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에 어렵사리 집을 마련한 오선생은 문간방에 세를 놓는다. 어느날 임신한 아내와 어린 두 남매를 거느린채 몇 점 세간만 가진 권기용씨가 이사를 온다. 그는 시위주동자였다는 이유로 감옥을 다녀온 뒤 경찰의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다. 출판사를 다니던 권씨는 직장을 그만둔 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채 공사판에 나가 막일을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홉켤레의 구두를 반짝반짝 윤이 나게 깨끗이 닦아 신고 다닌다...>
윤흥길의 단편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입니다. 이 소설을 읽은지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대학에 들어온 후 친구가 선물한 장편소설 ‘장마’를 읽은 후 그의 문체에 매료(魅了)돼 기왕에 나온 이 제목의 단편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1970년 중반의 경기도 성남을 무대로 한 이 작품은 고도성장의 그늘아래 살아가는 인간(人間)군상(群像)의 모습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지식인이자 소시민인 권씨의 아홉켤레 구두는 무너져가는 가장에게 남은 마지막 권위의 상징이요. 자존심을 뜻합니다.
대학시절 강렬한 인상을 남긴 그의 소설제목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2010년 9월 뉴욕의 한 매체가 보도한 기사를 볼 때였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10년이 넘게 단 두켤레의 구두를 신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정말 요즘 보기 드문 검소한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검약(儉約)해도 그렇지 10년이 넘는 세월을 구두 두켤레로 버틴다는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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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의 구두 두켤레 사내가 찢어지게 가난하기는 커녕, 억만장자(億萬長者)라고 한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공은 뉴욕시장 마이클 블룸버그입니다. 미국매체들이 툭하면 그이 앞에 ‘billionaire mayor(억만장자 시장)’이라고 하니 돈이 많기는 많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구두 두켤레로 버티고 있다니 왜일까요.
스투 로저 시장 대변인에 따르면 “블룸버그 시장이 일할 때 신는 구두는 단 두 켤레”라고 합니다. 시장에 재임기간인 지난 10년간 단 두 켤레의 구두로 모든 공식 업무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블룸버그 시장은 두 켤레 구두를 하루씩 교대로 신고 다닙니다. ‘짝홀제’ 구두라고 할까요. ^^ 하나는 클래식한 검정색 간편화이고 또 하나는 술이 달린 페니 로퍼 스타일입니다. 밑창이 닳으면 갈아서 신을망정 구두를 바꾼 적은 없다고 합니다.
구두의 브랜드를 추적(追跡)한 기자들에 따르면 검정색은 ‘콜 한(Cole Hahn)’, 페니 로퍼는 ‘데니(Dennehy) 로 추정됩니다. 이태리 제품인 데니는 소매가 328달러로 비싼 편이지만 10년이 넘게 신는다면 본전을 몇 배는 뽑은 셈입니다.
블룸버그의 구두가 화제를 모으면서 2009년 뉴욕추석대잔치에 블룸버그 시장이 참석해 뉴욕한인들과 만났을때의 취재 사진들을 살펴봤습니다. 지금 다시 봐도 사진속의 구두는 그리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정작 추석대잔치때 인상깊었던 것은 블룸버그 시장의 소탈함이었습니다. 물론 정치인인 그가 한인 유권자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보여줄 이유는 전혀 없으니 본디 성품이 어떠한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수많은 한인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돌면서 장터 음식을 맛보라는 얘기에 한 아주머니가 사용하던 포크로 떡볶이와 파전을 먹는가하면 손으로 갈비를 뜯어 먹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다시 구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
낡은 구두 두 켤레만 줄창 신는 시장님을 안쓰럽게 본 보좌진이 새 구두를 하나 사시라고 조언하면 블룸버그 시장은 “아직까지 쓸만한데 왜 사나?”고 대꾸한답니다.
물론 블룸버그 시장이 딱 두 켤레의 신발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골프를 좋아하니 골프화도 있고 운동화도 있습니다. 시장으로서 공식 업무를 볼 때 쓰는 ‘업무용 신발(work shoes)’이 두 켤레라는 뜻이니까요.
그렇다해도 블룸버그 시장의 검소함은 평가할만 합니다. 재산이 물경 180억 달러라는 그가 낡은 구두를 신는 모습에서 사치(奢侈)와 향락(享樂)을 일삼으며 탈세(脫稅) 등 불법을 자행하는 한국의 많은 부자들이 대비되는 까닭입니다.
그는 시장이 된 이래 월급을 사실상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규정상 월급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상징적으로 책정한 연봉이 1달러랍니다. 월급은 9센트정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재벌인 그에게 수십만 달러의 공식 연봉이 하찮을 수도 있지만 사재(私財)를 털어 시정(市政)을 돌보는 것 자체가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근검절약하고 월급도 마다해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아닙니다. 절약이 지나쳐 짠돌이 소리를 듣는 부자들은 한국에도 많이 있으니까요. 블룸버그가 보통의 부자들과 다른 이유는 바로 기부(寄附)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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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룸버그는 미국 부자들의 좋은 덕목(德目)인 기부를 비롯한 사회공헌에 힘쓰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지난 26일 뉴욕타임스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떴습니다.
‘$1.1 Billion in Thanks From Bloomberg to Johns Hopkins’
블룸버그가 모교인 존스 홉킨스대학에 최근 3억5000만달러(약 3800억원)을 희사하는 등 지난 40년간 기부한 금액이 11억달러(약 1조700억원)을 넘어섰다는 뉴스였습니다. 단일 대학에 10억달러 이상을 기부한 인사는 그가 최초라는 사실도 아울러 전해졌습니다.
블룸버그는 1964년 존스 홉킨스 전자공학과를 졸업하면서 모교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첫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기부액은 단돈 5달러. 지금보다 물가가 훨씬 쌌던 시절이지만 5달러는 많다고 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이후에도 그는 끊임없이 자선활동을 계속했고 비즈니스 성공으로 부가 늘어나는만큼 기부 액수 또한 커졌습니다.
그가 이번에 기부한 3억5천만 달러중 2억5천만달러는 존스홉킨스대학병원의 아동병동을 비롯, 보건의료, 학습과학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 지원되고 나머지 1억달러는 10년간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학부생 2600명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여집니다.
한 사람의 쾌척(快擲)이 이처럼 많은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블룸버그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기부대상은 실로 다양합니다. ‘불법총기와 싸우는 시장들’의 창설자인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총기규제운동을 널리 알리는데 주요한 자금원이었습니다.
지난해 그는 총기규제와 동성애자 권리 등의 홍보예산으로 1천만달러를 쏟아 부었습니다. 수질오염을 막기 위한 캠페인을 위해 330만 달러를 지원했고 지난 16일에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담배회사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건강문제르 공론화하는데 사재 600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1999년에만 4700만달러를 기부했고 2000년엔 총 1억달러를 기부했습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블룸버그 재단에 3억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갔습니다. 2008년엔 또다른 거물 자선사업가 빌 게이츠와 함께 5억 달러를 금연 사업과 개발 도상국 지원에 기부한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2011년에는 2억 7920만 달러를 기부, 세계 기부 순위 2위에 올랐습니다. 약정이 아닌 이미 낸 액수를 따지면 1위라고 하니 가히 기부의 제왕(帝王)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같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사람이 더 많이 기부하기에는 경제가 악화된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기부는 내게 책임이 아닌 특권입니다.”
블룸버그와 같이 훌륭한 부자, 참된 정치인이 있는 미국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청문회(聽聞會)가 두려워 손사래를 친다는 한국의 오염된 고위공직자 후보들, 각종 탈법, 불법 분탕질로 부를 세습하며 제왕적 권위를 누리는 재벌가들이 어느날 갑자기 개심하여 블룸버그 발바닥 근처라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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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블룸버그 시장은 구두 두켤레를 언제까지 신을까요. 최소한 몇 년은 더 보게 될 모양입니다. “광을 잘 내고 밑창을 8~9개월에 한번씩 갈면 수명이 20년은 간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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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블룸버그 시장 참 훌륭하신 분이로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아끼고 이웃을 위하여는 아끼지 않는
나를 위한 삶보다는 이웃을 위한 삶을 사는 시장님 존경스럽습니다.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이런 생활이 아닐까요?
이 장로님 뉴욕 시장님에 대한 기사 잘 보았습니다. 댓글이 늦어서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