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톡스 주사 맞고, 쌍꺼풀 수술에 지방흡입해서 아무리 팽팽하고 날씬해도
신문이나 잡지 뒤적이는 폼만 보면 다 알 수 있지 ] 라면서요.
아닌게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손톱의 까끄라기를 떼어내려고 들여다보면
영 흐릿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것이 도통 말끔하게 보이질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려 좁히고 손을 쭉 뒤로 물러 거리를 좀 두고 보면
어릿어릿하던 게 제대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게 눈의 노화, 곧 [ 원시 ] 의 시작이라는 걸 처음엔 쉽사리 눈치채지 못했지요.
코를 들이박고 인쇄물 들여다보며 오·탈자 발라내는 일을 워낙 오래 하다보니
[ 시력이 더 많이 안 좋아졌구나 ]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는 정말 신문 보는 일이 부쩍 불편해지면서
결국 [ 노안 ] 을 인정하고 [ 돋보기 ] 를 맞추어야 했습니다.
처음이라 조금 어질증이 나고 눈이 금세 피곤해지긴 해도
그 돋보기란 놈을 콧잔등 위에 척 걸치면 퍼드러지거나 꼬물대던 글씨들이
신통하게도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머물러 있어 읽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돋보기를 찾아 처음 집으로 들고 오던 날,
공연히 서럽고 하소연이 하고 싶어져서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 엄마, 나 돋보기 맞췄어... ]
[ 뭐? 뭐라꼬? ]
[ 나 이제 돋보기 써야 한다구요!!! ]
[ 우야꼬∼ 야가 지금 뭐라 케쌌노? 니가 무신 돋보기를 벌씨로 씬다꼬! ]
이제 마흔도 훌쩍 넘긴 딸이지만, 그 딸이 돋보기를 써야 한다는 걸
친정어머니는 당사자인 저보다도 오히려 더 인정하기 싫어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늘 장난삼아 한번씩 써보곤 하던 엄마의 돋보기가 아닌 제 눈에 맞춘,
제 돋보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고 생각할수록 서글퍼지기까지 합니다.
그럼 그 전엔 꽤 쓸 만한 눈이어서 그토록 안타까운 것이냐 하면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중 1 때부터 근시에 난시까지 섞인 시원찮은 눈이 되어, 극장에 외화를 보러 갈 때는
꼭 안경을 챙겨야 했지만, 평소엔 되도록 쓰지 않는 버릇이 들어서 실수도 많이 했었지요.
길을 걷다 우연히 만난 반가운 사람, 손까지 흔들어가며 인사를 했는데
가까이 접근할수록 생면부지의 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의 그 황당함은
[ 저 여자가 대관절 누군데 아는 척을 하지? ] 라는 의문에 빠진 상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럴 때 피차 민망한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
사람을 잘못 보았노라고 시인을 하고 솔직하게 사과를 하거나, 혹은
계속 손을 흔들면서 그 사람 뒤로 시선을 옮기고 재빨리 지나치는 것입니다.
물론 한동안 뜨거워지는 뒤통수를 감수해야 하는 대가가 따르지요.
제가 택한 방법은 대부분 후자였는데
사과하는 곤혹스러움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엉뚱한 버스 타고 병든 닭마냥 꼬박꼬박 졸다가 화들짝 깨서 차창 밖을 살피면
영 낯선 곳, 결국 어두운 길눈으로 엄한 곳 헤매기 정도는 일주일이면 한두 번은 꼭 있는
단골 메뉴였습니다.
걸핏하면 주인을 우세시키거나 다리품 실컷 팔게 하는 데다,
음식 속 머리카락이나 나뒹구는 죽은 쥐 등 별 아름답지 않은 것을 잘 발견해
[ 좋지도 않은 눈으로 안 봐도 될 것만 본다 ] 는 지청구를 먹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볼 줄 아는 재주도 지닌 눈입니다.
몇 해 전 친구들과 도심의 C호텔 뷔페에 갔다가, 김초밥 위를 바쁘게 노니는
새끼 바퀴벌레들을 발견한 대가로, 주문도 하지 않은 와인이며 스페샬 요리 등
호텔측의 지극한 대접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는 그날 생일이었던 제게만 약속되었던 케익을
나머지 다섯 친구의 손에도 하나씩 들려주었으며, 저를 포함한 여섯 명의
식대까지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더군요.
그날 재미가 톡톡히 들린 친구들은 뷔페만 가면 [ 뭐 안 보이냐? ] 며 닥달하곤 하는데,
다시 그런 행운(?)이 따르진 않았으니 이제쯤은 역시 돋보기가 필요한 걸까요?
어쨌거나 돋보기를 쓰게 된 저는 심사가 몹시 복잡하고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식구들 앞에서 여봐란 듯 꺼내 쓰고 시위를 해봤지만
아이들은 엄마의 돋보기를 그저 재미있고 신기해 할 따름이고,
제가 바라던 [ 위로 ] 따위와는 거리가 먼, [ 너한텐 안 어울린다 ] 라는
한방 쓰는 이의 아주 간단하고 무미건조한 품평만 그러잖아도 지끈지끈
편두통이 자심해지고 있는 머리를 사정없이 쳤을 뿐입니다.
제가 거울을 봐도 돋보기가 물론 어울리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 벌써 쓰게 돼서 어쩌냐 ] 고 안쓰러워 하는 말 한 마디라도 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우울해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며칠은 돋보기 때문에 속상하고 서운해서 혼자 마음을 끓이며
나이를 갑자기 한꺼번에 열 살은 집어먹은 것처럼 풀 죽어 보냈었습니다.
정작 써야 할 때도 책상 위에 꺼내놓은 돋보기를 공연히 째려보며
한참 동안 눈싸움만 하다가 그냥 외면해버리기도 여러 번...
신발장 위에 잠시 얹어둔 우산을 신발 신는 새 홀랑 까먹고 그냥 나온 덕에 아침부터
비를 맞고 출근한 오늘은 불현듯, 내내 천덕꾸러기 취급하던 제 돋보기가 가엾어지더군요.
건망증처럼, 제 눈이 이리 된 것은 돋보기 탓이 아니라 육신이 세월 따라 사위어 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수긍하기로 한 것인데, 그게 참 묘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특별한 애석함이나 두려움을 품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왔으며, 다시 한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고 싶다는 등의 실현 불가능한
소망 같은 것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데 돋보기를 쓰게 된 것에 그토록 상심하고 언짢았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 모두
가식이었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어 새삼 마음 속 깊은 우듬지까지 뒤져가며 확인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대 명치 끝에 가시로 박힌 채 곪아 있는 곱지 않은 나의 허물이
돋보기 아래서 또렷하게 드러날까 겁이 나는 건 아닌지,
세월의 발자국이 남겨놓은 잔주름 사이사이 묵은 때처럼 씻겨나가지 않는
잡다한 시름이며 걱정, 상기하기 싫은 과거의 실수가 확대되어 보일까
전전긍긍하는 것은 아닌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비관적으로 받아들였던 돋보기의 용도를 좀 달리하여
아주 사려 깊게, 긍정적으로 사용해볼 생각입니다.
그동안 과소평가했던 제 자신의 중대한 결점을 꼼꼼히 살핀다거나,
무심히 지나쳐 서운함을 샀을지 모르는 저에 대한 주위의 배려를, 베풀어준 이의
깊이와 크기 그대로 감사히 간직할 수 있도록 돋보기의 확대기능을 최대한 활용해 보려구요.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해진 것은...
너무나 가까이 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족함 없이 차고 넘쳐
탯줄이 끊어진 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호흡처럼, 존재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소중한 줄 모르고 가벼이 넘기던 그대의 마음이 조금씩 명료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 * * * * [ 루사 ] 라는 성질 고약한 사슴 한 마리가 대책 없이 날뛰며 쓸어버린
집과 세간들을 씻어내느라 막막한 시름마저 흙탕물 속에서 건져내야 할 지경이 되어버린 이 땅에는,
루사가 훠이훠이 여름을 몰고 가며 대신 데려다 둔 얼떨떨한 모습의 가을이 나와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는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선선한 바람이 제 방 창가에 오락가락 하는 것을 보니,
사람과 달리 서둘러 왔든 더디 왔든 계절은 변함없이 제몫을 해내기 마련인가 봅니다.
이 가을, 저는 돋보기를 쓰고 불분명하던 주변을 다시 한번 찬찬히 살피며
그동안 사소하게 여기고 지나침으로 인해 잃을 뻔했을지도 모를 소중한 보석들을
더 지체하여 후회만 남기 전에 알뜰히 수확할 참입니다.
그대...
그대가 수확할 보석들 중 제 이름 석 자,
말석에나마 들어있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입니까...
비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처참한 흔적 위를 고운 단풍으로 덮어줄 이 가을,
언제 다시 꺼내보아도 가슴 따뜻한 추억에 젖을 수 있는
풍요로운 결실이 넘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