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가치들
2023.08.06.(성령강림후제10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8/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 9/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 10/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 11/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베드로전저 4:7-11)
들어가는 말
지역을 중심으로 한 마을 공동체는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런 가운데 학교는 가정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공동체가 유지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과 학교는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맺어진 공동체입니다. 가정은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공동체이며, 학교는 스승과 제자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과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학생들 서로 간의 배려와 자녀의 인성과 지성의 성장을 선생님에게 맡긴 학부모의 신뢰 등이 덧붙여집니다. 사랑, 존경, 배려, 신뢰는 공동체임을 증명하는 가치들입니다. 이 가치들은 법의 영역이 아닙니다.
학교가 무너졌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습니다. 사실 오래 전부터 교육의 현장이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들이 있었지만, 최근 강남에 있는 한 초등학교 2년차 선생님이 학부모의 집요한 민원에 어려움을 호소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학교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각인시켜 주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학생인권을 강조하다보니 교사의 인권이 형편없이 실추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자녀에 대한 과잉보호와 자기 자녀만의 특혜를 바라는 학부모들의 고소고발 남용은 선생님들의 자존감을 한없이 추락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학교가 무너졌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법의 반작용
많은 사람들이 교사의 인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 해법으로 당장 떠오른 것은 ‘학생인권조례’를 손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듯하게 들립니다. 공동체가 무너진, 즉 공동체적 가치들이 외면 받는 한국사회는 그 가치들을 법이 대신하면서 법 만능의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법을 통해 폭력적인 선생님들로부터 학생들의 인권을 지켜냈듯이, 이제는 법을 통해 무너져버린 선생님들의 인권을 강화하자는 것입니다. 법을 통해 이기적인 학부모들의 악성 고소고발을 막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법의 균형추가 학생 쪽으로 기울었으므로 반대편을 위한 법을 강화해서 균형을 맞추자는 것입니다.
그동안 선생님들의 머리에 무거운 돌을 얹었다면, 이제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머리에도 돌을 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선생님들은 법의 짓누름에 신음하면서 교직에 회의를 느껴왔습니다. 한때 안정적인 직장으로 선망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교직에 대해 젊은이들이 매력을 잃으면서, 교육대학은 예전과 같은 인기를 잃어버렸습니다. 학교와 교사들을 통제하는 법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최초의 특목고이기도 한 민족사관고등학교가 대안학교로 학교형태를 바꾸려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법의 과도한 규제 때문인데, 교육현장은 법의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시위입니다.
학교는 공동체입니다. 학교가 공동체성을 잃는다면 그런 사회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학교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마주하는 사회는 약육강식의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가치들이 법을 통해 보장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법이 공동체의 서로 다른 구성원들, 즉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생들의 문제를 보면서, 그들의 머리 위에 돌을 얹기 시작하면 공동체의 가치들은 숨 쉴 공간을 찾지 못하면서 공동체는 파괴되는 것입니다. 사랑, 존경, 배려, 신뢰는 사라지고 이해관계만이 남게 됩니다. 이제라도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법과 공동체
공동체를 위해 법이 존재하는 것이지 법을 위해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가치들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만 앞으로 우리사회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돈의 가치만을 좇는다면, 비극은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확대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앞선 서구사회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공동체의 가치가 무시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물질만능주의 때문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사회는 은연중에, 그러다가 공공연히 법도 돈 아래에 종속시키게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학교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학부모들이 고소고발을 겁박하며 교사들을 향해 내뱉는 소리들을 보십시오. 돈 많음을 드러내는 소리며, 법이 자신의 편에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 중 압권은 ‘내가 변호사인데.’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법으로 교사들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법을 힘 있는 자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법을 제정하든 결국은 돈의 가치가 공동체의 가치에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생인권이든 선생님의 인권이든 인권은 법으로 보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권의 보호가 학교라는 공동체의 무너짐을 막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가치가 우선되지 않는 사회에서 지켜지는 인권이란 상대방의 인권을 파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학생의 인권을 지킨다는 것은 선생님의 인권을 제한하는 것이며, 선생님의 인권을 지킨다는 것은 학생과 학부모의 인권을 억누르는 것입니다. 교육부가 내놓은 한심한 해법을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학생과 학부모의 잘못을 분명하고 엄중하게 묻겠다는 것입니다. 법은 처벌하는 것으로 ‘그 무엇’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결국 인권을 침해당하고 나서야 상대의 인권을 공권력을 통해 억누르는 것으로 보상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정치지도자나 전문가들의 입장은 법을 강력하게 적용하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공동체의 가치를 위하여
해결사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의 무능과 전문성을 내세우는 전문가들의 비전문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같이 시류에 영합하면서 자기이익 찾기에 골몰할 뿐입니다. 선생님들의 인권이 약해 보이자, 정치인들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잡은 듯이 교권을 강화하는 법을 만들자고 하며, 이때다 싶은 교육전문가들은 일부 무 개념의 학부모들을 희생양 삼아 교육계의 입지와 파워를 높이고자 합니다. 공동체의 무너짐을 보면서도 사랑과 존경, 배려와 신뢰라는 공동체적 가치의 회복을 말하는 이들은 찾기 힘듭니다. 정직함이 필요한 때입니다. 어쩌면 정직함을 외면하는 언론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서는 말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7) 마지막이란 현실의 무너짐과 파괴를 말합니다. 베드로서의 저자는 로마시대의 종말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종말을 사회적 현상들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성경은 그러한 때에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라‘(7)고 조언합니다. 마지막 때이니 법을 충실하게 지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8) 오늘날 교육의 현장은 사소한 죄조차도 법 앞에서 드러내려고 합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먹을거리를 사주자 학생에게 수치감을 주었다는 식입니다.
“불평 없이 서로 따뜻하게 대접하십시오.”(9) 법은 모든 것을 불평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을 합리화시켜줍니다. 이런 식이라면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은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십시오.”(10) 공동체가 무너진다고 생각될 때, 해야 하는 일은 서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11) 우리는 해야 할 일은 사람답게 해야 합니다. 갈 데까지 갔다고 생각될 때, 우리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은 인간다움의 회복입니다.
나가는 말
이제 종교인들은 공동체의 가치가 경제적 가치에 우선해야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종교인들은 돈이란 ‘맘몬’ 대신 사랑의 ‘하나님’을 따른다고 늘 말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11)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불평 없이 서로를 대접하고, 봉사하는 사람답게 봉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 활동 자체가 경제적 가치에 익숙해져 있는 종교인들이라면 무슨 염치로 공동체의 가치가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삶의 현장에서 성경적 교훈을 실천했다면 교육현장은 지금처럼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공동체적 가치를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를 향해 말할 때입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제적 가치를 우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을 보인다면 그들의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갈 것이며, 그렇게 살아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사회에 이런 공동체가 아직은 요원해 보이지만 어디에선가 싹을 틔운 이런 공동체가 곳곳에서 꽃을 활짝 피우길 바랍니다. 울부짖는 사회가 이런 모범적인 공동체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