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방석 강안나
새 아파트에 쓸모없다고 버려진 방석 하나
수위 아저씨 품에 안겨 좁은 방에 들어와
조몰락조몰락 시린 엉덩이 번갈아 온기 나누어요.
-동시집 『달콤한 재촉』 (2022, 아동문예)
하루가 금방 갔다 권영상
하루가 갔다. 사과나무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놀던 하루가 갔다. 그걸 알고 다들 푸념 섞인 말을 했다. 하루가 금방 갔다고. 그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가더냐고. 하루가 보통 동쪽에서 오니까 갈 때는 아마 서쪽으로 난 작은 길로 갔을 거라고 말했다. 친구들을 보내고 하루가 갔을 고욤나무 서쪽 길로 달려가 보았다. 떠나는 게 싫은지 저쪽 길모퉁이에 하루의 그림자가 머뭇거리고 있었다.
-《시와소금》 (2022 여름호)
글과 길 김완기
‘글’ ‘길’ 참 좋은 말이다.
찬찬히 글 읽다 보면 길이 보이지 책갈피 사이에서
혼자 들길 걷다 보면 글이 떠오르지 들곷 피는 길모퉁이에서
‘글’ ‘길’ 사이 좋은 우리 말이다.
-동시집 『들꽃 백화점』 (2022, 아침마중)
세상에! 박옥경
감나무 잎이 토란잎에게
토란잎이 어린 호박잎에게 이슬을 굴려 내려주네
목축인 잎들 실핏줄 팽팽해져 초록 무늬 짙어졌네
여름 아침에 생긴 일.
-동시집 『바람 글씨』 (2021, 고래책빵)
자판기 신준수
신천1리 경로당에 음료수 자판기가 놓였다 지호 할머니 자판기 탁탁 두드리며
-마실 거 하나 조바유
-여바유 마실 거 하나 달라하이 으째 대답이 읍써
-여바유
옆에서 지켜보던 경자 할아버지
-거 딴거 달라케보이소
-동시집 『쿠쿠기차』 (2022, 걸음)
시간의 손 신현득
시간에는 손이 있다. 그 손이 아기를 키운다. 그 손이 강아지를 키운다. 그 손이 냇물에서 물고기도 키운다. 그 손이 들판에서 씨앗을 키운다.
한 달 서른 손가락 한 해 삼백 넘는 손가락이 시간의 손에서, 시간의 손가락이
들판을 산천을 바다를 세계를 고루고루 고루고루 만져서 키운다. 키운다!
-동시집 『뜬구름에 하얀 곰』 (2022, 상상)
콩닥콩닥 윤동미
봉지가 뚫려 쏟아진 깜장 콩
이때다 싶어 있는 힘 다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난, 식탁 아래 숨을 테야 -난, 멀리 소파 밑까지 갈 거야 -난, 냉장고 밑으로! 다들 조심해!
힘센 청소기에 모두 잡혀갔지만 깜깜한 냉장고 밑에 숨은 콩은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아직 숨바꼭질 중
-동시집 『콩닥거리는 가슴』 (2022, 고래책방)
하나밖에 없는 목숨 이성자
매년 3월 1일이면 생각나는 이름 유관순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나라를 위해 당당했던 이름 유관순
나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날마다 게임에 바치고 있으니….
-《시와소금》 (2022 여름호)
뒤집기 정미혜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있는 힘 다해 휙 넘어간다
빙글, 벽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온다
집을 한 바퀴 돌린 아기 대단한 우리 아기야
자라서 이 세상도 빙글, 멋지게 돌리렴
-동시집 『물음표가 팔딱!』 (2021, 청개구리)
말 잘 듣는 아이 -분재 최춘해
밑둥치는 굵은데 키 작은 모과나무 가지마다 꽃을 피웠다.
앉으라면 앉아 있고 서라면 서 있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아이.
등이 굽고 팔다리가 뒤틀려도 시키는 대로 하는 몸에 밴 버릇.
-《동시마중》 (2022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