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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금오봉 468m)을 등산하다.
글 쓴 이 旲 熀 高 達 五
2월 24일 설레는 맘으로 대문을 나서니 훈풍(薰風)을 타고 봄이 오는 소리가 온 몸으로 느껴진다. 오늘은 기해년(己亥年) 시산제(始山祭)를 모시는 날이라 제물(祭物)에 조식(朝食), 하산주(下山酒)까지 아마도 한 추럭은 될 것 같으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일이 참으로 크고도 무겁게 느껴진다. 모든 준비물에 정성을 다 하신 회원님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오며, ‘평사휴게소’에서 조반을 드실동안 주위를 잠시 둘러봅니다.
소공원 내에는 설총(658~?)의 ‘이두문자’ 와 ‘삼성현(三聖賢)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 (一然. 1206~1289)스님’에 관한 안내문이 보인다. 설총은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출생하여 “이두문자(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한국어를 적던 표기법)”를 창안하여 널리 보급하였으며, 이도(吏道), 이도(吏刀), 이두(吏讀), 이토(吏吐)라 고도 한다.
보각국사 일연스님은 속명이 김견명(金見明),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자(字)는 회연(晦然)으로 14세에 출가하여 주로 비슬산을 중심으로 수행하였으며, 22세에 승과에 합격, 1285년(78)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그가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1281~1283년 경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없는 단군신화(檀君神話)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어 있어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수립하였다. 살아 백년이 어려운데 님의 향기는 만년을 가오리다!
차는 신나게 달려 경주 남산의 삼릉골(三陵谷) 주차장에 도착하니 시계는 9시를 조금 지나고 있다. 준비됀 제물(祭物)을 회원님들이 골고루 나누어 들고는 삼릉 주위의 솔 밭에서 시산제(始山祭)를 정성 껏 모심니다.
‘시산제(24회)’를 통하여 남산산악회의 무궁한 발전과 모든 회원님들의 일신건강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기원 기원 하였습니다. 시산제를 마치고 돼지고기며 팟시루떡을 골 고루 나눠드시고는 솔 향기 그윽한 ‘삼릉골’의 답사여행을 출발합니다.
삼릉(三陵) 주위로 우거진 소나무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남산을 대표하고 국내에서 제일가는 솔 밭이라 하겠습니다. 그 가운데 1800여 년 동안 고즈넉이 잠들어 계시는 세 분의 신라왕이 계시니,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154~184),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제54대 경명왕(景明王. 917~924) 등의 무덤이 있어 삼릉(三陵) 또는 여름에는 찬 기운이 돌아 냉골(冷谷)이라 한다.
이 중 신덕왕은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6)의 사위로 제52대 효공왕(孝恭王. 897~912)이 후사(後嗣)가 없어 신하들로부터 추대됀 왕이다. 재위 중에는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으며 가운데 능(陵)이다.
아름다운 송림(松林)을 배경으로 김해진님에게 부탁드려 필자도 한 컷 찍습니다. 몇 걸음을 더 올라 삼릉 머리쪽에서 주위를 살펴보니 청룡(靑龍) 백호(白虎)는 허(虛)하나 주산(主山)과 안산(案山) 조산(朝山)은 튼실하도다!
우리나라의 풍수지리(風水地理)가 대개 임진란(1592) 전 후로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학계에선 얘기하지만, 삼릉의 배치를 보면 그 보다 훨씬 더 상고시대 때부터 자생적으로 산수를 보는 비법이 있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삼릉위로 비치는 아침 햇살이 누런 잔디색깔에 오버랩(over-lap)되어 황금빛으로 찬란하고, 천년 전에 왕혼(王魂)이 만세에 여여(如如)합니다 그려! 잘 다듬어진 등산로를 따라 100여 미터를 올랐을까? 우측 길 옆에는 ‘삼릉곡 제1사지 탑재와 불상’들을 한곳에 모아두었다.
탑재와 목없는 불상(약사여래불로 추정) 4점이 모셔져 있어 하나 같이 그 훼손이 심해 식별이 어렵슴니다. 유구한 세월동안 풍우(風雨)에 의한 마멸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 도굴범(盜掘犯)들의 고의적인 훼손이 더 클 것으로 여겨져서 일그러진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선두는 어드메 쯤 가셨는지 보이지도 않고, 후미에 황까페지기님, 신승우님, 정일영님, 김해진님, 구윤서님 등 5~6명이 한 조가 되어 이런 저런 세상사 얘기들을 나누면서 오르니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을 하는 기분이 든다.
다시 200여 미터를 더 오르니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머리와 두 무릎 수인(手印)이 파괴되어 있으며 옷 주름은 생생하게 남아있다. 안내문에 동국대 발굴조사단에 의해서 1964년에 발견되었으며 높이 1.6m, 너비 1.56m의 큰 불상이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두툼한 가슴 넓은 어깨는 신라 전성기(8세기 중엽으로 추정)에 조성된 불상이다.
그 북쪽 산등성이에 뾰족한 바위에는 “마애관음보살상(磨崖觀音菩薩像)”이 새겨져 있는데, 일정상 다 답사치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100여 미터를 더 진행하니, 우측에서 흐르는 작은 개울물이 합쳐지는 지점에 병풍바위처럼 생긴 자연석 바위에 동. 서 두 군데로 새겨진 “선각마애불(線刻磨崖佛)”이 있다.
동편 암벽(巖壁)에 새겨진 본존 석가여래는 연꽃좌대 위에 앉아 있으며, 양 옆에 문수(文殊) 보현(普賢) 두 보살이 서 있다. 연하여 서쪽 암벽의 아미타삼존은 여래가 연꽃좌대 위에 서 계시고, 양쪽 협시보살은 연꽃 위에 앉아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 암벽에 마치 일필휘지(一筆揮之)로 갈겨 쓴 듯... 단숨에 주~욱 내려 그은 듯 합니다. 옛 말에 “성인(聖人) 신력(神力)으로 손톱으로 새긴다.”드니, 그러 한 공법(工法)으로 새긴 것인가? 천 년 전에 석공의 신력(神力)에 감탄하면서 우측으로 돌아 나오니, 건너편 바위 벼랑아래 산신각을 모셔놓아 오 가는 답방객들이 참배를 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경주 남산은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부처가 머무는 영산(靈山)으로 신성시 되었으며, 아울러 수 많은 불적(佛跡)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연하여 동서의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르며, 고위산(高位山)과 금오산(金鰲山)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그 규모는 작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또 2000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국내는 물론이요, 세계적 명산으로 알려져 있어 사계절 방문객들이 넘치고 넘쳐나며, 소나무도 꼬질 꼬질 비틀어져서 천년송(千年松)의 향기를 머금어 사바세계(裟婆世界)에 찬란히 피어 오름니다!
이 밖에도 마애석가여래좌상(磨崖釋迦如來坐像)과 흔들바위, 부부바위가 있다 하나 다 둘러보지 못하고, 20여 분을 더 올라 제7 절터에 인접한 능선에서 몇 몇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잠시 휴식을 합니다.
바로 아래는 정사년(丁巳年)에 조성됀 무안(務安) 박씨묘가 한기 있는데, 약 90년은 됐을 것으로 짐작되며 상당한 길지(吉地)에 모셔져 있다. 연하여 우측으로 작은 개울을 건너 험준한 능선 위에는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진좌(鎭坐)하고 있으며 보물 제66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대석(下臺石)은 없이 땅에 있는 지대석(地臺石) 위에 중대석(中臺石)이 조성되어 있으며, 화려한 연화좌대(蓮華坐臺) 위에 석불이 모셔져 있는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본래는 얼굴 부분에 심한 훼손이 되어 2007~2008년에 보수. 정비하였으며 그 뒤로는 거대한 바위아래 천연동굴이 있어 옛 사람들의 수행처(修行處)였을 것으로 짐작이 됨니다. 또 안내문에 조금 아래 바위군락에 탑과 석등이 있었으나 모두 훼손되었다고 한다.
동행한 회원님들에게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적당한 거리에서 주위를 조망하니, 주산은 우뚝하고 백호는 그만 그만 하지만 청룡(靑龍)이 참으로 훌륭하여 옛 선인들의 안목과 지혜에 탄성이 절로 남니다.
상선암(제8 절터) 가는 길은 험준하고 가팔라서 오르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여러 회원님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20여 분을 올라 절 입구에 당도하니, 제(祭)를 모시는지 북소리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다.
상선암(上禪庵)은 그 규모가 왜소하고 경사가 심한 곳에 지어져 있어 절이라기 보다는 절 우측 높은 바위벼랑에 새겨진 “마애여래대좌불(磨崖如來臺坐佛)”을 모시고 관리하기 위해 있는 것 같습니다.
법당에 들어 간단히 예를 드리고 마애불 쪽으로 오르니, 용왕당 앞에서 스님의 독경(讀經)소리와 불자님 대 여섯명이 지극정성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와서 소원(所願)하는 바를 다 이룰 수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정성을 다 하는 것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힘겹게 힘겹게 올라 마애불에 도착하니 일시에 안광(眼光)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탁 트인다. 이 맛에 산에 오르는 기라! 거대한 암벽에 남산에서 최대의 마애불 답게 웅장하고 장엄합니다 그려!
뒷산의 암봉은 준엄하게 솟아 있고, 그 동편으로 ‘상사바위’가 하늘에 떠 있는 듯 하며, 연이어서 동남방에 금오산 정상이 필봉(筆峰)으로 찬란하고, 연하여 바위산들이 청룡(靑龍)이되어 아름답게 감싸주시니 천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을 이어 온 힘이 바로 지덕(地德)의 덕분이 아니겠는가!
이름모를 석공(石工)의 찬란한 예술품이 천년후에 중생을 위로합니다 그려! 너비 4.2m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아 천하를 내려다 보며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다 들어 주실 것 같습니다.
두툼한 입술과 우뚝한 콧 날에 덕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줍니다. 손. 발. 법의는 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광배(光背)는 별 다른 문양이 보이지는 않는다.
선 채로 예를 올리고 출입금지됀 길을 따라 상사바위에 당도하니 벌써 점심을 드시는 분들이 계신다. 상사바위는 남산신(南山神) “상심”이 살고 있는 바위이며, 남쪽면은 “산아당(産兒堂)”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 낳기를 기도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1856년에 새겨진 “산신당(山神堂)”이라는 명문이 있다.
또 ‘상심’은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875~886)이 포석정(砲石亭)에 행차했을 때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기도 했다 한다. 연하여 동쪽면에는 남근석과 기도용 감실(龕室)이 있으며 그 아래 머리와 좌대가 훼손됀 조그마 한 석불이 있는데, 마모가 너무 심하여 식별(識別)이 어렵습니다.
이제 부터는 능선길이라 걷기도 수월하고 조망(眺望)하는 경치도 좋아서 가히 신선됀 기분으로 걷습니다. 답사에 열중하다 보니 남산님들은 어디까지 가셨는지... 바지런히 걸어서 금오산 정상에 이르니, 많은 등산객들이 기념촬영에 분주해서 얼마를 기다렸다 후미의 5~6명에게 만 간단히 사진촬영을 해 드리고는 선착한 회원님들과 합석하여 중식을 맛나게 먹습니다.
점심후 여러 회원님들에게 단체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는 잠시 천하를 조망합니다. 금오산(金鰲山. 468m)은 낙동정맥의 백운산(892m) 부근에서 동북방향으로 한 줄기가 뻗어 나와 치술령을 지나 고위산(495m)을 거쳐 금오산에 이르고, 다시 그 잔여지맥은 작봉에서 경주시내 남천(南川)에 드리우고 있으며, 치술령에서 갈라진 다른 한 지맥은 조항산. 토함산을 거쳐 삼봉산, 공개산을 지나 포항 호미곶에서 그 지맥을 동해바다에 떨구고 있으니, 이름하여 호미지맥(虎尾支脈)이라 한다.
아울러 남산 전체로는 왕정골, 절터골, 부처골, 탑골, 미륵골, 천암골, 철와골, 국사골, 천동골, 봉화골, 별천룡골, 백운계, 천룡골, 용장계(茸長溪), 비파골(琵琶谷), 약수골, 삿갓골, 냉골, 포석계 등 끝없이 나누어져서 골골이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동쪽에는 1970년 대에 박정희 대통령 때 통일전 등을 건립하여 성역화 하였다.(윤경렬 저. 겨레의 땅 부처님 땅. 참조)
용장계(茸長溪) 이정표를 따라 10여 분을 내려와서 산림도(山林道)에 이르니 오후의 날씨가 어찌나 포근한지 완연한 봄 날씨다. 산매화도 제법 피어서 상춘객을 맞아주시고 양지바른 묘지 부근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정담(情談)을 나누고 있다.
길섶에는 소나무가 지천으로 많지만 간혹 감태나무, 노간주나무 등이 보인다. 10여 분을 진행하여 우측편에 용장계곡으로 나려가는 이정표를 따라 200여 미터를 더 나아가니, 거대한 암반(巖盤)위에 균형잡힌 3층석탑이 우뚝하다.
화강암 석재에 찬란한 태양빛을 받아서 보는 눈이 다 시리다! 탑 모양은 신라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가탑(釋迦塔) 양식이며, 기단석(基壇石)은 없이 바로 암반위에 상층기단(上層基壇)을 세웠다.
해발 400여 미터 되는 높은 산에 탑 높이 5m 정도의 작은 탑은 수미산(須彌山:불교의 소우주를 상징하는 산)의 정상에 세워진 것으로 천상(天上)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이라. 첫째 기단은 도리천(忉利天)이 되고, 그 위로 층층이 쌓은 옥신은 하늘나라의 부처님 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여러 회원님들에게 단체로 기념촬영을 해 드리고 다시 몇 걸음을 더 내려가니, 울퉁불퉁 자연석의 기단위에 둥근(옥돌모양)돌을 받침대로 첫 원반석, 이층 반석, 삼층 반석 까지 단을 쌓고 그 위에 머리없는 불상이 단정하게 앉아 계신다.
마지막 반석에는 연화무니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좌대(座臺)는 사각형의 연잎이 수 놓아져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동양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이 또한 천상의 세계에 계시는 부처님을 상징한 것이리라.
이를 삼륜대좌불(三輪臺坐佛)이라 하는데 높이가 4.56m 이고, 남산 내에서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석탑이다. 한 참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다시 올려다 보니 얼굴없는 저 님은 도시 어떤 분일까? 아직도 궁금합니다!
그럭저럭 용장사지(茸長寺址)에 도착하여 윗 쪽을 다시 올려다 보니, 삼륜탑은 보이지 않고 삼층 석가탑만 홀로 우뚝하여 천상의 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증합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니 깨진 탑의 기단석이 여러개 보인다.
머무르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한참을 나려오니 용장계곡을 가로지른 “설잠교(雪岑橋)”가 한 눈에 들어온다. 설잠교는 설잠(雪岑:김시습의 法名)이 용장사(茸長寺)에 머물면서 건너 다니던 징검다리가 아니겠는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조선 초기의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양주의 수락(水落), 해상의 설악(雪嶽) 등 여러 곳을 주유천하(周遊天下)하던 중 이곳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다고 한다. 그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 동봉(東峯) 출가후 법명이 설잠, 청한자(淸寒子), 벽산(碧山)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5세 때 이미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통하여 신동(神童)이라 불렀으며,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어 상금으로 비단 50필을 주시면서 “이것을 네가 모두 가지고 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녜, 비단필을 제 몸에 메어주시면 가지고 가겠습니다.” 하므로 비단의 한 끝을 매줬더니 궐문밖으로 끌고 나가니 모두들 그 기지(機智)에 놀랐다 한다.
세조가 단종임금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문을 닫고 3일을 통곡한 뒤 세상을 비관하며 책을 불사르고 중이되어 방방곡곡(坊坊曲曲)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시다가 충남 보령시 운수면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렇다! 무엇이 그 를 그 토록 허무하게 했는가? 설잠스님의 시(詩) 한 수를 옮겨 봅니다.
용장산동유(茸長山洞幽)(용장골 골 깊으니)
불견유인래(不見有人來)(오는 사람 볼 수 없네)
세우이계죽(細雨移溪竹)(보슬 비에 시누대는 여기저기 피어나고)
사풍호야매(斜風護野梅)(비낀 바람은 들매화를 간지러네)
소창면공록(小窓眠共鹿)(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
고의좌동회(枯椅坐同灰)(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앉았는데)
불각모첨반(不覺茅簷畔)(깰줄을 모르는구나 억새처마 밑에서)
정화낙우개(庭花落又開)(뜰에는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용장계곡을 따라 쉬엄 쉬엄, 도란 도란, 얘기들을 나누면서 나려오니 여러 가지 문화유산(文化遺産)들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고, 아울러 매월당에 관한 역사적 사실과 그가 지은 시(詩)를 그림으로 전시 해 놓았다.
절기는 입춘 우수를 지나 경칩(驚蟄)으로 내 달으니 개울물은 며칠전 나린 비로 인하여 상당히 불어있으며, 흐르는 개울 물 소리는 천연(天然)의 교향악(交響樂) 이로다! 20여 분을 내려와서 우람하고 널찍한 암반지대가 있어 잠시 쉬면서 살펴보니, 2013년 3월 10일에 “대구산악회” 원정산행을 가서 “시산제”를 모셨던 기억이 난다.
발걸음을 세면서 걷는다!드니... 터~덜 터~덜 물 따라 山 따라 나려오니, 마~악 겨울 잠에서 깨어난 개고리가 개~골 개~골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다! 작은 개울을 두 개나 건너서 용장마을에 이르니 담 너머로 일찍 핀 매화(梅花)가 방~ 긋 방~ 긋 생명의 미소(微笑)를 짓는다.
머~언 山에 아롱 아롱 아지랭이 피어 오르고
우거진 솔 숲에는 白巖이 벙긋 방긋 웃는구나!
己亥年 한 해의 소망을 삼릉계에서 기원하고
금오산의 정기를 받아 남산님들 강녕하소서!
단기 4352년(서기 2019년) 2월 24일
경주 남산(금오산. 468m, 용장계곡)을 등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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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 고고문님께서 긴장문 쓰시느라
수고 하셨습니다'
늘건강하세요~
벽송 전(前) 회장님께서 다녀가셨군요.
졸문의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리오며,
늘 강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