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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36권 / 묘갈명(墓碣銘)
이조 판서 시호 문간 이공 묘갈명 병서 - 기유년
(吏曹判書謚文簡李公墓碣銘 幷序 - 己酉)
문정공(文正公)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공업이 사문(斯文)의 표준이 되니, 선생이 몸소 실천하여 가르치신 것이 가문의 범절이 되어 이 집안의 가학(家學)이 선대의 아름다움을 이어 갈 수 있었는데, 고(故) 총재(冢宰 이조 판서) 소화공(小華公) 휘 광문(光文)이 바로 그 가학을 이은 분이시다.
공은 자가 경박(景博)이니 소화는 그의 호이다. 선계가 우봉(牛峰)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낸 공정(公靖)을 시조로 삼는다. 우봉 이씨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계속 고위 관리를 배출하였다. 참의로 영의정에 추증된 휘 유겸(有謙)에 이르러 유학으로 명성이 드러났는데, 이분이 우의정 충헌공(忠憲公) 휘 숙(䎘)을 낳으니, 명릉(明陵 숙종)의 명신이 되었다.
충헌공의 아들 휘 만창(晩昌)은 진사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손자 휘 재(縡)는 좌참찬과 대제학을 지냈으니, 이분이 바로 도암 선생으로 바로 공의 증조이시다. 조고 휘 제원(濟遠)은 대사간으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선고 휘 채(采)는 호가 화천(華泉)이니 호조 참판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는바, 공이 귀한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추증된 것이다. 화천공은 문학과 명망으로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다.
선비(先妣)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이조 참판 영순(榮順)의 따님이고, 충익공(忠翼公) 태채(泰采)가 그 증조이시다. 부인은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고 정숙하였다. 공은 선조의 후광(後光)을 이어 받아 정조 2년 무술년(1778)에 출생하였는데, 타고난 자품이 매우 뛰어났으며 여유가 있어 급히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 역사책을 배우자마자 바로 배송(背誦)하였고, 글자를 씀에 스스로 체재(體裁)를 갖추었다.
장성하자, 외가가 단서(丹書)에 걸린 일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혹자가 반시(泮試)에 응시할 것을 권하였는데도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그고 열심히 책을 읽으면서 장차 그대로 일생을 마칠 듯하였는데, 외가의 깊은 원한이 다 신원되자 비로소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신유년(1801, 순조 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병인년(1806)에 황감제(黃柑製)에 장원하여 직부전시(直赴殿試)되었다. 방방(放榜)에 이르자 순묘(純廟 순조)께서 악공을 내려주어 풍악을 연주하게 하여 영화롭게 하였다.
기사년(1809)에 천거로 승정원 주서와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는데, 같이 주서로 있던 동료가 쫓겨나 구속되자, 공은 상소를 올려 인피(引避)하고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대궐문을 나왔다. 엄한 비답(批答)으로 다시 주서에 차임되고, 얼마 후 사관의 직책(승정원 주서)에 복귀되었다.
겨울에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에 제수되고 준례에 따라 홍문관과 교서관(校書館)의 정자(正字)를 겸하였다. 공은 참하관(參下官 정7품 이하의 관직) 중에 명망이 높은 네 가지 관직을 한 때에 두루 거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겨, 선친 화천공께서 영남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적에 전서(專書 심부름꾼을 시켜 특별히 보내온 편지)로 경계한 사실을 들어 두 번 상소하여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아패(牙牌)로 공을 재촉하여 불렀으나, 여전히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않으니, 잡아다 심문하도록 명하였다. 심문이 끝나자 곧바로 그 자리에 복직되었는데, 홍문관의 본관록(本館錄)에 오른 날에 또다시 소명(召命)을 어겨 파직되었다. 신미년(1811)에 다시 검열에 제수되었는데, 아래 직위(職位)에 있는 동료가 곧바로 승진하니, 공도 전례에 따라 육품(六品)으로 승진되고 별겸춘추(別兼春秋)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여, 내각(內閣 규장각)에서는 검교(檢校)와 대교(待敎)와 직각(直閣)을 지내고, 춘방(春坊 세자시강원)에서는 겸문학(兼文學)과 겸필선(兼弼善), 겸보덕(兼輔德)과 세손우부빈객(世孫右副賓客)을 지내고, 대성(臺省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칭)에서는 헌납과 집의, 대사간과 대사헌을 지냈으며, 논사(論思)를 담당하는 자리(홍문관)로는 수찬과 부수찬, 교리와 부교리, 응교와 부응교, 부제학을 지냈다.
중간에 훈국(訓局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낭관과 문겸선전관(文兼宣傳官), 그리고 서학(西學) 교수와 중학(中學) 교수, 의정부의 검상(檢詳)과 성균관의 사성(司成), 사복시 정(司僕寺正)과 서장관(書狀官)을 지냈다. 갑술년(1814)에 열성 어제(列聖御製)의 인쇄를 감독한 공로로 통정대부로 승진되고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거듭하여 승지에 제수된 것이 무려 70여 차례에 이르렀다.
또 당품(當品)으로 특별히 도승지에 제수되니, 특별한 예우였다. 형조와 예조, 호조와 이조의 참의(參議)와 대사성(大司成)을 차례로 역임하고, 경진년(1820)에 산실청(產室廳) 약방(藥房)의 부제조(副提調)가 되어 세운 공로로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예조와 형조, 이조와 병조, 공조의 참판과 동지춘추 경연관 의금부사(同知春秋經筵官義禁府事),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지내고, 비국당상(備局堂上 비변사(備邊司)의 당상관)에 차임되어 호남을 관장하였다.
기축년(1829)에 임금의 뜻에 의해 첨서(添書)되어 한성부 판윤에 발탁되었고, 얼마 후 진하사(進賀使)에 차임되었다. 형조 판서로 묘소도감제조(墓所都監提調)에 차임되고, 또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으며 겸하여 책저도감제조(冊儲都監提調)에 차임되고 반송사(伴送使), 도총관(都摠管), 지춘추 경연 의금부사(知春秋經筵義禁府事), 지실록사(知實錄事), 이조 판서(吏曹判書), 양관제학(兩館提學), 우참찬(右參贊), 지중추(知中樞)에 차임되었다.
또 양조(兩朝)의 어제의 인쇄를 감독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해서 승문원(承文院)과 혜민서(惠民署)ㆍ관상감(觀象監)ㆍ사옹원(司饔院)의 제거(提擧)가 되고, 춘천 부사(春川府使)와 전라 감사(全羅監司), 수원 유수(水原留守)를 역임하니, 이것이 공이 지낸 내외(內外)의 관직들이다.
임신년(1812)에 서쪽의 역적들이 일으킨 반란(홍경래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않고 있었는데, 공은 홍문관의 관직에 있으면서 아래와 같이 상소하였다. “일전에 내리신 전교(傳敎)는 그 내용이 돼지와 물고기를 감동시키고 용과 뱀을 교화시킬 수 있으니, 어찌 다만 교만한 장수와 사나운 병졸들이 창을 던지고 눈물을 흘릴 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저 모반하여 불안해하는 자들이 아직도 의구심을 품고 머리를 맞대고 귀를 기울이면서 전하께서 행하시는 일을 상고하고 전하께서 하신 말씀을 검증하려고 합니다. 전하의 말씀이 일과 부합되면 저들이 개과천선하는 마음이 점점 견고해질 것이고, 일이 말씀과 위배되면 난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사람을 말로써 감동시키는 경우는 그 감동이 깊지 못하고, 행실로써 감동시키는 경우는 그 감응이 반드시 신속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어진 수령들을 선발해서 민심을 얻고 굶주린 자들을 구제하여 도적이 일어나는 것을 억제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 아뢰기를, “기전(畿甸) 지방은 사방(四方)의 근본이요, 경사(京師)는 기전의 근본입니다.
지금 힘으로 협박하고 몽둥이로 약탈하는 자들이 방방곡곡에 멋대로 횡행하여 그 근심이 적지 않은데, 기전 지방에 기근이 더욱 심하게 들어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린 듯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쉬지 않고 세금을 독촉하니, 흩어졌다가 겨우 다시 모인 백성들이 채찍과 매를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심은 한번 떠나면 다시 수습할 수가 없고 백성들은 형편이 곤궁해지면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신은 국가의 우환이 관서 지방에 있지 않고 근본의 땅인 기전에 있을까 두렵습니다. 서둘러 널리 변통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크게 시행하여, 초적(草賊)들과 간사한 도적들이 감히 점점 불어나서 도모하기 어려운 근심이 되는 일이 없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또 주청하기를, “서쪽 지방을 정벌하고 있는 대장(大將)에게 명을 내리시어 성상의 윤음(綸音)을 수백 본 필사해 깃대에 게시하고 화살에 묶어 성안으로 날려서 역적들이 두루 볼 수 있게 하시면, 응당 저들이 역적들을 배반하고 귀순해 올 것입니다.
그리고 거듭 해방(海防)을 엄격히 신칙(申飭)해서 비상사태를 사찰하고 미리 수군을 선발해서 난의 근본을 끊으소서.”라고 하였으며, 그 끝에 말하기를, “더욱더 삼가고 두려워하여 헌괵례(獻馘禮)를 행하고 개선(凱旋)을 아뢴 뒤에도, 위급함을 알리는 격문이 정신없이 오가던 날을 잊지 않으신다면 태평한 만세가 지금부터 시작될 수 있지만, 만일 혹시라도 역적들이 평정되어 근심이 없다고 생각해서 재앙을 다시 받지 않도록 뉘우치는 실제를 유념하지 않으신다면, 국가의 안위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올린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백 자에 이르렀는데, 당세의 급선무에 절실히 들어맞으니, 성상께서 가상히 여겨 받아들이셨다. 갑신년(1824)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번개의 변고로 인하여 글을 올려 권면하였는데, 대략 “상하가 서로 통하지 못함이 《주역》에서 비괘(否卦)가 되니, 비괘는 음과 양이 조화롭지 못해서 재앙과 요기(妖氣)가 자주 일어납니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동궁(東宮)을 보도(輔導)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審理)할 것을 청하니, 성상께서 내용이 정중하고 극진한 비답(批答)을 내려 유념(留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병술년(1826)에 옥서(玉署)의 장관(홍문관의 부제학)으로 본관록(本館錄)을 만들었고, 정해년(1827)에 호남의 관찰사가 되었는데, 흉년을 당하자 자신의 녹봉까지 덜어 영진곡(營賑穀)을 만드니, 백성들이 재앙을 알지 못하였으며, 일반적인 준례를 따르지 않고 농사를 권장하고 선비들을 공부시켰다.
전조(銓曹 여기서는 이조를 가리킴)의 장관이 되어서는 주의(注擬)를 격식에 따라 행하여 시의(時議)에 흔들리지 않았다. 당저(當宁) 초년에 각신(閣臣)으로서 일찍이 빈료(賓僚 세자시강원의 관료)의 자리에 있었다고 하여 번을 돌아가며 권강(勸講)에 나갔는데, 공은 진강(進講)하는 전날에 책을 펴놓고 단정히 앉아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입으로 풀이하여 반드시 극진히 연구하여 마음속에 의심이 없게 된 뒤에야 비로소 경연에 오르곤 하였다.
군주와 가까운 곳에 자리한 30년 동안 일에 따라 경계하고 풍간(諷諫)하였다. 이때 죽을죄를 범하였으나 특별히 용서를 받은 액례(掖隷 액정서(掖庭署)에 속한 이원(吏員)이나 하례(下隷))가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이 무리들이 스스로 책임을 면하는 것을 급하게 여겨 사면할 수 없는 죄를 무릅쓰고 범하였으니, 반드시 그 해당되는 형률을 피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안 것입니다. 이미 저들이 국가의 기강을 훼손한 것을 알았으면 어찌 이렇게 법을 굽힐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또 죄 아닌 죄로 벼슬을 빼앗기고 쫓겨난 대신이 있었는데 문묘에서 작헌(酌獻)하라는 명령을 갑자기 내리자, 공이 또다시 아뢰기를 “대신에게 설령 죄 줄만한 단서가 있더라도 실정을 규명하고 너그러이 용서하며 특별히 예우하여야 성상의 함홍광대(含弘光大)의 덕이 빛날 것인데, 도리어 우연히 살피지 못해 저지른 잘못을 가지고 갑자기 문외출송을 시키시니, 기상이 저상(沮喪)되고 있습니다.
문묘에서 작헌하라는 명령은 비록 한때에 관계되나 백성들의 이목은 8도(道)에 관계되니, 저의 지나친 우려가 비단 금일에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또 문묘에서 작헌하는 것이 얼마나 성대한 일인데, 한밤중에 명령을 내려 졸지에 예를 행하게 하였으니, 사전(祀典)을 중시하는 의리에 위배됨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조(京兆 한성부)의 낭관(郎官 정5품 통덕랑 이하의 당하관의 총칭) 중에 자신의 직임을 소홀히 처리하여 죄를 지어 처벌된 자가 있었는데, 공이 아뢰기를 “방방곡곡에 지위(知委)하여 나이 많은 백성들을 초치(招致)하지만 이는 평상시에 명을 대기하는 것이 아닌데, 또 그중에서 가난하고 궁색한 백성을 가려 뽑는 일은 지체(遲滯)되기가 쉽습니다.
형법은 중도를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삼천 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는 것은 편배(編配) 가운데 무거운 형벌이니, 지나친 처분이 아닐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성상께서 공이 아뢴 것을 옳다고 여겨 석방하도록 명하셨으니, 진실되고 한결같은 충정과 정성으로 말을 다하지 않음이 없는 태도가 이와 같았다.
무술년(1838, 헌종4) 봄에 피로한 기색을 보이다가 윤4월 18일에 고종명(考終命)하니, 때는 마침 공이 태어난 갑년(甲年)에 한 달이 차지 못하였다. 사대부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 서거했다고 말하였으며, 성상께서는 내각의 속관(屬官)을 보내시어 상주를 조문하고 치제하기를 예법(禮法)대로 하였다. 7월에 양지현(陽智縣) 서쪽 묵가(墨街) 간좌(艮坐)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을사년(1845)에, 시법(諡法)에 있어 ‘배우기를 힘쓰고 묻기를 좋아한다.〔勤學好問〕’는 문(文) 자와 ‘한결같은 덕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다.〔一德不懈〕’는 간(簡) 자를 써서 ‘문간’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배위(配位)인 정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현감 재정(載鼎)의 따님인데,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이 그 선조이시다. 5남 3녀를 두었으니, 도(壔)는 지금 부사이고, 문정공에게 양자로 간 진사 후(𡎋)와 준(埈)은 모두 요절하였다.
우(㘾)는 전임 대사성이고, 희(土+喜)는 전임 참봉이며 딸들은 참판 한정교(韓正敎)와 홍용주(洪用周), 진사 김인근(金寅根)에게 출가하였다. 희의 딸은 박현양(朴顯陽)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공은 천품이 온화하고 후덕하며 몸가짐과 풍도가 장중(莊重)하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겸손과 신중함으로 스스로를 수양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천성으로 타고나서, 살아계실 때에는 화순(和順)함을 지극히 하였고 돌아가시자 저존(著存)의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매일 아침 아들들을 이끌고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삭망(朔望)에는 반드시 종가의 사당에 배알하였다. 제사가 있어 재계(齋戒)할 적에 힘써 정성과 예법을 다하였으며 기일(忌日)에는 마치 초상 때처럼 곡하였다.
혹 선친께서 좋아했던 음식을 우연히 만나기라도 하면 항상 흐느끼며 차마 먹거나 마시지 못하였다. 선조의 일에 정성을 다하여 촌수가 멀수록 더욱 힘을 다하였으며, 윗대의 여러 묘소에 모두 묘지(墓誌)를 자기로 구워 묻어서 능곡(陵谷)의 변고에 대비하였으니, 고심하여 우환을 근심함이 모두 이처럼 지극하였다.
미처 교정을 보지 못한 문정공이 저술한 《예람(禮覽)》을 전심전력으로 윤색하여 끝내 책으로 만들었다. 또 친척 가운데 소원한 자들과도 친밀하고 화목하게 지내니, 모두가 “나의 몸을 의지할 수 있다.”라고 하여, 허름한 옷을 입은 선비들이 찾아와 집안에 가득하였는데도 정성을 다하여 응접하였으니, 이는 모두 효를 미룬 것이었다.
집안에 있을 적에 살림살이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았고 재화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으며 의롭지 못한 선물은 받지 않았다. 두 번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나, 진귀한 패물은 단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다. 입는 옷은 삼베나 명주 베로 지은 것에 불과하였고 음식에 있어서는 거친 음식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좌우에는 경전(經典)만을 두었을 뿐 패서(稗書)를 함께 두지 않았다.
먼지가 방안에 가득하였는데도 편안하게 여겼으며 의로운 방법으로 자질(子姪 아들들과 조카들)을 가르치고 노복들을 다스려 한 번도 꾸짖고 욕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적에 진실하고 꾸밈이 없어서 빈한(貧寒)한 선비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벼슬을 가지고 뽐내지 않았다.
세상의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말하지 않았으며, 담백한 흉금과 광달(曠達)한 운치로 사람들로 하여금 공을 해치려는 마음을 저절로 깨끗이 버리게 하였다. 말년에는 또 경례(經禮 강령(綱領)이 되는 예)에 대한 공부에 힘쓰고 명리(名理)를 깊이 연구하였으며, 시는 성정(性情)을 그대로 쏟아내었고 문장은 의미가 잘 전달되고 논리가 뛰어나니, 공의 유고(遺稿)를 읽어보면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능하지 못하다고 여겨 문원(文苑)의 임무를 맡는 일을 극구 사양하였으니, 더욱 조행이 편안하고 소탈하였음을 검증할 수 있다.
평소에 남과 경쟁하지 않았으며 담박함이 조용한 옛 우물과 절로 떠도는 빈 배와 같았다. 이 때문에 매우 화려하고 현달한 지위에 있었으나 사람들이 시기하지 않았고, 평피(平陂)의 시기를 겪었으나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약 일이 명분과 의리에 관계되면 반드시 꺼리지 않고 직언(直言)하였는데,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아 남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을 잘 말하였으며, 일의 시초와 마지막을 탐구하여 우뚝하게 당대(當代)의 완인(完人 덕행이 완미(完美)한 사람)이 되었다.
공의 후손들이 번성하고 복록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니, 세주(世胄 대대로 녹(祿)을 이어받은 집)들을 두루 꼽아 봐도 공의 집안보다 더 성대한 경우는 드물다. 이는 바로 공이 유여(有餘)한 복을 후손에게 남겨 준 것이니, 아아, 아름답다.
불초가 공의 선고이신 화천공을 한천(寒泉) 가에서 배알할 적에, 공이 이때 포의의 신분으로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마치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 어눌하였다. 공은 높고 귀한 신분이 되어 산기슭에 사는 나를 자주 방문하였는데, 예전의 어눌한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뛰어난 언론과 훌륭한 식견은 순수하게 올바른 법도로 보필함에 있어 규범(規範)이 되었으니, 이 때문에 문정공의 훌륭한 후손이 된 것이다. 공이 막 화성(華城 수원)의 유수가 되었을 적에 불초가 공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한천에 은거하여 문정공의 뜻과 사업을 닦을 것을 권하자, 공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낙하였다.
차마 곧바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 하루도 이를 잊은 적이 없으니, 안타깝다. 대성(大成) 군이 공의 아우 상서공(尙書公)이 저술한 행장을 가져와서 불초에게 묘갈명을 요구하면서 이르기를 “이 세상에 우리 선인을 아시는 분은 오직 선생님이 있을 뿐이니, 묘갈명을 지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니, 불초가 늙어 붓과 벼루를 버려두고 있었으나, 감히 사양할 수가 없어서 뒤에 죽는 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여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명문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혁혁한 세주여 / 奕奕世胄
우봉이 우뚝 솟았네 / 有屹牛峰
충헌공과 충숙공이 / 忠憲忠肅
직언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네 / 謇謇匪躬
문정공이 우뚝이 태어나시어 / 文正挺生
당대의 유종이 되었네 / 爲世儒宗
화천공이 이를 계술하여 / 華泉踐述
명망과 실상이 모두 높았네 / 名實俱隆
선조의 영광을 품고 태어나서 / 肧胎前光
공이 또 명성을 이었네 / 公又繼聲
그 덕이 온화하고 공손하며 / 維德溫恭
그 성품이 질박하고 곧았네 / 維性醇貞
효성과 우애에 근본하여 / 孝悌爲本
가정에서 훌륭한 행실 갖췄네 / 行備家庭
과거에 급제하여 / 釋褐策名
밝은 조정에서 명성을 드날렸네 / 颺于明廷
한림원과 규장각에 들었고 / 翰院奎華
문원과 전형에 올랐네 / 文苑銓衡
조정에서 가지런히 홀을 잡고 납약하여 / 整笏納約
군주의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간쟁하였네 / 君違必爭
시무에 대해 통렬히 진언함에 / 痛陳時務
참된 정성을 다하려 하였네 / 要殫眞誠
밝게 빛나 이에 등용되었고 / 有濯斯庸
쟁쟁하여 이에 명성 높았네 / 有𤨿斯鳴
격절하지도 않고 추종하지도 않아서 / 不激不隨
성상께 지우(知遇)를 입었네 / 受知聖明
어찌 장수(長壽)를 누려 / 胡不黃耉
그 성취를 다하지 못하였는가 / 而究厥成
맑고 투명한 호련이며 / 瑚璉淸瑩
그윽한 향기의 지란이네 / 芝蘭幽馨
이는 바로 여론(輿論)이니 / 是乃輿誦
누가 감히 달리 평하겠는가 / 疇敢改評
세상에 덕이 높은 원로가 없으니 / 世無耆德
이에 공이 전형이 되었네 / 用作典刑
어수가 집에 가득하니 / 魚鬚滿堂
후손들에게 넉넉히 드리우네 / 垂裕遺贏
우뚝이 솟은 묵가(墨街)의 언덕에 / 嵂嵂墨岡
고요한 묘소가 있네 / 侐侐佳城
나의 말은 아첨이 아니니 / 我辭非諛
천년토록 밝게 이어지리라 / 昭垂千齡
<끝>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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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年]
吏曹判書謚文簡李公墓碣銘 幷序 - 己酉
文正公陶菴李先生盛德大業。表準斯文。而身敎所推。用成家範。門庭詩禮。克紹先休。故冢宰小華公諱光文。乃其一也。公字景博。小華其號也。系出牛峯。以高麗侍中公靖爲初祖。入本朝珪組蟬嫣。至參議贈領議政諱有謙。以儒學顯。是生右議政忠憲公諱䎘。爲明陵名臣。有子諱晩昌。進士贈吏曹判書。有孫諱縡。左參贊大提學。是爲陶庵先生。卽公曾祖也。祖諱濟遠。大司諫贈吏曹參判。考諱采號華泉。戶曹參判贈吏曹判書。用公貴也。華泉公文學聲望。矜式士林。妣楊州趙氏。吏曹參判榮順女。忠翼公泰采其曾祖也。孝友貞淑。公承藉前光。以正宗二年戊戌生。生稟絶異。無疾遽色。纔受史。已成誦。寫字自具體裁。旣長以外氏罹丹書不應擧。或勸赴泮試。而亦不從。關門劬書。若將終身。及外氏幽寃畢伸。始入試圍。辛酉中司馬。丙寅魁柑製 。及放榜純廟賜樂以寵之。己巳薦授承政院注書,藝文館檢閱。因注僚汰拿。疏引徑出。嚴批還差注書。尋還史職。冬除奎章閣待敎。例兼弘文校書正字。公以參下名官有四。而一時遍擧爲難安。引華泉公在嶺邑。專書爲戒。再䟽辭不許。用牙牌促召公。猶逡廵不進。命拿勘。旣罷旋仍。館錄日又違召罷。辛未還付檢閱。因下僚徑陞。援例陞六品。付別兼春秋。自是歷敭淸顯。內閣則檢校, 待敎, 直閣。春坊則兼文學, 兼弼善, 兼輔德, 世孫右副賓客。臺省則獻納, 執義, 大司諫, 大司憲。論思則修撰, 副修撰, 校理, 副校理, 應敎, 副應敎, 副提學。間拜訓局郞。文兼宣傳官, 西學中學敎授, 議政府檢詳, 成均, 館司成, 司僕寺正, 書狀官。甲戌以御製監印敍勞陞通政。拜同副承旨。屢拜至七十餘度。又以堂品特除知申。異數也。歷拜刑禮戶吏四曹參議。大司成。庚辰以產室廳藥房副提調。陞嘉善拜禮刑吏兵工五曹參判。同知春秋, 經筵官義禁府事, 都摠府副摠管, 差備堂句管湖南。己丑睿旨添書擢漢城府判尹。尋差進賀使。以刑曹判書差墓所都監提調。又拜工曹判書。兼差冊儲都監提調, 差伴送使 , 都摠管, 知春秋經筵義禁府事, 知實錄事, 吏曹判書, 兩館提學, 右參贊, 知中樞。又以兩朝御製印進勞陞正憲。提擧承文院, 惠民署, 觀象監, 司饔院, 春川府使, 全羅監司, 水原留守。玆爲公內外官閥也。壬申西冦未平。公以館職陳疏言。日昨傳敎。可以感豚魚化龍蛇。豈止驕將悍卒投戈泣下已矣哉。然彼反側者。尙懷疑懼。聚首傾耳。考殿下所行之事。驗殿下所宣之言。言與事符則遷善之心漸固。事與言背則思亂之心復興。故古人云動人以言者。其感不深。動人以行者。其應必速。仍請選良吏得民心。救饑餓禁竊發。又曰畿甸四方之本。京師畿甸之本。而強劫椎剽。肆行坊曲。其憂非細。而畿邑饑饉尤甚。民情倒懸。而催科不止。乍散還集之民。不堪鞭扑。人心一去。不可復收。民勢旣窮。靡所不至。竊恐國家之憂。不在關西而在根本之地。克恢通變。大施拯濟。俾草竊奸宄。無敢有滋蔓難圖之患。又請敕西征將臣。廣寫綸音數百本。揭旗竿約飛矢。遍示城中之賊。則自應背逆歸順。申嚴海防。伺察非常。預簡舟師。以絶亂本。終言益加兢惕。雖在獻馘奏凱之後。無忘羽書旁午之日。則太平萬世。自今伊始。苟或謂賊平無憂。不念悔禍之實。則國之安危。未可保。首尾累百言。切中當世之急務。上嘉納。甲申以諫長因雷異陳勉。槩言上下不交。在易爲否。否則陰陽不和。灾沴屢興。仍請輔導東宮。審理寃獄。優批體念。丙戌以玉署長行館錄。丁亥觀察湖南。値歲飢。捐廩營賑。民不知灾。勸農課士。不循恒例。及秉銓。注擬循格。不被時議所撓。當宁初服。以閣臣曾經賓僚。輪進勸講。進講前日。披卷端坐。心語口釋。必盡究賾。無疑於心。然後始登筵。處邇密三十年。隨事規諷。時有掖隷犯死罪特貸者。公奏曰此輩急於自脫。冒犯罔赦。必自知其當律之不可逭。旣知其虧損國綱。則何爲此屈法乎。又有大僚以非罪削黜者。而文廟酌獻之命猝下。公又奏曰大臣設有可罪之端。原情而恕之。優禮而待之。有光於含弘廣大之德。而乃以適然不審之失。遽使之逬出門外。氣象愁沮。命令雖係於一時。瞻聆有關於八方。過計之憂。不但在於今日。且文廟酌獻。何等盛擧。而深夜發令。猝地行禮。有違重祀典之義 。京兆郞有以慢忽被罪者。公奏曰知委坊曲。招致耆民。此非常時待令。而又就其中抄出貧竆者。則易致遲滯。刑章貴乎得中。而流三千里。編配中重典。處分恐涉過當。上可其奏命釋之。其斷斷忠款。言無不盡者如此。戊戌春示憊。閏四月十八日考終。適以所降之甲而月未周。衿紳咸稱贒宰相逝矣。上遣閣屬官。弔孤致侑如禮。七月葬于陽智縣西墨街艮坐。乙巳用勤學好問一德不懈二法。賜謚文簡。配貞夫人昌原黃氏。縣監載鼎女。文敏公愼其先祖也。擧五男三女。壔今府使。𡎋進士出后尸文正公嗣。埈幷夭。㘾前大司成。(土+喜)前參奉。女適參判韓正敎, 洪用周, 進士金寅根。 (土+喜) 女朴顯陽。餘幷幼。公天資和厚。儀度端凝。寡言笑。謙愼自牧。孝友天植。生極愉婉。沒盡著存。每朝率諸子謁廟。朔望必拜宗祠。承祭齋潔。務殫誠禮。哭諱如袒括 。或遇先公所嗜。輒泣不忍進用。誠先事彌遠而彌盡其力。上世羣位。幷燔誌埋壙。用備陵谷。其苦心慮患。靡極不至者類此。文正公所著禮覽未及塗洗者。刻意修潤。竟底成書。敦睦宗族疎遠者。咸曰於我乎歸。布褐滿座而不倦應接。是皆孝之推也。居家不問產業。口不道貨財。不受非義之饋。再赴燕。凡係珍貝。一物無所隨。衣不過布帛。食不厭蔬糲。左右經籍。不雜稗書。凝塵滿室晏如也。敎子姪御奴僕以義方。未嘗叱咜。待人悃愊無華。雖蓬蓽之士。不加以爵位。而絶口不及世事。冲襟曠韻。自令人機心淨盡也。晩又用工經禮。鑽硏名理。詩好陶寫性靈。文取辭達理勝。讀其稿可知其人。然自謂不能。牢謝文苑之任。彌可驗操履安素也。平生與物無競。澹若古井之不波。虛舟之自泛。以故極華顯之位而人不猜。閱平陂之會而世無訾。然苟關名義 。必正言不諱。確而無撓。能人之所難能。原始要終。卓然爲一代完人。而後承繁衍。福祿未艾。歷選世胄。尠與爲京。玆乃公之留有餘不盡者。於乎休哉。不佞拜華泉公于泉上。公時以韋布侍坐。訥訥若不能言。及公崇貴。屢訪我岳麓。而不改舊度。名論雅識。粹然是法拂規矱。所以爲文正公肖孫也。方公之居留華城。不佞勸公納節。而遂初泉上。用修文正公志業。公頷可。固未忍便訣。而意未嘗一日忘也。惜哉。大成君齎公季氏尙書公所述狀文。謁銘于不佞曰。斯世知吾先人者。惟子在耳。願有述焉 。不佞老閣筆硯。而有未敢辭者。塞後死責也。遂力疾而爲銘。銘曰。
奕奕世胄。有屹牛峯。忠憲忠肅。謇謇匪躬。文正挺生。爲世儒宗。華泉踐述。名實俱隆。肧胎前光。公又繼聲。維德溫恭。
維性醇貞。孝悌爲本。行備家庭。釋褐策名。颺于明廷。翰院奎華。文苑銓衡。整笏納約。君違必爭。痛陳時務。要殫眞誠。
有濯斯庸。有𤨿斯鳴。不激不隨。受知聖明。胡不黃耉。而究厥成。瑚璉淸瑩。芝蘭幽馨。是乃輿誦。疇敢改評。世無耆德。
用作典刑。魚鬚滿堂。垂裕遺贏。嵂嵂墨岡。侐侐佳城。我辭非諛。昭垂千齡。<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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