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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8월 30일 금요일]
『대동야승』 제7권 [해동야언 1] 세종조
<압록강-백두산-두만강 국경 개척사> 중 김종서의 상소
앞에 올린 북쪽 국경 개척사 중에서 말미의 <김종서 상소>를 떼어내어 올린다. 상소를 읽으면 한치라도 국토를 넓히고자 하는 구구절절 김종서 장군의 충군애국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김종서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어찰(御札)을 뵈옵고, 밤낮으로 외고 생각하기를 여러 날을 하여,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지극히 인자한 마음과 나라를 걱정하시는 원대한 헤아림을 몸으로써 느끼옵고 감격을 금할 길이 없사오나, 신이 재주가 용렬 하와 임금님 생각에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가만히 들은 바에 의하면, 위엄과 덕을 널리 입히어 나라를 백 리 넓힌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주 문왕(周文王)보다 더한 이가 없고, 무력으로써 땅을 천 리를 개척한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한 무제(漢武帝)보다 더한 이가 없습니다. 또 사리에 어둡고 나약하고 서툴러서, 날로 그 땅을 축내어 끝내 떨치지 못한 유선(劉禪) 따위는 본래 말할 것도 없습니다.
덕으로써 나라를 개척한 이는 얻기는 쉬우나 잃기는 어려운 법이요, 힘으로서 땅을 개척한 자는 얻기는 어려우나 잃기는 쉬운 것이오니, 일은 같으나 방법이 같지 않습니다. 그 얻음과 잃어버림, 쉽고 어려움의 차이는 도(道)와 부도(不道)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도가 있으면 비록 저들의 경계에서 다툰다 하더라도 가하거늘, 하물며 우리 강토를 되찾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또 듣기에 고려 태조가 힘으로는 능히 삼한(三韓)을 통합하였으나, 위엄이 북방에 미치지 못하고 다만 철령(鐵嶺)을 경계로 삼았고, 예종(睿宗) 때에 이르러서는 모신(謀臣)들의 슬기를 모아 오랑캐를 꾀어서 죽이고 9성을 설치하였었는데, 비록 잠깐 얻었다 도로 빼앗겼으므로 이익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경계와 판도가 분명하여져서 후세에 남긴 혜택이 그지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태조께서는 하늘이 주신 성무(聖武)로서 북방에서 일어나시어, 대동(大東 우리나라)을 다 차지하여 남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으로는 두만강에 닿아서 공주(孔州)ㆍ경성(鏡城)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의 7고을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동방에서 나라를 연 이래로 일찍이 보지 못한 성업(盛業)이었습니다.
또 태종께서 나라를 이어 도(道)가 정치에 젖어, 잘 다스려진 지 이미 오래되어 오랑캐를 백성으로 교화하고, 풍속을 개선하여 나라를 굳게 지켜 왔으니,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태평한 지 오래되어 지키는 신하가 방어를 잘못하여, 경성(鏡城) 이북이 적의 소굴에 빠졌는데, 태종께서는 이를 진념(軫念)하시어 우선 경원(慶源)을 부거(富居)에 두어 넌지시 복구의 뜻을 표시하였사오니, 오랑캐를 물리치고 옛 강토를 회복하는 것은 전하께서 뒤를 이어 하실 일입니다.
앞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아뢸 적에 경원을 줄여서 용성에다 붙이면, 북방의 포치(布置)가 알맞게 되고 민폐가 가시리라고 하였으나, 전하께서 생각하시기를 조종이 지켜온 한 자 땅, 한 치의 흙도 버릴 수 없다고 고집하시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부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시어, 그 후 그 의논이 다시 일어나 시끄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에 소신에게 명하여 대신에게 가서 의논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석막(石幕)에 두어서 국경을 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이제 북방에 있어서 어느 곳이나 보지 못한 것이 없고, 어떤 말이고 듣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부거와 석막은 모두 국경을 삼을 곳이 못 되오며, 용성도 관새(關塞)의 땅이 아닙니다. 의논하는 자가, ‘용성이 진(秦) 나라의 함곡(函谷)과 같아서 좁고 험하기 비길 데 없어, 여기서 지키면 오랑캐가 감히 우리를 향하여 간교를 피울 수 없으며, 우리 백성이 베개를 높이하고 마음 놓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나, 이것은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막을 만한 물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험한 진을 설치할 것이며, 의거할 만한 산이 없으니 무엇으로써 튼튼한 요새로 삼겠습니까. 참으로 이른바 사방으로 흩어지고 사면으로 싸워야 할 곳입니다.
만약, 네 고을의 요충지로써 큰 진(鎭)을 만들어 네 고을의 응원으로 삼는다면 괜찮지만, 만일 의논하는 자의 말대로 용성으로써 경계로 삼았다가 오히려 적에게 침입당하는 걱정을 면하지 못하면, 뒤에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마천령(摩天嶺)을 경계로 삼으려 할 것이요, 그래서도 오히려 면하지 못하면 철령을 경계로 삼고야 말 것이오니, 전조 (前朝 고려)의 일을 거울삼을 만하옵니다.
신이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역대의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유(劉)씨의 한(漢) 나라가 풍패(豐沛)에 대하여, 이씨의 당 나라가 진양(晉陽)에 대한 것으로써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땅을 버리고 지키지 않으며 창업의 땅을 잊어버리고 회복하지 않는다면, 선조가 이룩하여놓은 일을 잘 이어받을 후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잇는다고 하겠습니까.
또 용성을 경계로 삼는 것은 불의(不義)한 것이 한 가지요, 불리(不利)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조의 강토를 줄이는 것이 한 가지의 불의요, 산천의 험함이 없는 것이 한 가지 불리함이요, 수비의 편리가 없는 것이 두 가지의 불리입니다. 두만강을 경계로 삼으면 한 가지의 대의(大義)와 두 가지의 큰 이익이 있습니다. 왕업을 일으켰던 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대의이오며, 긴 강의 험함에 의거하는 것은 한 가지의 큰 이익이요, 수비에 편리함이 있으니 두 가지의 큰 이익입니다. 그러니 용성을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은 모자라는 생각입니다.
하늘은 도(道)가 있는 자를 도와서 원흉(元兇)은 자멸하고, 천한 오랑캐는 스스로 쫓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전하께서 기회를 타고 포치(布置)를 알맞게 하여 한 명의 군사도 힘들이지 않고 한 사람의 백성도 다치지 않고서 옛 강토를 회복하고, 거기에 네 고을을 두면, 선조의 뜻과 업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더욱 빛냈다고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또 듣기에, ‘큰일을 이룩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폐단을 돌보지 않으며, 큰 업을 세우는 사람은 작은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다.’ 합니다. 일이 크면 폐단이 반드시 생기고, 업이 크면 해가 따르는 것은 다만 오늘의 일만이 아니오니 옛날부터 그러하옵니다. 이번에 네 고을을 설치하는 것은 과대(誇大)함을 좋아함이 아니요 선조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오니,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사오며, 선왕의 업을 잇는 것이오니 이보다 더 중한 의(義)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조그마한 폐단을 염려하며 작은 해를 걱정하오리까.
하물며 첫해의 눈이 비록 많이 왔다 하오나 마소가 심하게 손실된 바 없고, 다음 해의 병이 비록 많았다 하오나 백성이 그다지 많이 죽은 것이 아니옵니다. 만약 의논하는 자의 말과 같다면 농우(農牛)와 전마(戰馬)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군졸이 많고 장정이 남아돌아가 오히려 지난날의 수효에서 감소된 것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그 말이 실정보다 지나쳤음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지난해의 일로 말하면 그 화가 비록 중했다 하나, 흥부(興富)의 죽음과 승우(承祐)의 패군(敗軍)과 용성의 대패에 비하면 참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9년 동안의 홍수와 7년 동안의 가뭄이 요(堯)임금과 탕(湯)임금의 성덕에 손실을 줄 수 없었고, 40만의 흉노(匈奴)나 50만의 돌궐(突厥)이 한(漢) 나라와 당(唐) 나라의 큰 공에 무슨 해를 끼쳤습니까. 하물며 1년도 못 되는 재앙과 수천도 못 되는 도적이 무엇이 걱정이며 두렵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옛날의 호걸은 만리장성을 쌓아 오랑캐를 막았고, 천리의 긴 둑을 수리하여 하수(河水)를 막았으며, 또 그 일을 하는 데 백성들이 10년이란 오랜 세월을 보내었으니, 이것은 좀 지나친 일이라 하겠사오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그 혜택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북쪽이 말갈(靺鞨)과 접하고 있어, 여러 번 침략을 받음이 전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으니, 성곽의 수리와 갑병(甲兵)의 훈련이 마땅히 다른 도에 비하여 백배나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금년에 한 성을 쌓고 내년에 또 한 성을 쌓아, 성을 쌓지 않는 해가 없다 한들 의(義)에 해로울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번 부거(富居)를 경계로 했을 적에는 아직 몇 자의 성도 없었습니다. 국경의 고을이 이러하였으니 하물며 용성 이남의 고을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변방에 대비하는 계책이 매우 허술하여, 중국 사람이 비웃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 전하께서 진념하시고 모신(謀臣)이 의견을 바쳐 백성들이 자식처럼 모여와서 이미 회령(會寧)에는 성을 쌓았고, 또 경원(慶源)에도 쌓았는데 역사(役事)가 시기를 잃지 않고 일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갑산(甲山)과 경흥(慶興)은 스스로 수축(修築)하여 모두 보배로운 성을 가지고 있으니, 북방의 걱정이 10중에 7ㆍ8이 이미 사라졌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은(殷) 나라가 귀방(鬼方)을 치는 데 3년이 걸렸고, 주(周) 나라의 수자리를 살던 자들이 말하기를 ‘내가 보지 못한지가 지금껏 3년이나 되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어느 달에나 내가 이기고 돌아갈고.’ 하였으니, 이것을 보면 은나라와 주 나라의 백성들은 오래도록 수자리를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뒤 오랑캐들이 더욱 세력을 펴서 정벌과 방비가 더욱 확대되었으니, ‘돌아오니 백발이 되었는데 도로 수자리 신세로다.’ 하는 시로써 알 수 있습니다.
비단 중국뿐이 아니오라 고려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철령을 국경으로 삼았다가, 뒤에는 쌍성(雙城)을 경계로 삼아, 하도(下道)에서 낸 군사를 보내어 이곳에서 수자리 살게 하였으므로, 수자리는 늙도록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부자가 서로 알지 못하였으니, 그 길이 얼마나 멀며 수자리를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를 알 것입니다.
오늘의 일로 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갑인년 봄부터 병진년 사이에 네 진을 설치한 이후로는, 홍원(洪原) 이남이 편안하고 조용해졌습니다. 다만 지난해 겨울에 원근의 야인이 동요하려 하므로 위엄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또 북청(北靑) 이북의 관하 소속 군졸이 아직 교대 휴가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홍원(洪原)ㆍ함흥(咸興)ㆍ정주(定州)ㆍ예원(豫原) 네 고을의 정규군 5백 명을 내어 겨울 방어에 임하게 하고, 다음엔 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덕원(德源)ㆍ용진(龍津)ㆍ안변(安邊)ㆍ문천(文川) 고을의 5백 명을 내어 봄에서 여름까지 지키게 하였으니, 다만 두 번만 나가면 그만입니다. 신이 계축년 겨울에 명을 받은 이래로 부거와 갑산에는 모두 유방군(留防軍)이 있고, 남도의 번상(番上)하는 자와 번휴(番休)하는 자가 길에 끊이지 않으므로, 말이 죽고 군졸이 쓰러지는 것을 신이 목격하였으니, 오늘의 일로 말씀드리면 그 노고에 본래 차이가 있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고을을 옮기는 것은 큰일입니다.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것은 옛사람이 깊이 염려한 바이온데, 하물며 조용히 살고있는 우리 백성을 저 늑대와 이리의 땅으로 옮기는 것이겠습니까. 원망하고 싫어하지 않는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성상의 계획이 신묘하시어 한 사람의 백성도 벌주지 않고서 수만이나 되는 무리가 겨우 한 달 남짓한 사이에 새 땅에 다 모여들어, 대사가 쉽게 이룩되고 새 고을이 길이 세워졌으니, 저 잠깐 동안 성공하였다 곧 실패한 것과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뜻밖에 부박한 무리가 첫해에 큰 눈이 왔느니, 다음 해에는 큰 병이 돌았느니 하여 서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어 인심을 선동 현혹케 하여, 편안히 살고있는 자가 움직이려 하고 머물러 있는 자가 가고자 하여, 거의 큰일을 저해하여 전공(前功)을 망칠 뻔하였사오나, 다행히도 전하의 명쾌하신 단안에 힘입어 근거 없는 말은 저절로 사라지고 민심은 자연히 안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극히 인자하신 은혜가 백성에게 깊이 스며들어, 추워하는 자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백성이 일에 시달려도 그 피로를 잊고, 군졸이 수자리 살기에 지쳐도 그 괴로움을 잊었으니, 옛사람이 말한바, ‘기쁘게 하여 백성을 부리면 백성이 그 괴로움을 잊는다.’ 함이 이것입니다. 오늘 네 고을을 건설함은 오로지 북방에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요, 오늘 성을 쌓는 것은 울타리를 튼튼히 하는 것이며, 오늘 변경을 지키는 것은 역시 저 도적을 막아 우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일은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가벼이 인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요, 과시하거나 공로를 좋아해서 병력을 다하며 무력을 남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백성이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것이니, 이 뜻을 모르고 망령되어 원망을 일으키겠습니까. 어떤 백성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령과 경원에는 이미 성을 쌓았으니, 앞으로 마땅히 쌓아야 할 곳은 종성과 용성인데, 오직 이 두 성이 건축되면 우리들은 걱정이 없을 것이다.’ 하오니, 이 말을 미루어 보면 다른 백성의 마음도 따라서 알 것입니다.
지난 해의 경원의 화는 참혹하다 하겠사오나,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흩어진 자는 모이고 간 자는 되돌아오며, 농사에 힘쓰고 생업을 즐기어 평일과 다름이 없었으니, 오늘의 일로써 이를 보면 뒷날에 목숨을 바치고 떠나가지 않을 것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혹 날카로운 기세를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적진에 나아가 능히 적의 머리를 베는 자도 있으니, 지난날의 사세로써 이를 돌이켜 보면, 훗날 윗사람과 친하고 어른을 위하여 죽는 것도 기약할 수가 있습니다. 경원 한 고을의 일로써 미루어 보면 세 고을 군민의 마음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북방에 있어서 야인의 실정을 잘 보았사온데, 그들은 비록 아비와 아들 사이일지라도 욕심이 나면 서로 죽이고 해치기를 원수와 다름없이 하니, 비록 매일 천금을 허비하더라도 그 마음을 맺기가 어려우며, 혹시 이익으로써 맺어 놓는다 하더라도 그 이익이 다하면 또 독살을 부립니다. 그러하오니 밖으로는 회유하는 은혜를 보이고 안으로는 방어의 태세를 갖추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형세는 저절로 강해지고 적의 형세는 저절로 꺾일 것입니다. 저절로 강해진 세력으로써 저절로 꺾인 틈을 타면 우리는 뜻을 펴게 될 것입니다.
신이 성을 쌓고 병기를 수선하며 군졸을 훈련하고 군량을 저축하기에 급급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만일 성곽이 튼튼하고 병기가 날카롭고 사졸이 훈련되면, 네 진의 백성이 스스로 지키고 제힘으로 싸울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다른 군사의 도움을 기다리겠습니까. 적의 침략이 길이 그치고, 적의 마음이 영원히 복종할 것을 미리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신이 또 생각하옵건대, 처음 새로 옮겼을 때에는 겨우 몇 자 밖에 안 되는 목책으로도 오히려 굳게 지킬 수가 있었사온데, 더구나 이제 석성이 이루어졌으니 스스로 지키는 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민간이나 관청에나 저축해 둔 것이 없어 이로 인해 기근이 들면서도 굶어 죽음을 면하였사온데, 더구나 지금은 매년 풍년이 들어 백성에게는 남은 곡식이 있고, 관에는 남은 저축이 있으니 어찌 식량이 다함을 걱정하오리까. 관청에서는 조금의 요구도 없고 백성은 실오라기 하나의 지출도 없사오니, 무엇 때문에 재물이 다하겠습니까. 백성의 마음은 이미 안정되고 죄를 짓고 도망하는 자는 날로 줄어드니, 무슨 까닭으로 모두 도망쳐버리겠습니까. 종성만 다 쌓게 되면 민력(民力)은 자연히 쉬게 될 것이니, 어찌 힘이 다함을 걱정하오리까. 용성 같은 곳은 형세가 그리 나쁘지 않사오니 빨리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력이 넉넉해지기를 기다린 뒤에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선인(先人)이 나라를 다스리되 백 년이 되어야 잔악함을 이기고 몹쓸 것을 제거한다.’ 하였사오니, 비록 선인이라도 백 년이 못 되고서는 다스려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 이온데, 하물며 이 세 고을을 세운 지가 10년도 못 되었습니다. 어찌 한 가지 일의 득실(得失)로써 대번에 걱정하거나 기뻐하겠습니까.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이루기를 구하지 마시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지 마시며, 작은 폐단을 헤아리지 마시고 조그마한 걱정을 염려하지 마시어, 세월이 흐르기를 천천히 기다리면 허황된 말이 저절로 가라앉고 민심이 자연히 안정될 것이며, 민폐는 사라지고 백성의 원망은 없어져서, 자연히 백성들의 식량은 넉넉해지고 병력은 강해지며 도적들은 굽히어 세 고을은 길이길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드릴 말은 다 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첫해의 큰 눈 내린 것을 말하는 자는 마소가 다 죽어버린 것같이 생각하오나 나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또 다음 해의 돌림병을 말하는 자는 백성이 거의 다 죽은 것처럼 여기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정의 의논은 대부분 저희들은 옳게 여기고 신은 그르다 하오며, 저희들을 가리켜 충직하다 하고 신을 가리켜 간사하다고 하니, 신은 이때에 있어 그지없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제 와서 보건대, 일이란 제각기 자취가 있어 끝내 덮어둘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公)이고 누가 사(私)인지, 공사(公私)와 충사(忠邪)의 가림은 오직 전하의 밝으신 판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예로부터 지방에 있으면서 일을 건의하는 신하는 반드시 참소와 비방을 받아 화를 벗어나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전조(고려)의 신하 윤관(尹瓘)도 그 하나의 예이겠습니다. 윤관은 그 지체가 귀족이요 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화를 면하지 못하였거늘, 더구나 신은 조그마한 공로도 없고 또 큰일을 할 재주도 없어 하는 일에 잘못이 많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신이 절실함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하였다.」
세종이 4군6진을 설치하여 북쪽 국경을 완성하기 전에 이미 태조는 두만강 중하류 남쪽의 공주(孔州, 경원)ㆍ경성(鏡城)ㆍ길주(吉州)ㆍ단천(端川)ㆍ북청(北靑)ㆍ홍원(洪原)ㆍ함흥(咸興)의 7 고을을 설치하였으며, 이어서 태종은 경계 안에 든 오랑캐를 백성으로 교화하고, 풍속을 개선시키며 달랬으나, 경성(鏡城) 이북은 오랑캐들이 주도권을 잡고 위세를 떨치는 지역으로 변하고 말았다. 윤관이 함흥 지역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나, 백성이 없는 9성을 계속 공격해 오는 여진족들의 공세에 밀려 9성을 포기한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러나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세종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 으뜸가는 명분은 두만강 유역이 이씨조선을 일으킨 왕업의 터전이기 때문이었다.
김종서는 “신이 또 들은 바에 의하면 역대의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기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유(劉)씨의 한(漢) 나라가 풍패(豐沛)에 대하여, 이씨의 당 나라가 진양(晉陽)에 대한 것으로써 볼 수 있습니다. 선조의 땅을 버리고 지키지 않으며 창업의 땅을 잊어버리고 회복하지 않는다면, 선조가 이룩하여놓은 일을 잘 이어받을 후손이 있다고 하겠으며, 선조의 뜻을 잘 계승하여 그 공렬을 잇는다고 하겠습니까”라 하며 세종에게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찾아야 한다라고 명분을 제시한다. 이 명분 앞에 세종과 신하들이 무슨 말을 보탤 것인가.
태조 이성계가 전주쯤에서 발신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고, 우리나라 국경선이 고려말과 비슷했을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가 전주에서 기생 문제로 별감과 다투다가 삼척 미로면 활기리로 이주했다. 그러나 싸운 별감이 삼척 수령으로 오자 피하여 가솔과 추종자들을 데리고 덕원, 지금의 원산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은 용비어천가식 정사에 나타난 목조 이안사의 이주기이다.
그러나 합리적 논리에 따라 추론해보자. 정중부의 난의 계획자이자 무신정권 초기의 실권자인 이의방의 동생 이린의 아들이 이양무이고, 이양무는 이안사의 아버지이다. 이의방이 정중부에게 죽임을 당하고, 정중부와 아들 정균을 죽인 경대승이 잠시 집권했다가 죽자 이의민이 집권했다. 그러나 곧 최충헌이 이의민을 거세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그럼 역적인 이의방의 가족인 이린과 이양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양무와 이안사는 고려 땅 전주든 삼척이든 어디든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삼척을 거쳐 오랑캐 땅인 덕원까지 함께 따라간 170호는 이의방 이린 이양무의 잔당이었을 것이다. 이 잔당들의 무력이 이성계의 군사력으로 이어졌다.
덕원에는 오랑캐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원산부터 동해안을 따라 사람이 살만한 곳에는 여진족들이 터전을 닦아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으로 옥저와 동예로 대표되는 예족들이 살았다. 그러나 원래 연해주에 살던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서쪽으로 만주 지역을, 남쪽으로 한반도 동북부로 팽창해오자, 예족들이 남하하여 신라와 백제로 귀하하면서 공지가 되었고, 그곳을 여진족이 들어와서 수백 년 동안 거주하였다. 여진족 소굴인 덕원에서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되면서 세력을 키운 이안사-이행리-이춘-이자춘-이성계 집안이 결국 고려를 접수하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이의방의 야망이 동생의 핏줄을 통해 이루어진 나라였다. 이고와 함께 정중부의 난을 계획한 이의방은 견룡군의 하급장교였다. 이의방과 이고는 자신들은 하급장교이기 때문에 군부의 존경을 받는 대장군 정중부를 대표로 내세워 반역을 도모했다. 무골들의 이러한 반역 행태는 1979~80년에 현대한국에서 벌어진 전두환노태우의 난에서도 반복되었다. 군부의 실권을 장악한 소장 전두환은 이희성 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내세워 정권을 찬탈했다.
이의방은 자신의 모계가 문신집안이고 형 이준의가 문신이며, 정중부가 김돈중과 한뢰 등 못된 문신 몇 명을 죽이고 난 다음에 “이제 문신을 그만 죽이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무릇 문관을 쓴 자는 모두 죽여라!”하는 명령을 내려 150여 명을 문신을 참살했다. 또 쫓겨난 의종을 수하인 이의민을 시켜 완력으로 허리를 부러뜨려 죽였다. 얼마나 잔혹한 짓인가. 그가 속한 핏줄에는 분명 잔혹성이 있음이 틀림없다. 이후 세종과 정조와 같은 성군도 있었지만, 태종 이방원과 세조 이유, 연산군과 영조 등 전주이씨 조선왕조 유전자에 보면 몇 대마다 표출되는 잔혹하고 비정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안사가 정착한 곳이 덕원, 원산이므로 위에서 김종서가 말한 ‘제왕이 왕업을 처음 일으킨 땅’은 경원이 아니라 원산이다. 그런데 왜 김종서와 세종이 경원 등 두만강 중하류 지역을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 지칭했을까? 원산과 경원이 함께 함경도이기 때문이었을까? 이것으로는 명분이 약하다. 그러나 강역을 두만강까지 확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명분이라도 필요했을 것이다.
고려 윤관이 시도하다가 실패한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 고구려와 발해의 강역임을 잊지 않고 두 강이 국경선이라는 개념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 사이에 용성을 경계로 삼느냐 두만강을 경계로 삼느냐 하는 문제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김종서는 용성과 두만강을 각각 경계로 할 적의 불의와 불리를 조리있게 설명하며 두만강을 경계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조정대신들은 방어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고초를 들며 6진을 폐하거나 더 아래로 내려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종서는 “삼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이루기를 구하지 마시고 작은 이익을 귀히 여기지 마시며, 작은 폐단을 헤아리지 마시고 조그마한 걱정을 염려하지 마시어, 세월이 흐르기를 천천히 기다리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서라도 6진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긴 글의 상소를 올렸다.
국경 개척의 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조정 대신들은 입만 살아서 온갖 훈수를 다 두었을 뿐만 아니라 김종서를 비난하고 모해하였다. 그러나 김종서는 “누가 충직하고 누가 간사하며, 누가 공(公)이고 누가 사(私)인지, 공사(公私)와 충사(忠邪)의 가림은 오직 전하의 밝으신 판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하며 국경 개척 사업에만 몰두하였다.
역사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임금이 보고 나서 곧 중관(中官) 엄자치(嚴自治)를 보내어 위로하고 유시하기를, “내가 북방 일에 대하여 밤낮으로 걱정하여 마지않았는데. 이제 경의 글을 보니 근심할 것이 없도다.” 하시고, 곧 어의(御衣) 한 벌을 내려 주시었다.
세종이 김종서(金宗瑞)에게 명하여 네 진(鎭)을 설치할 때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으나 종서가 힘껏 그 일을 주장하였다. 의논하는 자의 말이, “김종서가 사람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는 일을 가지고 이룰 수 없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니 그 죄는 죽여야 옳다.”는 것이었다.
세종이 이르기를, “비록 내가 있으나 만일 김종서가 없었다면 이 일을 마련할 수 없었고, 비록 김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었더라면 이 일을 주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고는, 고집하고 마음을 돌리지 아니하였다.
김종서가 이미 네 진을 설치하여 남도 백성을 옮겨다 채우고, 날마다 술을 마련하고 풍악을 울려 장사(將士)들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었으므로,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어떤 이가 그 불가함을 말하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바람이 모래를 날리는 변방에서 장사가 굶주리고 수고하는데, 내 처음부터 초라하게 시작하면 뒤에 반드시 유종의 미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어느 날 밤 잔치 때에 불평하는 무리가 활을 쏘아 술통을 맞히니, 좌우가 모두 놀라 떠들썩하였으나 김종서는 태연자약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김종서가 말하기를, “간인(奸人)이 나를 시험해 보았을 뿐이니 제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였다.」
일부 대신들의 비난과 모해의 말에 세종이 흔들렸다면 김종서는 벌을 받았을 것이고, 6진 개척은 실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의 말대로 세종과 김종서는 강토 확장의 원대한 희망을 공유했기에 흔들림 없이 사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큰일을 한 김종서가 단종 1년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이유 李瑈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유, 참으로 잔혹한 짓을 한 자이다. 아버지 세종의 유지를 거역하고, 만고의 애국자를 죽인 민족의 역적이다. 이유는 한때의 왕이었지만 김종서는 천추만대 우리 민족의 별이다.
같은 장군이지만 이의방, 정중부, 최충헌, 전두환, 노태우 등과 강감찬, 이종무, 김종서, 최윤덕, 권율, 이순신, 김좌진, 홍범도 등은 인간 품질이 다르다. 전자들은 장군 자리가 탐욕의 자리였지만, 후자들의 장군 자리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자리였다. 앞으로도 우리 역사에서 시대마다 수많은 장군이 명멸할 것이다. 아무쪼록 전자를 본받지 말고 후자를 본받아 개인과 나라의 명예를 드높이기를 바란다.
조선 세종조의 장군들의 6진 개척사는 다음과 같은 출병으로 마무리되었다.
「9월 7일에 이천(李蕆)이 여연 절도사(閭延節度使) 홍사석(洪師錫)과 강계 절제사 이진(李震)과 더불어 4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계로부터 만포구자(滿浦口子)의 앞 여울을 지나 옹촌(瓮村)ㆍ오자참(吾自站)ㆍ오미부(吾彌府) 등지로 향하고, 호군(護軍) 이재(李梓)로 하여금 1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理山)의 산양회(山羊會)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라산 남쪽 홍타리(紅拖里)로 향하게 하고, 대호군(大護軍) 정덕성(鄭德成)은 1천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이산의 산양회로부터 압록강을 지나 올뢰산(兀頼山) 남쪽 아간(阿間)으로 향하였다.
11일에 좌우군은 고음한(古音閑) 땅으로 들어가 적의 전장(田莊)을 협공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다. 좌군은 홍타리 가운데의 마을로 향하고, 중군은 오자참으로부터 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적의 소굴 10여 호를 수색하여, 적의 머리 35급을 베고 5명을 사로잡고 마소와 가축을 뺏고 쌓아둔 곡식은 불살라 버렸다.
12일에 좌군은 파저강을 지나 올라산성과 아간 땅을 수색하니, 적은 모두 도망하였으므로, 다만 적의 머리 한 급만을 베고 그 집과 곡식을 태워버리고 곧 파저강을 도로 건넜다.
13일 새벽에 우군과 중군이 함께 오미부에 이르러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적이 미리 알고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 빈 집 24채와 쌓아둔 곡식을 불사른 뒤에 중군은 곧 돌아오고, 우군은 소토리(所土里)에 머물러 좌군을 기다리면서 적의 머리 10급을 베고 남녀 9명을 사로잡고 홍타리로부터 와서 모이었다. 이날 신시(申時)에 적이 우군이 미처 진지를 마련하지 못한 틈을 타고 달려들었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14일 아침에 적이 또 좌군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다가 우리 군사가 화포(火砲)를 쏘자 물러갔다. 좌 우군이 모두 군사를 돌릴 때, 좌군이 앞잡이가 되고 우군이 후군이 되어 오다가 길에서 적 50여 기가 별안간 숲속에서 뛰어나는 것을 만났으나 우리 군사가 쳐서 말 두 필을 빼앗았다.
16일에 삼군(三軍)이 모두 개선하니 죽이고 잡은 적이 60여 명이었다. 이천 등이 사자를 보내어 첩보(捷報)를 올렸는데, 그때마다 사신들에게 모두 차등을 두어 옷을 내려 주었고, 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이세형(李世衡)을 보내어 장병들을 위문하였다. [고전번역원 고전종합DB]」」
그런데 7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토벌한 전과가 죽인 자 46명, 사로잡은 자 14명에 집 수십 채를 불태우고 마소와 가축을 빼앗고 쌓아 둔 곡식을 불살라 버린 정도였다.
앞서 1433년 세종 15년 10월에 최윤덕 장군이 14,955명의 군대를 이끌고 강계 압록강을 건너 파저강 유역 오랑캐를 토벌하여 거둔 전과도 죽인 자 107명, 사로잡은 자 236명, 마소 70필 정도였다. 두 번의 압록강과 두만강 도강 토벌 작전에서 거둔 전과가 초실할 뿐만 아니라, 집을 불태우고 가축을 빼앗고 곡식이 자라는 밭을 짓밟고 곡식을 불살라 버리는 등 오랑캐들의 생활 근거지를 없애버렸다. 윤관의 여진정벌 민족기록화에 보면 고려군의 기병들 칼날 아래 죽는 것은 여진족 노약자와 아녀자들이다. 고려와 조선의 국가정책이었지만 휴머니즘 면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여진족들이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하면 가끔 강을 건너와 백성들을 살상하고 붙잡아 가는 노략질을 하기 때문에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 건너편은 여진족들이 정착하여 살고있는 곳이었다.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했지만 여진족의 침략은 임진왜란 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여진족이 강성해지면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어서 명나라까지 패망시키면서 청나라를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말갈족의 후예인 여진족은 북쪽의 적이었다. 세종 때 두 번의 토벌로도 기세를 꺾을 수 없을 정도로 여진족은 이미 1000만에 가까운 인구로 팽창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인구와 비슷했다. 그렇다고 조선이 십여 만의 대군을 만들어 정벌에 나설 힘도 없었다. 그렇다면 여진족의 실체를 인정하고 교역, 화친하는 적극적인 외교 전략이 필요했다. 사나운 오랑캐일수록 다독이고 설득하는 외교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은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조건 깔보며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국경 방비를 엄히 하면서 침략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근대 동북아에서 가장 성공한 민족은 여진족이다. 반만 년 역사상 한 번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던 조선을 정복하고 인조로 하여금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하도록 했다. 한족의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건국하여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광대한 영토를 만들어 현대중국에 넘겨주었다. 중국인들 중에서 현재 자기가 여진족이라고 공개한 인구가 천만이 넘는다고 한다. 미공개를 합하면 아마 삼천만은 넘을 것이다.
동북아에 살고있는 민족을 대별하면 우리 대한민족, 중국한족, 일본족, 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등 다섯이다. 이들 다섯 민족은 수천 년 동안 얽히고 설키며 전쟁과 평화를 반복해왔다. 이제 한국, 북한, 중국, 일본, 몽골의 다섯 국가로 집약되었다. 글로벌시대를 맞이하여 혈연과 문화기 동류인 동북아 네 국가가 공존과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