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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빛내림
우리에게 있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슈뢰딩거가 물리적 법칙을 근간으로 하여 생명현상을 해석하고자 했다면 50년 후의 린 마굴리스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관계를 통하여 생명에 접근한다. 그는 우선 생명의 자기 지속성에 관한 고민을 시작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생명관의 역사적 변천, 생명의 기원, 지구 생명체의 선조로써 박테리아의 역할을 다루었다. 또 공생에 의한 합병을 통해 박테리아는 원생생물로 진화를 하며 이후 동물, 균류, 식물로 까지 진화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생명체들이 상호간에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진화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생명이란 무엇일까? 이 쉽지 않은 질문에 대하여 고대인들은 생명을 신비한 현상이라고 여기고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단지 동물만이 아니라 우주 만물 하나하나에 살아 있는 내적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물활론이며 천체들 또한 저마다 내부에 무언가가 있어서 천체의 움직임을 주관하기 때문에 하늘을 지킨다고 여겼다.
또 이와 반대로 생명은 태엽으로 움직이는 장난감이며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장치일 뿐이라는 기계론도 있다. 물활론은 기계론이라는 철학으로 인해 사라져 갔다. 하지만 기계 장치는 우리의 자기의식과 자기 결정 능력을 설명해주지 못하며 또 자기생산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작가이자 철학자인 아서 케스틀러는 보다 큰 전체를 이루는 작은 생물들의 공존을 홀러키(holarchy)라고 불렀는데 지구상의 생물은 계층 분류적으로 창조된 별개의 계급 조직이 아니라 조합과 조정 그리고 재조합의 자기 유도적인 시너지 효과에 의해 창발된 홀러키이다. 러브록은 생명이 오늘날 우리가 생물이라고 부르는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층을 포함한 생물권 그 자체가 거대한 홀러키적인 생명체라고 표현했다.
서양 철학사에서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는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실체와 물질적 실체, 즉 사유와 연장(延長) 사이의 운명적인 분리를 제시했다. 그는 오직 인간만이 신의 성질을 나누어 가져 영혼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통을 느끼는 듯이 보이는 동물조차도 영혼이 없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했다. 데카르트의 이런 생각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물을 아무런 가책 없이 해부학적 생리학적 실험용으로 사용하였고 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전까지 신성시하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연을 분석하고 마구 해체하고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의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지식이 발달되었다. 하지만 자연의 생명체들이 인간의 필요에 의한 수단으로 전락하며 폐해가 심화되었다. 우리 모두는 생명에 관심을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명이 예정된 자극에 대한 기계적이고 자동적이며 결정된 반응 이상의 그 무엇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결코 뉴턴적 기계가 아니다. 다른 생물들은 열외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자만일 것이다.
생명의 특징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생명은 화학성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화학 물질들의 작용에 따라 구별된다. 생명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가깝다. 생명은 자신을 수선하고 유지하며 다시 만들고 자신을 능가한다. 생명은 자신을 질서 있게 조직하고 열과 무질서를 우주 공간으로 배출함으로써 우리의 대기를 화학 반응성이 높게 만들었다. 이는 운동하거나 에너지를 사용하는 모든 계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생명은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고 했다. 또 생명의 본질 중에 하나로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치스코 바렐라는 물질 대사에서 찾았다. 그들은 이것을 자기생산(autopoiesis)라고 불렀다. 자기 생산은 끊임없는 생명 화학과 에너지 흐름인 물질 대사로 말할 수 있다. 생명의 가장 중요하고도 놀라운 점은 모든 생물은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생명체는 지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웃 행성의 대기는 90퍼센트가 이산화탄소인 반면, 지구는 대기권의 이산화탄소 양이 겨우 0.03퍼센트에 불과하다. 만일 지구의 생물권이 이산화탄소를 소비하는 생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대기는 이웃 행성과 마찬가지로 이미 오래 전에 이산화탄소가 풍부한 수준에서 화학 평형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다른 분자와 반응할 수 있는 분자란 분자는 모두 이미 반응을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생산을 하는 지표면의 생물들의 활동으로 지구의 대기는 적어도 7억년 이상 동안 약 20퍼센트 수준의 산소가 유지되고 있었다. 또 적절한 반응으로 생물은 지표면을 식혀 태양에 의한 과열을 막고 일정온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구의 자기 항상성은 그 속에서 많은 기체를 교환하고 유전자를 교환하며, 성장하고 진화하는 생물의 집합적이고 창발적인 특성이다. 지구의 조절도 지구상에 거주하는 생물들 사이의 수십억 년에 걸친 상호 작용으로부터 진화한 것이다. 생물은 자기 완결적이고 자율적인 개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생물과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공동체이다.
베르나드스키는 생명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인식함으로써 생물학을 비롯한 다른 전통적인 학문 분야를 뛰어 넘어 연구의 폭을 자유롭게 넓혔다. 그는 생물권은 지구의 작용의 표명임과 동시에,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태양의 창조물에 가깝다. 지구상의 창조물들, 특히 인간을 태양의 아들로 여긴 고대의 종교적 직관은 그들을 단순히 덧없는 삶을 살다가는 창조물, 물질과 지구의 힘이 목적 없이 우연히 만들어낸 산물로 바라보는 견해보다 훨씬 더 진실에 가까웠다. 우리는 살아 있는 물체를 전체로서 파악하고, 비로써 태양의 빛 에너지가 축적되고 변화되는 특별하고도 유일무이한 영역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다윈이 모든 생물이 하나의 먼 조상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었듯이, 베르나드스키는 모든 생물이 물질적으로 통일된 장소, 즉 생물권에 살고 있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는 생물을 태양 에너지가 변환되는 범지구적인 현상으로 설명했다. 광합성을 통해 성장하는 광합성 세균, 조류, 식물의 예를 강조하는 그는 푸른 불꽃으로 표현되는 이들 살아 있는 물체들이 태양 에너지를 공급받아 확장해 나감으로써, 다른 생명들이 보다 복잡하고 분산되도록 하였음을 알았다. 러브룩은 자기 조절이 가능한 생물권을 가이아라고 불렀다. 지난 30억 년 간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온 지구의 평균 온도, 연소할 만큼 높은 산소 농도와 질식할 정도의 낮은 산소 농도 사이에서 7억 년 간 지탱해 온 지구 대기, 그리고 명백히 지속되어 온 해양으로부터의 해로운 염분 제거 등 이 모든 것들은 전체적인 생명의 조직화에서 나타나는 포유류와 비슷한 의도성을 나타낸다. 지구의 항상성은 무에서 생성된 것도, 외부의 신에 의해 창조된 것도 아닌, 평범한 생물에 의한 홀러키적인 결과이다.
지구가 처음 형성되었을 때는 생물이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빨리 회전하여 낮이 겨우 5시간 지속될 뿐이었다. 생물은 은생대 후반쯤 용암 같던 지표면이 충분히 냉각될 때쯤에 가서야 등장했다. 끊임없는 에너지와 환경 변화에 노출된 복잡한 탄소 화합물이 기름방울처럼 되어 결국 막으로 둘러싸인 세포로 되었다는 데는 과학자 대다수가 동의한다. 그러나 에너지와 물질들로부터 최초의 생명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뒤따르는 시기인 시생대(40~25억 년 전)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암석의 일부가 남아있는데 열이나 압력 변화를 겪지 않은 몇몇 시생대 암석에는 생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최초의 생명으로 탄생한 박테리아는 35억년 이상 계속 번성하고 진화해왔다. 지구환경과 생명의 역사는 박테리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테리아와 관련된 내용은 린 마굴리스의 저서 『마이크로 코스모스』에 자세히 나와 있다. 원시생명체인 박테리아가 35억 년 전인 태고대에 처음으로 지상에 출현하여 22억 년 전 진핵세포가 나타나기 까지 지구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지구는 태양의 강렬한 고온과 자외선에 노출되었고 원시 대기는 암모니아, 메탄, 수소가 주 구성원이었고 천둥과 번개는 늘 존재했다. 초기의 박테리아는 강렬한 태양의 자외선을 피해서 물밑이나 진흙탕 속에서 번식하였다. 이러한 세포들은 지하의 화학물질에 의존하여 생활하면서 발효라고 부르는 다양한 당분해 과정을 발전시켰다. 발효미생물 중 한 종류는 대기 중에 풍부한 질소를 고정하여 아미노산 등 유기화합물을 만들기도 했다. 미생물들은 먹이로 하던 천연의 화학물질이 줄어들면서 그 동안 먹지 않던 먹이를 찾아나서 새로운 물질대사 방식을 발전시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획득하는 능력을 갖는 미생물도 생겨났고, 약 22억 년 전에는 광합성 박테리아도 나타났다.
최초로 광합성을 할 수 있었던 박테리아는 수소기체 또는 황화수소를 이용했고 산소를 생산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광합성 미생물은 수소 공급원을 찾다가 물을 이용하게 되었다. 막대한 양의 물의 수소원자를 이용하게 되면서 초록색 광합성 미생물은 급속도로 확산되었지만 그와 함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것은 산소 오염으로 산소는 유기물과 강한 반응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물체에 유독했다. 산소는 효소, 단백질, 핵산, 비타민 등 세포의 성장과 번식에 필수불가결한 물질들과 쉽게 결합하여 산화시켜버린다. 이로 인해 많은 박테리아는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 중에서 산소를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대사를 갖는 박테리아가 생겨났다. 이런 산소호흡 방식은 생물계의 위기를 기회로 바꾼 기회가 되었으며 이로써 미생물은 땅속에서 지상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동물은 식물이나 균류보다 3억 년 전에 나타났다. 동물은 수중에서 발달하여 육상으로 진출해나갔다.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생명에 대한 이해를 동물 중심적으로 특히 인간 중심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의식과 같은 것은 인간만 있다고 생각을 한다. 이 부분은 서양 철학사에서 데카르트의 영향이 매우 컸다. 하지만 동물만 의식적인 게 아니라 모든 생물체, 모든 자기 생산 세포 역시 의식을 한다. 가장 단순한 의미에서의 의식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살기 위해 모든 생물은 자기 주위 환경을 감각하고 반응해야만 한다. 인간만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고 또 하등한 박테리아에서 고등한 인간으로의 진보라는 개념은 과대망상이다.
또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모든 생명은 죽는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생명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매우 낯선 사건이다. 처음부터 생명이 죽음을 맞은 것은 아니었다. 원핵생물은 원생생물로 진화를 하며 환경 위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성의 분화를 선택했다. 이 자기 생산이라는 독창성으로 동일한 상태에 머무는 것을 바꾼 성의 분화는 생명에게 죽음과 성을 가져 왔다. 이로써 생명체는 보다 다양한 유전정보를 가진 2세를 남길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은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하게 되었다. 캄브리아기의 박테리아와 원생생물은 DNA재조합, 광합성, 운동성, 지수 함수적인 성장을 이끄는 번식 등 생명의 진화와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지구 환경을 만들었다. 박테리아와의 공진화를 통하여 동식물은 진화를 해나갔다. 캄브리아기에 와서 동물은 서로 잡아먹기 시작하고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단단한 몸체가 진화되었다. 진화는 기계적 법칙이 아니라 민감하고 공생 발생적인 과정이 복합체이며, 부분적으로는 진화하는 생물 스스로의 선택과 작용의 결과이다.
균류는 식물이나 동물처럼 핵이 있는 진핵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식물처럼 단단한 세포벽이 있다. 하지만 식물의 세포벽이 섬유소인 셀룰로오스로 되어 있는 데 반해, 균류의 세포벽은 질소가 풍부한 탄수화물인 키틴으로 되어 있다. 균류는 식물이나 동물과 달리 배를 형성하지 않고, 포자라고 불리는 미세한 싹에서 자라난다. 축축한 곳에 닿으면 포자는 실 같은 균사를 만든다. 우리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음식물이나 가구나 책이나 옷을 못 쓰게 만들거나 포도주, 맥주의 알코올을 만들고, 빵을 부풀려 주는 곰팡이를 접한다. 또 숲에서 자라는 균류인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팽이버섯, 송이버섯 등은 식용으로 쓰인다. 생물의 역사는 균류와 다른 생물과의 공생의 역사이기도 하다.
식물의 조류 선조는 양분을 조달하는 균류가 아니었다면 육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오늘날 지구상의 생명들은 식물에 공생하고 있는 균에 의해 토양 속의 인이나 질소를 공급받고 있다. 이렇게 토양 속의 인이나 질소를 식물에게 공급해주는 균류가 없었다면 식물도 생존할 수 없었고 또 식물을 먹이의 근간으로 하는 동물 또한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균류는 생물권의 사체를 포함한 쓰레기 처리를 도맡아 한다. 이러한 균류의 덕분으로 지구의 생물권은 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공급받지만 몸의 구성물은 순환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식물이 지상에 자리 잡은 것은 4억 5천만 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다른 생명체들이 자리를 잡은 후에 나타난 것이다. 식물은 박테리아와 공진화를 하면서 육지에 적응해 갔다. 물에서 육지로 올라온 식물은 셀룰로오스로 리그닌을 만들면서 수직으로 자라 생물권을 지표면에서 삼차원 공간으로 확대시켰다. 사람들은 동물만 생각을 한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식물도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하여 생각을 하고 전략을 마련한다. 식물은 동물을 이용하여 자손을 퍼뜨리는데 이 동물을 이용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마련한다. 화려한 색이나 달콤한 꿀, 또 맛있는 과실 같은 것은 식물 자체에게는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두 동물을 유혹하여 이용하기 위한 방법들이다. 달리 말하면 동물들은 식물들의 유혹에 넘어가서 식물들이 원하는 대로 열심히 자손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이다. 꽃식물은 인간의 뇌도 언어 능력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우리의 것을 빌리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데 누가 더 뛰어난 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행위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두 권의 책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들에는 궁극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없다. 생명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없다. 단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생명의 특징들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계속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뿐이다. 생명은 생산하고 번식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산과 번식은 각 생명체 단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명은 균계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각각의 생물계들이 연맹한 네트워크이다. 모든 생명체는 네트워크 속에서 각 생명체를 초월한 존재들이다. 그 생명체들 전체가, 지구상의 생명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이다. 린 마굴리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적이며 독창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재능은 인간만이 지닌 것이 아니다. 인정하든 하지 않든, 우리는 생명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하나의 주제에 지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