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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성탄절...마누엘 2세 팔라이올로고스...
아나톨리아의 고지대 평원은... 병사와 식량의 주공급원이었다....
이제 외국 동맹군과 용병들 외에는 달리 의존할 데가 없었다.
내전이 한창이던 1347년에 들이닥친 흑사병으로 최소한 제국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비잔티움 학자들...대부분은...로마 교회와의 통합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340년경 테메트리오스 키도네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작품을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에 매료되었고, 따라서 이탈리아 학문도 무시할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이탈리아와 지적으로 깊은 교류를 원했고, 소망은 점차이루어졌다.
1396년의 니코폴리스 십자군(오스만의 술탄 바예지드 1세가 1395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자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가 주도한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바에지드 1세는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에서 이 십자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가했다.
마누엘은 교회통합을 반대했다. 그는 나름대로 진정한 종교적 확신이 있었고 그의 백성들이 절대 교회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누엘의 장남 요안네스 8세는 서방의 원조 없이 제국은 구조될 수 없다는 확신하에 선왕의 충고를 무시하고 로마 교회와의 통합을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라틴 사제들의 기량이 그리스 사제들보다 월등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했다. 라틴 사절단은 하나의 팀으로 훈련을 쌓은 고도의 숙련된 논쟁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비잔티움이 아닌 다른 정교회 국가의 지배자는 분명 교회통합을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동방정교회의 다른 나라 총대주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 거대한 반도(아나톨리아)는 로마 제국 시절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였다. 그많던 인구가 줄어든 것은 로마 제국의 쇠퇴, 그와 함께 찾아온 역병과 말라리아의 창궐, 그리고 7세기와 8세기의 페르시아와 아랍의 침략 때문이었다. 제국이 안정을 되찾은 것은 9세기가 되어서였다. 잘 짜여진 방위체제가 적의 급습 위험을 줄여주었다.
국경지역의 방어는 그곳의 호족, 곧 적군의 땅을 침입하거나 적군의 침입에 맞서 싸우는 일로 평생을 보낸 아크리타이(akritai, 비잔티움 시대의 국경 전투대)에게 맡겨졌다.
11세기 중반에는 그 힘이 제국 정부를 뒤흔들 정도였다. 한편 중앙정부는 아르메니아 국경의 북쪽까지 지배권을 가지려는 생각으로, 광대한 지역을 정식으로 편입시켰다. 그 결과 비잔티움의 세리(稅吏)와 성직자들은 국경호족과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원한이 결국 제국의 방어력을 약화시켰다.
(셀주크투르크는) 국경호족들에게 계속 기습을 하도록 부추겼다. 비잔티움은 아르메니아 최후의 독립 공국을 차지하는 것으로 그에 맞섰다. 하지만 제국 수비대는 기습을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제는 그들을 상대해줄 아르리타이도 없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071년 8월 19일 금요일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졌다(유명한 만지케르트 전투를 말한다. 여기서 이긴 셀주크투르크는 아나톨리아 지방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로마노스는 용맹스러웠으나 지략이 부족했다. 용병들 또한 믿을 게 못되었다. 그의 군대는 궤멸당했고, 로마노스는 생포되었다.
무슬림 국경호족들에게는 이슬람의 전사라는 뜻을 가진 가지라는 호칭을 주었다.
셀주크 왕조가 쇠퇴하면서 국경의 가지 족장들은 차츰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니케아 황제들이 아크리타이를 부활하여 국경 수비를 강화...비잔티움 제국의 1261년의 콘스탄티노플 수복(라틴 제국으로부터 수복)은 감격스러웠던 만큼이나 불리한 점도 있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잔티움은 유럽에 깊이 연루되어, 발칸 제국(諸國)뿐만 아니라 라틴 제국 몰락의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서방 국가들의 위협도 함께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아시아 주둔 군대는 철수했다. 해군의 긴축재정으로 해안 경비도 약화되었다. 지불할 것들이 새로 생겨나면서 제국 전역의 세금도 치솟았다. 아크리타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고 급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341년에는 요안네스 칸타쿠제노스와 어린 왕 요안네스 5세 섭정들 사이에 내전까지 일어났다. 요안네스 5세의 지지자들이 마니사와 아이딘에서 용병을 고용하자, 요안네스 칸타쿠제노스는 1344년에 딸 테오도라를 오르한과 혼인시켜 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술탄은 답례로 6000명의 전투병을 트라케로 파병했다. 칸타쿠제노스(요안네스 6세)는 왕위를 차지한 다으에도 오스만군을 계속 불러들여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이용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들 투르크군은 대부분 트라케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1355년 요안네스 6세 칸타쿠제노스가 실권하자 오르한은 극서을 유럽 침략의 구실로 이용했다. 1356년에는그의 아들 쉴레이만을 지휘관으로 한 투르크족 군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넜다. 그 군대는 그로부터 채 1년도 못 돼 코를루와 디디모테이코스(Didymoteichos,디디모티쿰Didymoticum)를 점령하고, 아드리아노플 점령을 위해 내륙을 압박했다....1362년...투르크족은 서트라케의 지배자 되었다.
비잔티움으로 귀국한 후인 1373년에는 술탄의 강요로 그를 지배자로 인정하고, 연공을 바칠 것과 요구할 때마다 군사원조를 제공한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들 마누엘까지 무라드의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세르비아는 1355년 스테판 두샨이 사망한 뒤 왕국이 둘로 갈라지기는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발칸 반도의 최강자로 군림했다. 불가리아는 1330년 벨부즈 전투에서 세르비아에 패한 상처에서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불가리아는 투르크족의 진군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남세르비아의 왕 부카신이 1371년 트라케 쪽으로 파견한 대군(7만)에 불가리아는 1개 부대만 보내주었을 뿐이다. 부카신은 투르크족을 견제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보잘것없는 장군이었다. 마리차 강변의 키르멘에서 세르비아군과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투르크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당한 것이다....이제는 세르비아의 전 왕국을 장악하고 있던 북세르비아의 왕 라자르 흐레벨랴노비치도 술탄의 가신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칸 제후국들에게 파견대를 보내줄것을 지시했다. 자존심 강한 세르비아인들은 그런 요구를 받자 심한 굴욕감을 느꼈다. 이에 라자르 국왕은 술탄과의 주군 - 봉신 관계까지 끊어버렸다. 그러나 투르크군이 신속한 공격으로 니시를 빼앗자 또다시 술탄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럭저럭 하는 사이 라자르 왕은 침략자에 대한 범발칸동맹을 획책하여, 138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토플리차 강변 전투에서 술탄 군대를 격파했다. 무라드는 즉각 복수전에 돌입했다. 먼저 불가리아로 신속하게 진격해 그 지역의 두 왕, 니르노보의 이반 시슈만과 비딘의 스라키미르에게 대부분의 땅을 빼앗았다. 그러고 나서 남세르비아로 건너가자, 그곳의 속국 군주 키우스텐딜의 콘스탄틴은 술탄에게 향응까지 베풀며 군대를 제공했다. 무라드는 그들을 이끌고 다시ㅏ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라자르 왕이 기다리고 있는 '검은 새들의 벌판', 즉 코스보(Kosovo) 벌판으로 향했다....투르크군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질서 정연하게 전투에 임했다. 그에 반해 기독교군은, 최초의 강력한 공격이 저지당하자,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병졸들 사이에서는 변절의 속삭임까지 흘러나왔다. 해질녘이 되자 투르크군의 승리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라자르 왕은 포로로 잡혀 무라드가 죽은 천막 안에서 살해되었다.
바예지드는 도나우 강 경계를 따라 지배권을 확립한 뒤 콘스탄티노플 쪽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탈리아 해상국들이 대함대를 조직중이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굉장할 거라는 소문과는 달리 비잔티움에 당도한 서방측 원군은 부시코 장군이 인솔해온 한 줌의 병력이 전부였다. 그들은 1년간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며 자신들 이름으로 된 성과는 내지 못했다....제국의 수도를 한 번 공격하기로 했다.
1395년 또다시 모습을 드러낸 티무르는 시바스까지 뚫고 들어가 주민들을 학살했다. 학살된 자 중에는 그곳 총독으로 있던 바예지드의 아들도 끼여 있었다....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포위를 고 군대를 아나톨리아로 이동시켰다. 티무르의 군대는 이미 시바스에 닿아 있었다. 결정적인 전투는 1402년 7월 25일 앙카라에서 벌어졌다....자기 위치를 꿋꿋이 지킨 부대는 스테판 휘하의 세르비아군밖에 없었다. 그는 술탄의 장남 쉴레이만과 쉴레이만의 형제 한 명을 구해내기까지 했다.
마누엘은 아들 요안네스 8셀의 힘에 눌려 있었다.
술탄의 베오그라드 공격(1440년) 공격이 무산되자 무라드 적들의 사기는 올라갔다. 피렌체 공의회의 성공으로 마음이 흡족해진 교황은 십자군을 조직했다. 헝가리의 울라슬로 1세(재위 1440~1444년) 왕도 열성적으로 그것을 환영했다. 세르비아 왕도 헝가리를 돕겠다고 나섰다. 술탄에게 선전포고를 한 사람은 스칸더르베그 라는 별칭을 가진 알바니아의 족장 제르지 카스티리오티(Gjergi Kastrioti, 카스트리오타Kastriota라도도 한다)였다. 카라만 족장도 부추김을 받아 아시아에서 술탄을 공격했다. 무라드가 카라만족을 제재하는라 정신이 없는 동안 동맹군을 거느린 헝가리군은 서출 왕족인 트란실바니아의 전사야노슈 휴냐디의 지휘 아래, 도나우 강을 건너 세르비아 땅에서 투르크군을 축축했다. 무라드 2세는 전력을 다해 유럽으로 돌아와 도나우 강 상류 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굳이 전투를 하려고는 들지 않았다. 울라슬로 왕도 비슷한 감정인 듯했다. 헝가리 군대는 교황의 특사 율리아노 체사리니가 지휘하는 교황의 서방 군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울라슬로 왕은 그보다 좀더 많은 것을 기대했다. 그와 무라드는 144
4년 6월 세게드(세게딘)에서 만나기로 합의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특히 무라드는 코란에, 울라슬로는 성서에 대고 10년간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 기간에는 어느 쪽도 도나우 강을 건너려 해서는 안 되었다. 휴전에 불만을 가진 후냐디는 그곳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라드 2세는 이제 그리도 고대하던 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경에서 군을 철수하고 자신의 양위 계획을 발표하기가 무섭게 헝가리 왕 울라슬로가 도나우 강을 거너 불가리아를 지나 진군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체사리니 추기경이 이교도와의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하자, 이때를 놓칠 새라 진군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 조약 위반은 투르크족에 못지않게 기독교인들에게도 충격이었다. 요안네스 8세 황제는 워조 제의를 거부했다. 세르비아의 브란코비치도 군대를 철수하고, 스칸더르베그의 동맹군 가담을 가로막았다. 후냐디는 마지못해 원정대를 뒤쫓아갔다. 하지만 그의 전략적 권고를 추기경은 묵살했다. 아타톨리아에서 은퇴를 대비해 신변을 정리하고 있던 무라드 2세는 군대를 이끌고 급히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1444년 11월 11일 바르나에서 기독교군 병력의 3배나 되는 병력으로 그들을 덮쳤다. 기독교군은 궤멸당했다. 울라슬로 왕과 추기경은 전사했다. 그 승리로 술탄은 도나우 강에 이르는 지역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1448년에는 후냐디(그때는 섭정이었다)가 헝가리, 왈라키아, 보헤미아, 독일 용병대를 이끌고 공격을 재개해왔다. 후냐디는 코소보 벌판에서 스칸더르베그와 만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스칸더르베그는 알바니아군과 만나기도 전에 투르크 대군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그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후냐디 자신도 독일과 보헤미아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쳤을 정도였다.
1446년에는 술탄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그러자 콘스탄티노스는 그 동안 요새로 복구시켜놓은 헥사밀리온으로 퇴각했다. 그러나 무라드는 중포를 가지고 왔고, 그것으로 2주간 줄기차게 공격을 퍼붓자 마침내 성벽은 무너졌다 콘스탄티노스와 토마스는 가까스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콘스탄티노스 군대 중, 특히 알바니아인 용병대는 충성심도 용기도 없었으며 현격한 전력 차이를 드러냈다. 술탄은 헥시밀리온 성벽을 또다시 파괴하고, 파트라스와 클라렌자로 진군하면서 가는 곳마다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런 후 그곳 전제군주들로부터 제후국과 연공 약속을 새로이 받아낸 뒤 군대를 철수했다.
귈베하르라는 이름의 노예 여성이 (왕자) 메메드의 아들 바예지드를 낳았다.
서방 기독교계는 베네치아와 부다페스트에서 들려오는 온화한 술탄에 대한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니코폴리스와 바르나에서 치욕을 당한 이후, 투르크족과 다시 싸우겠다고 나서는 서방 국가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레반트(Levant,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 아나톨리아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쪽에 관시믈 보이는 군주는, 오직 1443년에 나폴리 왕관을 차지한 아라곤의 알폰소 5세(재위 1416~1458년) 밖에 없었다.
...교황청조차 신임 술탄에 대해선 안심해도 좋다는 희망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교황에게는) 피렌체 공의회에서 황제가 서명한 동서 교회통합의 시행을 여전히거부하고 있는 도시(콘스탄티노플)에 원조해주고 싶은 마음 또한 별로 들지 않았다.
술탄이 루멜리 히사를 완공하자(즉 콘스탄티노플 점령 준비), 콘스탄티노스는 곧바로 서신을 통해 교회통합을 실행하겠다는 약속을 해왔기 때문이다.
1452년 12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는 황제와 조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한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문에서는 교황의 이름이 받들어 모셔졌고, 피렌체 공의회에서 결정된 동서 교회통합의 율령이 발표되었다....그리스인들은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성당으로 들어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교회통합을 받아들인 사제들에게만 예배가 허락되었다는 것이다.
술탄 함대의 규모...콘스탄티토플에 있었던 이탈리아 선원들이 남긴 자료를 보면, 3단 갤리선 6척, 2단 갤리선 10척, 노가 딸린 갤리선 약 15척, 푸스케(무게가 가벼운 긴 배) 약 75척, 파란다리아 20척, 그리고 통신이 주목적이었던 외돛배와 소형 범선이 여러 척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대 지휘관에는 불가리아 태생의 배교자(이슬라교로 개종한 기독교도) 쉴레이만 발토글구(Sulayman Baltoghlu)가 힘명되었다. 노잡이와 선원은 죄수와 노예들도 간간히 섞여있기는 했으나 대개는 후한 임근에 이끌려 자원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술탄은 육군보다는 함대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되리라는 생각에서 지휘관들 임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투르크측 자료에 따르면, 정규군 약8만 명에, 비정규군 바시 바조우크 2만명, 비전투 종군자 수천 명 정도로 나타난다.
대포는 수바르츠(Bethold Schwartz)라는 독일인 탁발 수도사가 화약의 추진력으로 포탄이 날아가는 기구를 제작한 이래(1354년)
1377년 베네치아인들은 제노바와 전쟁을 벌이며 해전에서 그 대포를 써보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배에는 육중한 전쟁 무기를 실을 수 없었고, 설사 실을 수 있었다 해도 배 안에서 쏘는 포탄은 약간의 타격만 입힐 뿐 배 한 척 침몰시키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약했다.
베네치아 원로원은 1453년 2월 19일 동방에서 날아온 가장 최근의 소식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각각 400명의 병사와 함께 2척의 군용 수송선을 콘스탄티노플로 즉시 보낸다는 것과,당시 재설비중이던 15척의 갤리선도 준비되는 대로 곧 보내겠다는 사항을 의결했다. 그후 닷새 뒤 베네치아 원로원은 이 소함대의 경비 충당을 위해 레반트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들에게 특별세를 징수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교황, 서방 황제들, 헝가리 왕과 아라곤 왕에게도 당장 원조를 하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서신을 전달했다. 하지만 3월 2일까지도 원로원은 여전히 편성에 대한 논의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알비소 롱고(Alviso Longo)를 지휘관으로 하고, 총지휘는 해군 총사령관 자코모 로레단(Giacomo Loredan)에게 맡긴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주일 뒤, 최대한도로 빠르게 행동할 것을 촉구하는 또 다른 결의안이 원로원에서 의결되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월 초, 다섯 척의 갤리선을 동방으로 보내겠다는 교황의 의지가 담긴 서신이 마침내 로마에 도착했다. 4월 10일자로 된 베네치아의 답장에는, 추기경들의 이러한 결정에 만족해하면서도 교황의 갤리선 임대료가 아직 체불중이라는 사실도 함께 적혀 있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에서 들어온 최신 정보에 따르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인력보다는 오히려 식량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미 늦은 줄도 모르고, 배는 3월 31일까지는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해야 된다는 점도 상기시켰다. 그렇지 않으면 세찬 북풍 때문에 해협 통과가 더욱 어려워질 거라는 얘기였다. 마침내 베네치아 함대의 출발일은 4월 17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출발은 계속 지연되었다. 마침내 베네치아 함대가 출발했을 때는 콘스탄티노플이 이미 2주간이나 포위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탄의 가신인 왈라키아 군주 블라디슬라프 2세는 헝가리 도움없이는 결코 그에게 대들려고 하지 않았다
포위전이 시작되었을 때 전투 장비를 갖추고 골든 혼에 남아 있던 선박 수는 모두 합해 26척이었다. 자신들의 거류지 성벽 밑에 정박하고 있돈 페라의 제노바인 상선과 소형 선박들은 제외한 숫자였다....이들 대부분은 노 없이 돛에만 의존하는 갑판이 높은 배들이었다. 투르크군의 대함대와 비교하면 아주 보잘것 없는 소함대였다. 육군의 병력차는 더욱 두드러졌다.
8만 명에 육박하는 정규군과 엄청난 비정규군 부대를 보유한 술탄의 군대에 맞서 약 22.5킬로미터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그 위대한 도시는 7000명의 병력으로 싸워야 했다.
메소테이키온(Mesoteichion) 성벽은 가장 취약한 곳으로 늘 여겨져 온 곳이었다.
1422년 술탄 무라드가이 도시를 공격했을 때 비잔티움인들은 외벽 방어에 집중했고, 투르크군은 그것을 뚫지 못했다. 황제는 병력의 열세를 감안해 이버에도 그것을 적절한 전략으로 생각했다.
4월 5일...황제는 최정예 그리스군과 함께... 메소테이키온 성벽에 자리잡았다. 그의 오른쪽, 카리시오스 문과 밀리안드리온 성벽에는 주스티니아니가 자리했다. 그러나 술탄의 공격이 메소테이키온에 집중될 것이 확실해지자, 주스티니아니와 그의 제노바 벼사들은 밑으로 내려와 황제와 합류했다.
4월 6일 공격 개시
(교황이 세를 내어 보낸 제노바의 갤리선은) 우수한 항해술을 입증해 보였다.
페라의 제노바인들이...중립을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했고,...
덕은 높았으나 백치나 다름없는 왕(헨리 6세)
프랑스에게 보르도를 빼앗길 긴박한 상황에 처해있던 영국에서만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인들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는 이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해가 뜨자마자 드디어 술타의 군대는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케르코포르타 성벽의 작은 문을 뚫고 진군하기 시작했다.
비잔틴군이 쇠줄로 골든 혼 입구를 봉쇄하자 메흐메드 2세는 75척의 배에 바퀴를 달고 소가 끌게 하여 내해에 침투,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1442년에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그리고 1456년에는 베오그라드 외곽에서 야노스 후냐디가 이들을(오스마 투르크) 처지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었지만...1526년 8월 29일, 모하치 전투에서 술탄 쉴레이만 1세는 마자르인들에게 끔찍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24000명의 사망자가 전장에 묻혔고 2000명의 포로가 학살되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노예가 되어 콘스탄티노플로 호송되었다.
이 종교조직(울레마 와 일미예((ilmiye-그들의 최고 대변인은 셰이휼이슬람(최고 뮤프티)이었다-로 알겨진 측근의 종교 지도자) 들은 서서히 오스만 정부에게 술탄의 독재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견제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존경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은 술탄이 왕위를 보유할 자격이 있는지를 심의할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기꺼이 정책 구상의 업무를 조정의 다른 사람들-총리대신이나 아아(오스만 제국의 고관이나 사령관)-에게 위임했다.
제노바와 라구사(두브로브니크) 출신의 상인들이 페루에서 가져온 싸구려 은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은 더욱 악화 되었고 그 결과 기초 식량가는 3배로 인상되었다.
1536년부터 유럽 국가들과 체결하기 시작한 '특권협정Capitulations'(오스만 제국 내에 거주하는 유럽인들에게 특별한 법적 권리와 관세 특권을 줌으로써 이윤이 높은 교역들을 외국인들이 서서히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조약이다)도...당시의 문제점들고 지적된다.
1529년 9월과 10워르 술탄 쉴레이만 1세는 25만 병력과 300개의 공성포를 동원하여 빈을 포위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로 군대가 수렁에 빠질 위험에 처하자 결국 그는 헝가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스트리아인들을 가장 경악하게 만든 것은 비정규군인, '아큰즈'(akincl)라 불리던 돌격대였다. 기장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 전위대는 규울잡힌 오스만 주력부대에 앞서 공격할 지역에 먼저 출몰하곤 했다.
빈에서 겨우 140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죄르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의 상징인 초승달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는 소식이 황제 레오폴트에게 전해지자 그는 위험이 임박했음을 느꼈다.
숲이 우거진 비너발트 언덕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오스만의 )사령관은 완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는 '기독교 세계의 최전선(Antemurale Chrestianitatis)'-당시의 한 네덜란드인이 빈을 일렇게 지칭했다-의 방위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도시를 단지 12000명의 정규군이 지키고 있다는 탈영병들의 정보에도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7월16일 화요일이 되어서야 투르크 전위부대는 빈 요새의 외곽에 도착했다.
빈 요새 외곽을 시찰한 지 채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는 도시를 완전히 포위해 버렸다. 7월 14일, 굉장한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에 있던 귀족들의 많은 대저택들이 파괴되었다.
60일 동안 카라 무스타파는 궁전같은 야영지에서 머물면서 도시 성벽의 12개 요새와 방어용 울타리 주변에 20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7월 16일, 그의 군대는 변경에 위치한 페르히트올츠도르프에서 4천 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포위를 시작한 첫 주 동안, 그는 포로에 대한 계획적인 학살을 명령했으며, 방어를 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키기 위해 그들의 머리를 전시했다. 7월 말, 카라 무스타파의 통제가 미치지 않던 아큰즈 기병들이 다뉴브 강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들은 서쪽 저 멀리에 있는 엔스강 지역까지 그들의 발길이 미치는 모든 곳에서 강탈과 유린을 자행했다.
그는 성벽을 파괴하고 공격자들에게 전통적으로 3일간의 약탈이 허용되는, 도시에 대한 정면 공격보다는 합의된 협정에 근거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인 항복을 받아 낸다면 빈에 있는 대저택이나 교회와 같은 풍부한 노획물들을 틀림없이 자신의 자산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얀 소비에스키의 전위부대가 다뉴브강 북쪽 제방에 도착한 8월 말이 되어서야 카라 무스타파는 도시를 기아에 빠뜨려 항복을 받아 내겠다는 희망을 결국 포기하고 남쪽 요새에 대한 총공격을 명령했다. 9월 7일, 소비에스키는 로레인 공 칼의 휘하에 있던 독일인들과 접촉하였다. 그 후 8000명의 구원병들이 빈 숲속의 북쪽 언덕에 집결되었다....그(무스타파)는 숙련된 투르크 공병들에게 빈의 외곽 요새 밑에 갱도를 내기위해 평행호와 터널을 파도록 명령했다. 결국 9월 12일 아침, 갱도의 폭발로 성벽은 파괴되어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오스만군은 이러한 성공을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 5시부터, 칼렌베르크의 숲이 우거진 낭떠러지와 낮은 경사의 포도밭 단지(段地) 도처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가 지기 전, 독일 보병은 거대한 투르크 야영지의 외곽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해질녘에는 폴란드 기병들이 막사로 만들어진 도시 안으로 밀로 들어갔다.
1683년 카라 무스타파의 군대는 수세에 모려 어쩔수 없이 후퇴하였고 패배한 사령관은 전장에서 도망쳤다....9월의 그 날 저녁, 빈 외곽에 있던 투르크인들의 야영지가 뿔뿔히 흩어진 사건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들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빈을 구출한 소비에스키와 칼 공은 사기자 저하된 적의 뒤를 즉시 추격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 화요일 황제 레오폴트가 돌아올 때까지 도시의 외곽에서 머물며 시간을 지체했다.
총리대신의 수하에 있던 오스만 연대장들은 빈의 면전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많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50명 이상의 파샤(장군)들이 칼렌베르크에서 전투가 벌어진 다음 주, 카라 무스타파의 개인 친위대에 의해 교살되었다.
잠시나마 10월 첫 번째 주말에 총리대신의 부관이 에스테르곰 남쪽에서 교차하는 파르칸 강변에서 폴란드군에게 호된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이틀 후 로레인 공 칼이 지휘하는 기독교 연합군이 파르칸강에서의 상황을 역전시키고 마침내 다뉴부강 중류지역에서 저항하던 투르크 전선을 무너뜨렸다. 10월 24일, 에스테르곰은 단시간의 포격끝에 함락되었다.
터키의 조선소는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견디며 헤쳐나갈 수 있는 튼튼한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판토에서 패배...그 후 역대의 총리대신들은 서지중해에서 활약하며 오스만 해군의 골칫거리가 된 기독교도 적들을 '베르베르 해적들'에게 일임했다. 물론 악명 높은 이 해적들은 때때로 믿을 수 없는 협력자들이었지만 말이다.
전쟁은 지난 가을에 전투가 긑났던 바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로레인 공 칼은 헝가리 대평원에서 전쟁을 계속했고, 두 번의 여름 출정으로 페슈트와 헝가리 북부 대부분을 확보했으며 한 달간의 포위 끝에 1686년 9월 2일 부다를 점령했고, 11개월 후에는 역사적인 모하치 부근에서 투르크인들에게 호된 패배를 안겨주었다. 칼 공의 승리로 합스부르크 군대는 크로아티아와 트란실바니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오스만인들을 쫓아낼수 있었다. 1688년 9월 첫째 주에 오스트리아는 지난 150여년 동안 오스만의 주도였던 베오그라드를 급습하여 전쟁을 발칸으로 확산시켰다. 다음해 여름 그들은 니시와 스코페로 전진했으며 가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6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까지 침입했다. 한편 베네치아도 발칸에서 전쟁을 개시했다. 달마티아의 남쪽 해안과 보스니아에 있는 오스만 전초기디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1685년 에는 그리스가 새로운 전쟁터가 되었다....1687년 8월, '베네치아' 군대-이 부대에 소속된 용병들 중에는 스웨덴의 모험가, 쾨니히스마르크 백작이 이끄는 루터교회의 신도들도 있었다-는 험악한 바위로 이루어진 모넴바시아 갑(岬)을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역에서 투르크인드을 몰아냈다.
신성동맹의 결정적인 반격을 우려하는 소문드이 콘스탄티노플에 퍼졌다. 몇 달 동안 계속해서 굶주림과 절망에 빠진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콘스탄티노플로 밀려들어 왔다. 수도에서나 보스포러스의 양안에서나 전쟁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1686년 2배로 인상된 빵 값이 1687년 또 다시 갑절로 올랐다.
모하치에서의 참패 이후 얼마 안되어 모르시니(베니치아 전 총독)가 아티카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메흐메드는 술탄의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무라드 5세의 다섯형제들은 1574년 12월 21일에 교살되었다. 1595년 1월 28일에는 메흐메드 3세가 18명이나 되는 형제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종교 지도자들은 형제 집단 살해가 과연 도덕적이고 현명한 일인지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가까운 남성 친족들은 술탄의 주요 궁전인 톱카프궁의 4번째 안마당에 마련된, 여러 작은 방들 가운데 하나인 카페스(kafes , 새장)에 감금되었다.
1690년 가을에는 니시와 베오그라드를 재탈환했고 다뉴브강을 따라 방어선도 재확립했다.
모로시니가...그리스로 출병했던 베네치아 워정대는 이미 그 여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베네치아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고수하고 있기는 했지만 투르크인들은 곧 아테네를 탈환했다.
1620년 무렵 예니체리는 더 이상 상비군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다.
(예니체리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잠재력을 인식한 쉴레이만 (1세)은 술탄의 호위대인 용기병(龍騎兵 , 실라흐타르silahtar)성장을 장려했다. 쉴레이만 시대 이후에도 이 연대는 부오한 부유한 투르크 귀족들 가운데서 모집되었고 어떤 전쟁에서는 술탄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나 실리흐타르가 소규모의 엘리트 세력이었던 반면 예니체리는, 전원이 동원된다면 9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가지고 100개 이상의 대대(오르타orta)를 조직할 수 있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1697년 늦은 여름...베오그라드에서 헝가리의 부오한 곡창지대인 바치카(지금의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작은 도시인 젠토 근방에서 술탄의 공병들은 다뉴브강과의 합류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티서강 하류에 부교를 놓았다. 그러나 그곳의 강폭은 넓었으며 물살도 매우 빨랐다. 9월 11일 저녁 늦게 티서강을 건너고 있던 군대를 오스트리아군이공격해 왔다. 사보이 공 오이겐의 훌륭한 지위 하에 그들은 투르크군을 두 조각 냈다. 대략 3만 명 정도의 오스만군인들이 젠토 전투에서 실종되거나 사망했으며 티서강에서 익사했다.
베네치아의 통치를 받았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수년간의 방치 끝에 1710년부터 다시 번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인구는 코린트만의 북쪽으로부터 이주가 이루어진 덕에 빠르게 증가하였고 덜 건조한 지역에서는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농업이 번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의 수준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은 베네치아의 통치를 반기지 않았다.
1714년 12월 초, 에게해에서 이따금씩 벌어지던 오스만과 베네치아 선박들 간의 교전을 구실로, 술탄은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평화조약이 파사로비츠에서 체결된 1718년 여름, 베네치아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포기하는 데 도의했다.
러시아 제국과 러시아 정교회의 밀사들인, 새로운 러시아의 관리들이 술탄의 발칸 영토로 침투하여 그곳에 잠재되어 있는 애국심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베네치아의 통치에 가장 큰 적개심을 보였던 지역에서 이러한 활동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신성 러시아 제국이 진정한 믿음을 수호하는 투사임을 자임함에 따라 오스만 제국에서 살고 있던 그리스 정교들이 술탄의 2류 시민의 지위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1730년 9월 28일....'프랑크적' 즉, 서구적이라고 생각되는 외국문화를 향한 증오심이 갑작스럽게 폭발한것이었다.
본느발의 개혁 덕택으로, 1736년에서 1739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의 산발적인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술탄 마흐무드의 군대는 베오그라드를 포함하여 세르비아 대부분을 회복했고 보스니아에 대한 오스만의 지배력도 강화시켰다.
1746년과 1768 사이 제국은 평화를 누릴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어느 한곳에서도 전쟁을 하지 않고 2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으며...
1722년 초 에카테리나 여제의 군대는 크림반도의 대부분과 지금의 루마니아의 중심지인 몰다비아 및 왈라키아 저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1744년 이른 여름, 드디어 전쟁은 러시아 장군 알렉산드로 수보로프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불가리아로까지 확산될 징후를 보였다.
퀴츅 카이나르자 협정은 역사적으로 이전의 다른 어떤 협정보다도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오스만측) 협상가들은 실패한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조약의 내용이 영토 상실을 기정 사실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어떤 조약이 인정했던 것보다도 더 광범위한 개인적 책임을 술탄에게 부여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다시 말해, 전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자처해 왔던 오스만 제국의 주장이 이 조약을 통해 처음으로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던 것이다....이후 150년 동안 오스만 칼리프의 종교적 권리에 대한 경외심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축소될수록 점점 도 높아졌다.
압둘하미드 1세는...제국 중심부의 육 해군을 재조직하도록 명령했다....근대적인 함대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항해술을 가르치는 해군사관학교가 보스포로스 옆에 설립되었다.
대부분의 서구화 시도는 표면적이었다. 흑해연안 시놉에 해군 기지를 세운 것 이외에는 모든 개혁들이 수도 근처에 집중되어 이루어졌다.
중앙 지역에서조차 실권은 지방 명사들의 수중에 있었다. 이들은 대개 탐욕스러운 티마르(군사봉토) 소유자였고 강탈행위들을 통해 출세한 가문들의 수장이었다.
아나톨리아의 경우, 오스만인들은 마르마라 해안과 부르사,에스키셰히르 사이에 있는 지역과 토로스 산맥 남쪽 너머에 있는 카라만 주(州)에서만 권력을 행사할수 있었다. 이 지역을 제외한 아나톨리아 서부는 6개의 '봉건' 가문들이 지배했다.
이와 유사한 양상이 해협 건너 유럽의 루멜리아 지역에도 확산되었다. 이 지역에는 유력한 4명의 '가신'들이 있었다.
1781~82년, 중앙집권체제가 눈에 띄게 쇠퇴하고 많은 변경지방에서는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으며,...
1783년 4월, 에카테리나가 이러한 극비의 '그리스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크림반도의 타타르 한국을 합병하자 콘스탄티노플은 매우 분개했다. 그러나 전쟁 선포는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술탄과 대신들은 강력한 동맹국 없이는 전쟁에서 이길 승산이 희박하다고 생각했고...
1785년...예니체리 군단의 인원을 약 60% 정도 삭감했던 개혁적인 대신 하릴 하미드의 몰락과 처형을 눈감아 주었다.
야시에서 체결된 평화조약(1792년 1월)은 터키 정부에게 또 다시 엄청난 굴육을 안겨 주었다. 이 협정에서 술탄은 에카테리나의 크림반도 합병과 그루지야에 새운 보호국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국경선이 드네프르 강 하류까지 남진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만 했다.
1789년 4월 셀림 3세가 등극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발생한 일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카페스 안에 유명무실하게 감금되어 있던 시절 동안 셀림은 루이16세와 접촉하고 있었다. 신임을 받고 있던 친구인 이스학 베이가 셀림의 개인밀사로서, 오스만 제국의 오랜 친구이자 동맹국인 프랑스가 군대를 근대화하고 러시아 봉쇄를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후원해 주기를 바란다는 청원을 가지고 1786년 베르사유로 떠났다.
술탄 셀림의 다른 개혁들은 곧 잊혀졌고...정규 보병 대대에만 한정되었다.
셀림은 제국이 자코벵파와의 동맹에 연루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뉴브강 건너에 있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공국들은 퀴츅 카이나르자 오약 이후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다.
1804년 2월, 5년 동안이나 자행된 예니체리들의 착취와 실정에 분노한 그리스 정교도들이 드리나강과 모라바강 사이에 있는 슈마디야 구릉지역에서 민족반란을 일으켰다.
1807년 5월 25일 젋은 예니체리 보조병들(야막라르 yamaklar)이 반란을 일으켰다.
마치 제국이 곧 멸망할 것처럼 보였던 이 당시만큼(1810년경) , 해외에서 오스만 제국의 위신이 엉망이었던 적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전체 인구 중 거의 1/4이 그리스어를 말하는 사람들이었지만 18세기 말까지도 술탄의 신민들 중 그리스 문화유산을 의식하고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1821년 부활절에 그리스정교 총대주교를 처형하고 그의 유체에 대한 중상을 허용함으로써 마흐무드는 자신의 신민들 중 1/4를 적으로 돌려 버렸다.
(무함마드 알리는)셀림 3세가 제국의 중심부에 만들고자 했으나 실패했던, 유럽식 이슬람 군대조직인 '새로운 질서'를 이 역사적인 오스만 보호령(이집트)에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1826년 봄, 마흐무드 2세에게 있어 그리스 반란은 이미 종료된 사건이었다. 무함마드 알리의 서구화된 근대적인 군사조직이 전통적인 오스만 연대와 예니체리가 오랫동안 얻지 못했던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1826년 6월 17일 토요일, 예니체리 군단은 정식으로 헤체되었다.
1827년 7월, 새롭게 체결된 런던조약은...영국과 러시아, 프랑스...세 강대국들의 전함들이 동맹국으로 협력한 것...
1827년 10월 20일 터키-이집트 함대의 2/3가 격침되었고 8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터 전쟁이 1828년 4월 말 시작되었다.
(러시아군이)에디르네를 점령했다. 심지어 일부 기마부대는 에게해에 도달하기도 했다. 서둘러 터키 정부는 강대국들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에디르네에서 1829년 9월 14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술탄은 결국 영국과 러시아가 제시한 그리스 자치안을 수용했다....세르비아 자치는 실현되었다....오스만 제국의 1년 예산의 2배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전쟁 배상금을 10년 동안 지불하라고 규정...
1830년 2월...그리스 독립왕국이 수립되었다.
그리스 전쟁이 끝난후...제국을 서구화하려는 마흐무드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1831년 11월, 이브라힘(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은 가자 사막을 건너, 재편성된 해군의 지원을 받으며 보나파르트의 옛 행군로를 따라 북쪽으로 밀고 올라갔다. 예루살렘등을 점령한후 무려 8개월 동안이나 항전한,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레에 도달했다. 1832년 한여름까지 시리아와 레바논 전체가 이집트의 수중에 들어갔으며,...술탄은 영국에 지원을 요청 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영국정부는 이브라힘을 무력으로 제제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수의 해군이 지중해에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단지 무함마드 알리에게 ' 즉시 이집트로 물러가 그 비옥한 지역에 만족하라'고 촉구하는 항위에 대한 지지를 ㅍ표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철수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결과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고 타우루스 산맥을 통과했다. 1832년 12월 그의 군대는 콘야 외곽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퇴하고 총리대신을 포로로 잡았다. 2월 초 이집트 전위대는 아나톨리아의 중아에 위치한 큐타히야(보스포러스부터 300킬로미터도 채 안 떨어진 곳)에 도달했다. 수도방어에 혈안이 되어 있던 마흐무드는 가장 막강한 이웃인 러시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의 중재를 수용해 더이상 위험한 상황은 진행되지 않았다.
1838년 초봄, 영국이 그(술탄)가 바라던 지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1839년 4월 중순, 그는 하피즈 파샤에게 오스만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알레포로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1839년 6월 24일 벌어진 네집 전투에서 오스만의 모든 야포는 파괴되거나 공포에 휩싸인 포수들에 의해 유기되었다. 1만 명의 포로가 이브라힘에게 잡혔다.
오스만의 해군제독 아흐멧 페브지는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출항했다. 그리고 이집트 총독, 무함마드 알리에게 함대를 양도해 버렸다. 이로써 갓 즉위한 어린 술탄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지중해에는 해군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아나톨리아에도 이브라함에 대항한 야전군이 없었다.
빈 정부에게 더 중요했던 두 번째 이유는, 거꾸로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다면 발칸 민족주의가 폭발하여 다민족으로 구성된 합스부르크 군주국도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40년 7월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오스만의 전권들은....무함마드 알리에게 사실상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집트는 여전히 38개의 보병연대와 1만 마리가 넘는 기마 그리고 나폴레옹 수하에서 복무했던 퇴역군인들에게 훈련을 받은 포병대라는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은 광대한 레반트 지역과 크레타 전역에 흩어져 있었지만 프랑스 해군의 지원을 받는다면 이런 문제끔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무함마드 알리는 생각했다.
전함들은 1840년 9월과 10월, 레바논의 해안을 폭격했고 영국 및 오스트리아의 해병대와 터키 보병대는 베이루트 북쪽 고지에서 발생한 드루즈파(이슬람교 시아파 내의 한 종파) 반란을 지지했다. 이브라힘의 단련된 군대가 이집트 국경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자 영국 전대는 아크레를 폭격하여 점령했다. 다른 선박들은 이집트 해안을 봉쇄했다. 위기는 곧 종식되었다. 11월 5일, 무함마드 알리는 알렉산드리아 협정에 서명했는데,...이집트 군대가 철수할 것을 규정...
1848년 혁명 이후...술탄 압둘메지드 및 런던의 파머스턴의 암묵적인 승인하에 짜르는...몰다비아와 왈라키아로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러시아는 2년 반 동안이나 다뉴브 공국들을 점령했지만 아무런 항의도 받지 않았다....이로써 혁명이 오스만 제국으로까지 확산 되는 것을 막을수 있었다.
1849년 이른 봄, 프란츠 요제프는 다뉴브강 중류지역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러시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짜르 니콜라이는 코슈트의 헝가리 신생독립국을 진압하기 위해 다뉴브 공국에서 국경을 넘어 트란실바니아로 2개의 군대를 파견했다.
술탄의 지위가 그해(1853년) 여름 위기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853년 10월 23일 터키과 이집트 군대는 투트라한 근방의 다뉴브강을 기습적으로 횡당해 부쿠레슈티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러시아의 전초기지를 공격했다.
11월 30일 시놉 해전에서 오스만 군은 러시아에 참패한다.
1855년 이후 오스반 제국은 14차례에 걸쳐 외국차관을 계약했고, 결국 1875년 정부는 파산하고 말았다.
1860년 무렵이면 이미 세르비아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1867년에 이루어진 (세르비아에서) 오스만군의 철수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분별있는 행동이었
다.
루마니아와 몰다비아 그리고 왈라키아간는 1861년 12월에 공식적으로 병합이 이루어져 '루마니아 연합 공국'으로 선포되었다.
1871년 알리 파샤가 사망할 때까지 국가의 개조 즉, 탄지마트는 지속되었고 술탄 역시 개혁 프로그램을완성시키려는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정부의 압력을 계속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