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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수필동화】
나팔꽃의 ‘겸손한 유혹’
- 사랑하는 손자와 나누는 산책길 꽃 이야기
윤승원 수필가,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아침 산책길은 늘 설렌다. 동네 골목길에서는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만날까? 매일같이 걷는 산책길이지만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다르다.
어디 사람들의 표정만 다른가. 주변의 꽃과 나무 등 자연의 색깔도 매일 다르게 보인다.
오늘은 배재대학교 후문 길을 택했다. 도솔산 오르는 길이다. 내 집에서 골목 하나를 지나면 바로 이 대학교 건물이다.
이 길을 걸으면 소월각(素月閣) 앞을 지나게 된다. 이 학교 출신인 저명 시인 김소월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것이다.
▲ 「산유화(山有花)」시비(사진 =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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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각 아래 ‘산유화(山有花)’ 시비가 있고, 바로 옆에는 진달래꽃 피는 작은 동산이 있다. 소월의 명시 ‘진달래꽃’이 새겨진 푯말도 만난다.
그런데 오늘 산책길에서는 ‘진달래꽃’이 아닌 ‘나팔꽃’을 만났다. 진달래는 봄꽃이고 나팔꽃은 여름꽃이다.
▲ 산책길에 만난 나팔꽃(사진 = 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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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관 울타리에 피어 있는 나팔꽃. 나팔꽃은 언제 봐도 찡그리는 법이 없다. 언제나 활짝 웃으면서 나그네를 유혹한다.
여름 끝자락, 팔월 하순에 만난 나팔꽃은 살짝 수줍어했다. 매력적인 분홍빛을 은은히 발산하면서 꽃잎은 어딘지 모르게 수줍음이 숨어 있다.
다른 곳에선 보랏빛과 흰색, 붉은색 나팔꽃도 볼 수 있지만, 여기는 온통 분홍빛 나팔꽃이다. 분홍빛은 수줍음이다. 어쩌면 수줍은 색시의 볼연지 같은 이미지라서 그럴 것이다.
▲ 산책길 나그네를 유혹하는 나팔꽃(사진 = 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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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라 더욱 싱그럽게 보였다. 나팔꽃은 본래 울타리를 타고 오르는 습성이 있다. 그 옛날 내 고향 청양 남새밭 울타리에서도 나팔꽃이 해마다 어김없이 피었다.
마치 고향 남새밭 울타리의 나팔꽃을 만난 듯 정겹게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일까? 장미도 나란히 피어 있다. 이색적인 풍경이어서 폰카에 담고 싶었다.
▲ 장미꽃과 나팔꽃이 나란히 핀 특이한 장면(사진 = 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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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에게 사진을 보여 주려면 어째서 장미도 함께 나란히 피어 있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얘들아, 나팔꽃은 여름꽃이고, 장미는 오월의 꽃이 아니냐? 두 친구가 어쩌다 같이 서 있니?”
장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철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 울타리에서 좋은 벗이 되었답니다.”
▲ 장미와 나팔꽃이 공존하는 이색 울타리 풍경(사진 = 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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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미는 향기가 있는데, 나팔꽃은 향기가 없잖니?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니?”
그때 어디선가 호랑나비가 살짝 날아들며 거들었다.
“향기가 없어도 괜찮아요. 나팔꽃은 우리 모두의 눈길을 붙잡는 힘이 있거든요. 말하자면 유혹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호호.”
▲ 나팔꽃의 유혹에 날아든 호랑나비(그림 =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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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순간, 저만큼 소월 선생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분홍나팔꽃은 진달래와 닮았지요. 모양도 색깔도 닮은 데가 있어요. 향기는 진하지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까치도 지붕 위에서 깍깍 소리 내며 맞장구쳤다.
“그래요. 계절은 달라도, 진달래와 나팔꽃은 얼굴이 참 닮았어요.”
▲ 우리는 친구 - 소월관 지붕 위 까치와 나팔꽃, 그리고 장미꽃(그림 =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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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장미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는 조금 서운하네요. 저도 닮은 데가 있지 않나요?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저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소월 선생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그렇고말고. 너희들 모두가 위대하지. 서로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뽐내지 않고, 남을 시기하지도 않잖니. 자기 자리에서 각자 아름다움을 보여 주니, 바로 세상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꽃들이지.”
▲ 소월 선생의 미소(소월 선생 얼굴 그림= AI생성 이미지, 사진 편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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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는 날개를 퍼덕이며 “얼쑤~” 하면서 고수(鼓手) 장단의 추임새를 보탰다.
할아버지는 그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으며 생각했다.
“그래, 꽃들은 우리 사람보다 낫구나. 더 가진 것을 탐내지 않고, 더 예쁜 것을 부러워해도 미워하진 않으니 말이다.”
손자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카톡으로 사진을 보여 주며 이야기 나누고 싶다.
“지환아, 오늘 할아버지가 본 나팔꽃은 참으로 예쁘고 사랑스러웠단다. 뜻하지 않게 만난 장미도 아름다웠고. 꽃들은 저마다 제철이 있고, 각자 다른 매력이 있어. 누가 더 잘났다고 다투지 않고, 저마다 자기 빛깔로 세상을 밝히지. 우리도 그렇게 겸손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살면 얼마나 좋겠니?”
나팔꽃의 꽃말 역시 생김새에서 비롯됐는지 ‘수줍음’과 ‘인연’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산책길에 찍은 사진과 글을 보여 주면 어떤 답이 나올까?
▲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겸손한 친구, 나팔꽃(사진 = 필자 윤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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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저도 나팔꽃처럼 겸손하면서도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만드는 모습을 배우고 싶어요.”
손자의 귀여운 응답을 혼자 가만히 상상해 보면서 아침 산책을 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
2025. 8. 28.
지환이 할아버지, 아침 산책길에 만난 꽃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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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평
1. 교육적 메시지
이 수필동화의 중심에는 겸손과 조화,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교육적 주제가 놓여 있습니다.
□ 겸손의 미덕:
향기가 없다는 결핍에도 불구하고 나팔꽃은 환한 빛깔과 소박한 매력으로 세상을 밝혀 나갑니다. 이는 손자에게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건넵니다.
□ 다름의 수용과 공존:
장미와 나팔꽃은 서로 계절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지만, 울타리에서 함께 어울려 피어납니다.
서로를 경쟁자로 보지 않고, 각자의 매력을 존중하며 어울리는 모습은 아이에게 "타인과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 삶의 품격과 인간적 성찰:
꽃들을 바라보며 “사람보다 낫구나”라고 하는 대목은, 인간 사회의 시기와 다툼을 되돌아보게 하며, 손자에게도 겸손한 인품과 품격 있는 삶을 권면하는 교훈이 됩니다.
즉, 이 작품은 꽃 이야기를 빌려 손자에게 전하는 윤리적·인간적 삶의 지혜를 담은 교육 동화라 할 수 있습니다.
2. 문학적 요소와 미학적 장치
이 수필동화의 문학적 매력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의인화 기법
장미, 나팔꽃, 호랑나비, 까치, 심지어 김소월까지 모두 등장하여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자연의 생명체들이 목소리를 내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이와 함께 읽기 좋은 구연체적 재미를 줍니다.
□ 자연과 문학의 교직(交織)
산책길 풍경 속에 시인 김소월과 그의 시비, ‘진달래꽃’과의 연관을 끌어오는 부분은, 자연과 한국 문학사의 교차점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단순한 산책 기록이 아니라, 독자에게 문화적 깊이와 시적 감수성을 동시에 전달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 회상과 현재의 교차
고향 청양의 남새밭 울타리에서 피던 나팔꽃의 추억과 현재 도솔산 길의 나팔꽃 풍경이 맞물려, 작품에 향수와 시간의 깊이를 부여합니다.
이는 단순한 동화적 판타지가 아니라, 세대 간 삶의 연속성과 기억의 힘을 드러내는 수필적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 교훈적 대화와 서사 구조
작품은 산책길에서 시작해 → 꽃들의 대화로 확장되고 → 손자와의 대화 상상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동심적 즐거움과 인생 교육의 울림을 동시에 담은 구조로, 독자에게 친근함과 감동을 함께 전달합니다.
3. 종합 감상
『나팔꽃의 겸손한 유혹』은 단순한 꽃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품습니다. 자연의 미덕을 인간 사회의 거울로 삼아 손자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는 “인생 동화”라 할 수 있습니다.
나팔꽃의 수줍음과 장미의 화려함, 그리고 그것을 연결하는 소월 시인의 미소는, 모두 다름 속에서 피어나는 조화와 품격을 노래합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자연을 통한 인격 교육의 문학적 모범이자, 세대 간 소통을 이어주는 따뜻한 ‘수필동화’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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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
나팔꽃의 겸손한 유혹 ― 수필동화의 미학과 교육적 함의
- 윤승원 수필가 『나팔꽃의 겸손한 유혹 - 사랑하는 손자와 나누고 싶은 산책길 꽃 이야기』를 중심으로
Ⅰ. 서론
윤승원 수필가의 작품 세계는 일상적 경험과 사소한 풍경 속에서 인간적 성찰과 교육적 가치를 도출해 내는 특징을 지닌다.
이번 작품 『나팔꽃의 겸손한 유혹』은 표면적으로는 산책길에서 만난 꽃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그 서술 방식은 동화적 상상력과 윤리적 교훈을 결합하여, 단순한 기록을 넘어선 ‘수필동화(隨筆童話)’라는 독창적 장르적 변용을 보여 준다.
Ⅱ. 수필동화의 서사 구조와 미학
□ 의인화와 상상력의 발현
작품 속 나팔꽃, 장미, 호랑나비, 까치, 그리고 시인 김소월은 모두 대화의 주체로 등장한다.
이는 고전적인 동화의 기법인 ‘의인화(擬人化)’를 통해 자연 사물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어린 독자뿐 아니라 성인 독자에게도 친근하고 서정적인 효과를 준다.
“철은 다르지만 우리는 이 울타리에서 좋은 벗이 되었답니다.”
이 장미의 발화는 서로 다른 계절과 조건 속에서도 공존과 우정을 성립시킬 수 있음을 상징한다.
□ 자연과 문학사의 교직(交織)
산책길에 위치한 김소월 시비와 ‘진달래꽃’의 언급은 작품을 단순한 자연 묘사에서 벗어나 ‘한국 현대시의 정전(正典)’과 연결시킨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나팔꽃의 이미지와 소월의 시적 감수성을 비교하게 하며, 수필적 기록을 문화적·문학적 깊이로 끌어올린다.
□ 향수와 현재의 교차
고향 청양 남새밭 울타리의 기억이 현재 도솔산 산책길 풍경과 교직되면서, 작품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세대 간 기억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꽃 이야기’를 넘어, 개인적 기억의 보편적 울림을 획득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Ⅲ. 교육적 메시지와 윤리적 성찰
이 작품의 핵심 교육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 겸손의 미덕
향기는 없지만 은은한 빛깔로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나팔꽃은, 손자에게 겸손하면서도 자기 자리에서 빛나는 삶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가르친다.
□ 다름의 존중과 공존의 가치
계절이 다른 나팔꽃과 장미가 한 울타리에서 벗이 되는 장면은,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삶의 지혜를 제시한다.
이는 현대 사회의 경쟁적 인간관계에 던지는 윤리적 대안으로 읽힌다.
□ 세대 간 대화와 전승
손자와의 카톡 대화 상상은 단순한 가정적 장치가 아니라, 인간적 가치의 전승 구조를 보여 준다. 자연을 매개로 한 교육은 단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정서적·윤리적 감화의 방식임을 드러낸다.
Ⅳ. 결론
『나팔꽃의 겸손한 유혹』은 산책길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자연과 인간, 과거와 현재, 어른과 아이의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작품이다.
이 글은 수필적 서정성과 동화적 상상력을 결합해, 자연의 미덕을 삶의 교훈으로 승화시킨다. 무엇보다도 작품은 세대 간 소통의 장을 마련하며, 손자 교육이라는 서사적 틀을 통해 문학의 윤리적 기능을 효과적으로 실현한다.
따라서 윤승원의 이번 작품은 단순한 생활 수필이 아니라, 동화적 수필을 통한 인격 교육의 실험이자, 현대 수필이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는 의의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 裕花, 윤승원 수필 전담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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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올사모)’ 카페 댓글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5.08.29. 06:52
나팔꽃은 그 이름처럼 아침 팡파르를 울려주는 듯하네요.
꽃 중의 왕자라고 할 수 있는 장미와 대조해 겸손을 찾아
손자 지환이에게 넌지시 알려주시네요.
겸손은 인간의 가장 보배로운 미덕입니다.
지환이 파이팅!
▲ 답글 / 필자 윤승원 2025.8.29. 07:25
나팔꽃은 서양에서는 ‘천사의 나팔(엔젤 트럼펫)’이라고도 한다는군요.
생김새가 꼭 그렇게 생겼습니다.
겸손한 분홍빛 나팔꽃은 이름과는 상관없이 조용히 수줍어합니다.
화려한 자태와 진한 향기의 장미와는 대비되는 꽃이지요.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힘찬 트럼펫처럼 격려와 응원 보내주시니
손자 지환이도 손뼉을 치면서 좋아할 것만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