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가(cafe.daum.net/Exlibris)에 먼저 쓴 글입니다.
사정이 허락하면 본문 가운데 한 토막쯤 더 옮기고 싶습니다.
아래에서 핫산은 유라의 또다른 닉입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 von Hasan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 2000), 232면.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짓고 임성모가 우리말로 옮겼죠.
자게에서도 소개했듯이 이 책은 '日本近代思想大系'(1988-1992, 전23권 별권1,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중의 한 권인 <飜譯の(의) 思想>(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편, 1991)의 부산물이라고 합니다. 가토 슈이치가 질문하고 마루야마 마사오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뤄진 이른바 대담록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차마 대화를 옮겨놓은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어서, 거의 경악할 지경입니다. 원제는 丸山眞男.加藤周一, <飜譯と日本の近代>, 岩波書店 1998 입니다. 정말 둥근 산의 진정한 사내가 아닐수 없습니다.
책 소개를 조금 더 하자면, 먼저 표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아담, 단아한 게 제 마음에 쏙 듭니다. 감옥사색처럼 재생용지 같은 재질에다 색감은 연한 황토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핫산의 책은 지금 손에 없고 본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지라 중도에서 빌려서 보고 있는데, 도서관에서는 겉표지를 벗겨버리기 때문에 외표지를 새삼 감상하지는 못하고 있습죠. 그리고 책 내부도 읽기 좋게 편집한데다 원서에는 없는 도판도 충실히 싣고 있어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역자의 정성이 가득 담긴 옮긴이주가 후주형태로 40여페이지나 달려있습니다. 좋은 책은 상당부분 역자의 노력에도 빚을 지는 듯 합니다.
내용을 도입부만 살짝 훔쳐볼까요.
가토의 첫 질문이 책 전체의 방향과 관련 상당히 의미제시적입니다. 즉 메이지시대(明治; 1868-1912) 번역의 배경에 대해 묻습니다. 첫째, 일반적으로 무엇을 번역했는가, 무엇을 번역할 필요가 있었는가.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번역을 했는가. 셋째로 왜 번역주의를 취했는가. 넷째로 어떻게 번역했는가라는 것으로 어떤 개념을 어떤 식으로 번역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보고자 합니다. 마지막으로 메이지시기 일본의 번역주의가 남긴 공과는 무엇인가를 화제로 삼고자 합니다.
마루야마 이를 듣고선 말문이 막힐 지경이라며 웃습니다.
이어서 그 배경을 논하게 되는데, 간명하면서도 시사(示唆)적입니다. 통찰, 혜안을 흔히 간구하지만 이 책에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상찬이 지나쳤다면 그 과장된 표현에 담긴 핫산의 흥분을 읽어주시라. 이쯤에서 고백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첨에 생각했던 방향에서 틀기로 합니다. 우연하게도 다른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어찌보면 잔머리를 굴린 것인데요, 그 소개의 상당부분을 알라딘에 맡기고자 한 것입니다. 핫산은 한 부분만 코멘트하죠.
바로 '인'(仁)에서 '인.의.예.지.신', 소위 오상(五常)으로 가게 되는 배경에 대한 마루야마의 탁견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가 논어징[徵] 등에서 콩쯔(孔子)가 '인'만은 강조했다고 분석한 사실은 이미 김용옥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같은 맥락에서 실제 콩쯔는 '인의'라는 병칭조차 언급하지 않았고 차후 멍쯔(孟子)가 논쟁을 좋아했기에 순자나 묵자에 대항하기 위해 '인의'라는 말을 꺼냈고 그 결과 성인(聖人)의 도(道)를 상대화시키는 데 이르러 버렸다는 소라이의 설명을, 마루야마를 통해 듣고 있자니 새삼스럽기 그지없습니다.(본서 80면 이하)
원래는 책 전반에 걸쳐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함축적으로 정리해보려했으나, 능력이 부족함을 절감하거니와 도대체 전부가 연결이 되어있어서 그 각각의 모든 부분이 의미를 가진다면 믿어주시겠습니까. 통째로 외워버리고 싶은 책입니다. 목차만 소개하고 핫산의 서평을 끝내기로 하죠. 목차 뒤에 첨부되는 상세한 내용(책소개, 저자와 역자소개, 미디어리뷰 등)은 핫산의 미진함을 보완하고자 함이 절대 아니며, 알라딘에 가면 있는 것을 편의상 그저 부록으로 달고자 할 뿐임을 양지하시라. 그 상론의 힘을 빌어 핫산을 윤색코자 하는 맘 추호도 없었음을 거듭 혜량하시라.
그럼 먼저 차례를 베껴보겠습니다.
1부 번역문화의 도래
시대상황을 생각한다 / 일본의 행운 / 양이론의 극적인 전환 / 근대적 군대와 기술관료의 출현 / 막번제 국가와 영토의식 / 에도 시대의 번역론 /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하다 / 비교의 관점 / 소리아에서 노리나가로 / 왜 번역주의를 택했나? / 번역과 급진주의 / <역서독법>에 대하여
2부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나
왜 역사책이 많이 번역되었을까 / 역사를 중시한 것은 일본 유교의 특성일까 / 널리 애독된 역사책 / 유학이 도덕의 체계가 된 과정 / '인'에서 '의, 의, 예, 지, 신'으로 / 논리 용어와 그 어법 / '개인'과 '인민' / '만약'과 인과론 / '논리'를 파고드는 자세 / 조어를 둘러싸고 / 번역어의 문제점 / 라틴어,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있었을까?
3부 만국공법의 이모저모
막부 말기의 슈퍼 베스트셀러 /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대조하다 / 전통적인 용어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 법의식의 문제 / '국체'라는 말 / 번역하지 않는 것
4부 사회, 문화에 끼친 영향
무엇을 번역했을까 / 왜 화학에 관심을 가졌을까? / 진화론의 수용 /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학관 / 지식인에게 영향을 끼친 번역서 / 원서의 질문제 / 후진국의 조숙성 / 번역에 적극 참여한 메이지 정부 / 문명 개화 : 민심과 정부
리뷰
소개글
'메이지 초기의 번역'이란 주제에 대해 일본의 두 지성이 대담한 내용을 문답 형식으로 정리한 책. 저자들은 '번역'이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전제하며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무엇을, 어떻게 번역했고 사회가 그 번역된 개념과 사상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했는가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19세기 초 서양 열강의 문호개방 요구와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기존의 쇄국정책을 버리고 막부를 몰아내는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이후 정부는 유학생과 시찰단을 통해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런 시대흐름에서 '번역서'는 서양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로 자리잡았다고. 이에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는 "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만에 이르니 한우충동(汗牛充棟)이 무색할 지경이다"라고 할 정도로 번역의 홍수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문화가 근대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도쿠가와 시대 중국어 문헌의 번역전통이 메이지 시대에 서양 문헌을 번역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의 사상적 배경이 형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 이 책의 설명이다.
이같은 일본의 번역전통과 '서양으로부터 배우자'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서양에 편중된 역사와 지리서, 군사관계와 병법, 자연과학, 법률제도 등에 관한 번역이 활발히 이뤄졌다고 설명하는 저자들은 다양한 번역서의 예를 통해 서양사상을 받아들인 일본인들의 태도와 그것이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책에 언급된 인물들과 일본 근대사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이 다소 생소하게 다가오지만, 약 40여 페이지에 걸친 옮긴이의 자세한 주 덕분에 어렵지 않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저자소개
가토 슈이치 (加藤周一) - 191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43년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 문학에 심취하여'마티네 포에티크' 그룹에 참가했다. <잡종 문화>라는 문명비평서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작 <일본 문학사 서설>로도 유명한 전방위 비평가이자 작가이다. 최근에는 <사라진 판목,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기이한 소문>이라는 희곡을 쓰기도 했다. 현재 리쓰메이칸 대학 국제관계학부 객원교수이다. 주요 저서로 <전후세대의 전쟁 책임>, <시대를 읽는다: '민족' '인권' 재고>, <가토 슈이치 저작집>(24권) 등이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 - 1914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1937년 도쿄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1940년 같은 대학의 조교수, 1950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대표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에도 시대의 사상가 오규 소라이를 분석해 일본의 근대 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을 파헤쳤다. 1996년 타계할 때까지 일본 정치학계뿐만 아니라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
주요 저서로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 <일본의 사상> <전중과 전후의 사이> <후위의 위치에서>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충성과 반역>과 <마루야마 마사오 전집>(17권)이 있다.
임성모 - 연세대학교 사학과에서 일본 근현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책으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공역), <번역과 일본의 근대>가 있다. 2002년 현재 연세대 강사이며, 일본 파시즘과 경계지역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다.
작가의 말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는 언어와 사상의 역동적인 투쟁의 장으로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따라서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의 필요성은 가히 절대적이다. 본디 원전과 번역의 관계는 자극과 수용이라는 일방통행적 관계로 왜소화될 수 없는 법이다. 서구 언어가 비서구 언어에 대해, 또 근대 일본어가 중국어, 한국어에 대해 일방적 헤게모니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번역과정에서 후자가 전자를 변형시키고 때로 공범관계를 형성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한 각 언어들 사이의 '연쇄', 나아가 번역을 통해 형성되는 제반학문들 -무엇보다도 국민국가 수립과 직결되는 법학, 정치학, 경제학, 역사학, 문학 등-의 지역간, 국제간 연쇄를 염두해 두지 않는 한, 동아시아의 근대는 온전히 복월될 수 없을 것이다. - 임성모(옮긴이)
미디어 리뷰
경향신문 :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일본의 사상·문화에 대해 영향력 있는 두 노(老)대가가 번역을 화두로 일본의 근대에 대해 짚어나간 흥미진진한 대화록이다. 대담의 발제·진행 역은 ‘일본문학사 서설’(시사일본어사) 등을 쓴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상대역은 ‘전후 일본 지식사회의 천황’이라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대화는 아편전쟁에 대한 역사적 조명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양에게 당한 것은 청국인데 ‘야단났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발빠르게’ 대응한 것이 일본이라는 것. “근대화의 첫걸음은 외국인교사, 유학생, 시찰단, 그리고 번역이었다”.
번역은 가장 강력한 근대화의 도구였다. 메이지 정부는 산하에 번역국을 두었다. 정부 부서들도 자체적으로 번역서를 앞다투어 펴냈다. 번역이 일종의 국가사업으로 이루어지면서 무수한 번역서를 쏟아냈다. 번역이 정보의 전달 장치가 아니라, 문화의 이질성에 대한 자각과 ‘비교의 관점’을 통해 상대국 국민보다도 상대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메이지 시대의 선각자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루야마는 이러한 번역 의식의 뿌리를 에도 중기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 徠)에서 찾는다. 일본 지식인들이 한문을 일본식 한문 독법인 화훈(和訓)으로 읽는 것을 두고 오규는 그것은 중국어로부터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중국어를 외국어로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런데 왜 메이지 시대는 비교적 진보 성향의 학자들 사이에서조차도 나르시시즘의 눈길로 회상되는 경우가 많을까. 이 두 석학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메이지 시대는 내셔널리즘의 시대. 이 시대의 주요 문화현상이었던 번역 역시 내셔널리즘의 자장(磁場)에서 파악하는 시점이 요구돼야 당연한데도 이에 대한 논의가 배제되고 있다. 사실 오규의 선언은 화이(華夷)적 세계관의 극복이라는 내셔널리즘의 각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함으로써 형식상으로나마 자기와 타자간의 수평적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 실제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에 주눅드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영한·한영 사전만큼은 정치적·문화적 우열과는 무관한 일대일의 동등한 관계를 주장한다. 그래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사전 편찬자와 저술가를 내셔널리스트 그룹의 필두에 올리지 않았던가.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메이지 일본이 서양을 필사적으로 배우려했던 것은 위기의식뿐 아니라 근대적 지식의 선점을 통해 정체 상태의 중국에 대해 비교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지적 헤게모니 장악의 의도도 개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근대 일본의 번역주의는 세계를 ‘일본/서양’의 양극구조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고착화시켰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화’라는 주제 못지않게 ‘번역과 제국주의’라는 주제도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번역했는가하는 물음은 이제 관점을 바꾸어서 이 노대가들이 방담을 나누고 떠난 자리에 되돌아가 다시금 던져야 할 질문이다.임성모 옮김. - 윤상인(한양대교수,일문학) ( 2000-09-07 )
대한매일 : 일본의 메이지 시대는 번역이 홍수를 이룬 시대였다. 불과 6∼7년 사이에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수만 권의 책이 번역돼 나왔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과 함께 근대법의 주요 고전으로 꼽히는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관청에나 비치돼 있는 정도였으며, 한국에서는 아직 번역도 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근대'에 얼마나 발빠르게 대응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번역은 근대화 과정의 일본 사회와 문화에 무엇보다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 학계의 천황'으로 불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와 문예비평가 가토 슈이치가 주고받은 문답을 엮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임성모 옮김, 이산 펴냄)는 이러한 인식 아래 씌어진 '번역의 사상사'다.
메이지 시대 번역서들이 양산된 것은 가토의 표현대로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에 유학생을 보낸다"는 일본인들의 극적인 사고방식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인물도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주장하다 미국·영국·네덜란드·프랑스 등 4개국 연합함대에 패배한 조슈 번(藩)이 영국에 파견한 유학생이었다. 가토는 "일본이 패전을 겪고 하루 아침에 변하는 것은 실로 극적일 정도"라고 말한다. 이것은 서양에 졌다고 스스로 깨달은 순간, 존왕양이의 쇄국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막부를 몰아낸 메이지 유신의 정신과도 일맥 상통한다.
이 책은 번역은 재창조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사용하는 번역어는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과정을 거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어와 외국어 사이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그대로 빌려 온 것이 대부분이다. 일본에서 소사이어티(society)의 번역어가 정착되기까지는 근대 일본의 정신적 궤적 만큼이나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건너뛴 채 소사이어티=사회라는 하나의 공식 같은 결과만을 받아들인다. 그런 만큼 '계약관계에 의해 성립된 인간집단'이라는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 단어대 단어가 아니라 의미대 의미의 번역이 중요하다고 한 키케로의 말은 귀기울일 만하다. 메이지 초기에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밖에 없다는 번역주의가 팽배했다.
늘 그렇듯이 그때에도 오역이 적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사회진화론을 제창한 영국의 보수적인 사상가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학(Social Statics)'이 엉뚱하게 '사회평권론'으로 번역되면서 급진적인 자유민권운동가들의 성전이 된 일화가 소개된다. 번역의 오류를 경계하기 위해서다.
또한 번역주의보다 한층 과격한 주장인 모리 아리노리의 '영어국어화론'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일본어의 뼈대인 야마토 말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야마토 말만으로는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게 그 요지. '영어공용화론'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 책은 번역은 단순한 어학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언어의 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임을 새삼 일깨워준다. - 김종면 기자 ( 2000-09-05 )
동아일보 : 도쿠가와 막부시절 에도의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죄수의 해부된 인체를 보고 나가사키의 통역관을 통해 입수한 네덜란드어 해부서의 정밀성을 확인한다. 해부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은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은 변변한 사전도 없이 3년만에 그 책을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해낸다. 1774년의 일이다. 일본의 ‘번역시대’가 열린 것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근대화과정에서 번역은 단지 외국 문물의 수용행위가 아닌, 하나의 국가생존 전략이요 프로젝트였다. 메이지시대의 번역에서 역사물이 많은 까닭은 문명 특히 서구문명을 그 바닥으로부터 탐구해 자국발전의 역사적 맥락을 다시 잡자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군사, 병법 관련은 물론 화학과 관련된 번역물이 많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대표적인 경공업인 섬유산업에서 ‘화학염료’는 필수적이고, 최대 현안인 군사분야에서 ‘화약’은 불가결한 것이며 농업국이라서 ‘화학비료’는 나라의 운명과 직결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도시대 이래 축적되어온 일본의 번역전통은 메이지 초기까지만 해도 한자 어휘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의 대표적 민권주의자 나카에 초민이 1882년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민약역해(民約譯解)>라는 제목으로 번역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1894∼5년 청일전쟁을 경계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번역어휘 차용의 역전현상이 나타났다. 옌푸(嚴復)가 <원부(原富)>(스미스의 <국부론>), <군학(群學)>(스펜서의 <사회학>), <군기권계론(群己權界論)>(밀의 <자유론>), <법의(法意)>(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천연론(天演論)>(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등으로 표현했던 중국식 번역어가 급속히 일본식 번역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군기권계론>이 <자유론(自由論)>으로 <군학>이 <사회학(社會學)>으로 바뀌었다.
사실 ‘society’를 ‘사회(社會)’라는 번역어로 정착시키기까지 그들이 거쳤던 고민의 궤적은 곧 근대일본의 정신적 두께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겪었던 그 무수한 고민과 허다한 오역의 과정을 건너뛴 채 사전적 의미로 박제화된 용어들을 그대로 옮겨쓰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일본과 한국의 넘어설 수 없는 격차인지 모른다.
번역은 타자와의 교섭이요 그 자체가 커뮤니케이션이다. 진정한 번역은 단지 다른나라 말을 자국어로 옮겨놓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번역은 말의 타자성을 의식하는 순간 시작된다. 에도시대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가 늘상 읽어왔던 ‘논어’, ‘맹자’가 외국어임을 인식한 순간처럼 말이다. 번역은 타자의 말과 동거하는 행위다. 그 동거행위를 통해 컨텍스트를 따져보고 서로의 의미구성을 탐색하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적절한 의미(어)를 포착할 때 비로소 동거는 끝난다. 그러나 새로운 언어, 곧 자국어로 갈아입은 말의 나열이 번역의 끝은 아니다. 번역은 독자의 읽는 행위를 통해 타자(성)와의 관계론적 소통을 이루면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번역의 시작은 역자이지만 번역의 끝은 독자가 맺는다.
따라서 “번역이 일본의 근대를 구성했다”는 말의 이면에는 “그 번역된 책을 읽는 독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녹아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이 번역사의 수레를 밀어간 독자들의 궤적을 좀더 깊이있게 짚어내지 못한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번역 자체는 40여쪽에 달하는 질좋은 역주와 원서에 없는 휘턴 원저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영어, 중국어, 일본어판 비교 등 역자의 섬세한 노력이 돋보인 수작(秀作)이다. - 정진홍(한국예술종합학교교수·커뮤니케이션학) ( 2000-09-02 )
문화일보 : “이즈음 역서 출판이 성황을 이루어 그 권수가 몇만에 이르니 한우충동 (汗牛充棟·많은 장서를 가리킴)이 무색할 지경이다.” 1883년(메이지 16년) 야노 후미오(矢野文雄.1850∼1931)가 번역서의 가이드북인 ‘역서독법(譯書讀法)’의 밝혀두기(지문·識文)에 나오는 이 말은 일본근대를 형성한 저력을 보여준다.
번역된 책의 종류가 많을 뿐만 아니라 <서국입지편 (西國立志編)>(원명 자조론)은 모두 100만부 이상 팔려나가 당시 자유민권 사상의 확산에 기여했다.
‘북리뷰’가 최근 나온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 주목한 것은 일본의 근대 사회와 문화, 학문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번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근대화에 실패한 우리에겐 반면교사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 96년 타계할 때까지 일본 학계의 덴노(天皇)로 불린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문예비평가이자 작가인 가토 슈이치(加藤周一)의 문답을 엮은 이 책은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서로 다른 행로를 간 중요한 배경에 번역을 통한 서구문화의 수용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우리에게 ‘근대화의 창(窓)’으로서 번역의 문제는 아직까지 고쳐야할 문제점이 많은 현재진행형의 사안이기도 하다.
우리의 현실을 냉정하게 되짚어 보자. 민족문학사연구소가 1894년부터 1910년 사이에 공간(公刊)된 서적의 서문과 발문을 뽑아 엮은 ‘근대 계몽기의 학술·문예사상’(소명출판)에 실린 77종의 책 중 번역서는 20종이 채 못된다. 그나마 일본인이 쓴 <폴란드망국사>를 번역한 <파란말년전사>와 <월남망국사>나 <중동전기>같이 중국인이 번역한 책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을 제외하면 서구의 텍스트를 판본으로 삼아 번역한 책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유길준의 <서유견문>같은 여행기까지 일본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4∼1901) 저서의 상당부분을 짜깁기 했을 정도니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마루야마와 가토에 따르면 아편전쟁에서 중국 청(淸)나라의 패전을 목격하고 양이론(攘夷論)을 포기한 일본이 서양을 배우자는 근대화의 첫걸음으로 주목한 것이 외국인 교사 수입과 유학생·시찰단의 파견, 그리고 번역이었다. 메이지시대 불과 6∼7년 사이에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수만권의 책이 번역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가토의 표현대로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에 유학생을 보낸다”는 일본인들의 극적인 사고의 전환이 배경이 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을 내세우다 미국·영국·네덜란드·프랑스 등의 4개국 연합함대에 패배한 조슈한(長州藩)이 영국에 파견한 유학생이었다.
이같은 인적 자원과 함께 내적으로는 17세기말 일본에서 처음으로 중국어를 외국어로 의식한 오규 소라이(荻生 徠.1666∼1728)의 존재가 번역문화의 확립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주자철학을 비판하고 <논어>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는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呼)아’라는 식으로 <논어>를 읽어서는 <논어>를 읽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식으로 바꿔 읽었을 때, 즉 번역했을 때만이 그 의미를 제대로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규를 통해 일본에서는 번역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자신의 언어적 정체성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마루야마와 가토의 지적이다.
이같은 일본의 현실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시찰단이라고 해야 일본과 중국에 파견한 ‘신사유람단’이나 ‘영선사’정도였고, 일본처럼 유학생 파견에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중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일본에 설립된 ‘조선장학회’가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구한말 정쟁의 와중에서 일본에 파견된 유학생들에 대해 조선정부가 지원을 중단하자 일본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 것이 바로 조선장학회였다. 친일파를 양성하려는 의도에서였다고 치부하더라도 어쨌든 조선왕조의 근대화에 대한 의지와 전략에 문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번역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서구문화의 수입상’이라는 학계의 극단적인 평가처럼 외국학문과 이론에 대한 의존도가 심하면서도 제대로 된 번역서나 이에 대한 평가가 인색한 것이 우리의 기막힌 현실이다. 이는 세계 최대의 ‘번역왕국’이라는 일본에 빌붙어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중역해온 국내 지식인들의 행태와도 관련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학>이 <사회평권론>으로 번역되면서 일본 자유민권운동가들의 성전(聖典)이 된 일화나 당시 양산된 번역서들에 대한 평가, 번역과 근대의 문제에 대한 마루야마와 가토의 문답은 우리에겐 아직도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릴 뿐이다.
국내에서도 최근 다양한 외국어를 소화할 수 있는 인력이 축적되고 <미메시스>(열린책들) 같은 번역서 가이드북이 나오고 있을 정도로 번역에 대한 인식이 제고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공들인 번역서가 논문 한편 정도로밖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학계의 현실은 100년전의 일본 메이지시대보다 낫다고 할 수 없다. 근대의 완결과 다른 언어의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번역의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가 된 것이다. 마루야마와 가토의 이 책이 가지는 의미도 이 점에서다. 전문적이고 어려운 주제이지만 문답의 형식으로 평이하게 서술돼 있다. - 최영창 기자 ( 2000-08-30 )
세계일보 : 전세계에서 번역되는 중요한 저작물들은 거의 빠짐없이 일본어로 번역됐고 지금도 꾸준히 번역되고 있을 만큼 일본은 '번역 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인들의 왕성한 지적 욕구과 외국의 문물을 자신들의 것으로 '번역'해내는 솜씨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의 이러한 문화는 어떻게 형성됐을까. 일본의 근대화과정에는 또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본어로 번역된 서구의 지식을 중역(重譯)함으로써 한국의 근대가 일본의 번역문화에 지대한 빚을 졌음을 시인한다면 그 과정에서 파생했을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최근에 출간된 '번역과 일본의 근대'(임성모 옮김.이산)는 이러한 궁금증을 마루아먀 마사오(86.전 도쿄대학 교수)와 가토 슈이치(81.리쓰메이칸 대학 객원교수) 등 일본의 대표적인 두 지성의 대담을 통해 상세하게 풀어주는 책이다.
한국에서는 'society=사회'라는 번역을 아무런 의심없이 무심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일본에서 처음에 'society'의 번역어가 '사회(社會)'로 정착되기까지는 그 의미를 최대한 정확히 전달하기 위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우리는 단순하게 일본에서 정착된 번역어를 쉽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계약관계에 의해 성립된 인간집단'이라는 'society'의 고유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이밖에도 한국에서 무의식적으로 번역하는 많은 단어들도 사실은 일본인들이 무수한 고민과 오역(誤譯)의 과정을 거쳐 정착시킨 번역어들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심각한 문제의식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수세기 동안 지식과 문자까지 전수받아왔지만 19세기에 접어들어 서양인들이 일본에 출몰했을 때만 해도 서양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중국 쪽은 정보는 많은데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았지만 서양 쪽은 사람은 오는데 정보는 없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서양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서둘러서 예민하게 반응했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조차도 일본과는 달리 태평한 자세를 취했다. 일본이 근대화 과정의 선두에 서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다. 여기에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인의 아시아 인식에 엄청난 변화가 초래됐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메이지 유신'을 통해 많은 유학생을 서구로 보내 근대화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대담에 나선 학자들은 이같은 저간의 사정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면서 일본의 번역문화는 메이지유신보다도 훨씬 이전의 역사에 뿌리를 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한자를 자국의 문자로 인식하고 생활했던 일본인들이 에도시대에 이르러 한자를 외국어로 인식, 번역을 통해야만 자신들의 문화에 접목시킬 수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옮긴이 임성모씨는 "한국의 근대는 서구,중국,일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삼중번역(三重飜譯)된 근대에 불과하다"며 "근대어의 성립과정에 대한 고찰을 통해 근대 자체의 개념사를 올바로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 조용호 기자 ( 2000-09-06 )
조선일보 : 동아시아의 '근대'는 서세동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것은 한 지역에 불과했던 유럽이 자신을 전지구적으로 확대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문명의 조우, 세계관의 충돌, 그리고 마침내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세계 질서의 구축과 재편 작업이 뒤따랐다.
그 과정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현실 적응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연코 일본이 앞섰다. 메이지 초기 일본의 근대화는 눈부신 것이었다. 그런 행보에 '번역' 작업이 박차를 가했다. 번역서가 거리를 넘쳐 흘렀다. 정부 차원에서 번역을 관장했던 번역국이 존재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번역은 '베끼기'가 아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대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경험, 언어학적인 지식, 그리고 지적인 능력이 두루 갖추어져야 한다. 마침 일본의 경우, 번역은 에도 시대 유학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지적인 유산이기도 했다. “졌다고 생각하면 바로 상대국에 유학생을 보낸다”는 특유의 발상 역시 단단히 한 몫 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두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1914~96)와 가토 슈이치(1919~ )가 번역과 일본 근대의 상관성에 대해 나눈 지적 대화의 산물이다. 그들은 근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과연 무엇을, 어떻게, 왜 번역했는지,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조건은 무엇인지, 심지어 거기에 따르는 문제점까지 열심히 따져 묻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번역은 일차적으로 서구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수많은 번역서들 가운데, 초기에는 각국의 역사, 군사관계, 과학기술, 화학 분야에 관한 책이 많았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과 휘턴(Henry Wheaton)의 <만국공법>(Elements of International Law) 번역서가 막부(막부) 말기의 2대 베스트 셀러였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그리고 <만국공법>의 번역은 새로 주어진 '근대' 국제질서, 이른바 국제법을 이해하는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번역은 곧 ‘반역’이라 하지 않던가. 때로 번역은 예상치 못한, 그래서 흥미로운 일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 예로, 당시 거세게 일던 자유민권운동의 성경(Bible)처럼 되었던 <사회평권론>은, 다름아닌 스펜서(H. Spencer)의 저서 <사회정학(사회정학: Social Statics)>을 번역한 것이는데 사실 그 책은 진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부동산, 판권 등 아예 완전히 새롭게 만든 단어는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전부터 있던 한자어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미묘한 의미의 변용이 일어나곤 했다. 또 한자어와 원어 사이에 의미의 격차가 생겨나, 오해를 낳기도 했다. 예건대 한자어 ‘자유’와 ‘freedom’ ‘liberty’의 의미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거리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유’에 대한 오해는 상당 부분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이웃나라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에게 진지한 문제 하나를 던지고 있다. "정작 문제는 우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서, 그 시대 우리 지식인들은 중국과 일본, 특히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번역 작업에 의거해, '간접적으로' 서구를 이해하지 않았던가. 정면 대결 혹은 직접적인 사상적인 고투가 없었다는 것, 다시 말해 번역 작업이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날, 서양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결여했거나 아니면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을 품었던 것 역시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번역과 한국의 근대’를 되돌아보고 재구성해내는 작업은 주체적인 우리 학문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 할, 이미 거쳤어야 할 통과의례 같은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김석근 (연세대BK21교수ㆍ동양정치사상) ( 2000-09-02 )
중앙일보 : 김용옥이 고백한 '마루야마 텐노오(天皇)' 〓도올 김용옥은 자신이 유학중이던 1970년대 일본 지식사회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4-1996)를 언급할 때 각별한 경의의 표시로 '마루야마 텐노오' 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회고한다.
2차대전 직후 펴낸 '일본정치사상사연구' 한 권으로 일본 학계의 스칼라십을 서구에 과시하며, 패전국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는 것이다.
마루야마의 책은 에도(江戶)시대 사상가 오규 쇼라이(荻生 徠)(1666-1728)연구서. 당시 마루야마는 오규야말로 인의(仁義)의 주자학(성리학)이 전부였던 동아시아의 컴컴한 중세를 딛고 근대의식의 씨앗을 뿌린 사상가로 규명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가 윤리와 정치를 분리해낸 '동양의 마키아벨리' 라는 것이고,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는 민족국가 형성도 '준비된 게임' 이었다는 논리다.
국내 학계의 입장에선 떨떠름하다. '성리학이라면 우리가 한 수 위' 라는 자부심 때문이 아니다.수백년의 조선 성리학, 주자학 해체론자들인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로 전개되는 학문적 두께를 철저한 문헌연구를 통해 현대의 언어로 재해석해낸 업적이 과연 있는가 해서 얼굴이 후끈거리기 때문이다.
◇ '마루야마 가이드' 앞세운 메이지 산책〓번역 출간된 '번역과 일본의 근대' 는 기본적으로 대화체라서 읽기 버겁지 않다.그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눈다는 느낌이 살아있는데, 한번 생각해보라. 일본 학계의 거물을 현지 가이드로 내세워 동아시아 근대사를 반추해볼 수 있는 행운이 어딘가. 단 긴장감은 늦출 수 없다.
'일본 근대〓한반도의 수난사' 때문만은 아니고, 서양사 발전단계를 준거틀로 삼아 '우리도 그런 것이 있었다' 고 꿰맞추는 식의 멘탈리티가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본디 이 책은 이와나미서점 기획 '일본근대사상대계' (전23권)의 부산물. 원래는 기획방향을 잡기 위한 대담이었으나 내용이 좋자 독립된 책으로 펴냈다.
◇ 메이지 시대 베스트셀러들〓책 내용은 쇄국주의 이념과 막부체제를 몰아내고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에 유학과 시찰 이상으로 영향을 많이 준 것이 번역서의 유례없는 홍수라고 보고, 그 이유를 분석한다.
과연 그 '일본적 현상' 은 중국 조선 등과 사뭇 달랐던 발빠른 대응방식. 일본은 만국법률 등 국제법분야가 가장 먼저 홍수를 이뤘고, 이후 서양사로 관심이 넘어갔으며, 다시 유별났던 화학 등 자연과학을 거쳐 문화예술 분야 번역홍수로 이어졌다는 것이 마루야마의 분석이다.
당시 번역 홍수는 과연 엄청났다. 6-7년 새 수 만종이 출판됐고, 해적판까지 1백만부를 넘기는 책도 드물지 않았다.
마루야마에 따르면 막부 말기의 2대 베스트셀러는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 과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 . 근대법의 고전인 '만국공법' 은 중국어 재번역본. 문제의 텍스트 '만국공법' 은 중국에서는 관청에서 잠을 잤고, 국내에는 아직도 번역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 지식인들에게 막강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마루야마는 놀랍게도 '데모크라시' 개념을 알린 알렉시스 토크빌, 존 스튜어트 밀을 꼽는다.
◇ 일본 특유의 '번역주의' 배경이 무섭다〓마루야마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무래도 나는 오규에 넋이 빠졌나?" 그러면서 일본만의 번역주의의 특징이란 '중국어와 영어는 외국어' 임을 분명히 한 오규 쇼라이의 근대의식에 뿌리를 둔다고 언급하는데, 그 점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이다.
한문 고전을 완전히 소화했던 역량을 가졌던 오규는 폭탄선언을 한다고 한다.우리가 읽는 '논어' 는 외국어일 뿐이다 라고. " '유붕이 자원방래 하니' 하는 식으로 논어를 읽어서는 일본냄새가 나지 않는다. 완전히 일본말로 번역해 읽자. " 는 것이다.
어떤가. 3백년전 오규의 폭탄선언과 일본의 맹렬한 근대 따라잡기 노력이 위력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굳이 '동양의 라틴어' 한문을 민족어로 착각하던 조선 사대부 중화의식의 한계를 들먹일 필요가 있는가? 김용옥으로 시작했으니 김용옥으로 매듭을 짓자.
"자랑스런 한국에는 번역은 고사하고 표점(標点)작업이 된 '주자어류' 조차 없다. 일본에는 완역에 가까운 '주자어류' 가 에도시대부터 존재했다. 그들은 주자를 논하기 앞서 주자의 저작들을 정확한 자기말로 이해했다. 이런 차이가 양국의 주자학 전개에 다른 양상을 가져왔다." - 조우석 기자 ( 2000-09-01 )
한겨레신문 : 흔히 일본을 `번역의 왕국'이라 한다. 전세계에서 출간되는 중요한 저작들이 거의 빠짐없이 일본어로 옮겨지고 있는 형편이니 그렇게 부를 만도 하다. 하지만 이 왕국의 지위는 하루 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다. 19세기 중엽 이래 일본은 말 그대로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 번역사업을 벌였다. 왜 일본은 일찍부터 외국 저작을 가져다 자기 나라 말로 옮기는 데 몰두했을까?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와 가토 슈이치(1919~)가 함께 만든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일본의 번역 열풍의 기원과 그것이 지닌 정치적·역사적 의미를 풀어놓은 책이다.
지난 98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에서 출간된 이 책은 애초 이 출판사가 기획한 시리즈인 `일본근대사상대계'의 편집과정에서 곁가지로 벋어나온 것을 따로 정리한 것이다. 마루야마와 가토는 이 시리즈 중 한 권인 <번역의 사상>의 공동편집자였는데, 편집을 진행하던 도중 마루야마가 건강을 잃자 가토가 그를 찾아가 번역에 관한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문답한 것이 이 책으로 갈무리됐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엮여 있어 통상의 이론서가 보여주는 치밀한 짜임새는 부족하지만, 번역과 근대화의 상관관계를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 살펴가는 과정이 자못 흥미롭다.
두 사람의 문답 혹은 대담은 몇 가지 논점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졌다. 요컨대,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왜 번역에 그토록 힘을 썼는가, 어떻게 번역을 했는가, 무엇을 번역했는가, 그리고 번역이 끼친 사회적 영향은 무엇이었는가'가 이들의 논점이었다. 두 사람이 이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제기하는 것이 `번역의 역사적 배경'이다. 그 배경이라는 것이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근대적 국가체제를 형성하는 메이지 유신(1868년)을 전후한 대외관계다.
일본은 미국의 페리함대의 내항(1854년)으로 서구의 무력에 압도당한 직후 재빨리 변신해 “서양으로부터 배우자”를 슬로건으로 내건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배척의식이 가장 강했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가장 먼저 `전향'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 전향을 주도한 것이 무사계급인데, 마루야마는 일본의 근대화에서 무사계급이 아니라 문치관료가 지배계급이었다면 이런 기민한 반응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서양을 배워 어서 힘을 기르자는 것이 이들의 뇌리에 박힌 생각이었다. 근대화를 곧 서구화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서둘러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고 사찰단을 파견한다.
그러나 사람을 내보내는 것만으로는 서양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었던 탓에 일본이 정책적으로 취한 것이 번역이었다. 군사·법률 같은 나라 세우기에 직접 필요한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역사·화학·의학·문학·예술 등 온갖 분야의 책이 다 번역됐는데, 메이지 시대 초기에 벌써 “몇 만 권”이 일본말로 옮겨졌다. “번역의 홍수”였다. 얼마나 많이 나왔던지 번역서 읽는 법을 안내하는 책자(<역서독법>)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 시기에 잠깐 등장한 것이 “영어를 국어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모리 아리노리가 주창한 `영어 국어화론'은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기 때문에 이대로는 서양문명을 일본 것으로 만들 수 없으니 아예 영어를 국어로 채택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영어를 국어로 할 경우 영어를 쓰는 상층계급과 영어를 모르는 하층계급으로 나라가 갈리게 된다”는 바바 다쓰이의 반박을 받고, 또 번역이 제 자리를 잡으면서 스러졌다.
번역물이 하루아침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려면 지적인 토대가 있어야 한다. 마루야마는 여기서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이 토대가 이미 마련됐음을 강조한다. 오규 소라이를 효시로 한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모국어처럼 쓰는 한문을 외국어로 인식하고 번역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다는 것이다. “소라이가 일본어를 수많은 언어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그건 일종의 의식혁명이다.”
쏟아지는 번역서 가운데는 잘된 것도 있었지만 엉뚱한 번역도 많았다.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정학>(Social Statistics)은 <사회평권론>(社會平權論)이란 평등주의 냄새가 강한 제목으로 번역돼 수십만부가 팔리며 당시 타오르던 자유민권운동의 성전이 되기도 했다. 또 별볼일없는 통속서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과 같은 고전과 나란히 번역돼 거의 동등한 영향을 주었고, 노동계급도 없고 노동운동도 없는데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 먼저 번역돼 급진사상을 뿌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앞서 모리 아리노리가 주장한 대로 추상어나 개념에 대응하는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해 한문번역본을 참조하기도 하고 유학의 용어를 빌려와 무수한 새 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는 과정에서 무엇을 번역하느냐 또 어떻게 번역하느냐를 놓고 번역 활동은 진보 사상과 보수 사상 사이의 치열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성격을 띠게 됐다. 이 싸움은 결국 보수적 근대화 세력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청일전쟁을 거치며 제국주의화한다. - 고명섭 기자 ( 2000-09-04 )
한국일보 : 흔히 일본을 번역왕국이라고 한다. 전 세계에서 출판되는 거의 모든 중요한 저작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나온다. 일본의 근대화에 있어서도 번역을 빼놓을 수 없다. 메이지 시대는 번역의 홍수를 이룬 시대였다. 6~7년 사이에 서양의 고전 수만권이 번역됐다. 서양에 대한 유학이나 견학 이상으로 번역은 일본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양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도쿄대 교수와 가토 슈이치 리쓰메이칸대 교수의 대화형식으로 기록된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번역의 문제를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고찰한 책이다. 우리의 근대 지식이 주로 일본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통해 들어왔다는 점에서 우리의 번역어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송용창 기자 ( 2000-09-01 )
본문읽기
본문 15~20쪽에서
1. 번역 문화의 도래
시대상황을 생각한다
- 가토 : 새삼스럽지만 여쭙고 싶은 것을 몇 가지 들자면 대략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선 전제로서 '번역의 배경'입니다. 곧 메이지시대 초기의 대외관계지요. 그리고 나서 첫째로 '일반적으로 무엇을 번역했는가, 무엇을 번역할 필요가 있는가',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번역을 했는가', 셋째로 '왜 번역주의를 취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일본과는 달리, 왜 그토록 철저하게 번역주의를 취했던 것일까' 하는 문제지요.
그것은 도리어 오늘날의 중국과 비슷합니다. 넷째로 '어떻게 번역했는가'라는 겁니다. 어떤 개념을 어떤 식으로 다루었는가 하는 좀 구체적인 이야기가 되겠죠. 마지막으로 '메이지 시기 일본의 번역주의가 남긴 공과'랄까, 다시 말해서 나중의 일본 문화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정도의 화제면 어떨까 싶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가토 : 맨 처음 전제 부분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도, 제가 이런 식으로 좀 생각해 본 것이 있는데 우선 그 대강을 말씀드리고 나서 바로잡아 주신다 할지 의견을 듣고 싶은데요....
메이지까지, 아니 18세기말까지 일본의 대외관계는, 조선통신사나 나가사키를 통한 네덜란드가 있긴 했어도, 크게 봐서 주로 중국과의 관계였습니다. 중국으로부터도 '몽골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이랄 것은 없었고, 에도 시대(1603~1868) 이전에는 교통도 꽤나 힘들었는데, 에도 시대가 되면서부터는 쇄국이었지요. 한반도와의 관계를 차치해 둔다면 외국과의 물리적인 접촉, 특히 인적 교류는 드물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사람도, 남북조 시대(1336~1392)와 무로마치 시대(1338~1573)야 어찌됐든 에도 시대에는 아주 적습니다. 요컨대 중국은 직접적인 접촉이 생겨나기에는 너무 먼 나라면서도 정보가 들어오기에는 충분히 가까운 나라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와는 달리 서양은 19세기초부터 직접 접촉의 형태를 취했습니다. 배가 출몰하고 사람이 나타나서, 수적으로 얼마 안되었지만, 중국과는 다르게 좀더 직접적으로 대하고 교섭해야 하는 상대로서 등장한 것이지요.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 보면, 물론 서양은 대항해 시대 이래로 항해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서양인이 일본에 오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해안까지 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서양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습니다.
이쪽에서 보자면 중국과는 전혀 달라서, 서양은 인도보다도 멉니다. 훨씬 더 저쪽이지요.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에는 [거리상으로] 너무 멀다고 하는 상태가 갑자기 생겨난 거지요. 그런 상태가 대개 반세기 정도 계속됩니다. 상대방이 해안에 나타나서, 얼굴을 보려고 마음만 먹으면 가물가물 보이는 상황인데도, 도대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의 나라는 어떤 상황인지 도통 모르는 겁니다.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가 발생했던 거지요. 중국과는 정반대로 말입니다. 중국 쪽은 정보는 많은데 사람이 오지 않고, 서양 쪽은 사람은 오는데 정보는 없는, 그런 역전 현상이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이거 큰일이군, 정보를 얻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문턱까지 와 있는 상대방을 모른대서야 곤란하니까, 어떻게든 정보를 얻기 위해 서둘러서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마치 태평양전쟁 뒤 연합군 점령기의 일본이 미국, 나아가 해외 사정에 대한 정보를 서둘러서 수집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지요. 일본이 예민하게 반응한 데 비하면 중국 쪽은 조금 태평스러워졌다고 할까요.
= 마루야마 : 아니, 중국은 조금이랄 정도가 아니라…
- 가토 :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한 건 중국인데, 중국인보다도 막부 말기의 일본인 쪽이 더 열심히 영국 사정을 알려고 했던 거지요.
= 마루야마: 중화(中華) 의식이 있으니까요.
- 가토 : 중국은 중화의식이 있기 때문에, 일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인데다 전쟁에 졌으면서도 아직 뭐랄까 '이거 큰일났군' 이라는 위기감이 없었고…
= 마루야마 : 중국이 보기에 전쟁에 강하다는 것은 곧 문화의 수준이 낮다는 증거지요. '중화'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禮)적인 문화질서라서 '문(文)'이 '무(武)'에 비해 우월하다는 관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때문에 억지를 부려서 "어차피 놈들은 오랑캐니까 완력은 강하게 마련이야"라는 이유를 갖다 댈 수 있지요.
- 가토 : 오히려 놀라워해야 할 점은 아편전쟁의 배상에 응할 수 있었던 청의 국력입니다. 하지만 일본은 아편전쟁의 결과에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일본은 사무라이가 통치하고 있는 '상무(尙武)'의 나라니까 오래도록 존경해 왔던 성인(聖人)의 나라가 오랑캐한테 그토록 무참히 당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지요. 아편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일본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거 큰일이군'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 '정보'라고 하는 문제가 다급해집니다.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은 일본인의 아시아 인식에 대해서는 둘 다 엄청난 일이었죠.
일본의 행운
- 가토 : '이거 큰일이군'이라는 일본인의 반응이 극한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메이지유신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메이지유신 직후에 많은 유학생을 서양으로 보내고 구미 시찰을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고, 서양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때 서양인은 일본 해안까지 왔습니다만, 19세기 후반은 일본에게 놀라울 만큼 운이 좋은 시기였습니다. 서양이 일본을 침략할 만한 처지가 못 되었던 거죠.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보불전쟁을 치렀고, 미국은 남북전쟁 와중이었으니 그럴 형편이 아니었어요.
= 마루야마 : 그 전에는 영국·프랑스와 러시아가 크림 전쟁을 치렀습니다.
- 가토 : 모두들 바빠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은 잠시 접어 두고 있는 틈에 일본은 민첩하게 근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가지 요인이 있는 거지요. 하나는 일본인의 반응이 빨랐다는 것, 또 하나는 상대방이 경황이 없었다는 겁니다. 둘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빠졌더라도 일본은 구미의 압력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을 겁니다. 상대방이 바빠서 침략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동안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1904년까지였다고 생각합니다.
러일전쟁 때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군사 간섭이라는 형태로 서양의 대국이 나섰습니다만, 그것은 러시아 쪽에서 볼 때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일본 쪽에서는 오히려 천우신조였고요, 만약 20년만 더 빨랐다면 러일전쟁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겁니다.
= 마루야마 : 하지만 삼국간섭이 있잖습니까?
- 가토 : 삼국간섭은 러일전쟁 10년 전이고, 그때도 마찬가지로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지요.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번역 문제는 요컨대 19세기라고 한다면 페리(1794~ 1858) 함대의 내항 때부터 러일전쟁 때까지, 아니면 메이지 정부가 계획적인 '근대화'에 나선 때부터 러일전쟁 때까지, 상대방이 쉬고 있는 사이에 이쪽은 서둘러서…
=마루야마 : 최소한도의 일은 한다. 그래서 근대국가를 만든다는 거지요.
- 가토 : 그러려면 철저하게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고 따라서 번역이 필요해지게 되는, 바로 그것이 배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양으로부터 배우자'. '서양이다, 서양이야'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있던 사람들은 도쿠가와 말기에 모두 영어로 바꿉니다. 미쓰쿠리 린쇼(1846~1897)처럼 사전도 없이 갑자기 프랑스어를 읽어 제치는 사람도 나오지요. 그들이 선두 그룹이고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운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서, 아무튼 별의별 서양 책을 다 번역합니다. 그러한 행위에 따른 현상으로 예컨대 자유민권(自由民權)이라는 것도 나왔던 게 아닐까요? 그것이 근본적인 배경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바빴다고 하는 국외 사정은 일본 쪽에서는 그다지 강조하지 않습니다. 일본 쪽의 반응이 민첩했다고 하는 점만 강조하고 말이죠.
= 마루야마 : 일본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 해석은 국제정치를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상식입니다.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가 본격화되기 직전에 세계는 서로 전쟁을 하느라 바빴습니다. 특히 크림전쟁은 영국·프랑스와 러시아의 차르가 거국적으로 일으킨 대대적인 전쟁이었고 남북전쟁의 사상자 수도 엄청났습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할 처지가 못되었던 겁니다. 그 두가지 사정 때문에 일본에 대한 압력이 급격히 감소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겠죠.
- 가토 : 거리 문제도 있었겠지요. 어쨌든 제일 멀었으니까요. 가는 데만 해도 돈이 들고 말이죠.
= 마루야마 : 그건 그렇습니다. 다만 역으로 말하자면, 막 생겨난 증기선은 항속거리가 얼마 안되니까 아무래도 중국과의 중간지점에 연료용 땔감을 보급할 항구가 필요했지요. 그래서 개항이 빨라졌다는 사정도 있습니다. 오히려 페리 내항 이후에 저쪽 사정 때문에 외압이 줄었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메이지유신의 기초를 다졌던 거지요. 따라서 일본이 완전히 식민지화될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었습니다만, 중국이나 조선의 경우와 비교할 때, 만약 막부 말기의 양이론을 고수한 채 돌진했다면 조차지라는 명목으로 영토의 일부를 외국에 빼앗겼을 가능성은 상당히 있었던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