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서 제천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남원주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구불구불 산 길을 넘는 것도 만만치 않았고,
제천IC에서 나온 후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 또한 꽤나 길었다.
고속도로를 이용했음에도 40분을 더 끌고 나서야 제천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마땅한 주차장도 없어 골목길을 몇 번 빙빙 돌다 결국 불법주차를 하고 카메라를 꺼낼 수 밖에 없었다.
5년이 지났지만 시외버스터미널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고속버스터미널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이웃 시외노선은 전국 각지로 실어다주며 꽤 다양한 노선이 모던한 감각의 세련된 터미널을 왔다갔다한다면,
여기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서울 가는 버스 딱 한 대뿐이다. 리모델링은 없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골목길 한 가운데에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제천시내는 생각보다 꽤 넓은 편이다.
중앙시장과 고층빌딩(이래봤자 4~5층)이 있는 중심가를 두고 북쪽에 터미널, 남쪽에 기차역을 두고 있다.
터미널이 중심가와 그나마 더 가까워서 한 블럭 정도, 걸어서 5분이면 가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인구가 적은 소도시의 특성상 고요하고 한적하다.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어 빙빙 돌았다는 서론의 말처럼, 오래된 동네일수록 차를 가지고 다니기가 힘들다.
1차로로 변해버린 터미널 앞 골목길은 그나마도 택시가 장악해 굉장히 복잡하다.
주차할 공간은 사거리 옆 공터 하나뿐이지만 규모가 작아 차를 타고 터미널을 찾기란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자동차 보급이 많아지면서 차를 끌고 터미널을 찾는 수요도 꽤 될텐데 만만찮은 문제다.
고속버스터미널은 (그나마) 눈에 좀 띈다는 시외버스터미널보다도 더 구석진 곳에 있다.
앞 사거리는 죄다 실질적 1차선의 골목길 뿐인지라 '나 잡아봐라' 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찾으려면 꽤나 까다로울 것이다.
오랫만에 왔지만 가게 이름 몇 개 빼고는 변한 건 딱히 없어 보였다.
동부고속이 운영하는 것도 그대로, 작고 아담한 1층짜리 건물도 그대로였다.
아직도 고속버스 노선은 서울행 딱 하나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적지 않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시외버스쪽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위치는 옛날의 대전시외버스터미널이고 분위기는 김제고속버스터미널과 흡사하다고 표현하면 될려나.
솔직히 조금 걱정될 정도로 사람이 안 보인다.
배차간격도 평일/주말에 이어 금요일까지 차등 구분이 되어있었다.
평일 50분, 금요일 30~40분, 주말 30분. 5년 전보다 오히려 약간 줄어든 것 같다.
인적 하나 찾기 힘들 정도로 휑하더만 역시 겉으로 보고 모든 걸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배차가 줄었다 한들 입지가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다른 지방노선 죄다 갖추고 있으면서 서울행까지 뚫어놓은 시외버스와도 경쟁해야 하며,
선형 개량으로 속도가 훨씬 빨라진 중앙선의 이용객이 크게 늘어나면서 가장 불리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수요가 많지 않은 만큼 변화도 셋 중 가장 적기는 했지만 나름 노력의 흔적은 보였다.
LCD 실시간 위치시스템으로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가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는 전광판도 생겼다.
아마도 마중나온 사람들 보라고 달아놓은 것 같은데 굉장히 신선하다.
낡은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어둑어둑한 틈새로 환한 햇살이 눈부시게 질주한다.
역시 승차장도 Z자형에서 일자형으로 바뀌어 있다.
많은 차량이 들어오지 않는 만큼 이게 더 효율적이게 느껴진다.
저 앞의 동부고속 차량도 어쩌면 나처럼 토요일 아침의 지옥같은 고속도로를 지나쳐 온 차일려나.
왠지 모를 연민이 간다.
운치 있고 느낌 있는 풍경까진 아니지만 잠시나마 여유로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좋았다.
고속버스터미널 앞에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세우고 고추를 말리는 모습.
큰 도시들은 물론이고 이웃 원주, 충주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아득한 냄새에 황홀하게 취한 채 다시 일행을 붙잡고 다른 곳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그리 멀지 않았다. 차로 5분 거리였다.
일부러 제천 중심가를 훑고 지나가며 사람 사는 광경도 구경해보고 제천이 어떤 곳인지 넣어보았다.
역시 생각한대로 작고 아담하지만 활기는 넘치는 그런 곳이었다.
4차선 대로변은 복잡하지만 젊은 학생들이 많고 골목길로 들어가면 가장 북적이는 재래시장이 나오고,
그 옆으로 만든지 얼마 안 된 것 같이 깔끔한 거리와 옷가게들.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파시는 할머니들의 미소, 주말의 기쁨에 취한 젊은이들 그리고 가족들.
중심가를 벗어나자마자 나오는 농촌마을 풍경.
대도시 사람에겐 '시골'이라 불리지만, 정작 자신들도 작은 도시인건 알지만,
그 안에서 도시 사람들 못지 않은 문화생활을 즐기고 행복과 여유를 찾음은 어느 대도시 못지 않다.
우리 일행은 짧은 제천시내의 분위기를 감상하고 금방 주차를 시켰다.
뜨겁게 달구어진 차량 엔진도 식힐 겸 조용하고 한적한 제천의 어느 골목길에 발을 내디뎠다.
위치는 '충청북도 제천시 교동'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 윤동주 - 별 헤는 밤 中
계절이 지나가는 마을은 가을로 가득 차 있었고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 상념에 잠기어 있었다.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곳, 시끄럽다며 문을 열고 호통치는 어른의 잔소리.
별 거 아닌 마냥 얼굴엔 웃음 꽃을 가득 피우며 장난치는 어린이의 웃음소리.
리틀꿈장에 모여 우리가 그릴 미래를 생각하며 어깨동무를 짊어진 소녀들의 다짐.
세월은 흘러 주름이 깊게 패인 중년이 되고 어린 시절의 순수함은 어디로 사라졌던가.
매정한 사회생활에 치이고 하루하루 스트레스의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순수한 모습들은 조급했던 마음을 차분히 잠재워주는 듯 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쌓이는날 외로운여자가 아름다워요' : 고은 - 가을편지 中
편지 대신 화려한 색감과 그윽한 향기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유혹하는 코스모스.
벚꽃 그림 위에 얹어진 봄과 가을의 대치는 은은하게 우리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꽃가루를 받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든 꿀벌들도 이러한 마음을 알고 있으려나.
아름다운 옛날의 그림을 되새겨주는 교동의 어느 작은 마을 속엔,
까마득한 옛날을 상징하는 하나의 멋진 건축물이 자리잡고 있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 제천대학교'쯤 되는, 제천향교라는 곳이다.
아주아주 먼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 곳은 글을 읽는 유생들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조그만 마을에는 그 위치 그대로 초가집과 기와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었을 것이고,
향교 정문으로 향하는 울퉁불퉁 흙길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람의 발자국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제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땅부자도,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전전긍긍하던 가난한 양반도,
모두 이 곳에 모여 글을 읽으며 출세할 날만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을지언정 후손들의 마음 씀씀이 역시 같은 것이다.
저 글자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평화로움 속에 공격적인 위상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출세를 향한 집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겠다.
아쉽게도 제천향교는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내부만 깔끔하게 꾸며놓고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 덕에 안에는 쓰레기 하나 없고 훼손 없이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지만,
몇 백년 전 글을 읽으며 출세의 집념을 불태우던 모습을 떠올리기에 조금 미련이 남는다.
9월 한낮 쏟아지는 더위 속에 파묻힌 그때 그 시절의 기억은 어땠을까.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뀐 지금도 '출세 만이 살길'을 외치며 여기저기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는 이의 마음은 어떨까.
읍성도 관아도 모두 사라지고 홀로 쓸쓸히 남은 향교의 한 지붕만이 말 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오랜 세월 제천을 지켜주었던 화려한 기와지붕의 쓸쓸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슬픔만 가져다 준다.
제천, 짧았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컸다.
다음 향하는 곳도 이처럼 강력한 기억을 우리에게 지어줄 수 있을까.
- 5부에서 -
첫댓글 터미널 여행기도 잘 보고 있고, 이번처럼 도시 자체의 이야기도 참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전부터 글 즐겁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버스터미널이 주제인데 어찌 산으로 넘어가는 글을 더 많이 올리는 것 같아요. ㅎㅎ 다음 게시물도 기대해주시고 댓글 감사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제 고향이 충남 당진인데 부모님께 전화드리거나 시골에 가서는 사투리를 씁니다. 제천은 충북이지만.원주.영월과 붙어있어서 그런지 충청도 사투리와 강원도 사투리가 섞여서 구수한, 정감있는 맛이 느껴지더라구요.충남 사투리보다 더 정겨운 사투리로 들리고 도시 규모도 아담하고 조용해서 갈때마다 편안한 맘입니다
우리나라 사투리를 구분할때 제천,단양은 아예 독자적으로 분류해서 구분을 하더군요... 억양은 강원도에 가까우면서도 충청, 경북말이 섞여서 독특한 지역언어가 남아있다고 합니다. 정겹고 구수한 사투리가 재밌어 일부러 찾아갈때도 있지요~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