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들처럼 확증편향에 사로잡힌 정이철 목사 (21): ‘정이철 목사 {성경}’에는 없는
‘히브리서 5장 7절’
朴埰同 (2019. 02.03. 14:35)
{바른 믿음} 정이철 <노승수 목사, 정이철-서철원 박사를 안셈, 피스카토에 비유>
http://archive.fo/zKoLM
링크한 글에서 정이철 목사는 “노승수 목사 이단성이 기록된 글이 {바른 믿음}에 제보됐다.”며 다음과 같은 노승수 목사님 글을 문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돼야 하는 존재로서 그가 이루신 율법에 대한 온전한 순종, 곧 행위언약에 대한 성취인 것이죠.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죄에서 구원’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 자신 역시 구원돼야 하는 존재”라는 노승수 목사님 주장에서 “구원”은 ‘죄에서 구원’을 뜻하는 말입니까? 물론, 결코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 1:31 상)는 말씀 때문에 아담이 범죄하기 전 누렸던 생명, 즉 ‘육신(몸)’을 생각할 때 ‘완전한 몸, 영화로운 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위(생명)언약으로서 선악과 금령’이 뜻하는 대로, 아담은 행위언약을 지킴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만 하는 처지, ‘창조의 궁극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 있는 몸으로 지음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즉, 범죄 전 아담의 몸은 ‘창조의 목표’로서 ‘영화로운 몸’, 우리가 부활 때 입는 ‘영화로운 몸’이 아니었습니다.1)
그러면 이 땅 위 그리스도의 몸, 마지막 아담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은 ‘영화로운 몸’이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첫째 아담의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었듯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7문답>이 뜻하는 대로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일 수 있는 몸’이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그리스도의 몸은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는 몸’(롬 8:21 상)이었습니다. 무덤에서는 초마다 계속 부패해 가는 몸, 그 ‘몸의 속량(구원, 구속)’(롬 8:23 하)을 기다리는 몸이었습니다.2) 칼빈 선생님 말을 빌리자면, “병약한 육신”이었습니다.
율법이 육신 때문에 연약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 때문에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
우리의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연약한 자들을 돕는다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참 뜻을 아셔야 했기 때문에 우리의 병약한 육신을 기꺼이 입으신 것이다.3)
우리에게 계시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
정이철 <노승수 목사, 설 지나서 고소 및 민사배상 청구할 것이라 밝혀>
http://archive.fo/4ficQ
링크한 글에서 정이철 목사는 다음과 같이 노승수 목사님을 다그쳤습니다.
노승수 목사는 자신의 이단성 문제가 마치 기존 개혁신학 능동 순종 사상 본질과 연관되기라도 한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능동 순종 사상을 지지하는 개혁신학자들 중에서 노승수 목사처럼 “예수도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온전히 율법에 순종하셨다.”(능동 순종)고 가르치는 사례가 있는지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논쟁의 본질을 흐트리지 마십시오. 기존 개혁신학 능동 순종 이론이 100% 진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노승수 목사 이단사상을 정당화해 주지는 못합니다.
좌충우돌 돈키호테 정이철 목사 이 다그침을 두고 저는 개혁신학자 주장이 아닌 성경에 적힌 하나님 말씀으로 응수합니다.
그분께서 육체에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건하심 때문에 들으심(구원)을 얻으셨느니라.
(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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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글은 ‘김홍전 {성탄절 강설}’ 214쪽~215쪽에서 옮기는 강설입니다. 들여쓰기 없이 옮깁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에 만드셨을 때 죄는 없었지만 완성품은 아니었습니다, 또 아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신 모든 뜻과 계획이 아담을 창조해 놓은 그 자리에서 모두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거기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도달해야 하느냐 하면 아담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아닌 훨씬 위대하고 참된 큰 생명으로 도달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네가 만일 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는 말씀은 ‘네가 이것을 먹지 않고, 이 금령을 잘 지키면 살리라.’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그가 현재 살아 있는 그 생이 아니라 ‘참된 의미의 생을 그에게 준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만일 죄를 범하지 않고 살았다면 그것은 율법이라는 관점, 하나님의 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에 온전히 하나님의 법, 즉 하나님께서 하길 바라시는 것을 잘 지키고 살아갔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다 잘 지켰을 때, 율법은 결국 무엇을 주려고 하는 것이냐 하면 생명을 주려는 것입니다. ㅡ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 생명을 얻을 육신은 이제는 없다.’(롬 3:20, 갈 2:16)고 하셨습니다. 현재는 그렇습니다.ㅡ 그러면 이와 같은 상태에서 아담은 최종적으로 그 영원하고 영광이 가득한 무한한 생명을 얻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아담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자기 노정路程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2) 다음 글은 ‘김홍전 {부활의 참뜻}’ 80쪽~81쪽에서 옮기는 강설입니다. 들여쓰기 없이 옮깁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법을 사람에게 최초로 주셨을 때 사람은 그것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또 상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안 지킬 때에는 무엇이 오느냐?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 거룩한 법을 지키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형벌이 오는 것이고, 반면 지키면 죽음의 반대인 삶을 얻을 것이었습니다. 고귀한 피조물인 사람의 경우 단순히 호흡하고 사는 것으로는 그 생이 충분한 의미를 나타낸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활용돼서 바로 생각하고 알고 깨닫고 느끼고 정당한 것을 하고자 해 나가는 데에 비로소 사람다운 본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지침이 되고 기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 결국 사람은 법을 지킴으로써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거룩한 법을 지켜야 사람이 장차 얻을 훨씬 더 고귀한 생명의 위치로 올라가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은 그 법을 지키는 대신 그것을 범하고 파괴하고 배반을 한 까닭에 그 반대인 죽음의 사실과 그에 따른 큰 저주의 상태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상태의 인류를 건져내시기 위해서 우리 주께서는 당신 스스로 법 아래에서 사는 위치로 내려오셨습니다. 저주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의 인간성을 취해 땅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바 제한된 과정을 다 겪으시기 위해서 동정녀 마리에게 나시고 점점 장성해 사생활을 보내신 뒤에 마침내 공생애를 또한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는 법을 지킴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처지, 계약을 지켜야 할 위치로 내려오셔서 법이 주는바 규제 아래 사셨습니다. 준법을 해야 할 종의 형상을 입으시고 비하된 위치에서 사셨습니다.
3) ‘존 칼빈 {로마서 주석}’ <로마서 8장 3절 주석>에서.
{페북} 제 담벼락에서 옮겨오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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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능동(율법준수) 순종에 따른 의義의 전가’를 부정한 정이철 목사에게 동조※)해 ‘알미니우스주의 웨슬리언 장기영 성결교 교수’는 지난(2019년) 설 연휴에 {페북} 자신의 담벼락에서 ‘그리스도 능동 순종에 따른 의義의 전가’를 부정하며 개혁 교회 형제들에게 ‘그리스도 능동 순종에 따른 의義의 전가를 증거하는 성경 구절을 대라.’는 도발을 했습니다. 다음은 이 도발 때 교만한 장기영 교수에게 쓴 제 댓글입니다. ‘장기영 교수 {페북} 담벼락 글 <개혁주의 형제들께 ②>’에 쓴 댓글입니다. 들여쓰기 없이 옮깁니다.
朴埰同 (2019.02.17. 22:13)
우리가 시험에 넘어질 때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주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얼굴만 보실까요? 아니면,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주님 얼굴도 보실까요?
그리스도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로서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 십자가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이 없는 십자가를 믿는 것은 헛된 믿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로서 중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전 생애에 걸친 이른바 “능동 순종” 없이 십자가로 곧바로 달려가셨을 것입니다. 물론, 부활 없는 십자가는 무용지물이듯이 그리스도 능동 순종 없는 십자가 역시 무용지물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 이신칭의와 얽힌 그리스도 능동 순종과 수동 순종’을 분리하는 태도는 그리스도 십자가와 그리스도 부활을 분리한 순천 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 태도로, 위험한 태도입니다.
그리스도 순종을 굳이 구별ㅡ분리가 아닌 구별ㅡ해 적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그리스도 수동 순종: 율법 아래 나셔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죗값은 사망이다.”는 ‘율법의 정죄’를 받으심. 즉, 택자들 죗값을 대신 치르심. → 증거 성구: 예수께서는 우리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롬 4:25 상)
② 그리스도 능동 순종: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을 지키심으로써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는 ‘율법의 축복’을 얻으심. 즉, 택자들에게 덧입혀 줄 의義(영원한 생명, 부활의 생명)를 얻으심. → 증거 성구: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하)
다음은 제가 ‘위 ②를 증거하는 성경 구절’로 생각하는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체 계실 때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고, 그분 경건하심 때문에 들으심을 얻으셨느니라.(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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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른 믿음} 정이철 <오히려 웨슬리언(장기영 교수)이 능동 순종 의미 더 정확히 알아>
http://archive.fo/Ytx3N
첫댓글 노승수 목사님이 쓰신 짧은 문구가 조금 아쉽긴 합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처럼 죽음에서 구원되어야 할 존재 라고 썼으면...
바빙크목사님글이 아주 명확합니다.
'예수는 행위계약의 대표자이신 공적 신분으로서 율법을 완수하셨다. 그러니만큼 그가 살아 계신 동안에 율법을 지키신 효과는 자기 개인에게만 아니고 그가 대표하신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의(義)가 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만 아니고 그의 생활도 우리를 대신한 희생제물이 되신다'
예수님은 중보자이시면서 자기백성의 대표자.
예. 아쉽긴 합니다. 그런데 더욱 아쉬운 것은 노승수 목사님이 이 주장을 철회하실 필요가 없었는데, 철회하셨다는 점입니다.
@四季 朴埰同 위에 쓰신 내용과 같이 구원이라는 것이 통상적으로 죄에서 구원이라는 공식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연상케 되기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독론에서 예수님이 백성의 대표자로 다시보게 되어 기쁩니다.
@가을
Wolf이철 장점은 저로 하여금 자료를 찾게 하고 성경을 살피게 하며 사유를 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 논란과 관련해 ‘{바른 믿음} 정이철 목사 글들과 정이철 목사를 지지한 목사들 글들’을 텍스트 비평한 비평문, {페북} 제 담벼락에 썼던 비평문이 50 편이 넘습니다. 이 비평문들을 쓰면서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신앙의 지식이 좀 더 밝아지는 기쁨을 맛봤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9.29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