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학교에 다닐때에 우리집은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계동 한 복판이다
우리집은 빨간벽돌 2층집인데 방이 9개나 되고 점포가 3개 였는데 그중 하나는 우리 작은 언니가 양장점을 했었다
우리는 학교에 갔다오면 미싱도 밟아보고 기래빠시(조각) 를 가지고 장나삼아 여러가지를
만들고 박고 하였다.
작은언니는 우리에게 단을 감쳐라 단추를 달아라 실표를 해라
가르쳐주고 일을 시켰으며 우리는 한번도 싫단말없이 그일을 거들었다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공부 보담 더 재미있긴 했다
짠돌이 언니는 수고 했단 말도 없고 절대로 하드 한개도 안사준다
겨울이면 그때 당시엔 우라까이 (완전히 다 뜯어서 뒤집어서 새로 만드는옷) 코트가 유행이었는데
그일감이 들어오면 면도칼로 살살 바느질을 튿어 주는 일도 많았다
지금도 면도칼로 박음질 한것을 잘도 튿는다
나중에 결혼한후에 작은언니가 살고 있는 계산동에 이사 왔을때 언니가 아르바이트로 몸뻬를
만들어 보라고 한다
개당 5백원인데 10개 만들면 5천원을 주겠단다
그때에 싸박기를 배웠다
일단 두장을 살짝 차이나게 놓고 박은후에 넓은쪽을 싸서 다시한번 박으면 앞뒤도 없이 예쁜 바느질이된다
그렇게 공들여 몸뻬를 10개 만드는데 일주일도 더 걸렸다
서툴으니 다시튿고 다시박고 하니 더욱 오래 걸렸다
그 오천원을 받으면 어디에 쓸까 하고 기대 하고 있었는데 순희언니 딸이 결혼한다고
언니가 오천원을 봉투 에 넣어서 낼 테니 몸빼 공임 으로 쓴심 치라고 한다.
이세상 살면서 그렇게 아까운돈 5천원은 절대로 안 잊혀진다
그때가 30년전이다 지금은 보통 축의금이 5만원인것 같은데...
내기억이 맞나 싶으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흘러 언니는 이세상을 떠났고
나는 예쁜 손수건을 미싱으로 싸박기로 레이스를 달고 만들어서 그림도 그리고 그림을 그리지 않은 흰손수건을 만들어서
몇천장도 더 팔았다
매끈하게 미싱이 잘되기 까지는 삼년은 걸린것 같다
2008년도부터 손수건을 만들었고 지금이 만 6년째다
곱게 박아진 손수건을 보면서 이게 다 작은언니 가 양장점을 했기 때문이야! 라고 생각한다
어깨넘어 배운 바느질로 내 조끼니 파자마를 마들어서 입고
손녀딸의 조끼와 쫄바지 원피스 등등 헤일수없이 많이 만들어 주었다
손녀딸의 친구것 까지 만들었다
딸 사위가 일어반구 "엄마가 만든옷 너무 예뻐 너무 고마워" 이딴말을 절대로 안하지만.....
오늘 노인 문화센타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하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분이 하는말 이 외손녀를 위하여 뜨게질로 세타와 모자 바지 를 셋트로 떠서 딸에집에
가져갔는데 사위가 하는말이 "60년대 스타일이예요 못쓰겟어요" 했단다
말이야 바른 말 이기도 한데
한두번이라도 입히는 척 했어야 하지 않을까?
단칼에 자른 그 사위 가 좀 밉다.
좌우간 그 모든 바느질 로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곱게 박힌것 볼때 기분 정화되고
또 내 여름 끈원피스는 얼마나 예쁘고 젊어 보이는가?
요즈음은 유리옷 해주려다가 내 옷 만드는 바람에 빨간 원피스 빨간 파자마 까지 만들게
되었다 잔잔한 꽃무늬가 있는 빨간 면이다
너무 예뻐서 요즈음 만나는 나분들 여사것 까지 만들어다 주었다
나분들 여사는 나분들 문구사를 하던 사람인데 너무나도 마음씨가 곱다
누구라도 이제는 다 만들어다 주고 싶다
오늘도 난초그린 손수건 2장을 영어회화 선생님께 선물 하였다
미국 생활 20년 하신분이어서 한국적인것 너무 좋아 하신다
이래 저래
모든것은 다 짠돌이 작은언니 덕분입니다~~~
큰언니 댓글 달으려면 아이디로 다음넷에 들어온다음 쓸수 있어요 권풍 이 정회원으로 되어있네요
라보 이야기도 나중에 써 넣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