에 뜻이 없는 말로 즉흥적으로 프레이즈를 만들면서 부르는 창법이다. 다시 말하면 아무 뜻도 없는 소리로 가사를 대신해서 흥얼거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후렴구를 스켓으로 부르게 했는지 깊게 생각 해 볼 일이다.
(6) 조선 지리가
북편에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남편에 제주도 한라산까지
동편에 강원도 울릉도로 서편에 황해도 장산곶까지
우리 우리 조선에 아름다움을 맹호로 표시하니 십삼도로다
사천년 역사로 이어온 배달 거룩한 단군이 비로소시사
삼천리 반도로 우리 집 삼고 이천만 동포로 한 집안이뤄
우리 우리 조선에 광채로움을 문화의 도덕으로 빛내었도다
산 높고 물 맑은 무궁화동산 아름다운 경개로 장식하였고
기후 좋고 기름지며 교통이 편해 세계에 자랑이 조선반도라
우리 우리 조선에 유명하옴은 경개와 산물로 자랑하노라
우리를 낳고 기른 반도 강산아 네 기리 복 받고 무궁하여라
삼각산에 암석이 다 부서지고 양양한 한강물이 다 마르도록
우리 우리 조선에 아름다움을 일월로 한가지로 전하리로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학생들에게 조선의 지리를 가르칠 때 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했다. 이 노래를 통해 학생들에게 내가 사는 나라의 땅 끝 경계를 알게 하였을 뿐 아니라, ‘삼각산에 암석이 다 부서지고 양양한 한강물이 다 마르도록 우리 조선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낳고 기른 반도강산’이세계의 자랑이라고 했다.
어느 세월에 삼각산 암석이 다 부서지고 한강물이 다 마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한서 선생께서 지금은 비록 일본의 지배아래 신음하고 있지만 이 강산 이 땅은 영원 무궁히 조선의 것이라는 것을 학생들의 마음에 심어주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본다.
이 노래는 바장조로 행진곡풍의 노래이다. 사용된 음은 ‘솔, 라, 도, 레, 미’의 5음으로 민요풍의 가락이다. 또한 이 노래는 a+a+a′로 구성 되어 같은 가락이 계속 반복되므로 따라 부르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다.
(7) 운동가
잘 참고도 굳세다 철석같은 맘 눈 앞에 무슨 곤란 못 이길손가
활발코도 활발토다 우리 기상은 오늘 날 청년계에 모범일세
(후렴) 덕지체육 연단하여 동량지재이루세
인도정의 목적삼아 후일공업 이루세
철망으로 꽉 눌러 앞길 장애와 두 다리 질끈 동여 닺지 못 하네
땅이라도 후벼 파서 나갈 길 열고 두 동무 마주 잡고 빨리 닫세
두 주먹 꽉 쥐고 힘써 다투매 한마당 일등상이 거 뉘 것일까
엎어져도 번쩍 서는 용맹한 네냐 뒤쳐도 힘 잘 쓰는 굳센 나냐
풍진 곳에 땀 흘려 일장운동에 잃었던 옛 정신을 다시 분발해
훌륭토다 우리 산천 내 흥 돋우고 일심한 우리 동포 의 좋도다
내림 나장조인 이 노래도 역시 5음으로 구성된 짧은 가락이다. A(a+a′) + B(b+b′)의 가요형식으로 점 팔분음표와 십육분음표의 리듬은 마치 뜀뛰는 어린아이를 연상시킨다.
후렴구를 살펴보면 한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덕(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 선생께서 ‘지(知)’ 보다 앞서 어진 마음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성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는 지금 삶의 우선순위를 잘못 놓고 살고 있는 까닭에 학교폭력이나 왕따 등 약자를 배려하지 않고 괴롭히는 좋지 않은 문화를 어려서부터 익히게 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인성이 먼저고 그 다음이 지식이요 체력인 것이다.
‘풍진 곳에 땀 흘려 일장운동에 잃었던 옛 정신을 다시 분발’하자는 가사의 내용도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를 다시 회복하고 일으키기 위해 체력을 길러야한다는 메시지라 하겠다.
(8) 시절 잃은 나비
일락은 서산에 황혼이 되고 바다와 온 우주는 캄캄 하는데
옥로를 떠나서 어데를 향해 정처 없이 어데를 향해 가느냐
애닲다 이천만의 고려 민족아 너희 살길 바이없어 떠나가느냐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을 누구를 주고 자꾸만 떠나가느냐
정든 산천 고국을 등에다 지고 애닲은 눈물방울만 연해 뿌리며
두만강 푸른 물결 건너서 가는 백의의 단군민족아 내 말 들어라
무궁화의 화려한 금수강산은 우리들의 소유인 줄 너도 알건만
의식주의 핍박을 바이 못잊어 주린 배 움켜쥐고서 떠나가느냐
너희의 정경이야 차마 가궁하다 그러나 낙심 말아라 고려 민족아
이 노래는 한서 남궁억 선생이 작사하고 작곡한 노래이다. 내림나장조로 작곡된 이 노래의 민요풍 가락이 고국을 떠나는 난민의 신세를 더욱 처량하게 한다. 지금까지 소개한 노래와 달리 작은악절 중 마지막 악절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르게 구성 되었다. A(a+b) + B(c+d) + C(e+d′)의 구조인데 부르면 부를수록 구슬픈 느낌이 난다.
한서는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금의 조선이 찬란했던 고려를 거슬러 올라 국조 단군에 이르는 과거를 일깨우면서, 당시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했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광야를 40년간 헤매면서 고생했지만, 조선은 이미 조상 대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화려한 금수강산의 주인으로 살아온 것을 잊지 말라는 격려의 말씀이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은 의식주 핍박을 받아 견딜 수 없는 가난을 차마 버리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서 두만강 푸른 물결을 건너서 가지만, 이 땅이 조상 대대로 우리가 살아온 우리들의 소유인 줄 알고 다시 찾게 되는 날까지 낙심하지 말라는 다독거림이라 하겠다.
논자는 이 노래를 대하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락과 가사의 내용이 너무 아프기도 해서 그랬지만 ‘단군’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현재 기독교에서는 단군이 마치 이단 종교의 교주를 뜻하는 것처럼 터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은 지금의 대통령처럼 직위에 붙여진 명사다. 그리고 단군은 엄연한 고조선의 리더에게 붙여진 직위였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고조선의 역사와 단군에 대한 오해가 없었는데 언제부터 우리 기독교 사회에서 고조선의 단군이 이단 종교의 교주처럼 왜곡 되었는지 모르겠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한다. 단군은 이단 종교의 교주가 아니라 고조선의 리더였다. 이참에 건강한 역사의식으로 한서 남궁억 선생이 일깨워주려 하셨던 이 나라의 유구한 역사성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새기기를 바래본다.
(9) 무궁화동산
우리의 웃음 따뜻한 봄바람 춘풍을 만난 무궁화동산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 다시 솟아나는 이천만
(후렴) 빛나 거라 삼천리 무궁화동산 잘 살아라 이천만의 고려족
백화가 만발한 무궁화동산에 미묘히 노래하는 동무야
백 천만 화초가 웃는 것 같이 즐거워하라 우리 이천만
이 노래는 바장조로 행진곡 풍이다. A(a+a) + B(b+b′)의 구조로 된 이 노래는 같은 리듬을 반복하고 있다. 다소 억지스러운 해석일지 모르지만 오래 피는 꽃 무궁화처럼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잘 살아야한다는 한서의 뜻을 담아 같은 리듬을 반복한 것은 아닌지. ‘우리의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또 다시 솟아나는 이천만’이라는 가사를 보면서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든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논자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교정에는 무궁화동산이라는 것이 꼭 있었다. 그 무궁화동산을 가꾸느라 무궁화 꽃 뿐 아니라 여러 모양의 꽃을 심고 돌을 골라낸 추억도 좋지만, 그 동산에서 친구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둥실 떠가는 뭉게구름이 참 몽실몽실했다는 기억이 아련하다.
(10) 조선의 꽃
거친 산등성이 골짜기로 봄빛은 우리를 찾아오네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아가는 움트는 조선의 꽃
바장조의 짧은 이 노래는 아가들과 함께 놀 때 엄마가 아가에게 불러주는 노래로 보여 진다. A(a+b) + B(a+b′)의 구조로 가락 또한 별 도약 없이 쉽고 단조롭다. 한서는 아가들을 조선의 꽃으로 보았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도 있는데, 저 출산으로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 마침내 마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놓고 보니 이 노래가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4. 한서 선생이 남긴 창가 10곡에 대한 평가와 의미
지금까지 한서 선생이 남긴 10곡의 창가를 살펴보았다. 선생께서 남긴 주옥같은 노래들을 살펴보니 그 분이 당시 국민들에게 그리고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남기고자 했던 강력한 메시지가 하나 있다.
한서 남궁억 선생께서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그 홍익인간을 다시 풀어 이야기하면 ‘사랑’이 될 것이다. 나라에 대한 사랑, 겨레에 대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깊어져서 마침내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 그것이 한서 선생이 우리에게 남김 메시지이다.
한서는 노랫말에서 유난히 봄을 많이 노래했다. 봄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겨울을 참고 견뎌낸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다시 말하면 아리도록 춥고 어두운 겨울을 견뎌내고 만나는 봄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사랑’인 것이다.
36년. 짧지 않은 시간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둡고도 추웠던 세월을 등이 따숩고 배가 불러 안락한 편안함에 점차로 잊어 가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볼 일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1945년 8월 15일에 맞이한 우리의 독립은 미국이 일본을 굴복시킨 결과 얼떨결에 맞이한 독립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구한말 나라를 잃어가는 아픈 현실 속에서 처절하게 나라를 지키고자했던 조선의 지식인들과, 자주대한의 독립을 외치며 먼 타국에서 목숨까지 내어놓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선각자들, 이 땅에서 모진 핍박과 압제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위치에서 잘 참고 견디며 살아 준 힘없지만 무궁화 꽃 같은 백성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독립이 가능한 일이었다. 얼떨결에 맞이한 독립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수고한 땀과 뜨거운 피가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분들의 ‘사랑’이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선물을 준 것이다.
5. 맺는 말
한서는 조선을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조선의 산과 강, 하늘과 땅을 사랑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했다. 그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개화기에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나라를 지키고자 관료로 언론인으로 계몽 구국운동가로 활동하고, 일제강점기에 교육가로 사회운동가로 시인으로 작곡가로 애국 가사를 보급하며 한글 서체를 창안하는 등 폭이 넓고도 다양하게 수많은 일을 했던 것이다.
그 분이 남긴 노래들이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에 실리는 날을 기대해 본다. 그래서 아이들이 변함없는 그 분의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을 배우고, 내 자신 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덕인(德人)이 되었으면 좋겠다.
* 참고 문헌
2013, 보리울의 달, 김영권 지음,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
2014, 황성신문 초대 사장 남궁억, 정진석 지음, 도서출판 기파랑
그 외, 남궁억 선생과 관련된 인터넷 까페, 블러그, 웹
[출처] 한서 남궁억의 창가(唱歌)에 나타난 민족정신 연구|작성자 민성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