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이른 바 ‘사랑 장’이라고 불리는 13장의 내용을 기록하게 된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은사 이해와 남용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양한 성령의 선물을 교회를 유익하게 위하여 사용할 때(12:7), 사랑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사용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바로 13장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런데, 12:31에서 후반부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는 13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구절은 13장의 서론입니다.
흔히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에서 “더욱 큰 은사 = 제일 좋은 길 = 사랑”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킵니다. 그래서 사랑이 모든 은사들 중에서 가장 큰 은사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첫째로, “더욱 큰 은사”에서 “은사”는 단수(카리스마)가 아니라 복수(카리스마타)입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길”에서 “길”은 단수입니다. 그래서 문법적으로 “은사들”과 “길”은 동격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더욱 큰 은사”에서 이 은사들은 12:28에서 언급된 첫째, 둘째, 셋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 다른 은사들에 비해 더욱 큰 은사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22), “몸의 덜 귀히 여기는 지체”(23),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23),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24), “부족한 지체”(24)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제일 좋은 길”에서 “길(호도스)”은 일반적인 길, 도로의 뜻과 함께 삶의 방식, 행동 방식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사랑은 더욱 큰 은사나 제일 좋은 은사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은사들을 사용하는 방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사랑의 방식을 따라 은사들을 사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 첫 번째 문단(1-3)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직역: 만약 내가 사람들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하고,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나는 울리는 구리(놋쇠)나 뗑그렁 울리는 심벌즈가 된다.
여기서 바울은 먼저 방언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 두 종류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당시에 방언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천사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참조. 고후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방언의 은사를 받아, 방언으로 말할 때 사랑이 없다면, 그 방언의 은사는 울리는 구리나 심벌즈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구리나 심벌즈가 뗑그렁하고 내는 그 소리는 듣기에 좋은 소리가 아니라 시끄러운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즉 듣는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는 소리를 의미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 역시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울리는 것들에 비유를 한 것인데, 이 방언이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아무에게도 유익을 줄 수 없는 듣기 싫은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도구들은 이방의 컬트, 이방인들의 종교 예배에서 사용된 도구들인 것을 감안한다면,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는 방식으로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공허한 것임을 더욱 강조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방언을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의 방식을 따라 사용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14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 교회에서는 반드시 통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역 없이 방언을 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는 것이죠.
2절.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직역: 만약 내가 예언을 가지고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만약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으나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바울은 두 번째로 예언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과 동격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언은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는 말인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는 것과 또 이미 기록된 성경으로부터 신자들의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는 기능을 하는 은사입니다(14:3). 여기서 “비밀(뮈스테리온)”은 전에는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낸 바 된 것 즉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합니다(엡3:3-5, 골1:26-27, 고전2:6-8 참조). 또한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유대인들이 완악하게 된 것이나(롬11:25),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죽은 신자들이 순식간에 부활하게 되는 것(고전15:51) 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모든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지식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즉 표적의 기능을 하는 은사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이런 은사들이 있지만, 만약 자신이 제일 좋은 길 즉 사랑의 방식으로 이 은사들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이 은사들은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은사를 사용하는 바울 자신조차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절.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직역: 또 만약 내가 나의 모든 재산을 내어 주고(프소미소), 또 내 몸을 불태우기 위하여 넘겨주지만 사랑이 없다면,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바울은 세 번째로 구제하는 은사에 대해서 말합니다. 자신의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몸까지도 이웃을 위하여 포기하고 희생할 때, 제일 좋은 길 즉 사랑의 방식을 따라 하지 않는다면, 그 은사는 “오펠루마이” 즉 아무런 가치도 없고, 도움이 되지도 않고, 유익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 문단(4-7)
12:31 후반부에서 바울은 “제일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3:1-3에서 “사랑이 없다면”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은사를 사용하는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이,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이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은 온유한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덟째로,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아홉째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열째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열한째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모든 교회들)가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들을 사용할 때, 바로 이러한 사랑의 태도로 사용해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첫째와 둘째를 예를 들자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 주로 사도들, 선지자들, 교사들이 해당되겠죠, 사용할 때 -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의 계시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양육해야 합니다.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은 참으로 인내가 필요하고, 온유가 요구됩니다.
셋째, 넷째, 다섯째를 예를 들면, 내가 받지 못한 다른 사람이 받은 은사에 대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내가 받은 은사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기 위하여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자랑으로 인하여 “교만”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의 은사에 대한 경종이라고 봅니다.
여섯째 부분에서,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헬라어는 “아스케모네오”라는 동사인데, 이 단어는 “부적절하게 혹은 부끄럽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목적이나 경우에 맞지 않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했습니다(14:40). 예를 들어,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데, 교회에서 일어나 함부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부절적하고, 부끄러운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14:34-35).
일곱째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방언은 통역이 없다면, 결코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통역 없이 방언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덟째로,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어떤 신자들이 은사들을 사용할 때,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그로 인하여 교만하고, 또 그 은사를 적당하게 질서대로 사용하지 않을 때, 교회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며 사용할 때, 다른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하여 화를 유발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쉽사리 성내지 않고, 오히려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내지 않는 것은 처음에 말했던 오래 참는 것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아홉째, 열째, 역시 은사들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봉사할 때, 결코 악한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불의를 기뻐하지 말아야 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면서 그 은사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나 “장로”라는 은사를 받은 자가 교회에서 그 직임을 이용하여 악한 일을 행하고, 불의한 일을 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은사를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은사들을 사용할 때,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면서 사용할 것을 요청합니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모든 악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우리가 모인 교회는 많은 죄악의 열매를 나타낼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 필요하고, 주님께서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를 자라게 하고, 굳게 하실 것을 믿고,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 세 번째 문단(8-12)
이 마지막 문단은 은사들은 폐하고, 그칠 때가 있지만, 사랑은 영원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직역: 사랑은 결코 끝이 없다. 그러나 예언은 폐지될 것이다. 방언도 그칠 것이다. 지식도 폐지될 것이다.
“떨어진다”는 말은 헬라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했는데, 이 단어[피프토]는 “끝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사랑은 결코 끝이 나지 않는다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반면에,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지식의 은사는 끝이 나고, 폐지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교회을 위해 모든 시대마다 주시는 은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 당시까지는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이 은사를 중단시킬 것이라는 뜻입니다. 폐하여진다(“카타르게오”)는 말은 멸망하다, 끝이나다, 폐지된다(abolish, do away with)는 뜻입니다.
9-10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직역: 왜냐하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고, 또 우리가 부분적으로 예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지될 것이다.
9절은 “가르”로 시작되는데, 이는 이유 설명 부사절을 이끄는 접속사입니다. 즉 9절은 8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왜 예언과 지식이 폐지되며, 방언이 그치는가? 그 이유는 바울 당대의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온전한 것이 올 때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당대의 예언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예언이 다 부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올 것이다. 즉 온전한 지식, 온전한 비밀, 온전한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말은 미래의 어떤 한 순간에 온전한 지식과 비밀을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현재의 부분적으로 하던 예언이 종합되어 온전하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전체적인 기록이 완성됨으로써 하나님 말씀의 기록 계시(문서 계시)가 종결되는 때이다.> 그때에 바로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폐지되는 것이다.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은 자신이 어린이였을 때는 말하는 것과 깨닫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모두 어린아이와 같았고, 장성한 사람 즉 어른이 되었을 때는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말하거나 깨닫거나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 “어린아이”는 여전히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존재하는 시대를 말한다. 즉 어린아이가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은사들이 존재하던 시대는 어린아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비밀에 대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서, 장래의 소망에 대해서 여전히 부분적으로 알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장성한 사람”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폐지된 시대를 말하고, 온전한 것이 온 때를 말한다. 그때 교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릴 것이다. 즉 더 이상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하던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폐지될 것이다.
12절.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바울은 “이제”와 “그때”를 대조한다. “이제”는 “어린아이”를 말하고, “그때”는 “장성한 사람”을 말한다. “이제”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는 때를 말하고, “그때”는 온전한 것이 온 때를 말한다. “이제”는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한 때를 말한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거울, 놋 거울이었기 때문에 희미했다. “그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확실히 모든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안다는 것은 “온전하게 안다”는 뜻이다.
바울의 때는 “어린아이” = “이제” =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한 때” =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던 때” = “예언과 방언과 지식의 은사”가 존재하는 때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는 “장성한 사람” = “그때” = “얼굴과 얼굴을 보는 때” = “주께서 나를 아시는 때” = “온전한 것이 온 때” 즉 예언과 방언의 은사가 폐지되고 중단된 때이다.
■ 13장의 결론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직역: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개는 존재한다(메네이). 그러나 사랑이 이것들 중에 제일 크다.
여기서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을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소망”은 장래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에서 사랑이 제일 크다는 말로써 바울은 마무리를 할 때, 역시 은사들은 사랑을 통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 것입니다.
*글쓴 이/김영환 목사, 언양교회
*본 글에서 9-10절의 내용에 있는 < > 부분은 글쓴 이의 허락없이 수정 보충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