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소리가 무작정 듣기 좋은 것만은 아닌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나는 여전히 착하다는 말에 의연하지 못한가 보다. 방학을 맞은 아이들을 데리고 전철을 타고 서울까지 가서 동서울터미널에서 시댁이며 고향이기도 한 울진으로 향했다. 남편의 감리교육으로 아이 둘과 함께 한 나들이인 셈이다. 첫날은 장장 8시간 걸려 어두워진 다음에야 시댁에 도착해서 저녁 먹고 잠 자리에 드는 것으로 하루 해가 저물었다.
새벽 기도를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아침을 지어놓고 한참을 기다렸음직한 7시 반경에 겨우 장시간의 버스에 시달린 몸을 일으켰다. 화장실 창문으로 밝게 열린 하늘과 함께 아이 얼굴 보다 큰 해바라기가 한여름의 태양을 온몸으로 견디며 고개를 한껏 숙이고 알찬 결실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에서 막 깨어나오는 아이들을 재촉해 아침을 먹고 난 후 마당으로 내려섰다. 마당 한켠에 마련된 조그만 텃밭에는 상추, 쑥갓, 고추, 깻잎, 취나물 등등의 각종 채소의 싱싱함이 마음 가득 여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이곳 천안에서도 매미소리를 듣지만 생명을 잉태한 흙을 밟으며 감나무가 우거진 마당에서 듣는 매미소리는 한결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한바탕 비가 흩뿌리고 난 마당엔 먹거리인 씀바귀와 비듬나물 외에도 잡초들이 제 키를 한껏 키워가고 있었다. 마당의 흙이 쓸려나가 골이 패일까봐 가위로 풀들을 잘라내신 어머니의 마음씀이 걸려 호미를 버리고 맨손으로 풀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쏘옥 쏙 뿌리채 뽑혀나오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렸을 때 감자밭이며 고구마밭에 북을 주며 김을 매던 시절도 생각키고, 소꼴을 마련하기 위해 논두렁의 무성한 풀들을 낫으로 베어내고 난 뒤의 깨끗해진 논둑을 바라볼 때의 뿌듯함이 전해오는 듯도 싶었다. 잡초가 하나씩 뽑혀진 자리, 깨끗함을 보는 재미가 노동이 아닌 추억이 되어갔다.
어머니께선 뿌리에 딸려 올라오는 흙이 연신 아까우신지 그냥 두라신다. 좀 자라면 가위로 잘라두신단다. "근원을 뽑아내야 잡초도 한동안 나오지 않지요. 재미 있는데요." 라며 어머니의 염려를 누그러뜨린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수수대의 서걱임은 누군가 그리움의 옷자락을 끌고 살며시 내게 다가오는 듯이 연신 뒤를 돌아다보게 했다. 뒤돌아보면 아쉬움만이 그 자리를 가득 채우지만......
앞 마당을 돌아 뒤꼍으로 갔다. 뒷집의 담장이 높아 물빠짐이 좋지 못한 뒤꼍엔 음지식물인 이끼도 끼이고 잔풀들이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실지렁이와 민달팽이 작은 고등들이 제 터전을 잃을세라 더불어 요동친다. 도시의 포장된 도로에서 비온 뒤 마주치게 되는 지렁이는 오싹 소름이 돋게 하지만 제 땅을 터전으로 잡고 살아가는 흙에서는 지렁이도 무서움과 징그러움의 대상이 아닌 함께 해야할 생명체로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손으로 하는 작업이니 더딜 수 밖에 없지만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하지 않던가. 내 속에서 큰며느리는 역시 다르다는 어머니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은 아닌지 끊임없이 자문하며 아침 먹고 시작한 풀뽑기를 점심도 거르고 어어나갔다. 진정 재미로만 이 일을 하는지, 손톱이 아파오고 쪼그리고 앉은 다리도 서서히 저려오기 시작했다. 잡초뽑기에서도 성격이 드러난다. 급한 성격이신 어머니는 며느리가 풀을 뽑고 있으니 긴팔옷에 모자까지 쓰시고 나오셔서 풀을 잡아 뜯어시다가 "나는 못하겠다. 그만 두고 점심 먹고 수박 먹거라"며 들어가신다. 그러나 시작한 일이니 말끔하게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3시경에 물놀이 가자는 아이들의 성화에 풀뽑기를 그치고 냇가로 내달았다. 다리 아래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의 물놀이를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추억으로 넉넉함을 안겨주며 어린시절로 나를 돌려놓고 있었다. 요즘에야 수영복에 구명조끼까지 갖추고 수영하지만 , 내 어릴적엔 입은옷 그대로도 마냥 신나는 물놀이였다. 익지 않은 새파란 감이며 감자 따위를 시퍼렇게 깊은 소에 던져두고 일제히 다이빙해서 누가 먼저 건져내나 내기를 벌였던 아련한 추억이 어젯일이듯 생생하니 떠올랐다.
몇 시간씩을 물에서 나오지 않는 아이들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이 슬며시 부러웠다. 물에 들어갈 엄두도 못내고 그늘에 앉아 지난 시절을 회상하노라니...... 나도 어느새 40이 되었다니........마음은 10대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건만. 며느리와 손주들이 빠져 나간 빈 자리 어머니께선 낮잠을 한숨 주무시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