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에서 향후 개최할 공청회에 제시할 백화산 개발 방안에 대하여 정리했습니다.
빠지거나 더 요구할 사항은 댓글로 제시 바랍니다.)
백화산 개발방안
1.들어가며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개발(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 ESSD)” 패러다임은 현재 관광산업의 중요한 부분이다.
지속가능한 개발은 경제성장과 환경정책을 통합시킨 개념으로서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환경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보장하는 개발방식을 의미한다.
환경보전을 염두에 둔 경제개발을 통하여 미래세대가 환경자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현세대의 적극적인 자원개발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문화적 자원은 일단 파괴되면 원래대로 복구시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백화산은 우선 사회문화적 자원인 역사성을 바탕으로 한 유적지 복원과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의 장으로 선행되어야한다.
삼국통일의 단초를 제기한 금돌성(백화산성)을 통하여 분단된 남북의 현실을 직시하며 삼국통일의 기상을 되새기고, 고려 때 항몽전쟁의 결연한 호국의지를 되살려 일신의 안위보다 나라를 사랑한 민중들의 애환을 그려내고, 누란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을 맞아 항병소를 설치하며 의병 활동에 나선 선조들의 기백을 담은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 바로 백화산임으로 이를 적극 활용해야 된다.
또한 휴양과 웰빙 자원화를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백화산은 백두대간 에코비즈(eco-biz) 프로젝트와 연계하여 생태(eco), 건강(health), 레포츠(leports), 문화(culture), 휴양(recreation) 등이 융합한 생태관광 구축이 요구된다.
백화산의 경계인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이 백화산의 소규모 면적을 차지하고 역사적 유적이 경상북도에 산재함에도 불구하고 도로 다리 개설, 휴양 시설을 설치하여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인터넷 등에도 ‘영동 백화산’으로 회자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소중한 관광자원이 송두리째 방치되고 있는 현상을 타개하는 타산지석의 한 사례로 삼아야할 것이다.
백화산의 빼어난 절경과 역사적 근원을 토대로 등산, 휴양, 자연학습장 및 역사 교육의 다각적인 개발이 이뤄진다면 국민들의 여가 충족 욕구에 부응할 수 있는 국민 관광지로 부상될 수 있으며 인근 중화 지역의 포도, 오이, 곶감 등 농외소득 창출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2. 백화산의 역사 및 관광자원
기록에 나타난 백화산의 역사를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1)백화산의 역사
(1)신라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백화산 금돌성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
“七月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白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輿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 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言 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 與 軍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五萬應之王次今突城 ...... 十八日 義慈卒太子皮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즉 ‘신라가 백제를 침공함에 무열왕 7년(AD 660년) 태자 법민에게 명하여 대장군 김유신장군, 품일, 흠춘 장군과 더불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도록 하고 무열왕은 금돌성으로 행차하였으며 그 후 태자 법민이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 무열왕은 7월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천복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승전을 알렸다.’는 것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4상기유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3년, 고구려 왕 장(藏) 8년, 백제 왕 의자(義慈) 9년
-을사 신라 경덕왕(景德王) 24년 107년간
夏六月 新羅王出屯南川停 遺太子法敏及金庾信 會唐兵于德勿島 云云 七月十日…….又遣法敏與 庾信 及 將軍品日欽春 師精兵五萬應之 進次今堗城(今尙州白華山)
新羅王會蘇定方于泗沘城 遣使告捷于唐 王自南川進次突城(今未詳) 聞百濟降 自今突至泗沘
云云
하 6월 신라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德勿島)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게 하였다.
신라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있다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함선이 천리에 뻗쳤으며 덕물도 (지금 인천부 서해 가운데 있다.)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ㆍ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함(兵艦) 1백 수(艘)를 거느리고 정방(定方)과 합치게 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7월 10일에 왕과 만나기로 기약하고 곧장 의자(義慈 의자왕)의 도성을 무찔렀다. 법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방의 군세(軍勢)가 대단히 성대하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다시 법민을 보내어 유신(庾信) 및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과 함께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하고 금돌성(金堗城) 지금의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 신라왕이 소정방과 사자성에서 회담하였고, 사신을 당에 보내어 승첩(勝捷)을 알렸다.
왕이 남천(南川)으로부터 금돌성(今突城)에 나와 있다가 백제의 항복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자성으로 와서 제감(第監) 천복(天福)을 보내 당에 노포(露布 전승을 알리는 포고문)하였다. 술을 차려 놓고 장사(將士)들을 위로할 적에 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는 당하에 앉혀 술잔을 돌리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 상산지(商山誌)
금돌성에 대해 “백화산에 있는데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할 때 신라 무열왕이 태자 법민과 대장군 김유신을 파견하여 6월에 금돌성에 이르렀다. 7월에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의 도성을 함락하니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였고 무열왕이 금돌성으로부터 백제로 가서 8월에 주연을 베풀고 소정방과 여러 장수를 치하하였다. ‘라고 하면서 ’백화산성은 백화산 위에 있고 보문성(普文城)이라고도 한다. ‘고 기록하였다.
(2) 고려
*高麗史節要 卷之十七
高宗安孝大王[四] [甲寅四十一年 宋 寶祐二年,蒙古 憲宗四年]
○車羅大攻忠州山城,風雨暴作,城中人抽精銳,奮擊之,車羅大解圍,遂南下。
○冬十月,
車羅大攻尙州山城,黃嶺寺僧洪之,射殺一官人,士卒死者過半,遂解圍而退。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갑인 41년(1254), 송 보우 2년ㆍ몽고 헌종 4년
○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 겨울 10월에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 이 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3)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세종실록-지리지(地理志)
慶尙道 상주목(尙州牧)
⊙ 尙州: 中牟縣, 本刀良縣, 景德王改名道安, 爲化寧郡領縣, 高麗改今名。名山 白華山【在中牟西。】 中牟戶一百九, 口六百五十。人物, 政堂文學金得培。【高麗時, 州吏金祚有女曰萬宮, 年七歲, 父母避丹兵于白華城, 追兵近, 倉皇棄于道左而走。 旣三日, 得之林下, 自言: “夜則有物來抱, 晝則去。” 人皆驚異跡之, 乃虎也。 及䈂, 適戶長金鎰, 生子祿。 祿生三男, 長曰得培。 恭愍王十年辛丑, 紅賊陷松都, 得培與安祐、李芳實將兵破賊, 收復京師, 世謂之三元帥。
産山陽縣】磁器所三, 一在中牟縣北楸縣里,【上品。】一在中牟東己未隈里,【上品。】
白華山石城, 在中牟縣, 去州西五十一里。
高險, 周回一千九百四步, 內有溪一、泉五, 又有軍倉。
중모현(中牟縣)은 본디 도량현(刀良縣)인데, 경덕왕이 도안(道安)으로 이름을 고쳐서 화령군(化寧郡)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명산(名山)은 백화산(白華山)【중모(中牟) 서쪽에 있다.】
중모(中牟)의 호수는 1백 9호, 인구가 6백 50명이요,
중모(中牟)의 성이 5이니, 김(金)·전(全)·강(姜)·박(朴)·방(方)이요, 내성이 1이니, 심(沈)이다. 인물(人物)은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金得培)이다.【고려 때에 고을 아전[州吏] 김조(金祚)가 만궁(萬宮)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부모가 글안(契丹) 군사를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갔는데, 쫓는 군사가 가까이 오자 황급하여 길가에 버리고 달아났다가, 사흘 만에 수풀 밑에서 찾았다. 스스로 말하기를, “밤에는 무엇이 와서 안아 주고, 낮에는 간다.”고 하기에, 사람들이 놀랍고 이상히 여겨 자취를 찾으니, 바로 호랑이였다. 시집갈 때가 되어, 호장(戶長) 김일(金鎰)에게 시집가서 아들 김녹(金祿)을 낳고, 김녹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김득배(金得培)다. 공민왕 10년 신축에 홍건적이 송도(松都)를 함락하자, 김득배가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쳐부수어 수도를 탈환하니, 세상에서 삼원수(三元帥)라 이른다. 둘째는 김득제(金得齊)인데,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고, 막내는 김선치(金先致)인데, 밀직사(密直使)가 되었다.】
자기소(磁器所)가 3이니, 하나는 중모현 북쪽 추현리(楸縣里)에 있고,【상품이다.】
하나는 중모현 동쪽 이미외리(已未隈里)에 있고,【상품이다.】
백화산 석성(白華山石城)은 중모현에 있는데, 주(州) 서쪽 51리의 거리다.【높고 험하며, 둘레가 1천 9백 4보인데, 안에 시내가 하나, 샘이 다섯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형승】백화산(白華山) 중모현(中牟縣) 서쪽에 있으며, 주에서 72리다.
【고적】백화산(白華山) 옛날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가 1천9백4척이고,
안에는 시내가 1개, 샘이 5개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
○ 옥동서원(玉洞書院) 선조 조에 세우고 정조 기유 년에 사액하였다.
황희(黃喜) 태묘(太廟) 편에 보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충청도(忠淸道) 황간현(黃澗縣)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0리요, 북쪽은 경상도의 상주(尙州) 경계까지 14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영동현(永同縣) 경계까지 16리에 이르고,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20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영동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경산부에 소속시켰다. 공양왕 2년에는 다시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본도(本道)에 예속시켰으며, 14년에 청산(靑山)을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으로 만들었다. 16년에 각각 다시 복구시키고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산천】 황악산(黃獄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또 경상도 금산군조(金山郡條)에 보인다. 백화산(白華山)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또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 보인다. 산양암(山羊巖) 장교천(長橋川) 서쪽에 있다. 극락산(極樂山)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석천(石川) 고을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속리산에서 나와서 산양암에 이르러 장교천과 합류(合流)했다. 장교천(長橋川) 성 남쪽에 있다. 혹 대천(大川)이라고도 일컫는데, 근원이 무주(茂朱) 도마현(都馬峴)에서 나와 황악산(黃獄山) 물과 합류한다.
*여지도서
慶尙道 尙州 <하권0428-2>
密縣南距州四十七里自善山白馬山來 白華山 在中牟縣西距州七十二里自俗離山來 露陰山 在州西十里自九峯山來或稱西露岳與北石岳南淵岳稱商山三岳
古跡 白華山 有古石城周一千九百四尺內有一溪五泉今廢
忠淸道 黃澗
寺剎 乾川寺 在黃岳山 盤若寺 在白華山 新增喚鶴菴 在寒泉洞 仙
亂兵塵不及居民皆得全 白華山 在縣北十里山形峭峻巖居削立
○道川在縣北三里源出俗離山歷尙州牧界中牟而來與長川合流入于冷泉西流入于沃川郡界赤登江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正祖 46卷,
21年( 1797 丁巳 (嘉慶) 2年) 2月 13日 甲申
○前持平金光遇上疏曰: “
昔宣川知印金鐵賢, 從忠武公金應河, 到深河, 及兵潰矢盡。 應河謂鐵賢曰: ‘汝其去矣。’ 鐵賢曰: ‘小人何敢去? 請伏劍, 以明不去之心。’ 遂與應河, 同時殉節。 其後立應河之祠於義州, 以鐵賢配之廡下, 至丙子之難, 祠亦焚焉。 高麗樂工林千石, 麗末抱琴入尙州之華山, 日上層巖, 援琴北望而長唏, 聞革命之報, 遂捨琴自投巖下, 至今傳林千石臺。 此兩人所成就樹立, 炳烺字宙, 而旣無名位, 莫能褒揚, 宜使本官, 伐石記事, 以彰其烈。”
命廟堂稟處。
정조 21년 정사(1797, 가경 2) 2월 13일(갑신)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선천(宣川)의 지인(知印) 김철현(金鐵賢)이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심하(深河)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무너지고 화살이 다했습니다.
그러자 응하가 철현에게 ‘너는 떠나거라.’ 하니,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어찌 떠나겠습니까. 칼을 물고 자결하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그 뒤 응하의 사당을 의주(義州)에 세웠을 때 철현을 무하(廡下)에 배향하였으나 병자년의 난리에 사당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
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華山-白華山의 별칭)
* 형제급란도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회화.
지정번호 경북유형문화재 제217호 지정연도 1986년 12월 11일
소재지 경북 상주시 청리면 가천리 658 시대 조선시대 크기 29×21.5cm, 112면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7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월간 이전과 창석 이준(李埈) 형제의 충성과 우애를 소재로, 중국 명(明) 화공이 그린 그림이다. 세로 29cm, 가로 21.5cm의 저지한장본(楮紙韓裝本) 오침법(五針法) 총 112면의 첩장(帖裝)으로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이전과과 이준 형제가 머물던 향병소(鄕兵所)에 왜군이 들이닥쳤고,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604년(숙종 20)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이 이 이야기를 전하자, 감동하여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그림은 백화산 아래 진을 치고 창검을 든 왜군이 두 형제에게 다가오자 형이 아우를 설득해 업고 떠나는 장면, 업고 가던 아우를 내려놓고 왜군을 향해 형이 화살을 겨누는 장면, 적을 물리치고 아우를 업고 산 정상을 향해 달리는 장면, 백화산 정상에서 아우를 내려놓고 위로하는 장면 등 모두 네 장면을 그렸는데, 극히 사실적이며 운필이 대담하다.
그림이 완성되자 창석은 주변에 이 사실을 소재로 시문을 청했으며, 유근(柳根)·이민구(李敏求)·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명인들이 써준 글들은 부록으로 그림 뒤에 붙여놓았다. 후손인 이만철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2) 백화산의 관광자원
(1)금돌성-백화산성
금돌성(今突城-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정상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을 포곡식(包谷式)으로 쌓은 석성(石城). 가장 남쪽으로 위치한 능선의 끝 563m 고지에서 남으로 내려선 산자락에는 차단성(遮斷城)이 축성되어 있다.
금돌성의 위치
성이 허물어져 성의 높이와 폭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군데군데 남아 있는 것은 성의 안쪽 높이가 120-150cm, 바깥쪽은 260cm 내외가
되고 성의 안으로는 성벽과 함께 회곽도를 자연석으로 쌓은 것이 보인다.
* 차단성(遮斷城)
수봉의 옥동마을 앞을 흐르는 석천 건너편 계곡 입구의
보현사에서 계곡 안으로 1km 지점 양쪽에 자연석으로 쌓았다.
* 외성(外城)
차단성에서 약 800m 거리에 있는 외성은 계곡 양쪽에 있는
능선을 따라 백화산 정상으로 이어져 있다.
* 내성(內城)
내성은 외성의 성벽이 있는 능선 위에서 계곡까지 쌓았다.
(2) 옥동서원
옥동서원(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은 1518년(중종13)에 방촌 황희(1363∼145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백화서원(白華書院)을 건립하면서 창건되었다. 1580년(선조13)에 영당(影堂)을 건립하여 향사(享祀)를 지내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714년(숙종40)에 전식(全湜;1563∼1642)을 배향하였고, 1715년(숙종41)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 하였다.
1716년(숙종42)에 강당을 건립하였고, 1783년(정조7) 황효헌(黃孝獻)과 황뉴(黃紐)가 추가로 배향되었다. 1789년(정조13)에 사액되었으며, 1789년(정조13)에 청월루(淸越樓)를 건립하였다. 1987년 청월루를 보수하였고, 1991년 경덕사(景德祠)와 온휘당(蘊輝堂)을 보수하였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경덕사 · 온휘당 · 청월루 · 전사청 · 고사(雇舍) · 화직사(火直舍) · 묘직사(廟直舍) · 팔각정(八角亭) 등이 있다. 경덕사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사우로 정면 3칸 ·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앙은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측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며, 황희를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전식 · 황효헌 · 황뉴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온휘당은 원내의 모든 행사와 유림 회합 및 학문 토론 장소인 강당으로 정면 5칸 ·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문(樓門)인 청월루는 정면 5칸 ·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2층 누각(樓閣) 건물이다. 1층은 출입문이고, 2층은 중앙이 마루로 되어 있으며, 난간을 두르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享祀) 때 제수(祭需)를 장만해 두는 곳이며, 팔각정은 유생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고사 · 화직사 · 묘직사는 각각 고직 · 화직 · 묘직이 서원을 관리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해마다 3월과 9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으로는 『갈천문집 (葛川文集) 』 등이 있고, 유물로는 황희의 영정(影幀) 등이 있으며, 재산으로는 대지 1,000평, 전 · 답 8,000여 평, 임야 1,200평 등이 있다.
황희는 태종(재위1400년∼1418년)과 세종(재위1418년∼1450년)대에 걸쳐 육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하였다. 학문에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한 분으로서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3) 중모천-구수천(龜水川 八灘) 혹은 龜水川 八絶灘
○ 구수천(龜水川) -1灘
白玉亭에서 물탕골
* 백옥정(白玉亭)
獻壽峰 위 시인묵객의 주선으로 백 년 전 지은 정자.
* 세심석(洗心石)
백옥정 서쪽 약 300m 지점 중모천변에 있는데 둘레 20m, 높이 5m로 숙종 42년(1716년) 白華齋 黃翼再와 密庵 李栽등이 玉峰에서 同遊하면서 이 돌에 세심석이라고 명명하면서 ‘이 돌과 같이 변함이 없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염원으로 새겼다.
후손 黃浩善, 黃源善 형제가 돌에 세심석이라고 刻字하였다.
* 사담소(沙潭沼)와 산택정(山澤亭) 터
물탕골 건너편에 있는데 중모천의 물결이 남북으로 分流하면서 북쪽 편으로 흐르는 물줄기에 沼가 형성되었다.
이 沼를 常山 金씨 弘敏이 사담소(沙潭沼)라 명명하고 자기의 호를 사담(沙潭)이라고 했다. 이 沼위에 산택정(山澤亭)을 짓고 벗들과 교유하였다.
○ 구수천(龜水川)-2灘
물탕골에서 방성재까지 구수천을 둘러싼 절벽과 기화요초가 장관을 이룬다.
*물탕골(藥水터)=비천(飛天)
세심석(洗心石)에서 중모천을 따라 약 400m 내려가면 절벽이 15m 정도의 높이로 형성된 곳에 있는데 그 절벽 밑에 물탕이 있어 약수로 널리 애용되었다.
○ 구수천(龜水川)-3灘
방성재(放聲재)에서 송골까지 경관이 우수하다.
○구수천(龜水川)-4灘
송골에서 보장골까지 이곳에는 난가벽이 있는 곳으로 구수천의 물결이 제일 격단을 이루는 곳으로 주위가 아름답다.
*난가벽(欄柯壁)
절벽이 구수천변에 병풍을 두른 듯이 산을 의지하고 서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제일 요란하다.
○구수천(龜水川)-5灘
보장골에서 전투갱변까지이며 진불암터와 임천석대가 있는 곳으로 옛 선인들의 맑은 정신이 서린 곳이다. 곳곳마다 경치가 수려하다.
*진불암(眞佛庵) 터
임천석대 건너편에 있으며 수목이 울창해 그 터를 찾기 어렵다.
*임천석대(林千石臺)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고 그 기록이 이조실록 정조 편에 남아 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이 표리부동한 현실에서 귀감이 된다.
○구수천(龜水川)-6灘
전투갱변에서 저승골까지이며 전투갱변은 넓고 편편하며 수목이 무성하고 저승골은 깊고 경사도가 급경사이며 한 폭 산수화를 방불한다.
*저승골
몽고의 6차 침입 때 차라대군을 저승골로 유인하여 협공을 하였다는 구전이 있으며 저승골, 전투갱변에서 몽고대첩을 이룬 곳이다.
*탑벌
충북 황간 반야사의 3층 석탑(유형문화재 보물 1371호)이 원래 있던 곳.
○구수천(龜水川)-7灘
저승골에서 明鏡湖까지이며 산세가 수려하고 명경호의 양 옆 산이 명경호 물속에 비쳐 그 아름다움이 형언할 수 없다.
*병풍석대
난가벽 못지않은 기암절벽.
*명경호(明鏡湖)
시냇물이 거울과 같이 맑고 호수와 같이 잔잔한 데 유래되었고 주위의 울창한 나무와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룬다.
○구수천(龜水川)-8灘
명경호에서 충북 영동 般若寺까지이며 望月臺가 있고 경북과 충북 영동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4) 대궐터
금돌성 남쪽으로 서쪽의 자연 성곽을 이용하여 동쪽 석축을 쌓고 평지를 마련했다.
석축 높이 12m 길이 30m로 거대한 잡석을 활용했다. 신라 때 축조한 것으로 다른 지방에서 볼 수없는 유일한 유적이다.
무열왕이 백제를 함락할 때 이곳을 전진기지로 이용했다.
(5) 용문사(龍門寺) 터-(일명 頭逆寺 터)
옥동서원에서 보현사를 지나 약 2km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옥류대가 있는 바로 위에 있다.
식산 이만부는 백화산의 제일 큰 절이라고 소개했는데 개울을 따라 인공으로 대지를 조성했고 동서로 25m 남북으로 5m의 석축을 하여 남향으로 건축한 것이 완연하다. 폐허에는 깨어진 기와 조각과 옹기그릇 파편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6) 龍秋 폭포
수봉리 버스 정류장에서 신덕을 경유하여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普賢寺이고 여기서
약 5,6백m 오르게 되면 길 오른쪽에 위치하였다. 물이 많이 흐를 때는 장관이다.
(7) 玉流臺
상산지에 백화산 용문사를 소개하는데 절 아래 반석이 있어 그 위로 물이 흐르고 이 물이 용추로 흐른다. 고 기록되어있다.
최근 백화산 답사 때 상주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이 ‘옥류대’라 명명하였다.
3.개발방안
1.등산로개발
다양한 코스를 확보하여 백화산의 전면을 두루 볼 수 있는 등산 코스가 요구된다.
특히 주차장에서 석천을 탐방하다 진불암 추증 옛길을 따라 일명 ‘촛대바위’로 오르는, 이어서 정상인 한성봉을 등반 하는 코스가 개발되면 소위 ‘저승문’이라 통칭되는 지명과 함께 ‘저승골’을 조명하며 한성봉을 등반하기에 향후 백화산 등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저승문‘에서 한성봉으로 연결하는 출렁다리가 요구된다. (청량산과 유사한)
(1)주차장-보현사-용추->첫 갈림길->두 번째 갈림길->보문사터-금돌성-한성봉
총소요시간 : 1시간50분
(2)주차장-봉화터-방성재-한성봉
총소요시간 : 2시간10분
(3)주차장-석천 -임천석대-저승골(촛대바위)-한성봉
(4)주차장-석천-난가벽-임천석대-반야사
총소요시간 : 2시간
2, 천년옛길 산책로(구수천 팔탄)
작은 소금강(小金剛)으로 불리며 영남의 동강으로 인터넷에 회자되는 ‘구수천 팔탄=석천’
백화산 입구인 백옥정에서 반야사까지 약 6km 길이다.
현재 황간에서 모동으로 넘어오는 길은 일제 강점기 때 조성된 길인 것 같고 오도치를 넘는 소로가 있지만 그보다 이전에는 현 백화산 수봉 입구에서 ‘구수천 팔탄’을 따라 충북 우매리 반야사로 넘어가는 6km 거리가 통상적인 통로였을 것이다.
지금도 원형 그대로 상당수 남아있는 구수천 양안을 따라 제방처럼 다듬은 석축은 흔히 벌목 등을 위한 길로 해석하지만 벌목 등을 위해 그렇게 많은 길에다 무겁고 큰 돌을 길 따라 쌓을 어리석은 벌목꾼은 없을 것이다.
또 폭이 최소한 우마차 통로의 너비에 해당하는 (3-4m) 것이 군수물자 등의 원활한 이동 통로였을 것이며 현재 충북 반야사가 원래는 백화산 경북 쪽에서 이전했다는 기록 등을 종합하면 구수천 옛길을 따라 길 근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전에 의하면 기마병들의 훈련장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음으로 삼국통일 때 신라병들의 공격로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많으며 은밀한 공격로 조성을 위한 통로였을 것이다.
(단국대 석좌교수 정영호 박사)
그리고 반야사 인근 만경대 건너편에 기와를 굽은 유적지가 있다는 고증과 잔존 파편들이 수레를 이용한 소로 길이 이미 조성되어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탄금대와 비견할 ‘임천석대’의 역사적 사실과 문화, 비경 등을 종합하면 가칭 ‘천년 숲길’이 전국에 회자될 수도 있다.
(1918년도 일제 고지도 )
○ 현재 옛길을 따라 ‘구수천 팔탄’ 길을 복원하면 물을 몇 번이나 건너야하는 단점이 있지만 징검다리, 출렁다리 길을 놓는 다면 자연미를 겸비한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임천석대, 난가벽, 저승골 등 명승지마다 안내판을 겸하여 유래된 한시, 역사적 사료 등을 발췌하여 게시하면 산책로를 겸한 역사, 문화 탐방도 가능할 것이다.
3. 유적지 복원
1)금돌성
금돌성 복원 계획이 수립되어야하며 금돌성의 성벽을 빼서 기도 탑을 쌓는 작금의 실태 파악과 이를 근절할 방법이 모색되어야 하며 학술적 근거 없이 일반 잡부들이 눈대중으로 일부 성벽을 복원 전시하는 일 등은 후일 복원할 때 근원을 알 수 없으므로 지양되어야한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31호로 있는 금돌성은 역사적 배경이나 중요성을 감안하여 ‘사적’으로 승격하는 절차가 요한다.
유적지 복원 사적문화재 지정이나 혹은 명승이나 천연기념물 지정 등은 모두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한다. 문화재청이 문화재보호법을 들어서 지정을 하면 문화재심의위원회 라는 곳에서 심의를 해서 제청을 하고, 그러면 문화관광부장관이 이를 지정하게 되어 있다. 문화부장관의 지정은 문화재보호법시행규칙에 의거하여 지정기준을 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사적은 문광부장관이 반대를 하거나 심의위원회가 심의를 안 하거나 반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국대 석좌교수 정영호 박사, 한국중세학회 회장 공주대 윤용혁 박사가 문화재 심의위원을 겸임하며 금돌성의 ‘사적’ 지정을 적극 촉구하며 이에 앞장 서는 입장임으로 옥동서원과 함께 ‘사적’ 승격을 서둘러야한다.
2)용문사
폐사지 용문사의 지표조사를 통한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고 복원 혹은 안내도 설치 등이 요망된다.
상주시 모동면 용호리 탑골 소재 3층 석탑을 원래의 장소인 용문사로 이전하는 계획이 조속히 수립되어야하며 용문사 주변에 형성된 축대의 보존 방법이 선행되어야한다.
아래 기사와 같이 용문사에 원래 있은 목조여래, 보살좌상 등이 최소한 이전은 못하더라도
모조 목조여래. 보살좌상 혹은 그림을 겸한 안내도가 설치되어야한다.
“중화사 목조여래·보살좌상 문화재 지정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88호로 지정
영동읍 화신리(절골)의 천년고찰 중화사(주지 현구) 대웅전의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제288호)로 지정됐다고 10일 밝혔다.
이번에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목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좌상은 조선 숙종 12년(1686년)에 만들어진 목조불상에 개금(불상에 다시 금칠을 함)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동시기의 불상 제작편년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동군에 따르면 이번 문화재 지정에 가장 큰 사유는 불상에서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복장과 묵기가 나와 절대연대가 확실하며 개금의 과정과 본래의 소속사원 등과 같은 연혁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또한 범우고, 가람고, 태고사법, 여지도서 등에 기록이 전하여 중화사의 역사를 뒷받침 해주고 있으며, 존상의 형태가 완전한 것은 물론 각 부의 조각양식이 정제되어 있어 17세기 불상양식을 규명할 수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불상에서 나온 기록에는 조성연대와 불상존명, 조성관계자 및 시주자의 성명이 적혀 있으며 1928년에 2개의 불상에 개금한 사실을 알리고 있다.
또 기록에 의하면 원래 경상북도 상주시 백화산 용문사 법당에 4구의 불상이 봉안되었으나 화재 등으로 인해 용문사가 폐사(현재 백화산에 용문사 옛터가 남아 있음)되어 여래상과 보살상만 현재의 중화사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중화사로 옮겨온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28년을 하한으로 보고 있다. “
(용문사 목조보살좌상)
(용문사 목조여래좌상)
그리고 충북 영동군 황간면 반야사의 3층 석탑(국가 유형문화재 보물 제1371호)도 경상북도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 소재 ‘탑벌’에서 1950년 가져간 것이 문화재청에도 기록되어 있음으로 유사한 절차로 복원 혹은 안내도 설치가 절실하다.
3) 보문사
백화산 중턱 대궐터 옆의 보문암이 작은 암자가 아니라 보문사로 기록될 정도로 큰 절임이 최근 밝혀지고 최근 멧돼지로 인하여 일대가 파헤쳐져 축대의 규모 등이 선명함으로 역시 지표조사를 통한 규모 파악이 요구된다.
불교용어사전에 반야사는 백화산 보문사 북쪽에 있던 절이란 글이 나오고,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㝠陽水陸齊儀纂要)"이란 희귀본이 바로 '상주 땅 보문산 보문사'에 소장된 책이라는 소개가 있는데 개판 날짜가 1568년이고 이어서 다음 해인 1569년에 "묘법연화경"이 '상주땅 백화산 보문사'에서 개판된 책이라고 소개되며 최근인 2008년에 270만원에 경매되었다고 한다.
1568년과 1569년에는 혹시 백화산이 보문산이란 별칭이 통용되지 않았나하고 이 보문사는 두 번의 큰일을 치룰 정도로 규모가 큰 절이라는 결론이다.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㝠陽水陸齊儀纂要)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㝠陽水陸齊儀纂要)
종이 36.4cm×25.5cm 반곽 27.5cm×21cm
목판본 1권 1책이다. 판심제는 중中, 권두제는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㝠陽水陸齋儀纂要이며, 표제는 중례문中禮文으로 되어 있다.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는 수륙재 때 행하는 여러 의식 절차를 정리한 불교 의례서이다. 권말에 ‘융경이년무진삼월일경상도상주지보문산보문사개판隆慶二年戊辰三月日慶尙道尙州地普門山普門寺開板’이라고 기록된 점을 미루어 상주 보문산의 보문사에서 1568년에 개판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향산사- 소재지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성보문화재 : 5 개
현재 무주읍 소재 향산사에는 모두 43종 97책의 불교전적이 소장되어 있는 사실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불교전적은 전북지역의 여타 사찰에서도 그다지 흔치 않을 정도의 비교적 많은 종수와 책수를 소장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들 불서 중에는 조선 성종 1474년에 궁실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인수대비에 의해 간행된 [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의 경우 동일본이 보물 1193호로 지정된 바 있어 그 귀중성이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雲水壇] 2종과 1568년에 경상도 상주 보문사에서 간행된 [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는 현재까지 국내 주요기관의 고서목록에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학계에도 전혀 소개된 사실이 없을 정도로 매우 희귀한 불서로 생각된다. 즉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매우 희귀한 유일본이라 생각된다.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며 천태종의 근본 경전인 묘법연화경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유통된 불교 경전으로서 또한 많이 인쇄되어 보급된 불가의 대표서이다.
출품물은 1569년 慶尙道 尙州땅 白華山 普門寺 開板記가 있으며 출품물의 상태는 양호.
4)역사박물관 건립
삼국통일의 대업을 기초한 금돌성은 존재 가치가 유명무실하게 방치되어있지만 패전국으로 볼 백제를 조명할 논산의 ‘백제군사박물관’은 날로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한 민족임으로 승패를 떠나 통일의 기초를 다진 금돌성은 역사 교육의 장으로 부각되어야하고 고려 때의 대첩을 이룬 항몽과 임란 때의 의병 활동을 기록한 역사박물관 건립이 시급하다.
(논산 백제 군사박물관에 조명된 금돌산성)
5) 산악레포츠
(1) 트레킹, 래프팅, 산악 마라톤, 산악 승마, 암벽타기 등 천혜적인 백화산의 자연 환경을 이용한 산림에서 이루어지는 종합 레포츠 개발이 요구된다.
(2) 모서면 백화산 지형을 활용한 패러(행) 글라이딩과 스키장 개설.
(3) 겨울철 얼음 암벽을 조성하고 늦게까지 얼음이 어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여 썰매장 개설.
(4) 가칭 신라군과 백제군, 고려 의병과 몽고군으로 편성된 서바이벌 게임.
6) 항몽대첩을 기리는 가장행렬과 모의 전투 재현.
1254년 몽고와의 대첩을 기리는 ‘상주백화산항몽대첩비’ 건립과 가상 전쟁 장면 재현과 가장 행렬 등으로 민중들의 항전 의지를 다짐하고 역사 교육 및 볼거리로 제공.
7) 약초단지 조성 및 테라피 체험장
백화산의 풍부한 자연림과 약초를 발굴하고 자연 치료 요법을 겸한 테라피 체험장으로 활용.
8) 자연 휴양림 조성과 산림문화센터 건립
9) 기타
한시 등을 종합하면 백화산에 90여개의 절이 존재했음이 나타남으로 이를 위한 정확한 지표조사가 선행되어 유적 발굴 등이 요구된다.
맺는 말
백화산은 자연휴양림 산림이 갖고 있는 좋은 것들, 즉 울창한 숲,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아름다운 경관 등의 모든 기능을 고루 겸비한데다 역사, 문화적 요소가 극대화되어 있다.
현대 사회는 산업화, 도시화에 의한 경제 성장, 소득향상, 사회 제도의 변화, 교통 기관의 발달, 여가 시간 및 자연회귀 욕구의 증대 등으로 사람들에게 휴양(recreation)의 필요성을 강요하고 있다.
백화산은 우선 지리, 교통적인 측면에서 국토의 중간에 해당되며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접하여 백화산 인근에 최근 백두대간 생태박물관이 조성되고 있음이 중요성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교차하며 교통의 편리성과 함께 30여분 거리의 김천에 KTX 고속전철역이 신설되어 향후 대한민국의 교차로라 불려도 손색없을 정도로 접근성이 높다.
굴뚝 없는 산업으로 지칭되는 관광적인 요소만 가미된다면 역사와 휴식 공간이 상존하는 국민 관광지로 부각되어 백화산은 지역 문화의 창출과 농외소득의 진원지로 떠오를 것이다.
백화산을 배경으로 모동면과 모서면, 화동면의 포도는 이미 전국적 포도 명산지로 각광받고 있음으로 이를 연계하면 금상첨화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먼저 모동, 모서면과 상주 및 출향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기금 조성한 4 천 여 만원을 토대로 ‘백화산항몽대첩비’ 건립을 상주시의 자긍심 고취 차원에서 소공원화하여 사람의 내왕이 많은 곳에 조속히 설치하여야한다.
처인성전투와 버금가는 항몽대첩의 역사성과 주민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사례를 활용하여 널리 홍보한다면 구상중인 ‘백화산 산림레포츠 생태관광권 개발’에도 탄력이 붙어 중앙정부의 예산 지원과 여론의 활성화를 도모할 길이 절로 나온다.
‘구수천 팔탄’ 옛길을 원형대로 복원한다면 상산의 탄금대로 지칭되는 임천석대, 저승골 등을 두루 볼 수 있고 생태 탐방 산책로 및 자전거 하이킹 코스 등으로 전국적인 주목을 삽시간에 집중시킬 수 있다.
옛 선인들의 지혜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자연을 음미하며 詩 한 수 읊조리는 풍광을 저절로 연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길 하나에도 도(道)가 있듯 심오한 생각으로 옛길 하나하나를 놓은 것이다.
조상들의 지혜를 빌려 옛길을 다듬으면 작금의 후인들이 살 길을 여는 것이다.
백화산은 중지를 모아 개발되고 상산의 탄금대 임천석도 북을 두드리며 거문고를 안고 환생하여 다시 충의(忠義)를 일깨워야 하기에 가칭 “백화산 개발을 위한 민, 관, 학 공동추진위원회” 설립을 제안한다.
참조1)상주 백화산 탄금대, 임천석대( 林千石臺)에 관한 소고(小考)
머리말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백화산 구수천을 따라 백화산 입구에서 약 4 km 가면 고려가 멸망하자 한 악인(樂人)이 거문고를 품고 내려와 고려가 망함을 한탄하며 거문고를 켜다 태조가 거듭 부르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간직하고자 거문고를 품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과 함께 임천석대라는 절벽이 있고, 최근 허경진 저자 ‘악인열전(樂人列傳)’에서 임천석(林千石)에 관한 간략한 소개 글이 있다.
“무릇 음악이 무엇이던가? 음악은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마음의 움직임을 여실히 엿볼 수 있는 예를 고려 말의 악공(樂工) 임천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거문고의 명인이었다.
고려가 기울 때 산에 들어가 높은 바위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늘 탄식했다. 이성계가 혁명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 떨어져 죽었다.
'정조 실록'의 기록이다. 기록들은 오랜 것일수록 성겨 행간이 넓어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며 임천석을 추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사이군의 충절과 탄금대로 알려진 임척석대(林千石臺)에 관한 상상력의 원천을 역사적인 사실과 선인들의 문헌을 통해 고찰해보고 충절과 역사 교육 및 관광 자원으로 재조명하고자한다.
들어가며
먼저 상주 백화산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무열왕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太宗武烈王)’에
“七月 夏五月二十六日 王與庾信.眞珠.天存等領兵出京 六月十八日 次南川停 定方發自萊州 舳艫千里 隨流東下 二十一日 王遣太子法敏 領兵船一白艘 迎定方於德物島 定方謂法敏曰 吾欲以七月十日至百濟南 輿大王兵會 屠破義慈都城 法敏曰 大王立待大軍 如聞大將軍來 必 蓐食而至 定方喜 還遣法敏 徵新羅兵馬 法敏至言 定方軍勢甚盛 王喜不自勝 又命太子 與 軍庾信 將軍品日 欽春等 率五萬應之王次今突城 ...... 十八日 義慈卒太子皮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 王聞義慈降 二十九日 自今突城至所夫里城遣弟監天福 露布於大唐......
즉 ‘신라가 백제를 침공함에 무열왕 7년(AD 660년) 태자 법민에게 명하여 대장군 김유신장군, 품일, 흠춘 장군과 더불어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싸우도록 하고 무열왕은 금돌성으로 행차하였으며 그 후 태자 법민이 백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 무열왕은 7월 29일에 금돌성으로부터 소부리성에 이르러 제감천복을 당나라로 파견하여 승전을 알렸다.’는 것이다. “는 기록과 ‘동사강목 제4상기유’에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3년, 고구려 왕 장(藏) 8년, 백제 왕 의자(義慈) 9년‘에
“夏六月 新羅王出屯南川停 遺太子法敏及金庾信 會唐兵于德勿島 云云 七月十日…….又遣法敏與 庾信 及 將軍品日欽春 師精兵五萬應之 進次今堗城(今尙州白華山)
新羅王會蘇定方于泗沘城 遣使告捷于唐 王自南川進次突城(今未詳) 聞百濟降 自今突至泗沘
云云
하 6월 신라왕이 남천정(南川停)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法敏)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德勿島)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나게 하였다.
신라왕이 김유신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있다가, 소정방 등이 군사를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함선이 천리에 뻗쳤으며 덕물도 (지금 인천부 서해 가운데 있다.)에 진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태자 법민(法敏)과 대장군 김유신ㆍ장군 진주(眞珠)ㆍ천존(天存) 등을 보내어 병함(兵艦) 1백 수(艘)를 거느리고 정방(定方)과 합치게 하였다. 정방은 기뻐하며 7월 10일에 왕과 만나기로 기약하고 곧장 의자(義慈 의자왕)의 도성을 무찔렀다. 법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정방의 군세(軍勢)가 대단히 성대하다.’ 하니 왕이 기뻐하여 다시 법민을 보내어 유신(庾信) 및 장군 품일(品日)ㆍ흠춘(欽春)과 함께 정병(精兵) 5만을 거느리고 응전하게 하고 금돌성(金堗城) 지금의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 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신라왕이 소정방과 사자성에서 회담하였고, 사신을 당에 보내어 승첩(勝捷)을 알렸다.
왕이 남천(南川)으로부터 금돌성(今突城)에 나와 있다가 백제의 항복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자성으로 와서 제감(第監) 천복(天福)을 보내 당에 노포(露布 전승을 알리는 포고문)하였다. 술을 차려 놓고 장사(將士)들을 위로할 적에 왕과 소정방은 당상(堂上)에 앉고 의자는 당하에 앉혀 술잔을 돌리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는 기록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유서 깊은 명산이다.
또 경상북도 상주의 역사지인 ‘상산지(商山誌)’에 금돌성에 대하여 “백화산에 있는데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이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할 때 신라 무열왕이 태자 법민과 대장군 김유신을 파견하여 6월에 금돌성에 이르렀다. 7월에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의 도성을 함락하니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였고 무열왕이 금돌성으로부터 백제로 가서 8월에 주연을 베풀고 소정방과 여러 장수를 치하하였다. ‘라고 하면서 ’백화산성은 백화산 위에 있고 보문성(普文城)이라고도 한다. ‘고 기록하였다.” 라고 했고,
고려시대에는 ’高麗史節要 卷之十七 高宗安孝大王 四 甲寅四十一年,蒙古 憲宗四年‘에
“車羅大攻忠州山城,風雨暴作,城中人抽精銳,奮擊之,車羅大解圍,遂南下。
冬十月,車羅大攻尙州山城,黃嶺寺僧洪之,射殺一官人,士卒死者過半,遂解圍而退。
是歲蒙兵所虜男女,無慮二十萬六千八百餘人,殺戮者不可勝計,所經州郡,皆爲煨燼,自有蒙兵之亂,未有甚於此也。
고려사절요 제17권 고종 안효대왕 4(高宗安孝大王四) 갑인 41년(1254), 몽고 헌종 4년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졸지에 큰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졌다. 성중 사람들이 정예 군사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드디어 남쪽으로 내려갔다. 겨울 10월에 차라대가 상주산성(尙州山成)을 공격하였는데, 황령사(黃嶺寺) 중 홍지(洪之)가 한 관인을 쏘아 죽이고, 죽은 사졸(士卒)이 반이 넘자,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 해에 몽고 군사에게 포로로 잡힌 남녀가 무려 2십만 6천 8백여 명이나 되고, 살육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거쳐 간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 군사의 난이 있은 뒤로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통일의 기백이 흐르는 호국명산(護國名山)으로 불러 손색이 없는 산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이전과 이준 형제가 머물던 향병소(鄕兵所)에 왜군이 들이닥쳤고, 곽란으로 몸이 불편한 이준이 형에게 혼자만이라도 피할 것을 간청했으나 형은 끝내 동생을 업고 백화산(白華山)으로 몸을 피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604년(숙종 20)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간 이준이 이 이야기를 전하자, 감동하여 화공에게 시켜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는 “경북유형문화재 제217호 형제급란도”가 전하는 의병 활동의 주축이었고 이후 항일 운동의 거점지이였기에 오랜 세월 백화산이란 지명조차도 일제에 의하여 삭제되고 본래의 이름인 최고봉(933m) ‘한성봉’이 삼국통일의 기를 사로잡는다는 뜻에서 ‘포성봉’으로 변경되어 지내오다 지역민의 줄기 찬 바램으로 2007년 12월 26일자로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백화산’이란 지명이 새로 제정되고 원래의 ‘한성봉’으로 지명 변경이 고시된 우여 곡절이 많은 산이다.
1392년, 고려 멸망 300년 전후 조선시대 학자인 식산 이만부(李萬敷·1664-1732)가 쓴
‘白華洞㙜壁記’에 “自沙潭西下。白華,萬景。勢益壯。聱岈崛岉。呈怪不相讓。石焉苔蘚蝕。土焉蘿蔦封。水劃中如絲貫。屈折交絡。齧其涯。潦澤加則尤怒號。劈破崩崖震谷焉。左峙壁削開一面。色紺黝。覆壽藤。窈窕而深。益下無幾。有巖架起二層。㸦鐫刻。其趾黛蓄噴薄。流沫塗瀯。其巓老松翠層。落陰釀凉。有補虧平治之迹。塊石剝落。俗傳新羅亡。樂師林千石隱居于此。每於巖上彈琴。故尙稱林千石㙜云。余欲破石根疏磴道。抱三尺琴。臨其壁上其㙜。俯其流。彈一闋二闋。吊古人宣堙鬱而未能焉。再叟所表揭勝。滿十夥矣。惟是二者遺焉。故於是名其壁曰欄柯。名其㙜曰峩洋。息山翁云。
사담(沙潭) 서쪽 아래로 백화 만경(萬景)이다. 기세는 웅장함을 더하고 꾸불꾸불한 산세는 아득하고 험준하며 기괴함을 드러내면서도 서로 물러서지 않는다. 돌마다 이끼 자욱하고 흙더미에는 담쟁이덩굴 자리 잡고 있다. 물결이 갈라지는 곳에는 마치 실타래가 꿰어지는 것처럼 휘어 꺾이고 얽히고 설켜 그 물돌아가는 벼랑을 흠집 낸다.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더하여서 더더욱 울부짖고 벼랑을 가르며 부수고 무너뜨리며 골짜기를 뒤흔들며 왼쪽 들쭉날쭉한 절벽은 빛깔이 감색으로 거무스레하고 오래된 등나무로 덮여 그윽하며 깊숙하나 점차 아래로 내려가면 위태롭지 않고 바위가 (2층처럼) 시렁같이 층대를 이룬다. 거기에 그의 발자취를 새겨 넣다. 낮게 물이 솟아 진흙 사이로 졸졸 흘러가고 그 꼭대기 노송은 비취빛으로 층을 이루고 해가 저물어 서늘해지니 평화로운 자취를 더해주는데 흙더미와 돌덩이가 파인 듯 떨어진다. 항간에 신라가 망하고 악사 임천석이 여기에 숨어 살아 늘 바위위에서 거문고를 타니 전해오기를 임천석대라 칭하였구나. 자신은 돌을 깨트려 돌비탈 길을 터서 삼척의 거문고를 안고 그 암벽 위 그 대에 다다라 흐르는 물을 굽어보고 한 곡조 두 곡조 타리라. 옛 사람을 조문하고 막히고 쌓인 것을 토로해보지만 다 할 수야 있겠는가? 늙은이가 겉으로 드러내어 감당할 바가 너무 많구나? 오직 두 가지만 여기 남긴다. 그러므로 전하기를 그 벼랑을 이름하여 ‘난가(欄柯)’라 하고 그 대를 이름하여 ’아양(峩洋) ‘이라 하였다. 식산옹이 이른다. “ 라고 글을 남겼는데 후세 기록을 종합하면 고려를 신라라고 오칭한 것 같다.
이어서 ‘林千石臺’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남겼는데,
“疊石枕碧泓。 파란 소를 베고 첩첩이 쌓인 바위
云是林子㙜。 이곳이 이른바 임천석대라네
知是武陽倫。 내 아노니 아마도 그는 무양의 은인같이
抱器避地來。 큰 그릇 가슴에 품고도 세상 피해 살던 분
人去雲埋壑。 사람은 가고 없는데 구름은 구릉을 메우고
㙜存巖蝕苔。 대는 남아 바위는 이끼가 덮었네.
松籟晩不齊。 날 저무는 솔밭에 바람은 거친데
擬聽律呂哀。 옛 거문고 가락 슬픈 듯 들리네. “ 라 했다.
또 조선 후기의 학자인 경현재(警弦齋) 강세진(姜世晋, 1717 ~ 1786)은 ‘林千石臺歌’에서
“由自玉洞 沿溪而下 行數里 有蒼巖 削立於溪上 高可數十丈上可坐十許人 故老謂之林天錫(一作石)臺 天錫 麗末伶官也 以善鼓琴名 見麗王無道 携家遠遁 隱迹於商之中牟縣 壽峯村 每日上此臺 鳴琴作兩三曲 其聲悽惋 及麗亡 太祖 聞其名 使人召之 天錫曰 我麗臣也 義不可屈 不赴召 上又使人迫之 天錫 抱琴自投於臺下而死 後人 遂名其臺曰 林天錫臺 嗚呼 當麗運之訖 能守義而不臣于聖朝者 惟吉注書 徐掌令數公而止耳 其名跡 光于簡冊如林君 以一伶官 節義之卓 亦何鈊少遜於二公 然 泯滅不章 只留於村翁野老之口 其可悲也己 余逐詩之曰
옥동(玉洞)에서 시냇가를 따라 數里를 내려가면 시내위에 푸른 암벽이 깎아 세워져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위에는 십여 명이 앉을 만하니 촌로들이 임천석대라 하였다. 임천석은 고려 말의 악사이며 북과 거문고를 잘 치고 타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고려왕이 무도한 것을 보고 가족을 데리고 상주의 중모현 수봉촌(壽峯村)에 숨어 살면서 매일 이 대에 올라 거문고를 타고 두서넛 곡조를 울리니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처로웠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 임금 태조가 그 명성을 듣고 사람을 시켜 부르니 임천석은 ‘나는 고려의 신하이다. 의리로 다른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며 부름에 응하지 않으니 태조가 다시 사람을 시켜 부르며 협박하니 임천석은 거문고를 안고 대 아래로 뛰어내려 죽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때부터 이 대의 이름을 임천석대라 한다. 슬프도다. 고려의 운이 다할 때를 당하여 능히 조선의 신하가 되지 않은 사람은 오직 冶隱과 서중보 장령 등 몇몇 뿐이라 그 이름과 자취가 청사에 빛나고 있다. 임천석은 비록 악사이지만 절의의 높음이 이와 같으니 또한 위의 두 사람과 뒤진다하랴! 그러나 묻혀서 빛나지 못하고 다만 구전에 머물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내가 드디어 다음과 같이 시를 쓴다. “라며 詩를 남겼다.
“水瀰瀰石崔崔 물은 세차고 깊게 흐르고 바위는 높디높으니
人說林君千錫之故臺 사람들이 일컬어 임천석대라고 한다.
林君麗季時伶官 임천석은 고려 말의 악사였는데
桐絲一鷗 동강에 낚시하며 갈매기 한 마리
能令鳳凰爲徘徊 능히 봉황으로 배회하게 했다.
麗王淫戱自勦絶 고려의 왕 음란을 즐기며 스스로 지쳐 파멸하니
鵠嶺伯氣寒於灰 鵠嶺의 흰 기운이 재 같이 싸늘했다. “ 고 했다.
이 글에서 ‘임천석은 혼자가 아니라 가족들을 데리고 중모현 수봉촌(壽峯村)에 살았고, 조선의 태조가 두 번에 걸쳐 협박까지 하며 조정으로 불렀으며 임천석은 거문고뿐만 아니라 이름이 날 정도로 북도 잘 두드렸다는 것이고 임천석대는 십여 명이 앉을 정도의 대(臺)라는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正祖 46卷, 21年( 1797 丁巳 (嘉慶) 2年) 2月 13日 甲申 “前持平金光遇上疏曰
昔宣川知印金鐵賢, 從忠武公金應河, 到深河, 及兵潰矢盡。 應河謂鐵賢曰: ‘汝其去矣。’ 鐵賢曰: ‘小人何敢去? 請伏劍, 以明不去之心。’ 遂與應河, 同時殉節。 其後立應河之祠於義州, 以鐵賢配之廡下, 至丙子之難, 祠亦焚焉。 高麗樂工林千石, 麗末抱琴入尙州之華山, 日上層巖, 援琴北望而長唏, 聞革命之報, 遂捨琴自投巖下, 至今傳林千石臺。 此兩人所成就樹立, 炳烺字宙, 而旣無名位, 莫能褒揚, 宜使本官, 伐石記事, 以彰其烈。”
命廟堂稟處。
정조 21년 정사(1797, 가경 2) 2월 13일(갑신) 전 지평 김광우(金光遇)가 상소하기를,
“옛날에 선천(宣川)의 지인(知印) 김철현(金鐵賢)이 충무공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심하(深河)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무너지고 화살이 다했습니다.
그러자 응하가 철현에게 ‘너는 떠나거라.’ 하니, 철현이 말하기를 ‘소인이 어찌 떠나겠습니까. 칼을 물고 자결하여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겠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응하와 함께 동시에 순절하였습니다.
그 뒤 응하의 사당을 의주(義州)에 세웠을 때 철현을 무하(廡下)에 배향하였으나 병자년의 난리에 사당마저 불타고 말았습니다.
고려의 악공(樂工) 임천석(林千石)은 고려 말에 거문고를 안고 상주(尙州)의 화산(華山)에 들어가 매일 높은 바위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고 거문고를 뜯으며 탄식하다가 혁명한 소식을 듣고는 거문고를 버리고 바위 아래로 떨어져 죽었는데, 지금까지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성취하고 수립한 것이 우주간에 빛났으나, 명성과 지위가 없어 포양(褒揚)할 수 없으니,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돌을 깎아 사실을 기록하여 그 충렬을 드러내게 해야 되겠습니다.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華山-白華山의 별칭) “ 라고 정조 실록에 기록되며 정조가 묘당에 품처한 기록을 보면 아마도 임천석에 관한 비(碑)를 새겨 남겼을 가능성도 많다고 보여진다.
또,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 1760년-1839년)는
“林千石琴師也。知麗運將訖。抱琴入嶺南商山白華山。皷琴不出。聞麗亡號慟投臺下水死。
時林鳥悲鳴。山谷慘憺。至今山中人相傳林氏臺。
임천석은 거문고를 타는 악사인데 고려가 다함을 알자 미래를 구걸하며 연명하지 않고 영남 상산-상주 백화산에 거문고를 품고 들어가 거문고를 타며 두문불출하였다. 고려가 망함을 듣고 대(임천석대) 아래 물에 떨어져 죽으니 수풀 사이로 새들이 슬피 울고 산하가 참담하였다. 백화산 중에 임천석대라고 지금까지 전해온다.“고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권58의 羅麗遺民傳’에서 新羅王子 興光부터 44명의 신라, 고려 말 인물들의 행적을 올렸는데 '임천석'에 관한 기록을 남겨 오직 승리한 자의 역사만이 남는 가혹한 현실에서 비록 나라는 망해 없어졌지만 그 아름다운 행장을 역사에 남기고자하는 선인들의 지혜와 슬기가 전설 속에 남을 '임천석'을 다시 조명하는 작은 단초가 된다.
또, 장원(藏園) 황원선(黃源善) (1798年-1873年)은 ‘林千石臺’
“疊石層支小作臺 첩첩 층층이 돌 쌓아 작은 대(臺) 만들었으니
藏園處士百年來 장원처사가 생전 처음 예 왔다.
野人尙說殉身事 촌로들이 임천석의 순사한 일 말하니
碧血知應化錄苔 푸른 피가 아마도 푸른 이끼로 변했나보다. “며 지역 주민들이 전설로 여기며 전하는 속설을 기록으로 남기고,
조선 시대 학자 立齊 鄭宗魯 (1738~1816)는 ‘林千石臺’
麗運無那聖運開。 고려의 운, 어찌 할 수 없어 조선이 개국하니
忠臣來死此荒臺。 충신이 이 거친 대에 와서 죽었도다.
英靈不與寒波逝。 넋이 한파와 더불어 가지 않았으니
應抱孤琴故國廻。 아마도 거문고 안고 고국에 돌아오리.“라며 충절을 되새기며
金崔曄 (1753-1804)도 ‘林千石臺’
“千石石爲臺 임천석으로 하여 석대가 되었으니
矢心齊石臺 맹세한 마음은 석대와 한 가지일세
人投臺下死 사람은 대 아래로 투신해 죽었으나
高節又高臺 높은 절의는 또 높은 대로 남았네. “라고 높은 절의를 칭송한다.
동 시대의 白下 黃磻老도
“高麗山色夕陽臺 고려의 산색이 빛나는 석양의 대에서
烈士前塵問刼灰 열사의 지난 날 죽음을 물어본다.
夢八朱絃彈不盡 꿈마다 거문고 타서 다하지 않고
江深白馬去無來 강이 깊으니 백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네.
雷鳴急峽蛟龍鬪 우뢰 우는 가파른 골짝에 교룡이 싸우고
春到空林杜宇哀 봄이 오는 빈숲에는 두견이 슬피 우네.
怊悵東風誰灑麥 슬프도다. 봄바람에 누가 원한을 씻을 고
空敎石面但崔嵬。 공연히 바위가 명성 높도록 만 가르쳤네. “라며
열사(烈士)라는 칭호로 임천석을 극찬한다.
맺는 말
실록과 시문(詩文) 속에 살아있는 임천석대(林千石臺)는 2008년 6월 ‘백화산을 사랑하는 모임’ 현장 답사에서 벼랑 옆을 기어 올라가는 고투 끝에 밑을 내려다보기도 아찔한 약 3층 높이의 절벽 위에 장원(藏園) 황원선(黃源善)의 林千石臺에서 ‘疊石層支小作臺 첩첩 층층이 돌 쌓아 작은 대(臺) 만들었으니’라고 하고 또, 경현재(警弦齋) 강세진(姜世晋, 1717 ~ 1786)의 ‘林千石臺歌’에서 ‘有蒼巖 削立於溪上 高可數十丈上可坐十許人 故老謂之林天錫(一作石)臺시내위에 푸른 암벽이 깎아 세워져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고 위에는 십여 명이 앉을 만하니 촌로들이 임천석대라 한다.’라는 글과 같은 십여 명이 앉을 편편한 대(臺)가 밑에는 큰 돌로 석축을 쌓아 올려 져 있음을 발견했다.
이와 같이 기록과 일치하는 점과 몇 백 년을 임천석대(林千石臺)라고 구전되어 온 지역민들의 말을 토대로 전설로 전한 허구가 아님을 증명한다할 것이다.
영남의 동강으로 불리는 “구수천(중모천, 석천) 팔탄”을 배경으로 충주의 탄금대에 비교하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까지 가미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부각되어도 손색이 없는 유래 깊은 비경이다.
임천석대(林千石臺)가 훼손되지 않도록 인근에서 볼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하고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안내도를 설치하며 어딘가 망실되지 않고 있을 지도 모르는 비문(碑文)을 찾는 일도 함께 병행해야 될 것이다.
또 최근 성황리에 개최된 ‘백화산 학술세미나’에서 조명된 우리나라에 가장 긴 산성인 금돌산성을 복원하여 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선조들의 기상을 되살리고 천년 옛길이라 불러 손색없을 영남의 동강 ‘구수천 팔탄’을 따라 편도 6km (구수천 양안 왕복 12km) 산책로를 조성하여 역사의 향기를 남겨야한다고 사료된다.
‘구수천 팔탄’을 가면 폭 3-4m의 길이 신라 때 쌓은 금돌산성과 축조 방법이 비슷하게 백화산 입구에서 충북 황간 반야사(경북 모동면 수봉리에서 옮긴 기록이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자료에 보임.)까지 내를 따라 조성된 점을 보아 ‘천년 옛길’ 산책로라 불리어도 무방할 것이다.
또, 이는 최근 수집한 1918년 일제 때 작성한 지도에서 이와 같은 도로가 명시되어 있음으로 복원에 해당될 것이다.
없는 역사적인 사실도 유추하여 확대 해석하며 관광 자원화 하는 현실에서 엄연한 기록들이 존재하고 기록과 부합된 현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임천석대(林千石臺)는 그 긴 잠재된 시공의 문을 열고 거문고를 켜며 임천석(林千石)이 현실에 재현되어 충절과 문화의 북을 그 시절처럼 두드리며 나와야한다고 사료된다.
참조2) 임천석대
첫댓글 벌써 준비가 많이 되었네요. 백화산의 역사적 가치와 자연적 가치를 이용할 다양한 방법들을 많이 구상하신것 같습니다. 그런데... 등산로,산책로 개발, 박물관설립 등등 다 좋은 생각이신것 같은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스키장은 왠지 지속가능한 개발하고는 별로 가깝지 않은듯 싶은데요. 최소한의 개발을 통해서 사람들의 접근이 용이할수 있게 하는 건 좋은데, 스키장같은 대대적인 개발은 산림을 많이 회손할 수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