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상으로 큰 눈이 내린다는 대설도 지나고 한 두 차례 한파가 밀려오기도 했지만 겨울 맛을 느끼기에는 포근한 날씨가 너무 길다. 예전 같았으면 반짝 추위에 놀라 서둘러 담근 김장독의 김치가 너무 익을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을 법하다. 연일 계속되는 겨울답지 않은 날씨 탓에 계절이 바뀌었는데도 아직도 남아있는 가을빛을 찾아 산과 들로 많은 사람들이 나선다. 야생초산행은 남해 바닷가 통영시와 고성군의 경계에 위치한 벽방산(碧芳山, 650m)을 찾았다. 벽방산을 멀리서 보게 되면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산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속에 들어보면 평범한 산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에 원효대사가 세웠다는 천년고찰 안정사를 중심으로 산줄기가 호위하듯 늘어섰다. 우뚝 선 벽방산이 겨울에는 매서운 북서풍을 차단하고, 여름에는 남쪽의 천개산이 태풍을 막아 아늑하고 포근하면서 동쪽이 열려 바다가 내려다보이니 전혀 갑갑하지 않다. 벽방산을 다른 이름으로는 벽발산(碧鉢山)이라 부른다. 석가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섭존자가 바리때를 바쳐 들고 있는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금도 산 아래 마을에서는 벽방산 대신 벽발산이라 부르고 있다. 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벽방산에는 한 때 1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영조 때에는 안정사 주변의 적송을 보호하라는 어송패가 내려졌을 만큼 소나무가 유명하다. 지금도 골짜기를 가득 메운 낙락장송과 곳곳에 자리한 기암괴석 어딘가에서 고승대덕들의 숨소리가 들릴 듯하다. 야생초 산행은 안정사 주차장을 출발하여 가섭암~의상암~정상~만리암터~안정치~천개산~안정사로 되돌아오는 회기 산행을 했다. 처음 시작은 임도를 따르고 때로는 지름길을 찾아 숲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가섭암까지는 비교적 평탄한 임도를 따르는 길이 계속된다. 포근한 봄날 같지만 숲속은 겨울 풍경이 완연하다. 낙엽수들은 잎을 모두 떨어드리고 나목으로 변했다. 남쪽 바닷가에 면한 곳이라 키 큰 나무의 줄기를 감고 오르며 자라는 늘 푸른 덩굴식물인 마삭줄과 송악이 자생하고 있어 삭막하지는 않다. 낙락장송이 숲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 오래 머물면 계절흐름을 놓쳐버릴 것 같다. 소나무 언덕에 자리하고 메마른 줄기에 덩그러니 꽃만 남아 있는 개쑥부쟁이도 계절감각을 놓쳐버린 것일까?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는 예사롭지 않은 모습이다.
개쑥부쟁이.
가섭암 맞은편에서 임도를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등산로는 차즘차즘 경사를 더하며 가팔라진다. 마른 계곡을 건너면 의상암까지는 한겨울에도 땀을 많이 흘려야 할 정도로 급경사에 햇볕이 따사로운 남향이다. 의상암은 무던히 높은 곳에 자리했음에도 텃밭에는 시금치와 각종 채소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하늘로부터 공양을 받았던 곳이라 전하며 참선을 하였다는 의상선대가 있다. 암벽사이에 자리한 작은 암자지만 바위틈에서 솟는 석간수가 있어 갈증을 풀 수 있다. 같은 경사 길을 조금 더 따라 오르면 능선에 닫는다.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고성 땅이고 남쪽은 통영 땅이다. 비로소 막혔던 시야가 트이고 땀을 씻어 줄 바람도 분다. 능선을 따라 10여분 더 오르면 남쪽으로 큰 절벽이 나타나고 그 끝이 벽방산 정상이다. 정상에 오르면 벽방산은 삼면이 바다에 면한 것처럼 느껴진다. 산을 가운데 두고 각 방향에서 바닷물이 깊숙이 파고 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만큼 조망이 빼어나다. 멀리 북서쪽으로는 지리산이 우뚝하고, 서쪽으로는 하동의 금호산과 광양의 백운산이 병풍처럼 늘어섰다. 남해에서 거제까지 한려해상국립공원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산은 남쪽에 위치한 안정치방향이다. 암벽으로 이어진 등산로 옆 바위 겉에 버티고 선 신비한 자태의 소나무가 하나 둘이 아니다. 모두 오랜 세월이 빚은 작품으로 균형 잡힌 모양이 정말 아름답다. 더 나아가면 암릉이 뚝 떨어지는 절벽에 붙은 계단이 나타나고 내려다보면 대밭이다. 대밭은 옛날 만일암이 있었던 절터고 뒤로 막아선 거대한 암벽은 만일창벽이라 부른다. (맨 위 사진)
맥문동 열매.
화살대로 쓰였음직한 대나무밭에는 샘이 있다고 한다. 대밭 주변으로는 새까맣게 열매를 매단 쥐똥나무가 즐비하다. 그 아래로는 열매가 새까맣게 익는 맥문동과 인동덩굴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한방에서는 모두 긴요한 약재로 쓴다고 한다. 인동덩굴은 봄에 꽃이 피는데 꽃의 빛깔이 처음에는 하얀색이었다가 노랗게 변하기 때문에 다른 이름으로 금은화라 부르기기도 한다. 안정치를 지나 천개산으로 향했다. 천개산 정상에는 정자가 있고 북쪽에는 헬기장이 있다. 천개산을 넘어 광도면 노산까지 갈 수 있으나 야생초산행은 동쪽 능선을 따라 안정사로 방향을 잡았다. 등산로는 풀과 나무를 베어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신기한 것은 등산로를 정비하면서 베어낸 그루터기에서 늦게 돋은 줄기에 달린 단풍은 빛깔과 모양을 잃지 않고 있다. 부드럽고 연약하여 추위에 쉬 얼고 먼저 사라질 것 같지만 더 오래 견딘다. 겨울눈을 미처 만들지 못한 때문일까? 모든 낙엽수가 나목으로 변해 벌써 겨울잠에 들었는데 신비할 따름이다. 능선에서 안정사로 내려서는 길은 경사가 급한 내리막의 연속이다. 응달이라 추울 때는 낙엽 아래 얼어붙은 물기를 조심해야 한다. 급한 내리막을 내려서면 임도가 지나가고 계곡을 건너면 안정사다. 천년고찰 안정사에 들렀다가 주차장에 도착하면 산행도 끝난다. 회기산행에 소요되는 시간은 3~4시간정도로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어린 단풍나무.
○찾아가는 길 대전·통영고속도로 동고성 IC > 산업도로 안정공단 > 77번도로 안정사 입구 > 안정사 (농협중앙회 거창군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