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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C동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소림사방장
번지없는주막 백년설 알토김학률120218.mp3
외동아낙 헤어스타일 ‘귀밑머리’ 얽힌사연
(작성 중 : 여성 머리모양 시리즈 4회)
여성들의 머리털에는 ‘귀밑머리’라는 부위가 있다.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이를 ‘기밑머리’라고 한다. 표준어 ‘귀밑머리’를 이르는 말이다. 옛적 고구려(高句麗) 시대에서는 ‘빈하수(鬢下垂)’라고도 했다.
‘귀밑머리’는 사전(辭典)에서 ‘이마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 귀 뒤로 넘겨 땋은 머리’ 또는 뺨에서 귀 가까이에 난 머리털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귓머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귀밑머리 (연속사극 '주몽'의 예소야, 귀 앞쪽으로 늘어진 머리털이 '귀밑머리'다)
정확하게는 ‘뺨에서 귀 가까이에 난 머리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그 위치가 ‘귀밑’이라기보다는 ‘귀앞’이 될 것이다.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에서 나그네가 쓰다듬는 주모(酒母)의 ‘귀밑머리’도 ‘좌우 귀 뒤로 넘겨 땋은 머리’라기보다는 ‘뺨에서 귀 가까이에 난 머리털’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기혼녀(旣婚女)의 경우 ‘이마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앞머리와 ‘귀밑머리’를 좌우 귀 뒤로 쓸어 넘겨’ ‘쪽’머리를 찌는데, 이때 긴머리는 모두 쓸어 올리고 짧은 머리만 남는데, 이 짧은 머리를 ‘귀밑머리’라고 한다.
나이가 좀 되는 남자 회원들의 경우 연애(戀愛)할 때나 신혼(新婚) 때는 주로 이 짧은 ‘귀밑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다짐들을 하셨을 것이다.
귀밑머리의 위치
그리고 처녀들이 ‘댕기머리’를 땋을 때는 ‘귀밑머리’와 다른 머리를 같이 섞어 땋아 양쪽에 두 가닥을 만들고, 머리 뒤쪽 머리를 한 가닥으로 하여 모두 세 갈래로 ‘댕기머리’를 땋는다.
‘귀밑머리’를 ‘푼기명머리’ 또는 ‘빈하수(鬢下垂)’라고도 하는데, ‘푼기명머리’는 머리를 세 갈래로 갈라서 한 갈래의 ‘머리채’는 뒤로 하고, 두 갈래의 ‘머리채’는 좌우의 볼 쪽에 각각 늘어뜨리는 머리모양인데, 고구려(高句麗) 고분벽화에서는 남자 그림과 여자 그림 모두에서 ‘푼기명머리’를 발견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푼기명머리’와 ‘귀밑머리’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은 ‘애교머리’라 하여 머리카락 몇 가닥을 이마나 귀 옆으로 내리는데, ‘푼기명머리’는 이마에 드리우는 것이 아니고, 귀 옆(앞)으로 내리는 앞머리라 할 수 있다. 물론 갈라 늘인 앞머리 밑에 ‘귀밑머리’가 숨겨진 형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푼기명머리
기록상 ‘빈하수’의 끝은 가슴 아래로 내려오고 끝을 동글게 말아 가슴꼭지에 말리게 했다고 한다. 여자의 탐스러운 ‘빈하수’는 구름에 비유하여 ‘운빈(雲鬢)’이라고도 한다.
‘빈하수’의 원조(元祖)는 고구려 ‘삼실총(三室冢)’ 벽화에 그려진 한 여인의 그림이다. 이 벽화에 그려진 여인은 머리를 단정히 빗은 후 두발(頭髮)을 3등분하여 한 다발의 ‘머리채’는 뒤로 하고, 두 다발의 ‘머리채’는 양 볼로 늘어뜨린 애교머리로 한껏 멋을 부리고 있다. 이는 ‘삼실총’ 제1실 남벽 왼쪽 여인도(女人圖) 등에서 볼 수 있다.
‘소서노’의 푼기명머리
한 때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사극(史劇) 「주몽」의 ‘소서노’나 ‘예소야’ 등 여자배우(女子俳優)들이 미혼시절 선보였던 머리 ‘빈하수(鬢下垂)’ 역시 ‘귀밑머리’ ‘헤어스타일’에 속한다.
‘빈하수(鬢下垂)’는 「주몽」뿐 아니라 「연개소문」등 고구려(高句麗) 배경의 사극(史劇)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 되었다. 그만큼 고증(考證)을 철저히 하고 있다는 반증(反證)이기도 하다.
「연개소문」의 ‘고소연’ 역을 맡았던 이세은은 이러한 ‘빈하수(鬢下垂)’를 더욱 화려하게 선보였는데, 흘러내린 ‘빈하수’ 머리 위에 ‘가채’나,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식을 해서 고구려시대의 가장 감각적(感覺的)인 여인으로 분했다는 평가를 받은바 있다.
사극 「연개소문」에서의 이세은과 ‘귀밑머리’
그리고 사극 ‘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의 동생 ‘연수정’으로 분했던 ‘황인영’은 쌍검무사(雙劍武士)로 등장하는데, 역시 굵다란 ‘빈하수’를 땋고 있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귀밑머리’는 미혼녀(未婚女)의 머리 모양이었는데, 양반가(兩班家)의 규수들은 이 ‘귀밑머리로’ 귀를 가리고, 일반 서민들의 처녀들은 귀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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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女性)에게 있어 머리치장은 하나의 화장(化粧)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잠시 우리들의 선대 여인들은 무엇으로 어떻게 얼굴 화장을 했었는지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모습의 전통사극(傳統史劇) 드라마에서 궁중여인들의 고고한 자태와 뛰어난 미모(美貌), 특별한 화장품이 없었던 옛날 여인들은 얼굴화장과 몸매관리를 어떻게 했을까. 또한 우리 여인네들의 아름다운 치장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사극 「연개소문」에서 ‘연수정’으로 분한 황인영과 귀밑머리
옛적 우리 선대(先代) 여인들은 참나무 숯으로 눈썹을 짙게 색칠하고, 복숭아꽃이나 모과 꽃물로 세수를 하며, 동백꽃 목욕(沐浴)으로 아름다움을 유지 했었다. 물론 중산층 이상의 양반가(兩班家) 여인들의 경우다.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올려 매화나무와 그 꽃을 새긴 비녀를 꽂은 여인의 모습은 우리네 전통미인(傳統美人)의 표상이기도 했었다.
일각에서는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산달래(마늘)를 먹이게 한 것이 화장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즉 미백효과(美白效果)가 있는 자연의 산물(産物)을 먹게 한 것을 흰빛의 피부로 변신하기 위한 주술(呪術)로 해석하는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동백기름으로 빗어 넘긴 머리 (귀밑머리를 거의 다 걷어 올리고, 조금만 남아있다)
아름다움의 추구(追求)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이라면, 화장재료(化粧材料)와 기술이 별로 없던 시절에는 그것을 자연에서 찾았던 것이며, 예전에는 자연의 여러 산물(産物) 중에서도 ‘풀껓나무’가 주였다.
수산리 쌍영총 고분벽화(古墳壁畵)에서 고구려의 화장을 보면 이 벽화의 주인공은 귀부인(貴婦人)이고, 쌍영총 벽화의 주인공은 여관(女官) 또는 시녀로 보이는데, 모두 머리카락을 곱게 빗고 있다.
눈썹은 짧고 뭉뚝하게 다듬었으며, 두 뺨에는 연지화장을 했고, 무인(舞人)들은 머리카락을 뒤로 틀고 연지를 이마에 바르는 등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신분과 빈부(貧富)의 구별 없이 치장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지곤지’로 화장한 신부
특히 머리카락 자르기가 부자연스러웠을 당시를 생각하면, 긴 머리카락을 곱게 빗고 치장(治粧)하는데 신경을 썼을 것으로 상상되며, 그 방법은 전통적(傳統的)인 동백기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따듯한 지역에는 잎이 반들거리고 붉은 꽃이 매우 아름다운 차나무과의 동백(冬柏)나무가 자라는데, 이 씨는 기름을 짜낼 수 있다.
그리고 예전 여인들에게 동백기름은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必需品)이었다. ‘동백기름’은 밤에 방안의 불을 밝히는데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백(冬柏)기름’은 반드시 동백나무의 씨로만 짜냈던 것은 아니다. ‘녹나무과’에 딸린 ‘생강나무’와 ‘때죽나무과’에 속한 ‘때죽나무’의 열매로도 기름을 짰고, 이들 나무의 기름도 ‘동백기름’이라 불러 그 때문에 ‘생강나무’와 ‘때죽나무’도 ‘개동백나무’라고 별칭(別稱)하기도 한다.
동백나무
이때는 ‘아주까리기름’도 많이 이용했는데, ‘동백기름’은 옛날 사대부집 귀부인이나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을 상대하는 기녀(妓女)들이 즐겨 사용하던 최고급 머릿기름으로 인기가 높았다.
강원도(江原道) 아리랑에 나오듯이 동백기름(생강나무 열매 기름)과 ‘아주까리기름’은 여성들의 단장(丹粧)에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4~6세기에는 불교(佛敎)가 전래되어 널리 신봉(信奉)됨으로써 청정과 청결을 몸소 실천하게 되었기 때문에 목욕이 일반화(一般化) 되었다.
또한 목욕의 대중화(大衆化)는 목욕용품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일반적으로는 쌀겨 목욕이 잘 알려진 것으로 궁중(宮中)에서는 ‘약탕목욕(藥湯沐浴)’이 유행했었다.
목욕하는 여인
헝겊 주머니에 말린 쑥을 넣고 욕탕물에 우려낸 뒤 몸을 담갔고, 목욕하기 3~4시간 전에 말린 무청이나 순무잎을 욕탕(浴湯)에 넣어 우려낸 물로 목욕하면 피부 노폐물(老廢物)을 배출하는 효과도 있었다.
50 여 년 전만 해도 거문도에서는 동백꽃 목욕(沐浴)이 성행했는데, 옛날 거문도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 저녁이면, 뜨거운 물로 동백꽃을 우려내어 그물로 목욕하는 풍속(風俗)이 있었다.
동백꽃은 원래 2~3월에 피는 꽃이지만, 거문도에서는 섣달에도 더러 꽃이 피어 이곳 사람들은 동백꽃을 우린 물로 목욕을 하면 종기(腫氣)에 약이 되고, 평소에는 피부병(皮膚病)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백꽃 목욕’은 예전에는 성행하였던 습속(習俗)이었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져 행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한다.
동백꽃 목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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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귀밑머리’가 돋아나는 ‘귀’와 그 ‘귀’를 치장하는 ‘귀걸이’를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귀고리’와 지금의 ‘귀걸이’ 등 ‘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용어(用語)에 대하여 그 개요(槪要)와 호칭을 알아보기로 한다.
‘귀고리’는 예전부터 ‘귀엣고리’라고 말해왔으나, 이제는 ‘귀고리’가 우세하여 ‘귀고리’를 표준어(標準語)로 하였다. 그런데 ‘귀고리’는 ‘귀걸이’로 써도 된다.
단지, ‘귀걸이’는 ‘장식용(裝飾用) 귀고리’라는 뜻 외에 겨울에 추위를 막도록 귀에 거는 도구를 모두 가리키기도 한다.
귀와 귀고리
즉, ‘방한용(防寒用) 귀걸이’는 ‘귀마개’ 또는 ‘귀덮개’라고도 부르는데, ‘귀마개’, ‘귀덮개’는 아직 표준어가 아니다. 따라서 ‘귀걸이’는 ‘귀고리’보다 뜻이 더 넓게 쓰인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장식용(裝飾用)의 ‘귀고리’를 영어(英語)인 ‘이어링’이라고 하는데 외래어(外來語)라는 점에서 가급적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귀고리’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는데, 왜 외래어를 사용해야 하느냐는 주체성이기도 하다.
‘귀걸이 안경’은 안경다리 대신 실로 꿰어서 귀에 걸게 된 안경(眼鏡)인데, 역시 ‘귀에 거는 안경’이므로 ‘귀걸이 안경’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다.
귀고리
다른 용어를 더 알아본다. ‘귀띔’은 ‘귀틤’이라고도 하는데, 역시 표준어가 아니다. 그러나 ‘귀퉁이’의 비속어(卑俗語)인 ‘귀퉁배기’, ‘귀퉁머리’는 표준어 규정 26항에서 모두 표준어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현행 우리나라 표준어규정(標準語規程)에는 여러 가지 비속어(卑俗語)까지를 포함하고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대두되기도 한다.
표준어 규정 26항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귀퉁배기 = 귀퉁머리’는 물론 ‘까까중 = 중대가리’, ‘볼따구니=볼때기=볼퉁이’, ‘오사리잡놈 = 오색잡놈’ 같은 예가 들어 있는데, 교양인(敎養人)이 쓰는 서울말을 표준어로 한다는 표준어 규정의 총칙 제1항의 정신에 어긋나고 있다.
'서소노'의 귀밑머리와 귀고리
그리고 ‘귓결에 희미하게 들었다’에 쓰인 ‘귓결’은 ‘우연히 듣게 된 겨를’을 가리키는 단어(單語)이며, 남몰래 고자질하는 것은 ‘귓속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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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초등학교(初等學校) 당시부터 ‘성인반(成人班)’ 처녀들의 ‘귀밑머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우선은 ‘귀밑머리’ 처녀들과 학교를 같이 다닌 탓도 있었지만, 어쩌다 그녀들과 언쟁이 벌어지거나, 화를 돋우어 예상하지 않았던 억지 ‘레슬링’을 하게 되는 경우였다.
이때는 필자들이 그녀들의 손아귀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귀밑머리’를 잡고 잡아채야 했는데, 이때는 그녀들의 ‘귀밑머리’ 위치와 형태를 제대로 파악(把握)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뒤로 미루고, 우선 당시의 필자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다니던 ‘귀밑머리’ 처녀들이 어떠한 존재(存在)들이었는지부터 설명하기로 한다.
‘외동이야기’ 어느 파일에서 소개드린바 있지만, 당시의 문교당국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植民統治)와 6.25동란 등으로 적령(適齡)에 취학을 하지 못하고 있던 18세 이상에 이르는 남녀 문맹(文盲) 청소년들을 초등학교마다 특별학급(特別學級)으로 편성하여 초등학교 졸업수준의 학력(學力)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특별과정을 설치하였다. 이를 ‘성인반(成人班)’이라고 한다. '
여기에서 말하는 ‘성인반’은 아래쪽에서 소개하는 대로 미군정청(美軍政廳)이 1946년 5월에 세운 ‘공민학교’ 중 ‘성년과(成年科)’에 해당되는 과정이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여기에서 해방 이후의 우리나라 성인교육(成人敎育)의 실태를 잠시 알아본다. 1946년 당시의 미군정청(美軍政廳)에서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하고 학령(學齡)을 초과한 사람에게 국민생활에 필요한 기초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공민학교를 설치하였다.
당시의 고등공민학교 학생들
1946년 5월 ‘공민학교 설치요강(公民學校 設置要綱)’이 제정되면서 제도상 정규교육기관으로 인정되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소년과·성년과·보수과를 두었는데, 소년과(少年科)의 수업연한은 2~3년이며, 입학자격은 13세 이상으로 하였다.
성년과(成年科)는 18세 이상 된 사람이 입학할 수 있으며 1~2년 내에 배우도록 하였다. 보수과(補修科)는 13세 이상 된 초등학교 졸업자가 입학할 수 있었다.
1949년 12월 ‘교육법(敎育法)’이 제정, 공포되면서 수업연한은 3년으로 기본교육을 완성하도록 하였고, 교과(敎科)는 초등학교에 준하는 과정을 두었으며, 학급당 학생 수는 60명으로 제한하였다.
그리고 수업일수는 연간 170일 이상으로 했고, 반면 초등학교에 부설한 성인반(成人班)의 수업일수는 70일 이하로 하였으며, 교과는 문자해독(文字解讀)을 주로 하였다. 집에서 가사(家事)를 돕거나, 농사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라는 조치였다.
라후족의 '푼기명머리'
그러나 정부가 수립되고 교육법(敎育法)이 제정 공포된 지 불과 6개월 만에 발발(勃發)한 6.25전쟁은 문맹퇴치(文盲退治) 사업을 보다 제도화하고 본궤도(本軌道)에 올려놓으려던 계획을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에 당시의 문교부(文敎部)는 6.25전쟁이 소강상태(小康狀態)에 들어가자 1951년 중단되었던 문맹퇴치사업을 각계의 협조를 얻어 재정비(再整備)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는 전시하(戰時下)의 시급한 대책의 하나로 교육대상을 20~30세까지의 장정층(壯丁層)의 문맹자 교육만으로 실시하였다. 이를 위하여 1952년에는 새로운 문맹퇴치(文盲退治) 정책이 마련되어 약간의 정부예산이 반영되기도 했었다.
고등공민학교 개교기념식
이에 따라 1953년 3월에는 전국 초등학교(初等學校)에 일제히 공민학교(公民學校)를 부설하는 등 새로운 조치가 취해졌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공민학교를 공립(公立)으로 개편하는 육성방안을 마련하게 되었다.
당시 입실초등학교(入室初等學校)에 부설했던 ‘외동고등공민학교(外東高等公民學校)’도 이러한 정부방침에 의해 설립되었고, 후일 이 고등공민학교가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로 개편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공민학교를 부설운영하지 못한 초등학교에서는 특별학급으로 ‘성인반(成人班)’을 설치 운영하였다. 성인반을 수료한 자는 영지초등학교의 경우 희망자에 한하여 본과(本科) 5~6학년에 편입학(編入學)을 시키기도 했었다.
당시의 성인반 학생들
지난 1960년대 초까지는 군대에도 공민학교(公民學校)가 있었다. 내용을 소개한다. 정부에서는 휴전 후에 문맹병사들에게 한글을 교육시키기 위해 한글학교를 군내에 설치, 운영하였다.
이를 ‘공민학교(公民學校)’라고 했고, 연대(聯隊) 단위에는 ‘공민교육대(公民敎育隊 ; 약칭 ‘공교대’)’를 설치하였다.
휴전(休戰) 직후 군에서 조사한 문맹병사(文盲兵士)들의 수는 23만여 명에 달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병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비록 문맹자(文盲者)이긴 하였으나, 전쟁기간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조국을 수호한 역전(歷戰)의 용사들이었다.
당시 군(軍)에서는 휴전기간(休戰期間) 중 군사교육훈련을 보다 강화해 나가려면 병사들의 지식수준(智識水準)이 향상되어야 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문맹퇴치(文盲退治)가 다른 업무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
목욕하는 여인과 귀밑머리
또한 병사들은 군(軍)의 성원(成員)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청년들이며, 이들은 장차 국가건설에 원동력(原動力)이 될 기둥들로서 이들의 지식수준을 향상시킬 교육문제가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중요시(重要視)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군대(軍隊)의 문맹퇴치 교육이나 공민교육은 비단 군사력 증강(增强) 면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교육정책(敎育政策) 면에서도 지극히 중대한 과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배경아래 마침내 군(軍)에서는 일반교육인 공민교육 과정으로 신병훈련소(新兵訓練所)를 위시하여 사단, 연대 및 포사령부, 그리고 각 관구사령부(管區司令部)에 각각 공민학교를 설치하게 하고 문맹퇴치(文盲退治)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문맹과정 4주간, 기본과정 8주간(후에 문맹과정 6주, 기본과정 12주로 변경)으로 하여 집체교육(集體敎育)으로 실시하였다.
글을 몰라 전우(戰友)들 사이에서 ‘고문관’이라고 놀림을 당하고 있다가 이제 글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그들의 향학열(向學熱)은 날이 갈 수 록 불타올라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남에 따라 한글공부에 깊숙이 빠져 들어갔다. 필자도 잠깐 동안 공교대(公敎隊)의 교관생활을 한바 있다.
군부대 '공교대' 수료기념 사진
(우수 이수자들을 모범용사로 선발하여 산업시찰을 갔다)
본론으로 들어간다. 당시의 영지초등학교 성인반(成人班)은 주로 여학생들이었다. 남자는 농사일을 하거나, 머슴살이를 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학교에 출석할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거의가 본과(本科)에 재학중인 사내 학생들의 이모(姨母)나 고모(姑母)들이었다.
말만한 ‘처자(처녀)’들이 책보를 들고, 짤막한 ‘밤물치마’에 거의 1m나 되는 댕기머리를 칠렁이며, 살찐 엉덩이를 뒤뚱대며 다니던 그녀들의 모습에서 애숭이들인 필자들은 생각도 못한 여자냄새에 물씬 취하기도 했었다.
귀여운 남동생을 대하듯 제법 자상하게 보살펴 주던 하학길에서는 가끔 손을 잡고 함께 걸어오기도 했고, ‘다북솔’ 뒤쪽에 쪼그리고 앉아 ‘밤물치마’를 훌렁 걷어 올리고 시원한 물줄기 소리를 내며 ‘소피(소변)’를 볼 때는 ‘책보’를 받아 들고, 누가 오나 안 오나 망을 봐주기도 했었다.
다북솔 뒤에서 소피(소변)보는 성인반 여학생들
함께 어울려 장난을 칠 때는 그녀들의 ‘밤물치마’를 치켜들어 ‘고쟁이’ 색깔을 살피기도 했고, 그녀들은 보복(報復)으로 여러 사람이 합세(合勢)하여 필자들을 쓰러뜨린 후 ‘베잠방이’ 바지가랑이를 끌어내려 노팬티 상태의 ‘꼬치’를 인정사정없이 잡아 흔들기도 했었다.
당시의 경우 결혼적령기(結婚適齡期)에 접어들었던 그녀들은 얼굴에 ‘동동구리무’와 ‘코티분’을 바르고 다니기도 했었다.
남성회원들 중 원로(元老)급 회원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당시에서 얼마 전까지도 17~18세의 처녀들과 12~13세의 머슴애들이 결혼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18세 이상의 성인반(成人班) 처녀들과 12~13세의 본과(本科) 머슴애들이 함께 어울려 학교에 다녔다면, 얼마 전까지 결혼적령기에 해당하는 상대들이 함께 어울려 초등학교에 다녔다는 말이 된다.
<연개소문>의 ‘쌍검녀’ 윤자경과 귀밑머리
다시 말하면, 꼬마들인 필자들은 몰랐지만, 성인반(成人班) 처녀들은 필자들을 혼인(婚姻)의 대상, 즉 ‘남정네’로도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필자들을 의식(意識)하여 자기 올케언니 ‘구리무’와 ‘분’을 훔쳐 바르고 다니기도 했고, 필자들에게 뜨거운 입김을 의도적(意圖的)으로 내뿜기도 했었다.
괜히 필자들에게 약을 올려 필자들이 쥐어박으려고 덤벼들면, 억센 팔 힘으로 필자들을 껴안고 저수지(貯水池) 모래바닥에 몇 바퀴나 나뒹굴면서 야릇한 눈길로 내려다보기도 했었다. 귀밑머리와 째려보는 키스
필자들보다 힘이 센 말만한 처녀들이라 이런 경우는 언제나 그녀들이 필자들의 배위에 올라타고 항복(降伏)을 받아 낸다면서 육중한 엉덩이로 ‘시루는’ 동작을 흉내 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리고 숙맥인 필자들은 그런 동작(動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고,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녀들은 밤에 자기들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동작(動作)을 훔쳐 본 것 같았다.
위에서 말한 ‘시루다’라는 말은 ‘서로 버티어 겨룬다’는 뜻의 경주(慶州) 지방 방언(方言)으로 민중놀이인 ‘씨름’의 어원(語源)으로 추측되는 ‘씨룬다’와 비슷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이 말을 ‘뽐뿌질(펌프질)을 하다’ 또는 ‘왕복운동(往復運動)을 하다’는 뜻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귀밑머리
회원님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넣을 때는 ‘공기주입기’의 손잡이를 눌렀다 뺐다 하는데, 이 운동이 바로 왕복운동이며 ‘시루는’ 동작(動作)이다.
여성회원님들의 양해를 구하면서 다시 설명 드리면, 남녀가 애정행위(愛情行爲)를 할 경우 남자가 정상체위(正常體位) 상태에서 ‘피스톤 운동’을 하게 되는데, 이를 ‘시룬다’라고도 했었다.
그건 그렇고,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든, 누가 먼저든, 일을 저지르기만 하면 반드시 사내가 책임을 지던 시절이라 마음에 드는 사내아이라면 여성의 입장에서 전혀 손해(損害) 볼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야릇한 장난질에도 처녀들이 오히려 더 대담하고, 적극적(積極的)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신계리(薪溪里)에 살던 필자의 초등학교 동기생 중에는 영지초등학교를 졸업한 얼마 후 ‘성인반’ 출신 처녀의 육탄돌격(肉彈突擊) 전술에 걸려들어 조혼(早婚)을 하기도 했었다.
그의 나이 14세 때 20세의 성인반(成人班) 출신 처녀와 결혼한 그는 오래 전에 작고(作故)했지만, 그의 큰 아들이 벌써 50대 중반이나 되고 있다.
당시의 ‘성인반’ 처녀들
본론으로 돌아간다. 학교에 따라 달랐겠지만, 당시의 ‘성인반’ 처녀들은 ‘성인반’ 과정을 수료하고, 자원에 의하여 거의가 본과(本科) 6학년에 편입(編入)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본과에 편입(編入)되었다 하더라도 그녀들은 본과 학생들과는 달리 ‘단발머리’를 하지 않고, ‘댕기머리’를 길게 땋고 다녔다.
초등학교(初等學校)를 졸업하면 바로 시집을 가야했기 때문에 ‘쪽머리’를 올릴 ‘댕기머리’를 자르면 안된다는 여론에 따라 교육당국(敎育當局)에서 예외를 인정(認定)해 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어차피 집에서는 길쌈을 하고 농사일을 하는 일꾼이었기 때문에 머리에 무슨 기름을 바르지도 않았고, 대충 머리를 땋고 다녔기 때문에 언제나 ‘귀밑머리’가 헝클어진 채 늘어져 있었다.
필자들과 영지(影池) 저수지 호반(湖畔) 모래톱에서 그녀들의 일방적인 횡포(橫暴)에 의해 ‘레슬링’을 할 때는 언제나 그녀들이 필자들의 배위에 올라타기 때문에 헝클어진 ‘귀밑머리’가 제 맘대로 흘러내려와 필자들의 눈을 찌르기도 했었다.
이때는 필자들이 그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늘어져 얼굴을 떼어내기도 했는데, 두 팔이 그녀들의 억샌 손아귀에 잡힌 경우는 눈앞에 늘어진 그녀들의 ‘귀밑머리’를 사정없이 잡아채면서 가까스로 벗어나기도 했었다.
‘귀밑머리’는 앞머리나 뒷머리 쪽 머리채보다 연하고 보드라운 피부(皮膚)에 돋아나 이를 잡아당기면, 엄청난 통증(痛症)을 수반하기 때문에 아무리 덩치 큰 여성이라도 나동그라지게 되어 있었다.
어쨌든 그 시절 그녀들은 필자들이 고분고분하지 않거나, 별명(別名)을 부르며 놀리다가 잡히거나, 아니면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다가 잡히면, 가차 없이 필자들을 모래톱에 쓰러뜨려 놓고, 배위에 올라탄 채 그 큰 엉덩이로 ‘거시기’부분을 짓이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제법 튀어나온 그녀들의 광대뼈로 머슴애들의 눈이든 입이든 아무데나 비벼대곤 했었다. 뭉개져 버리라는 앙심에서였다.
귀밑머리
그리고 앞쪽 파일에서 소개한바 있지만, 필자들이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재학 당시 입실리(入室里) ‘새말’에서 자취할 때 자취집 주인아저씨의 외동딸은 예쁘기도 했지만 ‘귀밑머리’가 일품이었다.
수업시간마다 그녀의 양쪽 귀밑으로 빗어 드리운 부드러운 그 ‘귀밑머리’가 눈앞에 어른거려 칠판(漆板)에 쓴 선생님의 백묵(白墨)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등 홍역(紅疫)을 치른 씁쓰레한 추억까지 갖고 있다는 얘기는 앞쪽 파일에서 얘기 드린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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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중국의 기록으로 가늠해보면 부인은 ‘귀밑머리’를 오른쪽 어깨에 내려 드리우고, 나머지 머리는 아래로 내려 ‘댕기’로 매고 비녀를 꽂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짙은 화장(化粧)을 즐기지 않아 짙은 연지의 사용이 많지 않았으며, 버드나무 잎 같이 가늘고 아름다운 눈썹을 그렸고, 또한 비단 향료(香料) 주머니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빈하수
여기에서 잠시 ‘귀밑머리’와 ‘빈하수(鬢下垂)’를 함께 그리고 있는 심재방의 ‘귀밑머리’를 게재(揭載)하여 음미하고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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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남녀를 막론하고 결혼(結婚)을 하게 되면, ‘귀밑머리’를 푼다고 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귀밑머리’를 푼다는 말은 혼인(婚姻)을 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다.
옛날의 경우 총각이나 처녀들이 머리를 땋을 때는 귀밑의 머리, 즉 ‘귀밑머리’는 짧아서 따로 땋을 수 없기 때문에 위로 걷어 올려 다른 긴 머리에 섞어서 땋기도 했었다.
그리고 시집가고 장가갈 때에는 이 ‘귀밑머리’를 풀어서 상투를 틀고, ‘쪽’을 찌개 되어 있어 ‘귀밑머리’를 푼다는 말은 결국 예식(禮式)을 갖추어 혼인(婚姻)을 한다는 뜻이 된다.
‘귀밑머리’는 인생의 연륜을 예표(豫表)하기도 한다. 흰머리가 제일 먼저 ‘귀밑머리’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반적(一般的)으로 흰머리는 옆머리, 앞머리, 뒷머리 순으로 나타난다.
특히 ‘귀밑머리’에 흰머리가 제일 먼저 나타나는데, 이 부분부터 흰머리가 생기는 원인은 피부(皮膚)가 얇아 혈관의 분포가 다른 부위(部位)에 비해 적기 때문이다.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은 40세 전후에서부터다. 따라서 40세 이후에 흰머리가 생기는 것은 머리가 벗어지거나, 머리카락이 가늘어지는 것과 함께 자연스러운 현상(現象)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라후족(고구려 후예)여인의 푼기명머리 단장
여기에서 다시 아름답던 추억(追憶)을 가슴에 안고, 뽀얀 ‘귀밑머리’ 매만지면서 뜨겁게 사랑을 맹세하던 그 여인이 떠나버린 거리에서 밤비를 맞으며 아쉬워하는 진송남의 노래 ‘비와 함께’를 음미하고 넘어간다.
‘귀밑머리’는 또 기다림의 상징(象徵)이 되기도 한다. 회원님들, 특히 여성회원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여성(女性)의 삶은 언제나 기다림의 삶이다.
우리 외동향우회(外東鄕友會) 여성회원님들도 연말연시에 자정이 넘도록 귀가(歸家)하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수심 어린 창문가에서 귀를 쫑긋하게 열고 먼발치를 응시(凝視)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낭군님 기다리는 여인
흐릿한 달빛에 드러난 검은 송전탑, 이따금씩 대문 앞을 지나쳐 가는 불규칙(不規則)한 발자국 소리들, 그리고 마침내 자정(子正)도 훨씬 넘어 꿈길로 오는 바람 속에서 잔가지에 걸린 어둠을 흔들며 ‘귀밑머리’를 간질이는 낮은 휘파람 소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바로 귀에 익은 낭군(郎君)님의 휘파람 소리였다. 남편의 휘파람소리에 얼굴이 환해지는 여러분의 모습을 정칠용의 ‘휘파람’에서 다시 한 번 되돌아보시기 바란다.
시인 서정주는 그의 시(詩) ‘신부(新婦)’에서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귀밑머리’만 풀린 신부(新婦)가 40∼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다가 우연히 다시 들린 신랑의 손길이 닿자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사연을 그리고 있다.
오랜 동안 신방(新房)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시절 신부들에게서 고전적(古典的) 절개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서정주의 ‘신부’를 소개한다.
기다리다 돌이 되어버린 신부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신부(新婦)가 40∼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고,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說話)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신비주의적(神秘主義的)인 내용에다 다분히 관능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버리는 신부(新婦)의 비극으로 인해 그저 웃어 버릴 수만은 없게 만든다.
또한 40∼50년 동안 신방(新房)을 기다리고 있던 신부에게서 우리들 선대 여인들의 고전적(古典的) 절개를 엿볼 수 있게도 한다.
기다림에 지친 신부
무엇보다도 이 시(詩)는 신부(新婦)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躁急性)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이 유발(誘發)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옷자락이 ‘돌 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淫蕩)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한 신랑에게 신부(新婦)는 40∼50년을 기다리는 수동적(受動的)인 저항으로 맞서고 있는 대목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종국적으로 자기 소멸(消滅)이라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신랑은 자신의 성급하고 지각없는 판단으로 인해 신부(新婦)를 소박한 채 40∼50년을 철저히 잊어버리고 지냈지만, 그 무관심은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비극(悲劇)을 탄생시킨 것이다.
오해의 실마리 문 돌쩌귀 (윗쪽이 수돌쩌귀, 아랫쪽이 암돌쩌귀)
위에서 말한 ‘돌 쩌귀’는 문짝을 문설주에 달고 여닫게 하려고 암짝은 문설주에, 수짝은 문짝에 박아 맞추어 꽂는 쇠붙이로 만든 두 개의 물건으로 ‘문지도리’의 하나이며, ‘확쇠’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다시 김복근의 ‘베개’를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귀밑머리’처럼 풀어 헤친 어둠이 소슬하게 내려오는 밤이 오면, 지친 삶의 하루를 접고, 떠나버린 그대를 찾아간다는 애수(哀愁)가 흐르고 있다.
일부종사의 상징 그 시절 귀밑머리 신부
회원님들께서는 우리나라 가요사(歌謠史)에서 온 국민의 심금(心琴)을 울리면서 애창되던 대중가요(大衆歌謠) ‘번지 없는 주막’을 익히 알 것이다.
한때 온 국민의 십팔번지가 되기도 했었던 ‘번지없는 주막’에서의 ‘귀밑머리’는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鬱憤)을 토로하는 민족의 애환(哀歡)과 울분의 상징이기도 했었다.
‘번지 없는 주막’은 1940년에 발표된 대중가요로 백년설의 특이(特異)한 음성이 이 노래의 멋을 한껏 돋구어주었고, 시원하고 구수한 음정(音程)과 목소리가 조화(調和)를 이루는 노래였다.
번지 없는 주막
내용은 한 나그네가 주막집에서 주모(酒母)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그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비극적(悲劇的)인 결말을 다루고 있다.
애타게 그리던 조국광복(祖國光復)이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친일분자(親日分子)들의 방해로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자괴(自塊)와 허탈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흔히들 이 노래의 작사자 ‘처녀림’을 ‘추미림’과 동일인(同一人)으로 생각하는데, ‘처녀림’은 박영호의 예명이고, ‘추미림’은 반야월(半夜月)의 예명이다. ‘번지 없는 주막’은 ‘처녀림’ 작사에 이재호 작곡이다.
다음은 우리 모두가 언제나 흥얼거려보던 정지용의 ‘향수(鄕愁)’를 음미해 보기로 한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아내)가 따가운 해ㅅ살(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그 곳을 차마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느냐”면서 고향마을을 그리는 고백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고향(故鄕)은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났던 그 시절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이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조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을 말한다.
따라서 ‘향수(鄕愁)’는 조국(祖國)의 품을 그리는 그 당시 우리민족의 안타까운 조국애(祖國愛)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따스한 민족정기(民族精氣)를 그리워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빈약한 '귀밑머리'
‘귀밑머리’는 시인(詩人)들의 시에서 뿐 아니라 대중가요 가수들도 즐겨 매만졌다. 이용복의 ‘영일만 처녀’에서는 ‘귀밑머리’ 쓰다듬던 그 처녀 어디로 가고, 영일만(迎日灣) 백사장엔 물결만이 반겨 준다면서 보이지 않는 그 시절 ‘귀밑머리’ 처녀를 추억하고 있다. 이용복의 ‘영일만 처녀’를 소개한다.
영일만 귀밑머리 처녀
‘귀밑머리’는 지금의 청소년가수(靑少年歌手)들도 가끔 흥얼거리곤 한다. 뜻을 알고 부르는지, 별 뜻 없이 부르는지는 몰라도 종종 불리어 지고 있다.
“귀밑머리 날리게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에 묻어오는 싱 그런 꽃향기처럼 다정(多情)한 너의 마음이 실려 올 것만 같아 나는 바람처럼 들로 나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람 부는 날’의 가사를 음미해 본다.
바람 부는 날
(귀밑머리뿐이 아니라 머리채 전체가 헝클어진다)
시인(詩人)들은 또 어머니의 ‘귀밑머리’를 추억(追憶)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즐거움과 기쁨은 자식들에게 돌려주고, 괴로움과 아픔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가는 어머니에게 이제라도 그 상황(狀況)을 바꿔드리면, 어느새 희어버린 어머니의 ‘귀밑머리’가 다시 검어 지실까”라며,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김광숙의 ‘어머니 생각’을 음미해 본다.
귀밑머리
‘귀밑머리’는 병든 아내의 쾌유를 비는 순애보적(純愛譜的) ‘신기루’가 되기도 한다. 항암치료(抗癌治療)를 받으며, 힘들어 하는 아내 곁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꿈결에서나마 현실로 바꾸어지기를 기도하는 소망으로 변질(變質)되는 것이다. 정채균의 ‘이부자리를 털며’를 음미한다.
투병중인 아내
누구나 그러하듯 젊은 시절 ‘귀밑머리’ 까말 때 만나서 서로 좋아 결혼(結婚)을 하고, 온갖 바쁜 일 때문에 아내의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주지 못한 채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아내의 ‘귀밑머리’ 위에는 ‘서리’가 내린다.
그리고 온 집안 경제(經濟)를 연약한 아내에게 다 맡겨버리고, 바깥 세상사와 씨름하며, 지내는 사이 아내 역시 중년(中年)을 넘어 초로(初老)의 여인이 되어가는 상황을 문득 보게 된다.
여기에 ‘불치(不治)의 병’이라도 걸리면, ‘비통’ ‘안타까움’ ‘애끓음’이란 모든 단어들을 총동원(總動員)해도 지난날의 회한(悔恨)의 표현에는 먼발치에도 이르지 못한다.
귀밑머리
이슬 머금은 개나리 한 줄 꺾어 고운 화관(花冠) 만들어 윤기 흐르던 그 시절 그 머리에 얹어주고 싶어도 독한 항암약제(抗癌藥劑)와 설움의 거미줄 사이로 빠져나가는 아내의 ‘귀밑머리’를 되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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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밑머리’는 남자에게도 있으나, 여성에게서의 ‘귀밑머리’와 대등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고, 특별히 그 부위(部位)에 무슨 변화가 있을 때 지적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사내아이의 귀밑머리
한시(漢詩) ‘회향우서(回鄕優書)’에서는 남자의 ‘귀밑머리’ 모습을 그리고 있다. ‘회향우서(回鄕優書)’를 살펴본다. ‘회향우서’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回鄕) 우연히 쓴 글(優書)이라는 뜻이다.
이 시를 쓴 사람은 ‘하지장(賀知章)’이라는 사람인데, 당나라 때 활약했던 시인이다. 그 시절 중국에서 유학(儒學)하는 사람들은 12~3세쯤이면 결혼을 하고, 자신을 알아보고 교육해주실 스승을 찾아 세상을 나섰다.
그래서 그 시절에는 ‘소소이가(少小離家 ; 어렸을 때 집을 떠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구전되기도 했었다. 이 시에서의 주인공(主人公)도 그렇게 어렸을 때 집을 떠났다가 늙어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돌아누운 여인과 귀밑머리
그런데 고향집에 와서 보니 고향사투리는 변함이 없는데, 자신의 ‘귀밑머리’는 이미 하얗게 세어버렸다. 옛 남성들은 갓이나 탕건(宕巾)을 머리에 쓰니까 ‘귀밑머리’만 보이는데, 시인은 ‘빈 귀밑머리(貧毛)’가 세었다(衰)고 표현한 것이다. 귀밑머리가 제일 먼저 세어버리기 때문이다.
어려서 집을 떠난 유학자(儒學者)가 고향집에 돌아와 보니 자신을 닮은 아이가 쳐다보는데, 서로들 알아보지를 못한다. 여기서 아이는 누굴까.
조혼풍습(早婚風習)이 있다고 했으니까 주인공이 집을 떠날 때는 결혼을 했을 테고, 어쩌면 그때 부인의 뱃속에는 귀한 생명(生命)이 자라잡고 있었을 것이다.
귀밑머리
그 아이가 태어나서 또 어른이 되었을 테니, 이 시에서 아이는 주인공의 손자(孫子)였던 것이다. 손자를 만났는데, 손자는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손님,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물어봤다는 내용이다.
---------------------------------------------- 앞서 잠깐 소개한 ‘귀밑머리’를 푸는 경우를 조금 더 첨언(添言)하고자 한다. 예로부터 우리말에는 “귀밑머리를 틀어 얹는다”거나, “귀밑머리를 마주 푼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귀밑머리를 틀어 얹는다”는 말은 “시집이나 장가를 간다”의 뜻이고, “귀밑머리를 마주 푼다”는 “서로 혼인(婚姻)을 한다”라는 뜻이 된다.
사람이 시집 장가를 가기 위해서는 “처녀나 총각 때 땋았던 ‘귀밑머리’를 풀어 ‘쪽’을 찌거나(여자), ‘상투’를 튼다(남자)”는 뜻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 ‘귀밑머리를 마주 푼다’는 말이다.
상 투
“귓머리를 맞풀고(=마주 풀고) 이삼십 년을 살던 조강지처(糟糠之妻)까지 내몰려고”(염상섭 - 삼대)와 “영실이가 저렇게 베틀에 앉아 밤을 밝히는데, 빨리 ‘귀밑머리’를 풀어 얹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사람 많은 ‘마실방’에서 떠들어댔다”(북한, 민중의 바다)라는 글들에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대중가요(大衆歌謠) ‘번지 없는 주막’에서 지나가던 과객(過客)이 그 주막의 주모(主母)나 작부(酌婦)를 잡고, ‘귀밑머리’ 쓰다듬으며, 이별을 아쉬워했던 것은 언젠가 다시 와서 그 ‘머리를 얹어 주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주막
그리고 그 다짐을 들은 주모(主母)나 작부(酌婦)는 어느 날짜에 오겠느냐고 울면서 매달렸고, 아무리 맹세가 길어도 못 믿겠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당시의 그녀들은 비록 주모나 작부(酌婦)로 살아가고 있었어도 절개(節槪)를 생명보다 중시(重視)하던 여인들이라 하룻밤을 같이 지낸 나그네라도 서방(낭군)으로 받들어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수절(守節)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귀밑머리’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나라 잃은 민족의 울분(鬱憤)을 토로하는 민족적 애환(哀歡)의 상징이기도 하다.
귀밑머리
조선 선조 때의 유명한 여류 시인인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유희경(劉希慶)을 그리워하며, 지은 ‘금가락지’를 음미하면서 파일을 덮을까 한다.
시(詩)에서 ‘매창’은 정인(情人)의 모습을 그리면서 ‘귀밑머리’가 희어지도록 애태웠다고 고백(告白)하고 있다. 지나가는 눈길로 거들떠 봐도 얼마나 애타게 그리웠으면 가락지 낀 손가락이 여위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시절의 ‘매창’이 그렇게 그리워 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은 허균의 ‘성수시화’에서 천한 노비(奴婢)였다고 적고 있다.
당시의 일류 명기(名妓)이자 여류시인이었던 ‘매창’이 흠모(欽慕)하던 사내가 그 당시로서는 인간취급조차 받지 못하던 노비(奴婢)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됨이 맑고 신중하며, 충심(忠心)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김으로써 사대부(士大夫)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고, 시(詩)에 능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귀밑머리
유희경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어린나이에 홀로 흙을 날라다가 장사를 지내고, 3년간 ‘여막살이’를 했으며,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나서는 병으로 앓아누운 어머니를 30년간이나 모신 효자(孝子)로 소문이 났다.
‘여막살이’ 중에 마침 수락산 선영(先塋)을 오가던 이경덕의 문인 남은경의 눈에 띄어 주자가례를 배운 뒤 예학(禮學)에 밝아진 그는 국상(國喪)이나 사대부가의 상(喪)때는 의례 초빙되었다.
여막살이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에 3년동안 여막살이를 했다)
미천한 신분이라 관직(官職) 없이 시(詩)를 지으며 지내다가 부안지방에 이르러 명기 ‘매창’을 만나 사랑에 빠졌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하는 한편, 호조(戶曹)의 비용을 마련코자 부녀자들의 반지를 거둬 충당케 한 공로로 선조로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받기도 했었다. 당시의 통정대부는 정3품 당상관이었다.
이후 그는 인목대비(仁穆大妃)로부터 여러 번 술과 안주를 받게 되며, 시문학에도 뛰어나 정업원(淨業院) 하류에 침류대(枕流臺)를 짓고 시를 읊었으며,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들과 교류하기도 했었다.
노비(奴婢) 출신이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주자가례에 통달하였으며, 나라의 위태로움에 발 벗고 나선 유희경은 장수하여 80살에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고, 92살 나이로 숨을 거둔 보기 드문 천민 출신 선비요 학자였다.
귀밑머리
또 얘기가 길어지고 있다. ‘귀밑머리’를 자르는 심정(心情)으로 인정사정없이 잘라버리기로 한다. 백년설의 ‘번지 없는 주막’을 오늘은 이미자의 목소리로 들어본다.
못 믿겠소 못 믿겠소 울던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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