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 가운데 유일한 국보
통일신라시대 흥덕왕8년 제작 9세기 범종 중 명문자료 유일 용뉴 음통 주위 연화문 '독특' 임진왜란 이전에 약탈 추정도
연지사종(蓮池寺鐘)이 소장된 죠구진자(常宮神社)는 쿄토[京都]에서 동북방으로 2백50km 정도 떨어진 한적한 해안가인 후쿠이현[福井縣] 츠루가시[敦賀市]에 위치한 자그마한 신사이다.
현재 범종은 죠구진자의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위치한 별도의 보호각 안에 소장되어 있다. 1900년 미술공예품 갑종 제1등으로 지정시켰다가 다시 1953년에 일본 신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범종은 우리에게 단 한 점도 남아있지 않은 9세기 범종의 유일한 명문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며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종이기도 하다.
통일신라 후기 종의 경우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2구 1조의 주악상(奏樂像)이 이제 단독의 독립주악상(獨立奏樂像)으로 바뀌어 요고(腰鼓)와 횡적(橫笛)을 각기 나누어 연주한다는 점이다.
그 시기는 분명치 않지만 선림원지종(禪林院址鐘, 803년)과 실상사종(實相寺鐘)이 만들어졌던 9세기 전반에서 그다지 오래지 않은 833년명의 죠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연지사종(蓮池寺鐘)의 짧은 기간 사이에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통일신라 종의 가장 전성기의 작품인 상원사 종이 만들어진 거의 100년이 지난 시점인 연지사종을 기점으로 중요한 양식적 변화를 맞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형을 보게 되면 전형적인 통일신라 종 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세부 의장이나 문양 면에서 몇 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용뉴(龍鈕)는 그 입을 천판(天板) 위에 붙인 채 입안에 표현된 보주로 천판과 연결시켰다. 용두의 모습은 상원사종과 성덕대왕신종에서 보였던 역동감이나 사실성이 결여되어 마치 괴수형으로 변모된 시대적인 차이를 느끼게 해 준다. 용의 가늘고 짧은 목은 직각으로 꺾여 굵은 음통(音筒)과 연결되었다. 이 음통 부분의 상단에 돌출된 연화좌(蓮花座)가 6개 장식되었고, 그 아래로 연곽대(蓮廓帶) 문양과 동일한 형태의 연속문이 얕게 부조되었다.
다시 음통의 중앙부분을 융기동심원으로 양각하여 그 하단부인 음통 후면에는 당좌형(撞座形)의 8엽 연화좌로 장식한 점이 독특하다. 그리고 용뉴와 음통의 주위를 돌아가며 동일한 형태의 팔엽 중판연화문이 표현되었다. 음통 주위로 간략한 장식문양이 배치된 범종은 간혹 보이지만, 이와 같이 용뉴와 음통 주위를 별도의 연화문으로 장식한 점은 매우 독특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상대(上帶)와 하대(下帶)는 동일한 문양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세밀한 파도문 사이에 작은 암산을 배치한 형태이다. 이 문양들을 연주문의 종선으로 방형 구획하였고, 다시 몇 개의 문양판을 잇대어 연속시켰음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 범종에 등장하는 상ㆍ하대 문양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표현이다. 상대에 바로 붙어 네 방향으로는 종신에 비해 비교적 폭이 넓은 연곽(蓮廓)을 배치하였다. 연곽대의 문양은 상ㆍ하대와 또 달리 그 내ㆍ외연 부분을 집사선문으로 장식하고, 내부에는 방형 연주문 구획 안을 다시 X자형으로 사선 구획한 뒤 각각에 화문과 엽문을 촘촘히 시문하였다. 연곽 내에는 잎이 넓은 연화좌 위에 돌기된 연꽃봉우리[蓮蕾]가 표현되었으나 많은 수가 손상 탈락되었다.
이 종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독립된 명문구의 등장이다. 즉 연곽과 연곽 사이에 해당되는 상대 바로 밑에 별도의 방형 명문구를 두어, 10행 118자의 양각명문을 새겼다. 그 내용은 '「태화칠년삼월일청주연지사 종성내절전합입금칠백십삼정 고금서백구십팔정가입금백십정 성전화상 혜문법사 ○○혜법사 상좌 칙충법사 도내법승법사 향촌주 삼장급간 주작대내말 작한사 보청군사 용년군사 사육○ 삼충사지 행도사지 성박사 안해애대사 애인대사 절주통 황룡사 각명화상(太和七年三月日菁州蓮池寺」 鍾成內節傳合入金七百十三廷」古金西百九十八廷加入金百十廷」成典和上 惠門法師 ○○惠法師」上左 則忠法師 都乃法勝法師」鄕村主 三長及干 朱雀大乃末」作韓舍 寶淸軍師 龍年軍師」史六○ 三忠舍知 行道舍知」成博士 安海哀大舍 哀忍大舍」節州統 皇龍寺 覺明和上)'이다.
두 번째 행의 '칠백십삼정(七百十三廷)'부분만 음각명으로 된 점이 흥미롭다. '태화칠년(太和七年)'은 통일신라 흥덕왕(興德王) 8년인 833년에 해당되며 '청주(菁州)'는 경상남도 진주의 옛 이름으로 이후 진주가 '진양도호부(晋陽都護府)'로 개칭된 것은 조선 태조 원년(1392년)의 일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가장 중요한 '연지사(蓮池寺)'의 원 소재는 미상이다. 아마도 이 정도의 범종을 발원한 사찰이라면 진주에 소재하였던 꽤 사세가 컸던 절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명문 중에 보이는 '합입금(合入金)'은 소요된 중량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그 다음에 기록된 '고금(古金)' 과 '가입금(加入金)'의 표현이 주목된다. 아마도 새로운 종을 만들기 위해 이전에 사용되던 청동종이나 청동기물을 다시 녹인 중량을 '고금'으로 표현한 반면, 그 중량을 늘이고자 새로이 추가된 분량을 '가입금'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이 두 중량을 합친 양과 실제 종의 무게가 차이가 났음인지 몰라도 주조된 이후 원래의 양각명을 고치고, 새로이 '칠백십삼정(七百十三廷)'으로 음각한 것이라 해석된다. 말미에 보이는 '황룡사 각명화상(皇龍寺 覺明和上)'은 이 종의 제작을 총괄한 각명화상이 황룡사에 주석했던 점으로 미루어 당시 연지사의 사세를 파악해 볼 수 있는 귀중한 대목이 된다.
한편 종신 중단쯤에는 횡선이 한 줄 돌려져 있는데, 주조 당시 틀을 합칠 때 생긴 주물이 흘러나온 자국으로 생각된다. 그 하단부로는 2개의 당좌와 1구씩의 주악비천상을 번갈아 가며 장식하였다. 당좌의 형태는 약간 도식화되어 그 바깥 모양이 별처럼 뾰족하게 표현된 연판과 8개의 연과, 그리고 그 여백을 집사선문으로 장식한 자방(子房) 주위로 8엽으로 된 중엽복판의 연화문을 원권(圓圈)없이 장식하였다.
당좌와 당좌 사이 종신에는 구름 위에 앉아 천의를 날리며 두 팔을 벌린 채 장구를 치는 모습의 비천상이 배치되었는데, 비록 볼륨감은 많이 상실되었지만 세부의 표현에서 아직까지 생동감을 잃지 않고 있다. 앞ㆍ뒤 동일한 문양판이 사용된 듯 모두 장구를 치는 모습으로서, 상원사종에서 보였던 2구1조의 주악비천상이 이제 완전히 독립된 1구의 주악상으로 정착되었다.
죠구진자 소장 연지사종은 상원사 종에서 통일신라 말 천복사년명종(天復四年銘鐘, 904년)으로 이행되는 범종의 변천 과정의 가교적 역할을 하는 9세기 범종의 가장 확실한 편년자료인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후의 통일신라 범종은 연지사종에서 시작된 앞, 뒷면 1구씩 배치되는 주악상이 기본이 되어 계승을 이루며 2구 1조의 주악상은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 여음(餘音)
이 종이 일본에 전래된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약탈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임진왜란 때 출병했다가 귀국한 오타니[大谷]가 노획품으로 가지고 와서 1593년 2월 29일 이 신사에 봉납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한국 범종 연구의 선구자였던 츠보이 료헤이[坪井良平]는 이 지역이 예로부터 중요한 항구였다는 점에서 그 이전 시기에 왜구들이 약탈해 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거나 일본에 소장된 한국 범종 가운데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돌아오기 힘든 문화유산이 되고 말았다.
[불교신문3289호 / 2017년 5월 2일]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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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_()_
범종은 전부 같은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