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께서 브두엘의 아들 요엘에게 이르신 말씀이라2 ??늙은 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들을찌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찌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4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5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 6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그들은 강하고 무수하며 그 이는 사자의 이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의 어금니 같도다 7 그들이 내 포도나무를 멸하며 내 무화과나무를 긁어 말갛게 벗겨서 버리니 그 모든 가지가 하얗게 되었도다 8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찌어다 9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10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찌어다 이는 밀과 보리의 연고라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요엘 선지자는 브두엘의 아들이라는 정보 외에는 달이 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이름이 많았기에 브두엘의 아들 요엘이라고 구별을 한 것입니다. 이 요엘 선지자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먼저 보고 세부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간절히 기다리던 한 날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구원의 날로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날만 되면 자기들이 당하는 현실적인 고통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회복이 되는 그런 날로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리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이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2:1-3절을 봅니다.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 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그렇게 기다리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이 날이 되었기에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자들은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2:12-14절입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자들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옷이야 사람의 손으로 찢을 수 있지만 마음을 무슨 수로 찢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성신을 부어주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신이 임하게 되면 마음을 찢는 일들이 일어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종말로 본 것입니다.
2:28-32절입니다.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5)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우리가 주일 낮에 보고 있는 사도행전 2장(2:14-21절)에서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가 성령이 임하신 것이라고 베드로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란 성령이 임하여 마음을 찢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일이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이러한 성경전체의 숲을 보고서 나무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엘서 1:1절입니다. 첫 단어가 '여호와께서'입니다. 여호와란 언약적인 이름입니다.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그 대상이 늙은 자들부터입니다. 너희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인데 이것을 너희의 자손대대로 증거 하라는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은 4절입니다. 팟종이가 먹은 것은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은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은 황충이 먹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메뚜기 종류인데 모든 푸른 것이란 다 갉아먹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4중으로 갉아 먹어버리는 엄청난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재앙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따라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당하는 자연재해들은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라는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8:38절과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심을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 모든 나무와 토지소산은 메뚜기가 먹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8:37-40절입니다. "37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38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40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솔로몬이 다윗의 언약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고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메뚜기나 황충이 나오는 것을 보고서 재앙을 깨닫고서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사유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백성들이 주를 경외하게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재앙을 내림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하여주심을 통하여 주님을 경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내용은 재앙입니다. 메뚜기 떼들이 4중으로 덮쳐 버리면 푸른 것이라고는 전혀 남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10가지 재앙 중에 메뚜기 재앙이 7번째 인 것은 그만큼 중한 재앙입니다. 그런데 애굽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이러한 메뚜기 재앙이 내리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처럼 되어 버린 것입니다.
1:5-6절을 봅니다. "봉독" 지금까지 포도나무의 열매로 포도주와 포도즙을 만들어 먹던 너희들은 깨어 울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푸른 것을 메뚜기 떼들이 먹어버리는 것은 1차적인 재앙이라면 이제 한 이방민족이 메뚜기 떼처럼 올라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강하며 무수하게 그 이는 사자 같고 그 어금니는 암사자 같다고 합니다. 메뚜기의 이빨들이 매우 강하다고 합니다. 그처럼 이방민족이 올라와서 포도나무를 멸하고 무화과나무를 말갛게 벗겨버리겠다고 합니다. 이런 재앙이 올 것이니 너희는 깨어서 울라고 하는 것입니다.
1:8-10절입니다. "봉독" 어느 정도로 울라고 하는 것입니까? 처녀가 어려서 약혼한 남편이 죽어버린 것처럼 애곡하라는 것입니다. 소제와 전제가 끊어져 버림으로 제사장들이 슬퍼하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부끄러워하라고 합니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은 곡하라고 합니다. 포도나무는 시들었고, 무화과나무는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및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다고 합니다.
자연의 재앙이 이방민족이 쳐들어오는 것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깨달은 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자들은 심판의 날이 구원과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과연 그 시대를 알아보고서 깨어 울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살고 있습니까?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고 느끼고 있습니까? 성경은 메시야의 오심과 성령이 임한 것을 말세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제는 아예 종말을 인식하지도 않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이 시대를 보고서 탄식하며 울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의 풍요 속에 더욱더 황폐하여 가는 신앙을 인하여 울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고 교인이 많다고 하여도 잎만 무성하여 주님의 저주를 받았던 무화과나무와 같지 않은지 우리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 9:3-6절입니다. "3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5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뒤를 좇아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 보지도 말며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찌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1)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하나님의 심판이 성전에서 늙은 자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늙은 자란 장로로 번역이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장로, 목사, 신앙생활 오래하고 잘한다는 사람부터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에서 면제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는 자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을 인하여 탄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지 온 것을 아는 사람은 울며 애통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오늘날 우리의 영적인 현실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이 땅의 현실을 보면서 통곡할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7-11절을 봅니다.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온 것을 안다면 더욱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할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허다한 죄를 덮어주고 있습니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있습니까?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고 있습니까?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있습니까? 봉사할 때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하여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말세를 당한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이러하지 않다면 주님의 임하시는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요엘서 1:13-20 여호와의 날 2003. 1. 29
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찌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맟도록누울찌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찌어다 15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왔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16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 생축이 탄식하고 소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떼도 피곤하도다 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거친 들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밭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며칠 있으면 설날입니다. 설날이 되면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설날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은 대학에 합격을 하였거나, 승진을 하였거나, 보너스를 두둑이 받은 사람들은 가족이 모였을 때 자랑할 것이 있어서 기뻐하겠지만 반대의 경우는 슬픈 날이 될 것입니다. 같은 날자 같은 명절이라도 기쁜 사람이 있고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명절이란 설이나 추석 같은 날자 이지만 이스라엘의 명절은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명절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3대절기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이러한 절기들 외에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을 지킬 때의 특징은 일하지 아니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을 쉼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기들과 달이 특별히 회개를 위하여 집회를 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한 집회들을 보면 우리가 자주 들었던 미스바라는 단어가 생각날 것입니다.
사무엘상7:5-11절을 봅니다. 5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6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7 이스라엘 자손이 미스바에 모였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그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온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듣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8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9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10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뢰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11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람들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에 하나님의 언약궤만 들고 가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고 들고 갔다가 오히려 전쟁에서 지고 그 언약궤마저 빼앗겨 버렸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간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지경에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서 회개하게 하는 집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군에게 오랫동안 고생을 하자 여호와께로 마음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스바 집회로 모여 회개할 때에 블레셋이 또다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때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응답하셔서 블레셋 군대를 물리칩니다. 그날의 승리를 기념하여 에벤에셀의 이라는 기념비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은 자연 재해나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간에 하나님 앞에서 재앙을 깨닫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개란 우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힘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의 어려움이 있으면 기독교 단체에서 미스바 구국기도회라는 이름으로 많이 기도하였습니다. 성도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였음을 회개하게 합니다.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사랑한 것을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회가 결국은 우리나라가 부강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우리나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 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을 혈통이나 국가단위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회개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세상의 다른 것들을 의지하였음을 회개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의 다른 힘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한다고 해서 회개가 인간의 공적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란 지극히 당연한 것일 뿐입니다. 회개하였다고 무조건 용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가 일어나는 것 자체가 용서가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서 회개를 하였다고 용서가 기계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이며 용서는 오직 주님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하는 것이 회개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 회개하였는데 왜 용서 안 해주는가 하면서 또 항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엘서 2:12-14절을 봅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기계적인 응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이 크시니 그 마음과 뜻을 돌이키실지 하는 자세입니다. 주의 긍휼과 자비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그러면 요엘 선지자가 왜 이렇게 깨어 울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기다린 여호와의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기에 회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 심판의 날의 징조로 메뚜기 떼가 임하는 것을 보고서 심판을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뚜기 떼는 적군의 침략으로 완전히 황폐하게 될 것을 함께 내다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날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구약에서 어떻게 계시하고 있는지를 보고서 우리는 이 여호와의 날을 어떻게 기다리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형식에 물들어서 자신들은 의롭다고 여기고 있는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날을 기쁨의 날로 기다리고 있을 지라고 심판과 애곡의 날이 될 것이지만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우는 자들에게는 그날이 심판의 날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쁨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구약이나 신약이나 간에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두가지의 일들이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 것을 성경 몇 곳에서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2:12-22절입니다. "12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13 또 레바논의 높고높은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14 모든 높은 산과 모든 솟아오른 작은 산과 15 모든 높은 망대와 견고한 성벽과 16 다시스의 모든 배와 모든 아름다운 3)조각물에 임하리니 17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18 우상들은 온전히 없어질 것이며 19 사람들이 암혈과 토굴로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 20 사람이 숭배하려고 만들었던 그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지고 21 암혈과 험악한 바위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땅을 진동시키시는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 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입니다. 어떤 자에게 심판의 날이 됩니까? 교만한자와 거만한자들입니다. 모든 높아진 것들을 다 낮추어 버릴 것입니다. 금 우상, 은 우상을 섬기고 인생을 의지하고 사는 모든 자들을 심판하시고 여호와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사야 4:1-6절을 봅니다. "봉독" 역시 그날에 여호와의 날입니다. 심판으로 남자들이 거의 없어진 버린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주님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고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 아름답고 영화로운 날이 될 것입니다.
두 곳의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날이 심판의 날임과 동시에 구원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심판 받을 자는 여호와를 대적하여 교만하여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입는 자들은 미리 심판의 영과 소멸하게 하는 영으로 더러움이 씻겨진 자들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요엘서 2:16-20절입니다. "봉독" 재앙으로 인하여 완전히 황폐화된 모습입니다. 메뚜기 떼가 4중으로 덮치는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씨가 땅속에서 썩어져버릴 지경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시냇물도 말라버리고 들의 풀조차 기근으로 말라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들까지 다 헐떡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범죄로 인하여 다른 피조물까지 하께 고통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이렇게 보이고 있습니까? 먹고 살만하게 보이십니까? 황폐하게 보입니까? 먹고 살만하니 안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황폐하게 보이니 안심이 어떻게 하든지 살아남기 위하여 땅의 것을 추구하시겠습니까? 세상이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35절입니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분명히 추수하기 까지는 넉 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들판은 아직 새파란 들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벌써 희어져서 추수 때가 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이러한 시각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새 대통령과 새해를 맞이하였다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엄청난 폭격을 맞은 것처럼 황폐화되어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에서 핵폭탄이 터져 폐허가 되어 버린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요엘서 1:13-15절입니다. "봉독" 금식 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고 모든 거민을 몰수이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세를 당한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가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기갈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시편118:22-24절을 봅니다. "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3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24 이 날은 여호와의 1)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버려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이 싫다고 내어버린 예수님을 누가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은 사람들이 환영하는 메시야기 아니라 사람들이 버려버린 그런 메시야를 믿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며 주님의 그날에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온 세상의 드러나는 날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성도란 이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엘서 2:1-14 나팔을 불어라 2003. 2. 5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성산에서 호각을 불어 이 땅 거민으로 다 떨게 할찌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 3 불이 그들의 앞을 사르며 불꽃이 그들의 뒤를 태우니 그 전의 땅은 에덴 동산 같았으나 그 후의 땅은 황무한 들 같으니 그 들을 피한 자가 없도다 4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1)기병 같으며 5 그들의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6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7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8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2)상치 아니하며 9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10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11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요엘서를 그동안 두 번에 걸쳐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제목을 살펴보자면 첫 번째가 '깨어 울찌어다' 입니다. 왜 깨어 울어야 하는 것입니까? 두 번째 제목이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소망하는 날이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기쁨과 감사의 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되기에 깨어 울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은 2:1절의 말씀처럼 나팔을 불고 호각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도 역시 여호와의 날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그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에 나팔과 호각을 불어서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민방위의 날에 경계경보를 발령하여 대피시키는 것처럼 경고의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이러한 경고는 사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열방에 경고의 나팔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속받아 나온 것은 온 세상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 위함입니다. 자기들만 구원받아서 잘살라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나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 전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에 이들에게 심판을 가하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하나님께 불순종하더니 저렇게 망하였구나 하는 것으로도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속하심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크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며, 죄인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나팔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종하여 적을 이기게 되는 경우나 또는 불순종함으로 적에게 패배하게 되는 경우도 결국 하나님의 나팔의 역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전체에서 나팔을 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본문 말씀에서 나팔의 경고와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어떤 경고가 되는지를 증거 하고자 합니다.
제일먼저 나팔소리가 나는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출애굽 한 이후에 시내 산에서의 나팔소리입니다. 이 나팔소리는 사람이 부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난 소리입니다. 출애굽기 19:13절에서 나팔소리가 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 앞에 나아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산으로 접근은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산으로 가까지 접근하다가는 죽게 되기에 모세만 시내산 가운데로 올라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의 말을 믿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9:16-19절입니다. "16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18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하나님의 강림하심의 모습입니다.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게 울리니 진중의 모든 백성이 다 떠는 것입니다. 나팔소리는 하나님의 강림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감히 접근이 불가합니다. 그러므로 나팔소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알리시는 나팔소리입니다.
그리고 나팔소리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행진할 때 신호로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이라는 신호로서, 전시에도 나팔을 신호로 사용하였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마지막 날에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임으로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면서 행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팔소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를 또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나팔을 부는 내용이 있습니다.
레위기 25:8-12절입니다. "8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9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10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찌며 11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12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서 나팔을 불라고 하는 때가 7월10일 속죄일에 나팔을 불라고 합니다. 7월 1일에도 나팔을 붑니다. 이날도 안식일로 지킵니다. 이러한 나팔 부는 것은 가을 추수를 거두어들이는 초막절과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7월 15일부터는 초막절을 지키라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레위기 23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레위기 25장에서는 희년과 연결된 속죄일에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매년 나팔이 불어지지만 희년의 나팔소리가 나면 전국에서 종으로 팔려 있던 유대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땅이 팔린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참으로 기쁨과 감사의 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년이 제대로 지켜진 기록이 성경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안에는 제대로 나팔소리가 울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속죄일에 형식적인 나팔은 불었을지 모르지만 참으로 종들이 돌아오고 땅이 다시 회복되는 그러한 나팔소리는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다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회복될 날을 기다린 것입니다.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이 율법대로 살고 있다고 여기기에 여호와의 날을 얼마든지 맞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그들 나름대로 재해석하면서 자기들의 편리대로 적용하여 지킨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다린 날은 회복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임을 요엘서가 증거하고 모든 선지서 들이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요엘서 2:1-3절입니다. "봉독" 기다린 여호와의 날이 어둡고 캄캄하고 빽빽한 구름의 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하고 많은 백성이 쳐들어 온 것이기에 이들이 지나가고 난 자리는 불탄 것처럼 황무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마치 전에는 에덴동산 같았으나 후에는 황무하여 지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에서 피할 자가 없다는 것을 나팔을 불고 호각을 불어서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가 1장에서부터 계속 반복이 됩니다. 메뚜기 떼들이 덮치는 자연재앙과, 적군이 쳐들어오는 재앙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들은 최종적으로 여호와의 날이 임박한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다시 요엘서 4:4-11절을 봅니다. "봉독" 적이 쳐들어오는 정도가 아닙니다.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벼들이 빛을 잃게 되는 날입니다. 이 두려운 여호와의 날을 당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팔을 불어 경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출애굽기에서 보았듯이 시내산에서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신 그 두렵고 놀라운 하나님의 날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날에 대하여 성경 한곳을 더 봅니다.
스뱌냐 1:14-18절을 봅니다.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15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16 나팔을 불어 경고하며 견고한 성읍을 치며 높은 망대를 치는 날이로다 17 내가 사람들에게 고난을 내려 소경 같이 행하게 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또 그들의 피는 흘리워서 티끌 같이 되며 그들의 살은 분토 같이 될찌라 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날이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여호와께 범죄 한 세상에 대한 이러한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온 땅의 모든 거민이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날에는 금과 은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금과 은이면,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어제 국민은행에 잠시 다녀왔는데 어느 한 창구에 줄이 길게 서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로또 복권을 산다고 줄을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당첨이 되어 수 백 억원을 받으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저도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죄 짓는 일 외에는 달리 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이나 은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건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 요엘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큰 나팔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경고의 나팔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고의 나팔소리가 들린다면, 듣고서 회개하는 자들이라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방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크고 두려운 심판의 날을 자기가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에스겔서 33장에서 파수꾼이 적이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지 않으면 파수꾼이 그 피 값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성안에 사람이 죽으면 죽은 사람은 자기 죄로 죽지만 그 피 값을 파수꾼에게 찾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나팔의 기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팔을 불기는커녕 나팔을 부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인 것입니다. 오히려 거짓 평안을 좋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소리를 좋아합니까? 나의 귀를 즐겁게 하여주는 거짓 평안의 말이 좋습니까? 아니면 쓰리고 아플지라도 경고의 나팔소리가 좋습니까? 오늘날 교회라 세상에 대하여 나팔소리가 되고 있습니까? 교회라고 하면 꼭 자신을 빼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몸 된 교회라면 이 세상에 대하여 빛과 소금입니다. 이것은 단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 세상사람 들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세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 언약의 나라를, 아들의 나라, 그 피로 이루신 나라를 사모하는 백성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에 성령이 임한 백성의 특징의 결론부분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0:7절입니다.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계시록 8장에서 천사들이 일곱 나팔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례대로 불게 되는데 마지막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게 되면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팔소리가 들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비밀이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 11:15-18절입니다. "봉독" 이 나팔소리를 들으시고 이 언약의 말씀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요엘서 2:12-17 마음을 찢고 2003. 2. 12
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찌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14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 15 ??너희는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고하고 16 백성을 모아 그 회를 거룩케 하고 장로를 모으며 소아와 젖먹는 자를 모으며 신랑을 그 방에서 나오게 하며 신부도 그 골방에서 나오게 하고 17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들은 낭실과 단 사이에서 울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소서 주의 기업으로 욕되게 하여 3)열국들로 그들을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말하게 하겠나이까 할찌어다
기다리던 구원의 날이 기쁨의 날이 아니라 심판이 날이 될 수 있음을 선지자들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야곱의 집에 대하여,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주님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형식의 금식이나 제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옷을 찢습니까? 슬픔과 회개의 표시입니다. 슬퍼하는 경우는 야곱이 아들들이 요셉을 팔아먹고서는 요셉의 옷을 가져와서 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으로 위장하였을 때 야곱이 옷을 찢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퍼도 옷을 찢지 말아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에 보시면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의 명하지 아니한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이 죽어 버립니다. 그 때에 모세가 아론과 그 다른 아들들에게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라고 합니다. 아들이 죽었다고 옷을 찢고 슬퍼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다른 불로 분향하는 두 아들이 죽었기에 슬퍼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린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 다르게 옷을 찢는 경우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백성들 앞에서 옷을 찢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옷을 찢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옷을 찢지 아니한다고 책망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36장에서 여호야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데도 옷을 찢기는커녕 오히려 두루마리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오려서 화롯불에 던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옷을 찢는 다는 것은 슬픔을 표시하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경우에 옷을 찢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옷을 찢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미 옷을 찢는 행위가 형식화 되었고 하나의 관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상가에 가면 의례적으로 곡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눈물이 나지 않는데도 소리로만 곡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식이 되어버리면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이 무슨 회개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옷은 찢을 수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찢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사람의 전인격적인 자리로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증거한대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멀도다. 한 것처럼 말로만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것이라고 창세기에서 이미 증거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인 선함에 관한 환상을 깨어 부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 나도 몰라' 이것이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마음을 사람들이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당 같은 곳을 가보면 벽에 '마음 다스리는 글' 같은 것이 걸려 있습니다. 읽어보면 좋은 말입니다. 화를 내지 말고, 너그럽게 마음을 먹고 참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들이 막상 화가 나는 일이 닥치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여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하여 수행을 하고 고행을 하고 산속암자로 간다고 하여도 마음을 잡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마음을 어떻게 찢으라는 것입니까? 옷이야 사람이 찢을 수 있지만 어떻게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결국 마음을 찢는 일이란 사람에게서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기 있다면 그것은 정말 주님께서 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15-16절입니다. "봉독" 시온에서 나팔을 불어 거룩한 금식 일을 정하고 성회를 모으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나팔을 부는 것은 경보를 울리기 위해서 이지만 오늘 나팔을 불라는 것은 성회를 소집하기 위하여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백성 모두를 불러 모으라는 것입니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 모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랑 신부도 불러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결혼한 남자는 군대소집도 면제되고 일년간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다른 의무들에서 해방이 되는데 그러나 마음을 찢는 일에는 신랑신부도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아 놓고서는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전 앞에서 울면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봉독" 울면서 회개하는 모습보다 사실은 그 호소하는 내용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주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입니다. 둘째는, 주의 기업이 욕을 당하지 않도록 다른 나라들이 관할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셋째로, 이방인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게 하겠나이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 호소하기를 긍휼이 여겨주옵소서입니다. 우리는 진멸당하여도 마땅하오나 그렇게 되면 주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언약으로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모습들이 참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간간히 구약에서 모습을 보입니다만 그러나 대부분 일시적이요 제대로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나팔을 불면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고 쫒아 내고 죽여 버린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간 자세는 다시 13절을 봅니다. "봉독"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온 자들은 결단코 자기들의 의나 행함이나 공로를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주님께서 은혜와 자비와 오래 참으심과 인애를 기대하고 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철저하게 회개하고 애통하고 나온다고 하여도 그러한 사람이 회개가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혹시"라고 말씀합니다. 회개 하였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자동으로 용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용서마저도 주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받으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제사를 드리게 하시는 것은 역시 하나님의 뜻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알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으라고 하시고서는 그 마음을 찢고 돌아올 자가 인간에게서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실 자를 하나님께서 또다시 보내시겠다는 약속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에 의하여 예언이 되어 있습니다.
말라기 4:5-6절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요엘서에서도 예언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는 날입니다. 그 날이 크고 두려운 날이 되는데 그러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찢는다는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로 그 땅을 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선지자 엘리야를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6-17절을 봅니다.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사가랴 제사장이 성전에서 수종들 때 계시를 받은 내용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러한 사역을 하리라고 합니다. 이 아이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요한을 오리라고 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9-13절입니다.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13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세례 요한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애통하는 것이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이 완성된 이 시대의 복이란 참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백성에게로 돌이키고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는 화목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애통하면서 주님께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이 완성된 이 시대의 복이란 참으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그 마음이 돌아서는 것이 복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에 주님 외에는 다른 소망이 없는 것을 알고서 애통해 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면 천국이 이러한 자들의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오늘 우리는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와 있는 자들입니까? 마태복음 5:1-12절을 봅니다. "봉독" 이러한 복을 구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연인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로 마음이 돌아온 자들만이 구할 수 있는 복입니다. 이러한 복을 구하는 자들이 주님께로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온 자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복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이 마음을 찢고 주님께로 돌아온 자임을 아시고, 또한 이러한 복들이 희미하여 진다면 또다시 마음을 찢는 일들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원합니다.
요엘 2:28-32 말일에 2003. 2. 26
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5)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2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큰일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주간을 살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크다고 하시는 일보다는 내가 크다고 하는 일들이 여전히 커 보이지 않았습니까? 나의 일이 커 보이고, 세상의 일이 커 보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크게 보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하나님만이 크게 보이도록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서 예언한 말일에 관한 일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신' 또는 '성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약에서는 주로 '성령'으로 나타냅니다. 단어의 뜻은 호흡, 생기, 기운, 바람 등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숨길, 하나님의 호흡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처럼, 말일에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는 것은 임재의 차원보다 사역의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하다가 그 사역이 끝나면 하나님의 신도 떠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아무에게나 임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1:24-29절입니다. "24 ??모세가 나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백성에게 고하고 백성의 장로 칠십인을 모아 장막에 둘러 세우매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26 ??그 녹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에 머물고 회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신이 임하였으므로 진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더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가로되 내 주 모세여 금하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0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진중으로 돌아왔더라" 칠십인중에 여호와의 회막앞에 나오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한 것을 여호수아가 금하라고 하자 모세는 모든 백성이 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37장에서도 에스겔 선지자가 마른 뼈만 가득한 골짜기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하니 마른 뼈들이 서로 서로 연결이 되고 힘줄과 살과 가죽이 덮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기에게 대언하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곧 살아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에스겔 37:13-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의 신을 자기 백성의 속에 두어서 살게 하시는 것이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내용입니다. 이것이 말일에 일어날 일입니다.
이 말일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구원의 날이며 동시에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 자기들의 종교성을 바탕으로 낙관적으로 기다리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선지자들이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사도행전 2:17-21절을 봅니다. "봉독" 요엘서의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그런데 단어 두개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단어가 '말세에' 와 '주'라는 단어입니다. 요엘서의 본문에서는 '그 후에' 와 '여호와'를 '말세에' 와 '주'로 바꾸어 사용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렇게 인용한 것은 요엘서의 그 후에 라는 것이 바로 지금이며 지금 성령이 임하신 것이 말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물론 구약에서 여호와를 주로 불렀지만 지금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일인 것입니다.
다시 요엘서 본문을 봅니다. 28절에서 하나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만민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종과 여종에 부어주신다고 하십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특별한 자들에게 임하였지만 그러나 이제 말일에는 모든 육체에게 남녀노소 신분의 차이도 없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들에게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면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늙은이가 꿈을 꾸고 젊은이가 이상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이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의 장래일과 꿈과 비전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큰일에 대한 장래 일이면 꿈이며 이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은 바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것입니다. 그 날에 대하여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전서 1:10-12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고 천사들조차 살펴보기를 원한 내용이 말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음성으로 꿈으로 환상으로 말씀하셨으나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무슨 환상과 장래일과 비전을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지금도 자기들의 평소의 꿈과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비전을 이야기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약속한 성령의 부어주심을 입고서는 무엇을 증거 한 것입니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세에 나타난 여호와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장래 일과 꿈과 이상은 성경에 다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세계에 최종적으로 확정되는 날이 주님의 재림의 날이 되겠지만 이미 이 복음이 증거 되고 있는 것이 말세라는 증거입니다.
히브리서 1:1-3절을 봅니다.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다시 요엘서 본문을 봅니다. 2:30-31절입니다. "30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말일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에 이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아직 성취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징조는 얼마든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당면한 현실을 말하면서 궁극적인 내용을 함께 보는 것처럼, 최후의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의 임하심의 사건을 함께 보는 것입니다. 멀리서 보면 겹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관념으로 말세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약속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이 이미 말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을 말일로 보는 자들은 지금 눈에 보이는 땅과 하늘을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나라를 믿고 살 것입니다.
베드로전서1:18-21절입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1)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말세를 알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과 소망이 없어지고 썩어질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있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말일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입니다.
그러면 이 땅과 하늘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면 전쟁이요 심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살았던 땅과 하늘이 흔들리고 요동할 것이면 결국에는 불에 녹아져 내릴 것입니다. 하늘이 마치 종이축이 말리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게 될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모두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만 크게 보이고, 눈에 보이는 일들만 크게 여기고 살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누가 하나님의 진노와 두려운 심판을 믿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요엘 선지자의 말씀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와 심판의 날이 이르렀는데 누구의 진노입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만이 아니라 어린 양의 진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어린양의 진노는 생소한 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가 하면 오직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피가 발린 집은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날에 오직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많은 능력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에게는 일말의 기대도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자신의 명예, 자존심, 자기의 가문, 자신의 신분 지위 등을 귀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도 자기의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일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심령이란 자기가 행하는 것은 죄 뿐임을 알고,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알기에 주님의 이름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는 사람이 바로 말일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성령이 임한 자이며 32절처럼 남은 자요, 주님의 부름을 입은 자입니다.
요엘 3:1-8 국문(鞠問) 2003. 3. 5
1 그 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2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3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취하고 동남으로 기생을 바꾸며 동녀로 술을 바꾸어 마셨음이니라 4 두로와 시돈과 블레셋 사방아 너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가 내게 보복하겠느냐 만일 내게 보복하면 너희의 보복하는 것을 내가 속속히 너희 머리에 돌리리니 5 곧 너희가 내 은과 금을 취하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궁으로 가져갔으며 6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7 보라 내가 그들을 너희가 팔아 이르게 한 곳에서 일으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행한 것을 너희 머리에 돌려서 8 너희 자녀를 유다 자손의 손에 팔리니 그들은 다시 먼 나라 스바 사람에게 팔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지난주에 요엘서 2장을 통하여 말일에 되어질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말일에 성신을 부어주심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와 동시에 땅과 하늘의 징조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온 세계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며 이러한 심판 가운데 주의 백성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말일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심판의 내용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심판의 대상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인지가 점검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심판의 대상으로 알게 된다면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백성이라면 그러한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이 마침내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과 세계의 다른 민족들을 벌하신다는 것, 이 두 가지 주제가 여기서 한데 어우러져 나타납니다.
1-2절을 봅니다. 1절에서 구원이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것이며, 2절에서 심판이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을 헤친 이방민족들을 국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국문이라고 하는 단어는 임금님이 친히 죄인을 심문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친국이라고 합니다. 사극에서 보면 임금님을 모함하거나 세자를 모함하거나 하는 경우에 엄청난 고문을 하면서 자백하게 만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때로는 모함에 의한 반역죄를 자백하게 하는 고문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면서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임금이 친히 나와서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국문이요 친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백하라고 국문하시지 않으셔도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입으로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누가 무슨 변명이 필요하며 증거가 필요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것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4:10-12절입니다.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ㄱ)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1)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이렇게 모든 무릎이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자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송사하지 않아도 스스로 직고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국문하시는 것입니까? 2절에 보시면 여호사밧 골짜기입니다. 역대 하 20:1-30절에 보시면 유다 왕 여호사밧 때에 암몬과 모압과 세일이 연합하여 유다를 치러 올라옵니다. 이때 여호사밧 왕이 기도합니다. 온 백성들로 금식하게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아브라함의 언약을 말하며 기도합니다. 그러자 연합군이 서로서로 치게 되어 다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하였다고 해서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합니다.
5-13절의 기도의 내용만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언약과 성전을 향한 언약을 따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에 애굽에서 나올 때 그들을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멸하지 아니하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공격하오니 보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기업에 쫓아내고자 하는 저들을 인하여 여호와만 바라봅니다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에 응답하심으로 적들을 서로 치게 하여 모두 죽게 만드십니다.
이러한 배경을 따라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국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판결골짜기라고 합니다. 3:14절에서 판결골짜기라고 합니다. 이곳에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사밧 이라는 말자체가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열국을 모아 국문하시는 장소가 여호사밧이라고 하여 지금도 지역적인 그 장소에서 심판하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장차 온 세계와 열방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우시는 하나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국문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본문에서 몇 가지로 나타납니다. 2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어버리고 하나님의 땅을 나누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과 기업으로 삼으셨기에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국이 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어버리고 그 땅을 나누어 버린 것은 여호와를 대적한 것입니다.
3절과 6절에서는 자기 백성을 제비 뽑아 취하여서는 동남으로 기생을 바꾸고 동녀로 술을 바꾸어 마시고, 노예로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한 것입니다. 고대전쟁에서 수많은 전리품 중의 하나가 전쟁포로들입니다. 그러니 적들이 쳐들어와서 많은 포로로 잡아가서 노예시장에 팔아서 자기들의 쾌락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에 대한 모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고대전쟁이란 신들의 전쟁으로 보기에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는 자기들의 신이 이긴 것으로 여기기에 그 백성들을 학대하고 팔고 죽임을 통하여 그 나라의 신까지 모독을 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금과 은을 취하여서는 그들의 신궁에 가져간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외국에서 쳐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과 은을 취하여 갈뿐 아니라 바벨론 같은 나라는 성전의 금과 은의 그릇까지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를 빼앗아 간 것을 여호와께서 나의 금과 은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의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략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의 나라들은 하나님의 몽둥이와 채찍으로 사용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구들인 열방이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이 잘나서, 자기들의 신이 능력이 있어서 이스라엘을 이긴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교만을 그대로 두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국문을 하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차원입니다. 이스라엘에 계시하신 여호와 외에는 달리 다른 신이 없음을 알리시는 차원에서 자기 백성들이라고 하여도 범죄 하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방의 교만도 함께 심판하심으로 여호와만이 홀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지만 선지자의 예언대로 70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복이 부분적이고 모형입니다. 장차 모든 열방에서 주의 택한 백성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이 때는 단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전 세계적인 하나님의 국문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국문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엘서의 예언은 하나님의 기업, 하나님의 백성을 헤친 자들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의 간구처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기업을 침략하러 온 적들에 대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도 지금의 혈통적인 유대인들이나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기준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일부에서는 그렇게 보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새 언약이 완성된 상태에서 혈통적인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종말에 회개하고 돌아올 자들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움직임이 계시가 아니라 성경에서 약속된 것이 전부인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어떻게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여호사밧의 기도에서 보았듯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기업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성경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성경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브라함을 따라서 이방인이 받을 복입니다.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에게 자동적으로 하늘나라의 기업에 상속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16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으며,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3;1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백성과 기업됨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세와 태도가 어떠한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국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것은 곧 주님을 대접한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것이 단지 이스라엘의 국가나 백성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공격한 것으로 보시듯이 오늘날 예수 믿는 아주 미미한 한 사람을 공격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을 때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심판을 스스로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1:28-30절입니다.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러면 무엇까지 심판을 받겠습니까? 말과 행동과 마음의 생각까지입니다. 그러나 이미 심판을 받은 자는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에 이르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죄인인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회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백하면 용서하시는데 자백이란 자기가 아는 죄만 죄로 여기지 모르는 것을 어떻게 자백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자 만이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란 목록을 정하여하는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지은 죄들도 있는데 그것을 자백하지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아래 들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과 골수와 관절을 찔러 쪼개기까지 하시면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어떠함을 드러내시면서 갈라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괴로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지난주 주일 오후에 이사야서 30장처럼 백성들이 진리를 말하지 말고 거짓말로 아첨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말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아플지라도 바른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회개하는 것이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말씀 앞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국문을 받고서 회개하는 자리가 성도에게는 심판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친국(親鞫) 앞에서, 우리 의가 없기에 주님만을 사모하게 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엘서 3:9-17 피난처 2003. 3. 12
9 ??너희는 열국에 이렇게 광포할찌어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무사로 다 가까이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찌어다 10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찌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찌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찌어다 11 사면의 열국아 너희는 속히 와서 모일찌어다 여호와여 주의 용사들로 그리로 내려오게 하옵소서 12 열국은 동하여 여호사밧 골짜기로 올라올찌어다 내가 거기 앉아서 사면의 열국을 다 심판하리로다 13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찌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 14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16 나 여호와가 시온에서 부르짖고 예루살렘에서 목소리를 발하리니 하늘과 땅이 진동되리로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내 백성의 피난처, 이스라엘 자손의 산성이 되리로다 17 그런즉 너희가 나는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
지난주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친국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친국은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시행되는데 이것은 이제 문자적인 장소가 아니라 그 의미를 따라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온 세상이 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위임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님의 친국 앞에서는 어떠한 위장과 변명이 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이실직고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1;13-16절입니다. "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계시를 받을 때 그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지상에 계실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영광 중에 계시고, 심판주로 계시는 모습입니다. 그 눈이 불꽃같은 분 앞에서 무엇을 숨길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계시록의 일곱 교회의 모든 일들을 다 아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곱 교회는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다 망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떻게 하는지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수고와 행위를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잘하는 일과 잘못하는 일을 모두 다 아십니다. 사람의 마음과 뜻을 다 아십니다. 심지어 주님의 보좌에 있는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가 있는데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4:8). 이 눈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살피는 것입니다. 5:6절에서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합니다. 온 땅을 감찰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의 머리털조차도 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주님 앞에서 산다는 것을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의 신앙은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누구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을 알면 알수록 두렵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모든 것을 아시기에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데 무엇을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집의 열쇄를 맡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모든 삶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하니 모든 삶을 내가 주장하고 붙들고 가려고 하니 피곤하고 힘 드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심판하실 주님을 믿고 삽시다.
그러면 주님의 심판과 그 피난처가 어떠한지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전체를 통하여 무엇을 심판하시는지 어떻게 심판하시는지 그리고 그 피난처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엘서3:9절을 보시면, 열국에 광포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광포하라고 합니까? 11절까지 보시면 전쟁을 준비하고 모이라는 것입니다. 열국이 서로 격려하면서 농기구들을 전쟁무기로 만들어 다 모여서 올라오라는 것입니다. 약한 자도 나는 강하다 하면서 전쟁하기 위하여 모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전쟁하기 위하여 모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치기위하여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3:1-8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의 친국이란 자기 백성을 친자들에 대하여 친국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을 하도록 하시는 것은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전쟁의 처음 약속은 창세기 3:15절에서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뱀의 후손이 먼저 공격을 합니다. 그러면 공격을 당하는 순간에 반격을 하는 것입니다. 공격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지 아니하심은 왜 입니까? 여인의 후손을 공격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이 누구의 손아귀에 놀아났는가를 드러내시는 차원에서 먼저 공격을 당하시고 나서 그들의 머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종교와 정치 경제적인 힘들이 다 모여서 합동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적인지를 드러내시고서 적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이 싸움이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함으로 징계하기 위하여 적군이 쳐들어오는 경우가 많지만 그러나 그 쳐들어온 나라들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을 모독하므로 결국은 심판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이러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싸움이 있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말을 따르는 자들은 소수이고 거짓 선지자를 따르는 자들은 다수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전쟁과 심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에서 모든 나라들에게 전쟁을 하기위하여 모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덤벼 보아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하여 도전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고 용사들만이 아니라 약한 자라도 스스로 강하다하고서 온 세상이 힘을 합하여 덤비라는 것입니다. 아주 점잖은 사람이 어지간한 시비에도 참습니다. 그러나 참다가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너희들 다 덤벼라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무시한 이 세상에 대하여 다 덤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쟁이 에스겔서 38-39장입니다. 열국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친 열국은 심판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39:21-29절입니다. "21 ??내가 내 영광을 열국 중에 나타내어 열국으로 나의 행한 심판과 내가 그 위에 나타낸 권능을 보게 하리니 22 그 날 이후에 이스라엘 족속은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겠고 23 열국은 이스라엘 족속이 그 죄악으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던줄 알찌라 그들이 내게 범죄하였으므로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고 그들을 그 대적의 손에 붙여 다 칼에 엎드러지게 하였으되 24 내가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범죄한대로 행하여 그들에게 내 얼굴을 가리웠었느니라 2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찌라 26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 27 곧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내어 열국 목전에서 그들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에라 28 전에는 내가 그들로 사로잡혀 열국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토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29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우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신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러한 전쟁에 대하여 스가랴 14장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14:1-21절 "봉독" 에스겔서 38-39장과 같은 내용입니다. 오늘 요엘서와도 같은 내용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불러서 자기 백성을 치게 하시지만 결국 이러한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적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을 친자들이 당하는 재앙이 어떠한지를 12절에서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에는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울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이후에 유다를 치러온 자들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경배하러 오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열국 중에서 택한 자들이 여호와를 경배할게 될 것인데 그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요엘서를 봅니다. 3:11절에 보시면 열국이 여호와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나는데 그러나 그때에 주의 용사들도 그곳으로 내려오게 하옵소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용사들이 나와서 그곳에서 심판을 행하는 것입니다. 12-13절에서 여호사밧 골짜기에서 심판을 하시는데 여호와께서 열국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은 마치 다 익은 곡식과 포도를 거두어들이듯이 낫으로 베어들이고 포도를 따서 포도주 틀에 가득 넘치게 넣고 밟는 것처럼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이 큼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자기의 이름과 거룩과 영광을 지키기 위한 전쟁인 것입니다. 이렇게 온 열방이 여호와를 대적하기 위하여 일어나는데 에스겔서, 요엘서, 스가랴서에서 나타납니다. 결국 이러한 전쟁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온 세상이 요란하게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죽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잠시 동안이나 그들이 성공한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모든 전쟁은 확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어버리고 이겨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 백성들을 다 찾아내시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온 세상을 미혹한 자들을 다 모아서 영원한 불에 던져 버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19:11-21절입니다. "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1)말씀이라 칭하더라 14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17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18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19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2)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21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에스겔, 스가랴, 요엘서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전쟁을 합니까? 백마 타신 분이 하십니다. 전에는 나귀새끼 타고 오신 분이 이제 백마타신 분이되십니다. 이것이 최후의 전쟁입니다.
세상은 지금도 이 전쟁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여 오늘도 인간의 독립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고자하는 이 세상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북한을 공격하려는 전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쟁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을 가진 사람은 이세상의 힘을 피난처로 삼지 아니합니다.
요엘서 3:14-17절의 말씀처럼 온 땅과 하늘이 다 진동하는데 어디가 피난처이겠습니까? 오직 여호와만, 그가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요엘서 3:18-21 그 날에 2003. 3. 19
18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19 그러나 애굽은 황무지가 되겠고 에돔은 황무한 들이 되리니 이는 그들이 유다 자손에게 강포를 행하여 무죄한 피를 그 땅에서 흘렸음이니라 20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21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 당한 것을 1)갚아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1)갚아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
요엘서의 끝입니다. 그동안 요엘서의 내용을 제목만이라고 한번 요약해봅니다. '깨어 울어라' '여호와의 날' '나팔을 불어라' '마음을 찢고' '하나님의 큰일' '말일에' '국문' '피난처'입니다. 성경의 단어 그대로를 제목으로 삼았기에 내용이 어느 정도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왜 깨어 울어야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구원의 날인데 그 날이 구원의 날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기에 나팔을 불어라는 것입니다. 안일하게 그날을 기다리다가는 구원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의 날이 될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마음을 찢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을 찢는, 근본적인 회개란 하나님께서 성신을 부어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일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큰 일이 말일에 나타났는데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의 임하심이 그 성취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을 사도들이 말일의 사건을 보는 것입니다. 말일이기에 여호와의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사도들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국문하실 것입니다. 그 국문 앞에서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피난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피난처에 대하여 지난주 보았습니다.
요엘서 3:14-17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판결골짜기에서 판결하시는 여호와의 날에 해와 달이 캄캄하며 하늘과 땅이 진동되는 무섭고 두려운 날입니다. 이 날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피난처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피난처를 찾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피난처를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은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너희의 지금 상태가 안전한 상태가 아니니 회개하라고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거하시며 자기 백성의 피난처가 되실 때에 그곳은 거룩한 곳이 되며, 그 곳에는 다시는 이방 사람이 통행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완전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지금의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피로 값을 주고 사신 주의 백성들입니다. 자기 피로 사신 백성들과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을 분리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날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 마지막 본문이 오늘 말씀에서 그러한 구분을 그 날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그날이란 이미 지금 시작된 날입니다. 지금이 말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엘서 18-21절을 봅니다. "봉독" 모든 것이 회복이 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과, 황무지가 되는 곳으로 구별이 됩니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언어라고 말합니다. 글로서 묘사하는 것이 한편의 그림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리고, 작은 산들이 적을 흘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적절하게 내려야만 과일들이 풍성하여지고 목초지가 풍성하여 짐승들이 풀을 먹고 젖을 많이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을 성경 몇 곳에서 찾아봅니다.
이사야11:1-9절을 봅니다. "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와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공의로 심판하시고 나면 그 때에 해함과 상함이 없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곳에는 물이 바다를 덮은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을 보시면 어떻습니까? 점점 더 이렇게 변하고 있습니까? 현재 이 땅에 해함과 상함이 없는 지상낙원이 되리라는 꿈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전쟁을 하지 않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여 지면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이 문자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서로 속이고 속고 사는 것입니다. 경쟁과 경쟁 속에서 뒤쳐지면 살아남기조차 힘이 드는 세상입니다. 마치 팽이를 돌리다가 가만히 두면 스러지듯이 스스로를 경쟁에 몰아붙이지 아니하면 죽을 것만 같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팽이를 계속 세게 쳐야 잘 돌아가듯이 온 세상이 서로 서로 팽이 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날마다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무엇으로 해함과 상함이 없는 세상을 인간들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까? 힘만 있으면 다 통하는 세상입니다. 유엔조차도 미국의 힘을 제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어린 양이 사자와 함께 뛰어 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이러한 예언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해함과 상함이 없이 늘 생명으로 충만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1-13절입니다.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4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1)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5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2)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8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12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작은 산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바닥을 칠 것이며 13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1절에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주와 젖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 영혼이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하게 영적인 내용을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취역시 인간의 애씀과 노력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때에는 이방에서도 나아올 것인데 결국 여호와를 인하여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치 비가 내리면 토지가 적셔져서 싹이 나고 열매가 맺듯이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2:17절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이사야에서 포도주와 젖을 값없이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포도주와 젖이 아니라 생명수입니다.
에스겔47:1-12절을 봅니다. "봉독" 성전에서 물이 스며 나와서 점점 불어나 강물이 되어 흐릅니다. 이 강물이 가는 곳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한계시록22:1-2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에서 생명수가 나오는 곳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 이사야의 예언이 더욱 구체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엘서의 그 날에 있을 예언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서 3:18-19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리고 작은 산이 젖을 흘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인하여 황무지가 된 곳에 물이 공급됨으로 모든 초목과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게 열리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과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성취차원에서 주어지기에 받는 자는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자는 그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심판의 상황은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애굽과 에돔처럼 유다의 무죄한 피를 흘린 자들에 대하여는 그 피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자들을 애굽과 에돔으로 대표하고 있지만 그러나 유다 안에서도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들을 애굽과 에돔처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무죄한 자들의 피에 대하여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5-36절입니다.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 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린 자들이 애굽과 에돔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이 예루살렘 한 복판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러므로 지금 온 세상에서 복음을 듣고 생명 안으로 들어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이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개념으로 보면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고, 미미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 한 장면으로 압축을 한다면 구원과 심판이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항상 단번에 이러한 날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한 선지자의 관점에서, 성경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생명의 역사와 심판의 역사가 지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고 현실입니다. 성경이 약속하고 그 약속한바가 실현되고 있는 진짜 현실에 눈이 뜨여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계속하여 가짜 현실에 현혹이 될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란 헛된 것을 믿고 살았던 것을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생명수의 풍성함이 만물을 새롭게 소생시킵니다. 포도즙과 젖이 흐르듯이 생수의 강이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그 생명수 강가에 살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그 날이 시작되었음을 말씀을 통하여 인식하고 생명 안에서 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