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권 의식을 갖게 될 것을 염려한 어머니의 결정이었다. 성심여중 2학년 때 학교 기숙사가 폐쇄되면서 청와대로 들어가 전차로 통학했다.
생활기록부를 보면 성심여중과 성심여고 재학 시절 6년 내내 반에서 1등을 했다.
중학교 1학년 2학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반장을 맡았다.
1960년대 중반 청와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가족이 둘러앉아 놀이를 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시계 방향으로 박 당선인, 동생 근령·지만씨,
육영수 여사.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0년 "산업 역군이 돼 나라에 기여하고 싶다"며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3학년 때 박 전 대통령이 '10월 유신(維新)'을 추진하면서
대학가에 반(反)정부 분위기가 고조됐다.
박 당선인은 "점점 학과 공부에 매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했다.
졸업 때 이공계 수석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1974년 8·15 경축 행사에서 어머니가 문세광에게 저격당해 숨지자 그는 프랑스 유학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22세 때부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심정을 "소탈한 생활,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1974. 11.10. 일기)고 적었다. 아버지가 기업체를 방문하거나 국토 시찰에 나설 때 수행했다. 거의 매일 아버지와 둘이 아침식사를 했다. 그때 아버지와 국정 전반에 관해 나눈 대화를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1970년대 말 구국봉사단을 운영했던
고(故) 최태민 목사(1912 ~1994)를 만났다. 검증 때마다 최 목사 얘기가 빠지지 않았으나 그는 "내가 어려운 시절에 도운 분"이라고 했다.
(사진 왼쪽)중학교 2학년 때 산정호수로 소풍 갔을 때 반 친구들과 촬영한 단체 사진. 하얀 점선으로 표시된 여학생이 박 당선인. (사진 오른쪽)고교 시절인 1960년대 말 야외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박 당선인.“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기타 치는 게 더 좋았다”고 했다.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1979년 10월 27일 새벽 1시 30분쯤 그는 아버지가 저격당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고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장례식을 치른 뒤 아버지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5년 전 어머니의 피 묻은 한복을 빨던 기억이 겹쳤다"고 했다. ◇인고의 18년 그는 1979년 11월 21일 두 동생 근령·지만을 데리고 청와대에서
서울 신당동 사저로 돌아왔다. 1982년 8월 경남기업 신기수 회장이 마련해준
서울 성북동 주택으로 이사했다. 신당동 집이 부모님의 유품을 보관하기엔 비좁았다,
마침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던 신 회장이 집을 지어줬다는 것이다.
한때 신 회장과 약혼설이 나돌기도 했으나,
박 당선인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고 했다. 1980년 4월 영남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지만, 재학생들의 반발 등으로 7개월 만에 물러난 뒤 이사직을 유지하다
1988년 11월 이사직에서도 사퇴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박 전 대통령 격하(格下) 운동이 벌어졌다.
지인들은 "차라리 외국에 가서 사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1981년 한 학기 동안 예장신학대학원을 다녔고
법구경·금강경 등 불교 경전을 읽었다.
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
1979년 11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를 모두 마친 박 당선인이
그동안 살던청와대를 떠나기 위해 승용차를 타고 있다.3
박 당선인은 아버지 10주기인 1989년을 1년 앞둔 1988년부터 아버지의 공을 기리는 내용의 본격적인 언론 인터뷰를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회도 발족했다. 박 당선인은 "1989년은 수년간 맺혔던 한을 풀었다고 해도 좋을 한 해"(1989.12. 30. 일기)라고 적었다. 1990년 동생 근령을 지지하는 '숭모회'가 육영재단 이사장인 자신의 퇴진 운동을 벌이자 1992년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청바지 차림으로 산과 문화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그는 자서전에서 "퍼스트레이디로 있을 땐 결코 누려보지 못한 평화로움이었다"고 했다. 40대가 되면서 여러 차례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사양했다.
◇정치 입문 그는 1997년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했다. "IMF 위기를 맞아 지난 세대가 이뤄놓은 많은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아찔함 때문에 정치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
(사진 왼쪽)박 당선인의 20대(代) 모습. 지금처럼 올림머리 스타일이 아니라 머리를 내린 채 머리띠를 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4년 3월 당 현판을 떼어낸 뒤 천막 당사로 옮기는 모습. /박근혜 당선인 측 제공
이듬해 4월 재·보선에서 대구 달성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나라당 부총재가 된 그는 2002년 2월 이회창 총재의 1인 체제를 비판하며 당권·대권 분리와 국민참여경선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당했다.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사실상 대선 준비를 했으나 여의치 않자 대선을 한 달 앞두고 복당했다. 이회창 후보가 또 패배하자,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당대표로 선출됐다. 한나라당의 '차떼기(정치자금 수수) 파문'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전망이
어둡던 총선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으로 121석을 얻었다.
그 뒤 2006년 6월 대표를 물러날 때까지 2년 3개월 동안 사실상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 유세 도중 면도칼 테러를 당했다.
의사는 "1㎝만 깊었어도 목숨이 위험했다"고 했다. 병상에서 선거 상황을 보고받자 그는 "대전은요?" 하고 말했다. ◇2007년 실패 후 재도전 그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첫댓글 정말로 박근혜대통령 당선인 우리 이여려운 경제 잘 극복 시킬거에요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