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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6 - 모세의 인솔로 이지트의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을 하다!
BC 4000년경 문명이 발생한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아브라함은 BC 1760년경에 가족들과 함께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와 이사악을 지나 손자 야곱의 시대에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로
이집트로 팔려갔고, 파라오의 꿈 해몽 덕분에 총리가 되어 아버지 야곱과 형제들 일행 70명이
이집트 고센으로 이주하는데..... 요셉이 죽은후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에 노예" 취급을 받게 됩니다.
기원전 17세기에 힉소스인(Hyksos) 들이 이집트에 침입해서 15왕조를 세우고 기원전 1663년 부터 기원전
1555년 까지 108년간 하이집트와 중 이집트를 통치하다가 아흐모세 1세가 힉소스인을 이집트에서
몰아내고 18왕조 신왕국을 건설하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억류되었다 탈출했다는 성서 출애굽기
의 전승과 다나오스가 그리스의 아르고스에 도착했다는 그리스 전설 사이에는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피온 반박문’에서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를 인용해
유대인들(힉소스)이 한때 이집트를 통치했음을 밝혔으니... 힉소스라고 불리는 이방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으로 힉소스는 북쪽에서 쳐들어와 아바리스
를 건설했고, 훗날 쫓겨날 때는 재산을 가지고 나가 유다지방에 예루살렘을 건설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형제 요셉의 보호 아래 나일강 동쪽 삼각주에서 번영하며 430년의 세월이 흘러 히브리
사람이라고 불렸는데.... 새 파라오는 노예로 삼아 비돔과 라암셋의 왕도를 건설하는 데에 강제
동원했고 히브리인 신생아 남자 아기를 나일강에 빠뜨려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자, 어느 레위 부족
에서 아들을 낳아 강에 떠내려 보낸 것을 왕녀가 발견해 궁정에서 기르면서 모세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신인 야훼가 내리는 재앙을 견디다 못한 파라오가 이집트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자
히브리인들은 도시를 출발해 시나이 광야로 향하는데,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파라오가 전차
부대를 동원해 도망치는 히브리인들을 뒤쫓아 왔을때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인들은 바다
밑바닥의 마른 땅을 통과해 건넜지만 바닷물은 추격하던 이집트 사람들을 집어삼켰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최초로 언급되는 문헌은 기원전 13세기가 말에 람세스 2세의 아들인 파라오 메르넵타
가 가나안을 원정한 사실을 기록한 비석인데.... 이집트 원정군이 가나안에 침공하여 이스라엘이라
고 불린 민족을 대량 학살했고....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후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공언합니다.
“왕들이 엎드려 외친다 : 자비를 베푸소서
아홉 개의 활 아래 머리를 들 수 있는 자는 없다.
테헤누(Tehenu)에는 쇠락이, 하티에는 평화가 왔다.
가나안은 약탈당하고 각종 재난을 맞이하였다.
아스겔론(Ashkelon) 은 정복되었다.
게제르(Gezer) 는 함락되었다.
야노암(Yanoam) 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황폐해졌다. 이스라엘의 후예는 이제 없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이라고 불린 특정 민족집단이 가나안에 살고 있었음을 알려주는데
정말 이집트에서 이주해 온 집단인가? 아니면 가나안 토착 민족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러 집단이 섞인 것인가? 고대에는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가는 이민의 물결이
주기적으로 끝없이 계속되었으며 탈출 또한 한번이 아니라 여러차례 있었을 것 입니다!
야곱의 가족처럼 가나안인에서 이집트로 내려와 이집트 동쪽 삼각주 지역에 정착한건 여러차례로 고대세계
에서 가뭄과 기근, 전쟁으로 생활이 견디기 힘들어질 때마다 셈족 가나안인들에게 이집트는 안전한
피난처 였으니, 도널드 레드퍼드는 나중에 쫓겨나 고향 땅으로 되돌아온 이야기가 훗날 이집트가
가나안에 대한 통치의 고삐를 조일때 가나안인들의 단결과 저항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기원에는 평화 이주설이 있으니 팔레스타인 산간 지대에서 기원전 1250년 이후 갑자기
생긴, 성곽이 없는 몇백개의 작은 마을들이 있었으니 초기 청동기시대에는 1만 2,000명, 기원전 12세기
는 5만 5,000명, 기원전 10세기에는 7만 5,000명으로 추정되는데... 인구가 중가 현상은 기원전 12세기경
에 외부로 부터 대규모 이주가 분명하니 이집트에서 나온 노예들과 연합해 이스라엘을 만들었다고 보입니다.
즉 가나안에 소재한 도시 군주 국가들에게서 억압받고 도망나온 다양한 하층 민중들이 팔레스타인
의 중앙 산악 지대에 거주할 때, 사회적 하층민에 있던 '하비루(Habiru)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부터 탈출해 나왔고, 광야와 가나안 남부의 사막 지역에서 그들의 신으로 야훼를
선택한 후에 이 두 집단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에 정착했다는 얘기 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에 거주했다는 것은 할례 풍습에서 알수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람들의 할례 풍습을 이집트에서 찾고 있으니 이스라엘과 페니키아는 상당히 많은
문화적 요소를 공유하는 이웃이고 지리적으로도 하나로 근동 지방의 할례 풍습이 이집트에서
나왔음은 부정할 수 없으며, 또한 일부 성 윤리 역시도 이집트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한 사회였는데 성역 내에서는 여자와 관계를 갖지 못하며, 또한
여자와 관계한 뒤에 목욕을 하지 않은 자는 성역에 들어올 수 없다는 등의 계율을 정한 것은
이집트인이 처음이니..... 이집트인과 그리스인 이외의 다른 민족은 거의 모두 성역 내에서
여자와 관계를 갖는가 하면 관계를 한 뒤에 목욕도 하지않고 성역에 들어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인들의 인명은 그 어원을 이집트어에 두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이집트
탈출 이야기의 등장 인물 중 한명인 비느하스(아론의 손자)의 어원은 이집트 이름 Pa-nehasi
에서 왔다는 게 중론이고 레위의 자손 므라리, 한참 후대인 사무엘서의 등장 인물인 홉니
등의 이름도 이집트어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여겨지며 '모세' 는 매우 흔한 이집트식 이름 입니다
게다가 구약의 이스라엘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정의할 때 "이집트인들이 하듯이 ... 하면 안
된다" 라며 제약을 거는 경우가 많으니, 이는 직접적인 영향이었든 반면교사로서
였든 이스라엘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고 더욱이
아케나톤의 일신교 개혁이 이스라엘의 종교 문화에 유일신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탈출기(출애굽기)가 최종적으로 완성된 시기는 바빌론 포로기(BC 6세기 바빌론 유수)
에서 페르시아 치하 시기(BC 5세기)로 짐작되는데 포로로 끌려가고 강대한 외세의
압제를 받아야 했던 민족 수난의 시기에 "우리 민족은 야훼에게 선택받은 민족"
이라는 민족주의적 메시지를 담고있는 이러한 문헌이 쓰여진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이 이집트에서 친히 인도해 내신 우리 민족" 과 같은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데.... 그 외에도 모세 휘하의 이집트 탈출행렬을 추격하던 파라오의 아들이 갈대밭에서
탈출 행렬의 호위 병력들에게 기습을 당해 죽은 사건이 홍해로 와전되면서 모세가
바다를 가른 사건과 또 이집트의 장자들이 죽은 사건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출애굽 연대에 관해 BC 15세기설(BC 1446년 투트모스 3세)과 BC 13세기설(BC 1250년
람세스 2세) 2가지가 있으니 전기설, 후기설로 불리는데... 전기설은 열왕기상 6장 1절에 묘사된
후대의 연대 계산에 의한 것으로, 아멘호테프 2세 치하설이 대표적이니 열왕기상 6장 1절에는
솔로몬 왕이 '그의 치세 제4년', 즉 '이집트 탈출후 제480년' 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르호보암(남유다)과 여로보암(북이스라엘)에 의해 왕국이 분열된 시기가 BC 930년경으로 추정
되니 열왕기상 11장 43절에 솔로몬은 40년 동안 통치한 것으로 역산하면 솔로몬은 BC 970
년 부터 BC 930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추정되니 '솔로몬왕의 치세 제4년' 은 BC 967년
경이 되며, 그것이 이집트 탈출 후 480년에 해당한다면 출애굽은 BC 1447년경의 일이 됩니다.
요셉이 출세하고 유대인들이 이주했을 때의 이집트 왕조가 제15왕조인 이민족 힉소스 왕조였다면
이집트인들이 힉소스를 몰아낸후 남아있는 유대인들을 부역자로 간주했을 가능성은 높아지니,
유대인들은 보복차원에서 이집트의 노예가 된 것이고 이 해석에 따르면 탈출시기는 투트모세
3세나 아멘호테프 2세니,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를 재통일한 제18왕조 파라오들 입니다.
후기설은 탈출기 1장 11절의 '유대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켜 파라오의 곡식을 저장해 둘 비돔과 라암셋
(람세스)성을 세웠다' 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람세스 2세 치하 설이 대표적인데, 1920년대 까지만
해도 열왕기상 6장 1절이나 카이로 남쪽 300km에 있는 '텔 엘 아마르나' 에서 발견된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에 기록된 '하비루(≒히브리) 의 활동과 예리코의 발굴을 들어 전기설을 신뢰했습니다.
최근에는 후기설(기원전 13세기설)을 더 따르니.... 성경에 '라암셋(람세스)' 라는 지명이
나오는 것을 볼때 모세의 출생과 출애굽 사건이 제19왕조의 세티 1세와 아들
람세스 2세 시대에 일어난 게 틀림없으니.... 라암셋(람세스)성의 이름은 파라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람세스' 라는 이름은 제18왕조 시기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후기설의 정황적 근거는.... 파라오 아케나톤이 아몬 라를 중심으로 한 종래의 다신교 대신 아톤 신을
내세운 일신교를 주장하였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덩달아 번영을 누렸으나, 그러나 아케나톤의
실각후 재등장한 아몬 라 신앙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은 박해를 받았고 결국 19왕조의 람세스 2세 때
탈출했다는 것으로 전기설의 근거인 열왕기상 6장 1절의 '480년' 기록에 어긋난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선 숫자를 정확히 명시하기 보다는 수학적인 비유를 자주 썼던 관행이 있기에
저 '480년' 이라는 기간이 실제 기간이 아닐수도 있음을 감안해야 하는데... 즉 480
이라는 수는 성서에서 완전수로 여겨지는 12와 40의 곱인바, 12는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의미하는 수 이고...... 40은 한 세대(30년)를 포괄하는 온전한 한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자면 이집트 탈출 이후 480년 만에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는 성서 기록은
이스라엘 열두 부족에게 노예 생활로 부터 성전 건축으로 완전히 새로운 시대
(40년)가 시작되었다는 뜻이지 정확히 480년이라는 실제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후기설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마냥 부정할 순 없는 이유입니다.
후기설의 또 다른 근거는 파라오 메르넵타 비문이니 '이스라엘' 은 도시나 국가가
아닌 부족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 말은 이 비문이 쓰여졌던 BC 13세기에는
이스라엘이 아직 가나안에 온전히 정착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니 전기설대로
BC 15세기에 출애굽이 이루어졌다면 이때는 국가를 이루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기설의 치명적 단점은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2세는 이집트 제18왕조 최전성기
로 메기도 전투에서 광야와 가나안 지역에 대한 지배가 공고해진 때라 히브리인
들이 가나안으로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점이 있고.... 게다가 이때 이후
19왕조 때인 메르넵타 때까지 이스라엘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난점입니다.
즉 성경의 이집트 관련 기록에는 멀리는 중왕국 시대 이집트 부터 가까이는 앗시리아 이후 이집트
시절까지 몇백년 넘는 시대상이 한정된 본문 안에 나와있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를 추정
하기에는 난점이 많은데, 애초에 성경의 기록 자체가 장구한 시대를 따라 전해 내려오며
많은 수정과 가필을 거쳤을 뿐만 아니라 중층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해석이어려운게 당연합니다.
성서학자들이 주장하듯 "몇몇 부족들이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로 탈출하는 것은 흔한 일
이었으니 이집트 문서들도 그러한 탈출을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들을 남겼는데, 그중 몇몇
드라마틱한 탈출 이야기가 출애굽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니... 오랜 시기에 걸친
수차례의 탈출과 관련된 기억이 나중에 하나의 탈출 사건으로 종합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성경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성장기를 보내고 미디안으로 피신하던 기간에 재위한 선대 파라오와
모세가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 때 재위한 후대 파라오 2명이 등장하는데,
선대 파라오는 모세를 죽이려 했고 오랜 세월 미디안에 있어야 했을 정도로 강경했던 인물
이니 토목공사를 자주 벌였으며 재위 기간이 길었던 람세스 2세가 선대 파라오에 근접해 보입니다.
10가지 재앙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나일강에서 발생한 적조 →
나일강의 포화산소량 부족 → 물고기 몰살 → 개구리 알을 먹던 천적(물고기)이 없어짐 →
개구리 등의 양서류가 번창 → 개구리의 폭발적인 개체 증가 → 개구리 부패 → 개구리 시체
에 이와 파리가 번창 → 이와 파리를 매개체로 전염병이 창궐 → 전염병이 가축과 인간에게 번창.
모래 폭풍이 이집트를 덮침 → 메뚜기 떼가 나일 강을 따라 올라와 이집트를 덮침 → 모래 폭풍으로
인한 암흑", 한편 우박으로 인한 냉해 피해와 더불어 습기가 높아지고 곡식들이 곰팡이가 슬면서
곰팡이 독이 퍼졌고 많이 먹은 장자들이 사망했는데, 이집트에서는 장자는 대를 이을 존재
라고 배를 안 곯게 했기에 오히려 곰팡이 독과 식중독에 노출되어 사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해석하자면 당연히 야훼가 이집트에 징벌을 내린 것인데, 이런 재앙은 그들이
섬기던 이집트 신들에 대한 타격으로도 작용했으니 '징벌'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사용한 표현이고... 고대 세계의 전쟁은 대립하는 각 민족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전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전쟁에 지면 우리 민족이 믿는 신이 진 것입니다?
탈출기 초반부에 유대인들이 노예로 혹사당하는 부분이 과장되었을 거라고 보는데 이집트에서의 건설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농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뉴딜 정책의 일종인데도 노예
혹사로 왜곡시켰다는 것인데, 히브리인들이 건축한 것은 피라미드가 아니라 도시였고 이때는 피라미드
가 지어지던 고왕국, 중왕국 시대로 부터 수백년이 흐른 뒤로.... 피라미드 건축은 사실과 다르다고 봅니다.
전기설에 따르면 힉소스 앞잡이들에 대한 보복 차원이니 이방인 집단인 하비루에 대한 대우가
이집트인과 같을수 없는 것인데.... 먹고사는 것 자체는 오히려 이집트 시절이 좋았던 것
같으니, 민수기에서는 만나가 지긋지긋하다며 이집트에 있을때는 고기에, 생선, 오이,
참외, 부추, 파, 마늘 같은 온갖 먹거리가 공짜였는데 이집트를 나가면서 고생한다며 불평합니다.
노예 노동력의 비중이 그리 크지않았던 이집트 사회에서 히브리인들도 이집트의 시민이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더 낮고 종속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에벧(עבד)" 은 노예제의
노예 신분 뿐만아니라 한국어의 "종", 영어의 "servant" 처럼 지배받는 상태를 지칭할
때 두루 쓰이는 단어이니 아랫사람인지라 "이집트 종살이" 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 탈출의 전설은 실제 역사와 문학인 것이 뒤섞였다고 보이니 '다큐 드라마' 에 가깝다고
보는데.... 이집트로 내려간 요셉과 이집트에 내린 열가지 재앙, 모세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탈출, 발을 적시지 않고 홍해를 건넌 사건, 시나이산과 십계명, 약속의 땅 정복,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하고 제리코의 성벽을 나팔 소리로 무너뜨린 이야기 등입니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이스라엘)에게서 기원한 부족이 이집트에 들어간 것과 요셉이 파라오의 왕실
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힉소스 중간기(기원전 1684~1567년)에 잘 들어맞으니,
출애굽이 람세스 2세의 치세인 기원전 1260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하는데 시나이
사막에 오래 거주하는 동안 모세는 이 부족들로 하여금 유일신을 숭배하도록 인도했다고 봅니다.
캐런 암스트롱은 그녀의 저서 <축의 시대> 에서 아예 출애굽기의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데 당시
이스라엘 지역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극심한 분열과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으로, 그중
한 부족이 기존의 낡은 가나안 문화와의 작별하고 다른 부족과 차별되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출애굽기의 서사를 만들어 냈고 이후 성경 편찬때 다른 이야기와 섞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건넌 바다가 과연 홍해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는데 성경 원문에는 '얌 수프'(Yam Suph) 라 되어
있으니 오늘날 학자들은 이를 '붉은 바다' 보다는 '갈대 바다' 로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하니,
이 '갈대 바다' 의 유력한 후보는 지중해를 코앞에 둔 이집트 북부의 만잘라호(بحيرة المنزلة)로 이 호수
는 수심이 얕아 바람이 거세면 호숫물이 일시적으로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 밑의 땅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또 다른 설로는 출애굽 경로가 통상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서 갔다는
설이 있으니 사우디의 라오즈산을 시내산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성경 고고학자인 론 와이어트
박사와 사우디아라비아 왕립 한방 병원 주치의를 맡았던 김승학 박사가 주장하는 설로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증명한다는데....... 사실이라면 광야에서 40년간 헤멘 것도 이해가 됩니다.
출애굽을 학자들은 BC 1446년 투트모스 3세 때로 보는 전기설과 BC 1250년 람세스 2세
때로 보는 후기설이 있는데....“십계”를 포함한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후기설을
근거로 만들어 졌으니 람세스 2세는 53세로 전차를 몰고 모세를 추격하다 바다에 빠져
죽었어야 하는데 그는 90세로 죽어 1881년에 미이라 가 발견되었으니 이제 이를 어쩐다???
전기설은 강에 버려진 모세를 이집트 공주가 주워 왕궁에서 키웠다니 여자 중에서 저런 간 큰 짓
을 할 여인은 이집트 역사에 유일하게 여왕에 올랐던 공주 하트셉수트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니,
출애굽 160년이 지난 BC 1286년에 시리아에서 카데쉬 전투 가 벌어지는데 람세스 2세
는 2만 대군을 끌고 북상해......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히타이트 왕과 세기의 결전을 벌입니다.
이때 이집트군은 팔레스타인 지방을 자국 가듯이 진군하고 5천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병사들이 위기에
빠진 람세스 2세를 구하는 전투에 적극 참전하는데, 팔레스타인을 점거하고 백수십년을 살아온
이스라엘 12부족이 이집트왕의 지배(?) 를 받으며 지원했다는 것인데.... 전기설은 앞뒤가 안맞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훈련을 받은 전문적인 서기를 두고 왕실과 나라의 대소사를 매일 꼼꼼하게 기록
했는데, 300만명이 탈출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면 당사국 이집트는 물론이고 이웃나라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인데도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히타이트나 아시리아에 출애급 기록이
전무하니 저런 미증유의 대사건이 관련국에 기록이 전혀 없고 성경의 기록이 유일한 것입니다?
이집트의 도시 라암셋에서 모세가 출애굽을 할때 보면..... 구약 성경의 민수기에 20살이 넘은
남자들은 제사장으로 성막 관리를 하는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 모두 603,550명 이었다고
했으니..... ”처와 자식등 사람만 300만 이고 거기다가 소와 양 등 여러 가축까지 합치면
어미어마한 인파인데.... 성경이나 영화에는 출발하는 기간이 얼마되지 않는 것 처럼 보입니다?
수나라 양제의 군대 30개군 113만이 탁군을 출발하는데 하루에 1군씩 출발하니 출발에만 40일
이 걸렸으며.... 선두와 후미의 거리가 천리(416km) 에 달했다고 사서는 전합니다. 모세 대중이
성경처럼 3백만에 가축까지 있었다면 출발에만 100일 이상 걸리고 선두와 후미는 3천리에
걸치는데..... 이집트왕의 군대가 어찌 후미를 제치고 3천리 떨어진 선두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6.25 때 서울에서 피난민이 쏟아져 나와 도로를 메우자 이승만은 수원으로 도주했으면서도 녹화
방송으로 국군이 북진중이라고 하니 피난민들은 생방송 중인줄 착각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국군과 경찰에 국회의원과 장관이며 고위 공직자와 기업인등 유력인사들이 차를 타고 도망
치기 위해서는 도로가 뚫려야 하는지라? 피난민들이 도로를 메우면 움직일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집트왕의 군대는 3천리에 걸친 군중을 어찌 뚫고 갔을라나.... 성경에 스무살이 넘는 남자가
603,550명 이었다고 했으니, 3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축과 수레를 가지고 움직이자면
3개월 전에 출발한 모세의 선두가 의주에 도착해 압록강을 건널 때, 히브리인들 후미는 부산에서
출발하는데... 이집트왕의 군대는 부산에서 의주까지 늘어선 사람들을 제치고 압록강까지 언제 가나?
또 300만 사람들과 가축들이 먹을 식량이며 물은 어떡한다..... 해서 제 어줍잖은 생각으로는 저런
단 한차례의 초대형 탈출 보다는 오랜 시기에 걸친 수백차례의 탈출이 있었고, 그와 관련된
기억들이 이스라엘을 구성하게 된 여러 부족들에게 전승되다가 탈출한지 700 ~ 800년이나
지난 후대에 하나의 탈출 사건으로 구약 성경에서 종합 편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집니다.
2010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카이로, 아스완을 거쳐 룩소르를 보고 비행기로 시나이 반도
샤름엘세이흐에 내려 택시로 다하브와 시나이산을 보고는 누에바에 도착해 페리를 타고
요르단 아카바에 내려 다시 택시를 대절해 북상해서는 페트라와 와디럼에 카락성을 구경하고
사해를 지나 느보산에 올라 히브인들을 이끌고 40년만에 이 산에 올랐던 모세를 생각했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땅 여리고 맞은편 아바림산에서
느보산으로 와서는 120세로 죽었다는데...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로 신명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나이반도에서 황금 송아지를 만드는등 야훼에게 반역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시나이 신 광야 에서 모세에게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은 후 바위를 보고
“물을 내라” 라고 소리치라고 했는데....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두번 내리쳐서 물을 솟게 만들어
환호갈채를 받았으니 이는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모세가 자기 공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나요?
야훼는 모세에게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해 그 후손에게 주리니...... 보라! 길르앗
에서 갈릴리 너머 단 까지, 또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 남쪽으로 종려읍성이며
여리고 골짜기 소압평지”등을 보이시고...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갔듯이 너도 여기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라“ 라고 말했다는 구절을 생각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