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저도안, 사대부 창수록에 시가 실리다.
“노스님을 상봉하니 높은 德行이 마음에 닿네”
월저 도안스님 진영.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양파 주류 계보 계승하며
풍담스님 문하서 20년 수행
화엄학에 통달한 ‘화엄종주’
17세기 편양파(鞭羊派)의 주류 계보를 이으면서,
‘화엄종주’로 일컬어졌던 월저도안(月渚道安, 1638~1715)스님의 행적은
普賢寺 ‘月渚大師碑’와 大興寺 ‘月渚大師塔銘’,
그리고 <月渚堂大師集>에 수록된 글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그는 스승인 풍담(楓潭, 1592~1665)의 문하에서 20년 간 수행하는 가운데
화엄학에 통달함으로써, 경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설법으로 당대 이름을
크게 떨쳤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면, 선과 교에 두루 능통했던
선승이자 학승으로서의 모습과 별개로, <월저당대사집>에는
사회적 지위를 갖춘 儒子와 주고받은 시문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관련해서 香海 蓮宗이 쓴 <월저당대사집>의 발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보인다.
“선사께서는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남들과 주고받은 시문이 자못 많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제자들이 찬록하기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십중팔구는 잃어버리고,
다만 말년의 유고 약간 수를 수습하여 상하편으로 만들어
세상에 간행하였으니, 태산의 티끌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이에 근거할 시 <월저당대사집>에 수록된 次韻詩와 酬答詩는
실제 도안이 평생 쓴 시의 극히 일부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재미있게도 17세기 말 해남에서 말년을 보낸 윤이후(尹爾厚, 1636∼1699)의 <支庵日記>에
월저 도안과의 만남이 짧게 기록되어 있는데, 도안스님이 쓴 시가 함께 남아 있다.
참고로 해당 시는 <월저당대사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아래는 해남 대흥사에서 도암과 윤이후가 만난
내용을 담고 있는 1695년 10월7일자 <지암일기> 기록이다.
“참의 權道一이 어제 白峙에서 묵었는데,
오늘 외숙과 함께 大芚寺에 간다며 나에게 함께 모이자고 했다.
아침을 먹고 興緖를 데리고 절에 올라가니, 외숙과 權赫, 권붕(權朋)이 먼저 와 있었고
권도일 영감, 李大休, 윤척(尹倜)이 뒤따라 도착했다. 저녁으로 軟泡를 차렸다.
妙香山의 승려 道安이 와서 만났다. 그는 명성이 있어 상문(桑門)의 존경을 받은 지 오래되었고
많은 승도를 거느리고 가르쳤으며, 시도 잘 지었다.”
해남 대흥사의 옛 전경.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학문 뛰어나고 문장 갖춰
시를 짓는 데도 매우 능통
윤이후 등 儒者 높이 평가
일반적인 승려와 달리 도안은 학문과 문장을 갖추었으며
당대 불교계에서 명성이 있던 인물이었기에, 윤이후는 그를 상당히 높게 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사람이 모여 있던 현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즉흥적으로 시를 짓고 和韻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먼저 權重經(1658~1728)(도일은 그의 자다)이 절구 한 수를 짓고 화답을 구한다.
香山老衲久聞名(향산로납구문명)
海上相逢尊趁情(해상상봉존진정)
終日說無無不得(종일설무무부득)
不知還自有中行(부지환자유중행)
“묘향산의 노스님 명성을 들은 지 오랜데,
바닷가에서 상봉하니 그 높은 덕행이 마음에 닿네,
종일 無를 說한 것이 옳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것이 도리어 有 가운데의 행위가 아닌지 모르겠네.”
권중경이 지은 시에 도안은 아래와 같이 화운을 한다.
雲泥遠隔仰高名(운니원격앙고명)
邂逅相逢倍有情(해후상봉배유정)
說到仙山山水趣(설도선산산수취)
不知窓外日西行(부지창외일서행)
“아득히 먼 곳에서 높은 명성을 우러르다가,
우연히 서로 만나니 갑절이나 반가워,
신선이 사는 산수의 운치를 이야기하느라,
창밖에 해가 지는 줄도 몰랐네.”
윤이후도 그 운을 따라서 도안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非關儒釋不同名(비관유석부동명)
靜裡唯欣共吐情(정리유흔공토정)
相携說盡玄機妙(상휴설진현기묘)
怳到三千法界行(황도삼천법계행)
“유교와 불교의 이름이 다른 것에 상관없이,
조용한 가운데 함께 마음을 터놓으니 기쁘네,
마주 앉아 天機의 오묘함을 끝까지 이야기하니,
황홀함이 三千法界에 이른 것 같네.”
짧은 만남이지만 시를 주고받는 가운데 이루어진 교감은 서로에게
꽤나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권중경은 당시 갑술환국(1694)으로 인해
별진(別珍, 지금의 해남군 계곡면 성진리)에 유배와 있던
그의 조부 權大運(1612~1699)을 모시기 위해 해남으로 내려와 있던 차에
대흥사를 방문한 것이었다. 권중경과 도안의 만남이 서로에게
어떤 계기가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次權議重經韻’(오언절구)과 ‘次呈權議韻’(칠언절구) 두 수가
<월저당대사집>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일정한 교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간척으로 인해 주변이 육지가 된 현재 죽도 인근의 모습. 출처=네이버 지도 거리뷰
1696년 1월 26일 윤이후는 대흥사를 다시 방문한다.
윤이후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도안은 다음날인 27일 윤이후를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으니, 당시 윤이후는 자신의 별서(別墅)를 마련한
竹島(지금의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 254)를 가지고 干 자 韻의 시를 지었는데,
도안에게 그 시를 보여주면서 화답을 청했고, 도안이 이에 응해 3수의 시를 지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아래는 도안이 윤이후에게 지어 준 차운시 세 수다.
此君之島俯長湍(차군지도부장단)
四面群山大海看(사면군산대해간)
新構已成容膝易(신구이성용슬역)
有何心事苦相干(유하심사고상간)
“此君의 섬은 긴 여울을 굽어보아,
뭇 산이 사방을 두르고 큰 바다가 보이는데,
새집을 완성하여 무릎만 펴도 편하니,
무슨 심사로 굳이 세상일 상관하랴”
幽居睹勝得臨湍(유거도승득림단)
碧海靑山一望看(벽해청산일망간)
時値水風夫月夜(시치수풍부월야)
八窓虛豁興闌干(팔창허활흥란간)
“좋은 경치 누리려 여울 가까이 지은 조용한 집,
푸른 바다 푸른 산 한눈에 들어오네,
때로 달밤에 바닷바람 불어오면,
팔방이 툭 트인 난간에 흥이 도도하도다.”
島壓馮夷萬頃湍(도압풍이만경단)
戱群鷗鷺坐相看(희군구로좌상간)
江湖亦有憂多集(강호역유우다집)
采采汀蘭意用干(채채정란의용간)
“드넓은 강의 水神을 누른 섬에 앉아,
무리 지어 노니는 갈매기와 해오라기를 바라보네,
강호에 있어도 우국충정 가득하여,
물가의 난초 뜯어 군주 뵙기를 구하노라.”
죽도는 대흥사에서 직선 거리로 10km가량 떨어져 있다.
도안이 실제 죽도를 방문했는지 여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죽도 인근에 있던 海倉(지금의 해남군 화산면 해창리)이
당시 제주도로 가는 배들이 정박하던 곳이었기에,
죽도의 존재에 대해 도안이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짐작컨대 윤이후는 당대 명성이 자자한 詩僧으로부터 자신의 별서를
묘사한 시를 얻었다고 무척 기뻐했으리라. 그로부터 약 20일 가량 뒤인
2월 14일 윤이후는 그간 받아 둔 화답시를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내면서 <竹島唱酬錄>이라는 제목을 붙인다. 해당 책이 현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도안스님 시 역시 수록되었으리라.
이후 <지암일기>에 도안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아,
그 구체적인 행적을 알기는 어렵다. 구름같은 승도를 거느리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아갔을 그의 삶의 궤적만을 어렴풋이 떠올려볼 뿐이다.
유인태 전남대 중어중문학과 조교수
2025년 11월 14일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