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압력솥이 하나 있다.
아니 내가 늘 사용하는 주인이므로 나는 압력솥을 하나 가지고 있다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그 압력솥 이름이 셉(SEB)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솥을 만든 회사 이름이 셉이다.
프랑스에서는 제법 알려진 회사인데 주부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 한다는 테팔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여태 들어본 일이 없으니까.
왜 갑자기 압력솥 이야기일까?
그 압력솥이 비웃음을 당해서라고 변명을 해주고 싶었다면 말이 될까?
좀처럼 손님이 없는 우리 집에 갑작스레 두 쌍의 부부가 들이 닥쳤는데 그들에게, 정확히 말하자면 여인네들에게 비웃음을 샀으니 새삼스레 애착이 더 가서 일 것이다. (아마 이리로 이사 온 뒤 첫 손님일 터이다. 3년 만에 첫 손님이라.. 해도 너무했다.)
놀림을 당하는 게 당연한 것이..
우선 볼품이 없다. 초기 제품이니 디자인이라고는 순전 실용적인 면만 고려했을 터이다. 내가 봐도 그야말로 볼품이 없다. 무식하게 큰데다가 모양마저 각져 있고 색이라고는 오직 스테인레스색 하나뿐이니 볼품없을 게 당연하다(정말 예쁘지 않다).
언제 만들어졌느냐고? 글쎄다.
프랑스 살던 시절 언니에게 물려받았던 그 셉은 이미 십여 년이 지난 제품이었는데 언니가 보고는 여태 사용하느냐고 놀라던 그 솥이니 얼추 이십여 년은 지나지 않았을까.
게다가 제구실마저 하지 못한다. 밥을 하면 영락없이 타기 일쑤니 말이다. 일부러 고무 패킹을 구입해서 새로운 고무 패킹으로 갈아주었건만 여전히 밥은 탄다.(그 고무 패킹 찾느라 시간도 어지간히 잡아 먹었었다. 수퍼를 온통 뒤졌으니..) 게다가 압력추마저 고장 나서 빠지기 일쑤다. 밥을 하다 보면, 대부분 고압을 필요로 하는 음식을 만들다 보면 몇 번 딸랑거리다가 치익하고 증기기관차 굴뚝에서 김 나가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나면서 추가 몇 번 덜렁거리다가 빠져버린다. 열이 식기를 기다려 조심스레 음식 속으로 빠진, 밥 속에 박혀버린 나사를 꺼내지 않으면 누군가 먹을 수도 있을 테지.
그렇게 제 구실마저 하지 못하는 오래 된 솥을 왜 내버리지 않을까. 나도 모르겠다. 무식하게 생겼긴 하되 여전히 요긴하게 사용하는 탓일 것이다.
매일 밥하는 일에는 물론이지만 다른 여러 가지에 유용하다. 여름 내내 물기 없이 파삭하게 감자 쪄먹고 옥수수 쪄먹고 얼마 전까지는 은근한 불로 고구마를 쪄먹었다(이렇게 하면 군고구마 냄새가 난다). 거기다가 아들 좋아하는 삶은 돼지고기 만들 때 (여기다 삶은 돼지고기는 언제나 부드럽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요즘 같이 추운 때는 돼지 등뼈 우려내어 감자탕 끓이고, 육수 만들 때, 각종 야채 넣고 푹푹 끓여 육개장 만들 때 그야말로 잘 사용한다.
최근에는 사용처가 하나 더 늘었으니.. 그건 바로 커피 생두 볶기다. 나중에 구하기 힘들다는 수망이나 구하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아마도 계속 애용하게 되리라. 솥이 깊으니 커피콩이 튀어나갈 염려가 없고(그래도 열심히 휘젓는 바람에 몇 알 튀어나가기는 한다), 밑이 두꺼우니 한동안 열을 받아들일 수 있어 고른 열을 가할 수 있다. 고른 열을 가할 수야 있지만 볶는 사람 솜씨가 형편없는 탓인지 내가 볶아낸 원두는 색감이 고르지 않고 울긋불긋 하기는 하다.
이렇게 요긴한데 너무 오래 되었으니, 볼품없으니 버리라고? (왈 압력솥 장사 다 망하지 않겠어요?)
글쎄다.
물건은 사용처가 있어서 태어났고 아끼고 사용하면 그만큼 생명을 갖고 아름다워진다고 믿는 탓에 뭐든 버리기가 쉽지 않은 이 구식 아줌마 머리로는 간편하게 버리고 간단히 새로 사는 그런 사고방식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매한가지 아닐까.
물건은 닳고 닳아서 쓸모없으면 모르되 매양 버리기 쉽지 않고, 사람은 사귀면 사귈수록 시일이 흐르면 흐를수록 보이는 것이 다르고 은근함이 다른 그런 사이가 된다고 믿는 탓에 사람 사귀기도 쉽지 않지만 헤어지기도 쉽지 않다. 저 물건 또한 언제 새까맣게 태워서 쓰지 못하게 되면 모를까.. 하긴 언젠가 태운 적도 있다. 그럼에도 도대체 버릴 엄두가 나지 않아 공들여 닦아서 다시 사용해왔으니. 버리면 그저 쓰레기가 될 뿐인데 그건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나라는 사람이 신식으로 변하지 않는 한, 손잡이나 기타 중요 부속이 떨어져나가 못쓰게 되지 않는 한 저 솥은 아마 계속 주방에 자리잡고 있게 될 터이다. 변덕스럽지 않은 스테인레스답게, 제 무게마냥 가볍지 않게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해가면서.
누가 또 아는가.
어느 날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용처를 발견하게 될지..
첫댓글거의 쓸 수 없는 몽땅연필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까운 법인데 아직도 쓸모가 많은 셉이니 버리지 못하지요? 이유 있는 애착입니다. 우리집에도 그런 게 하나 있어요. 대한전선표 선풍기가 우리집에서는 가장 조용한 선풍기랍니다. 집 사람이 시집올 때 가지고 왔으니 20년도 넘었지요.
첫댓글 거의 쓸 수 없는 몽땅연필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까운 법인데 아직도 쓸모가 많은 셉이니 버리지 못하지요? 이유 있는 애착입니다. 우리집에도 그런 게 하나 있어요. 대한전선표 선풍기가 우리집에서는 가장 조용한 선풍기랍니다. 집 사람이 시집올 때 가지고 왔으니 20년도 넘었지요.
또 들꽃 이야기는 아닌데요.........(사알살 눈치보다가 정가네님 꼬리글보고 안도의 한숨 내쉬는 tinkle)
팅클님! 들꽃얘기가 우리들 얘기이고 우리들의 생활이 들꽃얘기라 생각하세요 그게 같이 어울리지 않으면 들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요? 오히려 셉처럼 오래 곁에 있는 물건에 정이 더 가거든요 *^0^*
뒹굴님, 그래서 문학방 제목 옆의 설명글을 바꿨습니다!
tinkle님..여기 문학방이 들꽃과 관련된 것에서 삶과 문학,그리고 여유로 바뀌었네요..시공님 말씀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글 올리세요^^* 셉 밥솥 이야기를 읽어 보니까 저도 한 자리 끼어들고 싶네요...진랑이 여중 다니면서 가사 시간에 사용하던 작은 가위가 있는데요.
종이 자르는데는 아무 이상이 없는지라 20 여년이 넘어서도 제 바느질 바구니에 담겨져 있어요.크고 좋은 가위도 있지만 조그맣고 볼품없는 가위에 담긴 옛 추억의 그림자 때문에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네요.
화아~~ 대단하시네요. 20년 넘은 가위라..^^ 누구나 그런 물건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정말로 바꾸셨군요. 고맙습니다. 히유~~~긴 안도의 숨..........제가 '바람재'님에게 엄청난 야단을 맞아가면서 영화이야기를 쓰고 있는데 그거도 이리 옮겨올까요?
밥통을 보여줬으면 더 감출게 없지요. 그 영화 같이 보자구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들꽃처럼 작고, 소박하고, 간소하게 그러나 여유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