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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8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욥 8: 1-7
빌립보 4: 10-13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 욥기를 읽었습니다. 8장만 떼어서 읽으면, 수아 사람 빌닷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말투는 상대방을 야단치는 듯합니다. 내용을 음미해보면 매우 좋은 말처럼 느껴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라서 올바른 심판을 하는 분이니, 당신이 받은 벌은 당신이 지은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자비를 구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것이라고 훈계합니다.
맨 마지만 7절에 나오는 말이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는 크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이 구절을 가장 많이 접하는 곳이 어딜까요? 식당에 가면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벽걸이용 나무판에 쓰인 말씀입니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작은 가게이지만,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는 장사 잘되는 가게로 번창할 것이라는 축하의 말을 성경구절을 빌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먹고살기 정말 힘든 세상에서 개업한 가게가 장사 잘되라고 빈말이라도 격려해주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독려해주니 이야말로 “아멘”하고 응답하고 싶을 것입니다.
욥기에서 이 말을 한 사람은 욥의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입니다. 욥기라는 성경내용을 잘 모르는 분을 위해서 짧게 욥기 전체를 설명해보겠습니다. 욥기는 지혜문학으로서 어떤 가르침을 줄 목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기록된 <신앙적 문학작품>입니다. 그 내용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는 욥이라는 사람이 그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1장 도입부에 보면, 사탄이 순전하고 정직하다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 욥이 재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배반 할 것이라고 단언하자, 하나님이 욥에 대한 시련과 시험을 사탄에게 허락해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대목을 두고 하나님도 시험을 하시는 분이냐? 우리가 겪는 고난과 고통은 모두가 사탄이 하는 짓이냐? 아니면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시는가? 이런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데, 이 도입부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한 구성일 뿐이지, 욥기의 핵심은 아닙니다. 이 성경은 인간이 풍족할 때는 신께 순종하고, 반대로 비참해지고 궁핍해지면 신을 원망하는 존재라는 항간의 생각을 뒤집기 위해 쓰인 성경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생각을 바꾸라고 요청하는 성경입니다.
처음에 욥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이 연속적인 쓰나미처럼 자기에게 닥쳐도 단지 슬퍼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풍족함을 빼앗기다 못해 가족의 비극까지 겪고, 심지어는 자기 몸에 중병까지 얻게 된 욥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자, 친구들이 찾아오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하다가, 논쟁하다가 하는 내용이 욥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욥은 친구를 만나고 나서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자기 인생을 저주하기 시작합니다. 필연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왜 나입니까? 내게 이런 불행이 닥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말합니다. “전에는 남에게 조언해주는 수준 높은 삶을 살다가, 이제 큰 불행을 겪으니 짜증나지?” 하고 비웃으면서 결정타를 날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잘 생각해보아라. 분명히 네가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 거야.” 그러고 나서도 참 좋은 말을 많이 해줍니다. 그렇게 버티고 있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서 네 속사정을 털어 놓아라. 하나님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하신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욥은 계속 고집을 부립니다.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나는 더 못 버티겠다. 너희가 친구라면 나를 믿어주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답을 달라.”고 항변합니다. 꼭 죄를 지어야만 그 벌로써 불행이 닥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친구는 불행의 원인은 죄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욥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아예 친구들을 안 만났더라면,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교훈을 듣지 않았더라면, 죄 없는 자신에게 불행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한 상태의 욥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슬프면 슬퍼하고 기쁘면 기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에 생겼습니다. 그러니 함부로 잘못된 위로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때 두 번째 친구 빌닷이 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심판을 잘못하고 있다고 보느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면, 그리고 이제부터 진실로 정직하게 살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욥은 그에게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면 어차피 자기 의로움을 내세울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은 의로운 자나 악인이나 다 한가지로 심판하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엘리바스가 욥의 불행의 원인을 설명하려고 했다면, 빌닷은 그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려고 했습니다. 만일 욥기의 결말이 엘리바스와 빌닷을 주장대로 끝난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신앙생활의 도식은 매우 단순할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겪으면, 모두 내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잘못을 빌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줄 것이다.” 얼마나 원시적인 신앙의 모습인지 모릅니다. 바로 인과응보(因果應報) 신앙입니다. 하지만 욥기는 잘못 한 것은 벌을 받고, 잘한 것은 상을 준다는 신앙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BC 6세기의 기록임을 생각한다면 욥이 깨달은 지혜는 오늘날에도 우리를 여전히 깨우쳐주는 지혜임에 분명합니다.
욥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이 불행을 겪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불행을 놓고 자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친구들은 자기들의 얄팍한 지혜를 가지고 욥을 죄인으로 만들고, 불행을 하나님의 인과응보적 심판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 친구들을 꾸짖으면서 욥의 항변이 이유 있는 항변임을 인정하십니다. 하지만 친구들 때문에 흔들려 흐려졌던 믿음을 회복하도록 욥에게도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욥기를 읽을 때에, 짧은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친구들의 논쟁 속에서 우리가 사는 모습을 찾아야하고, 오랜 기간 항변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달은 욥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음식점에 붙여놓은 <그러므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을 잘못이해하면, 하나님은 인과응보의 규율에 따라 상벌을 주시는 기계적인 하나님으로 그 능력이 축소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 한 구절도 눈에 보이는 대로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매우 좋은 말, 선한 지혜처럼 보이지만, 그 말씀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황하게 욥기의 의미를 설명한 이유는 이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빌립보 4장 13절에서 따온 말씀인데, 우리가 종종 어떤 큰 일이나, 해결하기 힘든 일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을 주시면 무슨 일이든지 성공시킬 수 있다고 여기며 기도할 때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본문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이 편지는 감옥에서 쓰는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갇혀서 형편없는 생활을 하다가, 빌립보교회가 바울에게 헌금을 보낸 것을 받고 쓰는 편지라는 것도 드러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죄수에게 영치금을 넣어준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곤궁한 전도자의 삶을 잊지 않고 다시 또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편지를 이렇게 목회적인 내용을 담아서 빌립보교회에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주님이 능력을 주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때에 그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안다는 것입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하는 비결이 바로 주님이 주신 능력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집을 이사하면서 이사 기념으로 마당에 대추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첫해는 대추가 딱 3알 열리더니, 다음 해에는 나누어 먹을 만큼 많이 열렸습니다. 그러더니 몇 년 안가서 그만 무슨 병에 걸렸는지, 이파리가 마르기 시작하더니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봄이 되면 줄기에서 싹이나고, 여름이면, 무성한 잎을 과시하더니, 가을에는 맛있는 대추열매를 내어줍니다. 그러다 색이 변한 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겨울을 납니다. 오래 오래 살았더라면 좋을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은 대추나무를 잘라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마찬가지 아닙니까? 4계절 내내 열매만 맺고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추운 겨울에 웅크리고 버티는 시간도 필요하고,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만사가 다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의 작은 바램일수는 있지만, 만사형통의 기준을 내게 두지 말고 하나님께 두어야 마땅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성경 속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 신앙과 삶의 길을 찾을 때에, 내가 원하는 길, 내가 마음속에 미리 정한 길을 고집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 말씀에 묻고 답을 구하는 기본자세는 훌륭합니다. 그런데 삶의 문제라는 것이 언제나 단답형의 문제일 수만은 없습니다.
묻는 사람의 마음이 이것이냐 저것이냐? 아니면 할까 말까?를 단 번에 정해주기를 바라는데, 성경은 그런 대답을 줄 수 없다는데서 첫 번째 어려움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2000년 이상의 시간의 차이, 수천 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의 간격, 그리고 소통되지 않는 언어의 장벽을 모두 다 극복하고 단숨에 나의 고민을 성경말씀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입니다. 성경말씀이 내게 분명히 답을 주기는 줄 것인데, 내가 원하는 방식의 그런 답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묻는 사람은 이미 자기 마음에 원하는 답을 가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한 율법사가 주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율법사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답과 예수 당신의 답이 맞는 지 한 번 맞추어 보자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대답은 율법사가 진즉부터 잘 알고 있는 구약 말씀을 인용한 대답이었습니다. 율법사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라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반목하게 한 것은, “영생을 얻는 길을 이미 당신도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라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백한 문자적인 답변은 율법사의 눈에나, 예수의 눈에나 동일한 것입니다. 동일한 말씀을 읽고 인용하면서도, 율법사는 율법주의에 얽매여서 남을 정죄하는 삶을 살고, 예수는 같은 말씀을 가지고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하면서 삽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우리가 성경말씀에서 인생의 답을 구해도 진정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지 못하면, 그저 아무런 생동감 없는 문자적인 답변을 얻고 살거나, 아니면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하며 사는 단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욥기의 말씀과 빌립보서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생각하며 살던 성경의 본문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저 내 삶이 번성하고, 성공하기만 바라는 눈으로 성경을 읽으면, “믿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을 오해하여 너무도 깊은 욕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생을 살기 쉽습니다.
하지만 빌립보 4장 13절 말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은 결코 사업의 번창이나, 진취적인 인생행로 속에서 이용되어서는 안 되는 말씀입니다. 투옥상태에 있는 바울의 모습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의 불행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겪는 고난입니다. 이 상황은 어쩌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갑작스런 불행을 당한 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이미 깨달은 자답게 “어떠한 형편에 처하였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라는 말로 담담하게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목사님은 주기도문을 암송할 순서가 되면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이제 담대히,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드립시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기도이면 <담대히 기도하자>고 하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는 말은, 내 뜻이 아닌 하나님 뜻대로 해도 기쁘고 감사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대로만 생각해도 우리 삶은 더욱 성경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입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정작 자신이 결정할 때에는 자기 뜻대로 하기에 주님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할 때에는 자기가 지금 욕심 부리며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때는, 내 속에 원한과 원망, 시기와 질투, 분과 미움이 남아있지 않은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에만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보아도, 우리가 “나에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평화목 교회 교우 여러분,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바울이 남긴 유언과도 같은 말 “내게 능력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씀이 살아서 지금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것을 듣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이란 내게 좋아 보이는 것만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입니다. 그 속에 기쁨이 있고, 그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그 기쁨과 행복을 되찾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다함께 주님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