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답사한 다음 들른 곳은 서울역사박물관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경희궁 옆에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하여 보여주는' 곳입니다.
마침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사진작가 홍순태의 '서울사진아카이브'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아카이브는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는 1960~70년대 서울의 변화와 시민 생활을 모습을 담은 사진 700여 장을 '기록의 방', '기억의 방', '시선의 방'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기획전시실에는 구로공단 반세기 기념 특별전 '가리봉동 오거리'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1970년대 서울 산업화의 주역이었던 구로공단의 모습을 재현하여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 경교장에서 서울역사박물관으로 가는 길 횡단보도에서 보면 흥화문이 정면으로 보입니다.
이 흥화문은 원래는 동향이었는데 지금은 남향으로 서 있습니다. 일제가 이 경희궁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건립하기 위하여 1915년 흥화문을 남쪽 담장으로 옮겼다가 다시 1932년 장충동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박문사는 바로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일본의 이등박문을 위한 사당입니다.
박문사는 해방이 되면서 바로 없어지게 됩니다. 그 뒤 박문사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이번에는 신라호텔의 정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현재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경희궁과 이웃하여 서울역사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경희궁의 동궁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광장에는 철거한 콘크리트 광화문 구조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콘크리트 건물을 좋아하여 광화문 다시 세울 때 콘크리트를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보신각으로 부르고 있는 종각도 역시 1978년 콘크리트 건물로 축조되었습니다.
↑여기는 381호 전차 안입니다. 한 때 서울의 다리 역할을 한 전차는 이제 박물관 한켠으로 물러나 시민들의 볼거리가 됩니다.
↑홍순태 작가의 서울사진아카이브 '세 개의 방'. 1960년대의 강남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여기가 불과 수십년 전의 강남땅이었다니......
↑구로공단 반세기 특별전 '가리봉 오거리'. 당시의 노동 야학 모습입니다. 장시간 노동에 지쳐있으면서도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않은 노동자들의 배움터입니다.
↑당시 노동자들이 즐겨 드나들던 분식점의 모습. 순대며 떡볶이, 그리고 핫도그와 튀김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음악 다방. 다방에 온 손님들의 신청곡을 DJ가 선곡하여 들려줍니다. 그때는 이 DJ가 다방의 매상을 좌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면 상설전시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서울의 변화하는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전시되어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가 그린 도성의 모습입니다. 자세히 보면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경희궁의 모습입니다. 규모가 꽤 컸습니다. 사진 왼쪽 위가 경희궁의 정전이 숭전전입니다.
↑종로의 시전. 시전은 국가에서 설치한 상점 거리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국가와 조정에서 필요한 물품을 팔았습니다. 시전 가운데 육의전은 조정에 물건을 납품하는 역할을 담담한 상점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개인이 사사로이 물건을 팔고 사는 곳을 난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시전과 육의전 상인들은 조정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 이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난전과 시전은 갈등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개화기의 종로 거리. 가마와 말을 타고 가는 신랑 신부와 두루마기에 선글라스를 끼고 담뱃대를 물고 있는 노인, 그리고 그 옆에 서있는 외국인의 모습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1929년 조선박람회 안내도입니다. 근정전과 경회루 등 몇 개의 건물만 남고 경복궁은 훼손되어 있습니다. 광화문은 철거되고 근정전 앞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위압적으로 서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여론이 일자 일본인들이 이 건물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방위로 로비 활동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서울에 관광을 와서 경복궁 정면에 서 있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합니다.
↑갑론을박 끝에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에 깨끗히 철거됩니다. 위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원형주두입니다. 원형주두는 둥근 모양의 기둥 머리라는 뜻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철거되면서 건물의 각종 부재는 충남 목천읍에 있는 독립기념관 근처에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을 조성하여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현재의 서울을 1/1,500로 축소한 대형 모형입니다.
↑경교장 원형 모형. 경교장은 1938년 서울의 금광업자인 최창학이 자신의 저택으로 지은 건물로 처음에는 죽첨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어 김구 주석 등 임정 요인들이 귀국하자 이들의 숙소로 제공되면서 이름이 경교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김구 선생이 서거하자 최창학은 이 건물을 회수하여 중화민국(현 대만) 대사 관저로 제공하였습니다. 이후 여러 경로를 거쳐 강북삼성병원의 현관으로 사용되다가 2005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9년에 경교장 전체를 복원하기로 결정하여 2011년 3월에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2년의 복원공사 끝에 2013년 3월 1일 삼일절에 맞추어 개관하였습니다.
↑지하 전시실에 걸려 있는 김구 선생의 피묻은 옷. 안두희의 총탄을 맞아 흘린 피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왼쪽 추모사 아래는 선생의 데드마스크입니다.
↑1층 귀빈식당. 김구 선생이 서거하였을 때 빈소로 사용된 곳입니다.
↑1층 응접실. 귀국한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의 회의가 개최되거나 김구 선생이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하던 곳입니다.
↑2층 김구 선생 집무실. 김구 선생이 평상이 공무를 보거나 접견 장소로 사용했던 곳입니다.
↑이 집무실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를 접견하다가 그가 쏜 총탄에 희생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선생의 비서 선우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두희 소위가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라 해."
그 즉석에서 허락하시므로 그를 선생님 거실로 들여보낸 때가 12시 30분께였다.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응접실에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흘러나왓다. 나는 곧 지하실로 가서 선생님의 오찬 준비 상황을 알아보았다. 식모는 "네, 만둣국을 다 끓여 가요"라고 했다.
주방에서 아줌마의 말을 듣는 순간 윗층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동이 났다. 1층으로 뛰어올라가 다시 2층 백범 선생 방으로 뛰어오르던 나는 층계에서 한 손에 들었던 권총을 떨어뜨리며 "내가 선생님을 쏘았소"하는 흉측한 모습의 안두희를 만났다.
허둥지둥 방으로 뛰어 올라간 나는 "선생님, 이게 어인 일입니까."하며 울부짖었으나 유혈이 낭자한 채 책상에 엎드린 선생은 말씀이 없으셨다. 순신간의 참변이었다.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선생을 다다미방으로 모시고 이웃해 있는 적십자병원에 의사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층으로 다시 내려오니 비서진들에게 얻어맞은 범인 안은 쓰러져 있고 경비실에서 연락을 받은 경찰이 달려와서 그를 데려 가려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는 듯 정체모를 군인들이 떼지어 몰려와 범인이 군인이란 이유로 저격범 안두희를 바람같이 쓰리쿼터로 끌고 갔다. 불과 2,3분 사이의 암살 음모 공작 현장이었다.
↑안두희가 쏜 총탄 자국을 재현하여 놓았습니다.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향하여 세 발의 총탄을 쏘았다 합니다. 그 중 두 발이 선생의 얼굴을 관통하였습니다. 우리민족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어이없는 암살사건이 백주에 버젓이 일어났습니다.
↑집무실 한 편에는 김구 선생의 흉상이 서 있습니다.
그후 안두희는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석 달 뒤에는 15년으로 감형되었고, 6·25 전쟁 중에 형 집해정지로 포병장교로 복귀하여 전쟁이 끝난 1953년 소령으로 예편하였습니다. 그리고 군납회사를 잠깐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쫓는 사람들 때문에 평생을 숨어 살아야만 하였습니다. 가족들은 이혼을 하고 이민을 갔으며 그도 이민을 시도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 폭행을 당하고도 운좋게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만 결국은 1996년 운전기사인 박기서씨에게 맞아서 80세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이때 박기서씨가 휘두른 몽둥이에는 '정의봉'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2층 응접실. 김구 선생이 국내 정당대표들과 회담을 하거나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개최하던 곳입니다.
↑아이들이 영상자료를 보면서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 늦은 시간이지만 경교장을 나와서 가까운 일식 집에서 돈까스를 시켜 먹었습니다.
↑마침 간 곳이 맛집이었고 점심 시간이 지난 때라서 아이들이 여유있게 점심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이제 정동길에 들어섰습니다. 정동은 개화기 신문명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에는 고종황제의 덕수궁이 있었고 덕수궁 주위로 각국 공사관들이 둘러 있어서 자연스러이 서양 문물과 문화가 유입되어 소개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기는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건물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경복궁에 갇혀있던 고종이 세자와 함께 극적으로 탈출하여 이곳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이곳은 약 일 년 동안 조선 정치의 중심이 됩니다. 역사에서는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부릅니다.
↑러시아공사관 아래는 한국 첫 카톨릭수도원인 정동수녀원이 있었습니다. 1887년 7월 23일 프랑스인 수녀 2명과 와 중국인 수녀 2명이 여기서 수도공동체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어 29일에는 조선의 순교자 딸 다섯명이 입회하여 40여 일을 함께 지내다가 명동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명동은 한국 카톨릭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점심도 먹었고 해가 기울어 날씨도 선선하여지자 아이들은 완전히 활기를 찾았습니다.
↑이화백주년 기념관 정문. 이 자리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손탁호텔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됩니다.
손탁은 1885년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일행으로 조선에 입국합니다. 손탁은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관파천 시에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에게 커피를 내 온 사람이 바로 손탁입니다. 고종은 곧 커피 애호가가 되고 손탁에게 왕실의 땅 일부를 하사합니다. 손탁은 여기에 호텔을 짓고 1층에 커피숍을 엽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점 '정동구락부'입니다.
정동구락부에는 주로 주위의 외국인들이 많이 출입을 하였습니다. 후에 영국 수상이 된 처칠도 조선을 방문할 적에 여기에 들렀고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도 여기서 커피를 마셨습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도 여기서 대한제국의 각료들과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후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자 한일합병 직전인 1909년 손탁은 이 호텔을 처분하고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그 후 1917년에 이화학당이 이 건물을 인수하여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 이 건물을 헐고 프라이관을 세웠는데 6·25때 폭격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가까이서 본 이화백주년 기념관. 시간이 늦어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안에는 카페도 있고 공연장도 있습니다.
↑이화백주년기념관 옆에는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심슨기념관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으로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3호로 지정되어 있는 건물입니다. 이화학당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건물을 희사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심슨문화관이라고 부릅니다.
이화학당은 미국의 여성 선교사 스크랜튼에 의하여 1886년 설립되었습니다. 이듬해 고종이 배꽃처럼 화사하게 자라라고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을 내렸습니다. 이화학당은 이후 다시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로 발전하면서 한국 여성 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정동극장. 이화여자고등학교 맞은편에 정동극장이 있습니다. 정동극장은 1995년 국립중앙극장 분관으로 출발하였으나 2015년 독립적인 재단법인으로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리 경주와는 인연이 많은 극장입니다. 2011년부터 경주 세계문화엑스포 문화센터 공연장에서 '미소2-신국의 땅, 신라'를 공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개화기는 기독교와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19세기 말에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을 찾고 이들에 의하여 교회가 건립되고 근대적인 학교와 병원이 설립됩니다. 정동제일교회는 개신교가 이 땅에 보급되면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입니다.
1885년 미국의 감교회 소속의 선교사 아펜젤러가 우리나라에 입국합니다. 아펜젤러는 교회부터 세운 것이 아니라 학교부터 세워서 학교를 통하여 선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학교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라는 배재학당입니다. 그 후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지었는데 이것이 정동제일교회입니다. 정동제일교회는 1895년에 착공하여 1897년에 완공을 하는데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을 갖추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었는데 특이하게도 교인들이 나와서 오징어 전을 부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배가 불러가 전은 먹지 않고 음료수를 얻어서 마셨습니다.
↑아펜젤러 목사의 흉상.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2월에 언더우드와 스크랜튼 등과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그해 8월에 배재학당을 세웠고 1895년에는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그 후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등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독립신문 발간에도 숨은 공이 있으며 성서 번역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44세가 되던 해 1902년, 목포를 향하여 배를 타고 가다가 선박이 충돌하여 침몰하면서 아펜젤러는 한창 활동할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합니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이례적으로 우리민족을 사랑한 마음에 감사하는 의미로 애국가가 불려졌다고 합니다.
↑최병헌 목사 흉상. 탁사 최병헌 목사는 배재학당 한문교사로 재직하면서 정동제일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다가 아펜젤러 목사의 사고 이후 담임목사가 되어 10여 년 동안 정동제일교회를 이끌어 간 사람입니다. 일설에 의하며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는 그로부터 출발하였다고 합니다. 애국가 가사를 지은 사람으로는 지금까지 도산 안창호선생과 윤치호가 거론되고 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위로 언덕길을 올라가면 얼마 가지 않아 배재공원이라는 표지석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가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이 건물은 배재학당 동관 건물로 1916년 세워졌습니다. 배재학당 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건물로 지금은 서울시 기념물 제 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늦어 박물관을 돌아볼 수 없고 그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배재학당 자리에는 신교육의 발상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학당을 세우자 그로부터 일 년 뒤에 고종은 당시 최고의 명필가인 정학교를 시켜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합니다. 배재는 배양영재를 줄인 말로 꽃다운 재목을 붇돋워 키운다는 뜻입니다. 배재학당을 필두로 이화학당과 경신학교 등 근대식 교육기관이 정동을 중심으로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배재빌딩 앞에는 신문화의 요람지라는 푯말이 서 있습니다. 이곳 정동을 중심으로 신문화가 시작되었고 꽃을 피웠습니다.
↑지금의 배재빌딩 부근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고 추정이 됩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에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입니다. 4면으로 발간되었는데 1,2,3면은 순한글판이었고 4면은 영문판이었습니다. 이 독립신문이 처음 발간된 4월 7일을 기념하여 '신문의 날'로 제정하였습니다.처음에는 300부 정도 발간하였으나 곧 이어 3,000부로 늘어날 만큼 세간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독립협회의 회원들도 4,0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러자 보수파들이 고종에게 독립협회나 만민공동회 같은 단체에서 왕정을 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고 모함을 합니다. 결국 서재필은 강제출국을 당하고 독립신문은 윤치호가 맡아서 발간을 하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아펜젤러가 나서서 이어 가지만 결국 조정에서 독립신문사를 인수하여 1899년에 폐간시키고 맙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배재학당 대강당 자리(현 배재빌딩)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고 표지석을 세웠으나 일부 학자들은 정동교회 맞은편의 신아빌딩이 독립신문사 자리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 여기를 돌아가면 덕수궁의 정문이 대한문이 나옵니다.
↑서울시청 잔디 광장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교보문고 가는 길. 광화문 광장 뒤로 광화문과 청와대 지붕, 그리고 북악산이 보입니다.
↑교보문고에 들러 보고 싶은 책을 사서 계단에 앉아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