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생활생물 연구회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역사 이야기 스크랩 루이 14세(Louis 14)와 프랑스의 절대왕정(絶對王政) (1)
임광자 추천 0 조회 127 08.05.09 08: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루이 14세(Louis 14)와 프랑스의 절대왕정(絶對王政)(1)                     이길상

 

(칼럼 65호 루이 14세 초기의 부르봉왕조, 속편입니다.연계해서 읽어 주세요)

가. 루이 14세의 친정(親政 / Personal government)

 

(1) 제왕(帝王)과 경륜(經綸)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에 귀화하여 추기경과 재상으로서왕실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했던 마자랭이 죽었다.

 

그가 남긴 흔적이 컸던 만큼 사람들의 관심도 누가 그 자리를 잇겠는가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런데 23세의 청년 왕 루이 14세는 그 자리를 자신이 직접 맡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이것이 1661년 3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그곳의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때 영국에서는 새로운 실력자 멍크 장군의 교섭을 받아들이고 브레다선언을 발표한 후 찰스 2세가 즉위, 왕정복고가 이룩 된지 1년 후의 일이다.

 

중세유럽역사가 연대기를 중심으로 편술되었다면, 대개 이 시대의 기록은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회상록(memoires/ 回想錄)이 사료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어의 메무아르(기록·보고)에서 연유하며,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성행했다는 이 개인의 자전적(自傳的) 기록은 은퇴 후 과거의 일을 회상하여 직접 집필하거나 문장력이 뛰어난 사람에게 구술하고 대필한 경우도 있는데, 지금 우리들에게 익숙한 자서전의 원형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회상록은 이 시대에도 루이 14세나 대 귀족 생시몽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남겼는데, 이들의 기록이 자기를 중심으로 편술되었기 때문에 사료의 채택 여부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문학적 측면에서 보면 높은 가치를 지닌 것이 많다고 한다. 처칠이 은퇴 후 집필한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것은 이를 반증하는 사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자랭의 죽음은 모후이면서 섭정자리에 있던 안 도트리슈를 몹시 불안하고 쓸쓸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있었던  안 도트리슈로서는 아직도 혼탁한 프랑스 정정에서  그를 지켜주고, 늙어가는 고독한 여인의 애정상대까지 되어 주었던 마자랭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 했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아들이자 왕위를 계승하고 있었던 루이14세는 23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으나, 모후로서는 그 아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왕이라고는 하지만 이때까지 루이 14세가 한 일이라고는 사냥이나 연애, 댄스 등이 고작 이었기 때문에 아는 것이라고는 그런 것들 뿐, 국정을 운영할 만한 능력이 도무지 없는 철부지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신회의를 소집한 루이 14세는 이런 말을 했다. "......추기경을 잃은 지금, 만사(萬事)는 짐(朕)이 맡아서 처리하겠다....."이 말을 듣는 순간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 졌다. 짐(朕)이 맡아서 모든 것을 처리하겠다? 아무 것도 모르는 그가 어떻게 모든 것을 맡아서 처리한단 말인가?  재상의 자리가 댄스 사교 장인가, 말이 될 법한 소리를 해야지....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생각은 대략 이런 것 들이었다. 나이 23살에 아무 것도 모른다. 이것 역시 우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소리다.

 

남자가 태어나서 10년이면 유(幼)라 하여 배우기 시작하고, 20세는 약(弱)이라 하여 관(冠)을 쓰며, 30세는 장(壯)이라 하여 가정을 꾸리고, 40은 강(强)이라 하여 벼슬 길에 나서고, 50은 애(艾)라 하여 정치를 맡고, 60을 기(耆)라 하여 남을 지시하고 부릴 줄 알며, 70을 노(老)라 하여 모든 것을 후진에게 전한다(禮記 曲禮編)고 하는데.....

 

이런 말은 연륜(年輪)에 따라 변모해 가는 시중의 일반인들에게 통용되는 현상이라 볼 수 있고, 대상이 군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군주의 나이가 어리면 왕권을 다른 사람이 대행하는 것을 섭정(攝政)이라하고, 섭정이 누구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대개는 권력의 누수(漏水) 현상으로 군주인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어렵게 만든다.

 

전한(前漢) 말 외척 왕망은 평제가 후사 없이 죽자, 황제가 될 수 있는 많은 후보자들 가운데 겨우 2살 된 유영을 점복의 결과라는 핑계를 내세워 황제 자리에 앉히고, 천명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부명(符命)을 조작하여 드디어는 자신이 제위에 올라 나라를 신(新)이라 했고(AD 8),

 

영화 "마지막 황제"로 널리 소개된 청조의 푸이(溥儀)는 세 살에 황제가 되었으나 4년 만에 신해 혁명으로 제위에서 밀려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근 3백 여 년 간 지탱 했던 세계적인 강국, 청조(淸朝) 자체가 무너지고 말았다(1912)

 

단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를 둘러싼 김종서,황보인 등 고명(顧命)신하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숙부 수양대군과의 알력으로 왕위는고사하고 천수(天壽)조차 지키기 힘겨워 열 일곱 나이에 비명횡사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성종은 13살에 왕이 되었으나, 인수대비로 더 알려진 그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의 뒤 받침이 있어서 무사히 섭정기간을 넘기고 스무 살에 친정을 할 수 있었지만, 드센 어머니의 입김은 사랑하는 왕비를 사사(賜死)케 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불행의 불씨는 그의 아들 연산군 때 사화로 이어져 무고한 선비들의 생목숨을 수 없이 앗아갔다.

 

순조는 11살에, 헌종은 8살에, 강화도령 철종은 20살에 왕이 되었으나, 세도정치로 문란한 정치기강을 바로잡지 못해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고, 고종은 12살에 왕이 되고, 생부(生父)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실권을 쥐고 적폐를 개혁하는 과단성을 보이기도 했으나, 며느리인 민비와의 갈등을 풀지 못하여 조선왕조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이런 사례는 서양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영국튜더왕조의 에드워드 6세는 10살에 왕이 되었다가 16살에 요절 함으로서 신구교도 간의 갈등을 더욱 부채질 하였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국왕 제임스 5세가 죽자, 그의 딸 메리가 생후 1주일만에 왕위를 이었고(1542) 그녀 나이 여섯 살 때 프랑스 황태자와 약혼, 16살에 결혼 하였으나, 1년만에 사별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신교들과의 마찰로 영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아들 제임스 6세는 겨우 한 살에 스코틀랜드 왕이 되었고, 다시 영국 왕이 되는 행운을 얻어 제임스 1세로서 런던에서 화려한 대관식을 올렸으나(1603), 그는 암살 당하였고, 그 아들 찰스 1세는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 당했다(1649)....

 

어디 그 뿐인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루이 14세의 아버지 루이 13세는 열 살에 왕위에 올랐고, 피렌체 메디치가 출신 모후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으로 있으면서 일어난 각가지 사연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모자 간에 권력 투쟁은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가관이 었다.

 

나이 어려서 왕위에 오르게 되면, 왕도(王道) 수업을 받을 기회를 잃게 되고, 다른 권력이 기생하게 된다. 그 영향은 섭정기간을 넘겨 친정이 시작되어도 그것이 흠으로 남을 수 있다. 수업을 받지 않았다면, 일반인들은 문맹에서 그치고 말지만, 권력,그것도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가 그렇다면 문제는 아주 심각해 질 수 있다. 그렇다면 23살에 친정을 시작한 루이 14세는 암군(暗君)인가? 그에게는 각가지 수식관사가 따라 다닌다. 짐은 국가다...태양왕...신인가? 태양인가?...파리, 그리고 베사유.....절대왕정 시대의 대표적인 전제군주...등

 

(2) 루이 14세의 친정(親政 / Personal government)체제 구축

 

아스라이 개선문이 보이는 샹 젤리제 거리루이 14세 역시 다섯 살에 왕이 되어 프롱드의 난 등으로 어려운 고비를 수 없이 넘겼지만,

 

마자랭이라는 튼튼한 울타리가 그를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서 제왕학(帝王學)을 틈틈이 익힐 수 있었다.

 

열 다섯 살 때부터 마자랭은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이 국왕을 국무회의(고문관 회의)에도 임석 시키고, 기회 있을 때 마다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마자랭이 죽자 루이 14세는 모후 안 도트리슈 못지 않게 애도의 눈물을 흘렸으며 그 은혜도 잊지 않았다고 하는데,....이는 다만 인간적인 겉치레 일뿐 실상은 마자랭의 그늘에 묻혀 빛을 보지 못했던 루이 14세로서는 국왕으로서 이상과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는 점에서 내심으로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루이 14세는 어린 나이에 부왕 루이 13세와는 사별했기 때문에, 부왕보다는 스페인 출신의 모후 안 도트리슈의 영향을 많이 받고 성장하였다. 이런 성장 과정이 혼자 만의 비밀 취미를 비롯해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습성, 호화롭고 장려한 것을 선호하는 사치,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근행과 엄격한 자기 통제 등 스페인적인 요소를 그는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이나 신체적인 특징은 부왕 보다는조부 앙리 4세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체구가 건장하고, 활력 또한 대단하였으며,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강한 집념, 모든 서류는 꼼꼼히 들여다 보고, 결론은 자신이 내리며, 하루 16시간 내지 18시간을 활동하고도 지칠 줄 몰랐다.

 

그리고 그는 누구도 믿지를 못했다. 프롱드의 난으로 수 없이 방랑 길에 오르기도 했고, 고모부가 되는 영국 왕 찰스 1세의 처형 소식도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추기경이든 귀족이든, 가까운 친척이든 여차하면 등을 돌린다는 것을 경험으로 터득했고,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은 국왕 자신이 챙겨야 되고, 명성과 재산, 권력을 비롯한 어떤 것도 자기보다 앞서는 것은 그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

 

이런 그의 면모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세상 사람들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친정 초기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마자랭을 대신 할만한 재상을 기용할 것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 한데로 자기가 직접 모든 것을 챙기겠다고 선언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루이 14세는 국왕의 승인없이 어떤 법률도 대신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국왕이란 칭호만 가지고 일은 남에게 맡기는 게으른 국왕, 혹은 허수아비 왕은 되지 않겠다는 호언장담 하였다. 하지만 그 말을 당시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고 이 말을 전해 들은 모후 조차도 코웃음을 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그의 선언은 하나 둘 현실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개혁에 착수한 것은 다수의 귀족 관리나 귀족들로 구성된 중신회의를 폐지하고, 세 사람의 부루주아지(Bourgeoisie)출신으로 최고 결정 기관(conceil erotit?)을 만들어 논의케 하였는데, 최종 결정은 국왕이 내리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국왕의 서명이 없으면 이행되자 못하도록 하였다.

 

이래서 모후 안 도트리슈를 비롯한 귀족들을 정치에서 배제(排除) 시켰는데. 껄끄러운 귀족들 보다는 수족처럼 움직일 수 있는 부루주아지들과 정책을 논하고 집행하는 것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이 세 사람의 최고 결정 기관, 즉 최고 국무 회의는 그의 치세 기간 변동 없이 3인조로 유지되었다.

 

영국의 찰스 2세가 댄비경의 실각 후 다섯 사람을 기용, 정부의 분업화를 시도하면서, 그들의 이름 두문자를 따 커밸이라 불렀고 이것이 영국 내각제의 출발이라면 세 사람으로 구성된 최고 국무회의는 프랑스 판 내각의 출발이라고 볼 수 있고, 이 세 사람의 멤버를 대신이라 불렀다.

 

루이 14세 치세 기간 중, 이 3인조 멤버가 되어 대신이라고 불린 사람은 모두 16명, 그 중 2명만 귀족이었고 나머지는 부루주아지 출신들이었다. 이를 두고 대귀족 생 시몽은 "비천한 부루주아지 계급의 통치(long regne devile bourgeoisic)"....라고 폄하(貶下) 했지만 날이 갈수록 국왕의 눈에 들기 위해서 귀족들이 행한 일련의 행위는 추태라고도 할말 큼 치졸해 지기 시작했다.

 

율령격식, 3성 6부와 같은 동아시아적인 관료제가 발달되지 못했던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세 사람의 대신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역할 또한 분명하지를 못하였고, 하는 일도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부루주아지 출신으로 마자랭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푸케와 푸케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콜베르의 경우를 잠시 살펴보자.

 

파리의 신흥 공업지구 데팡스푸케(Fouquet, Nicolas/ 1615 ~ 1680)는 법복귀족으로 출발, 이런 저런 사연으로 마자랭을 알게 되었고,

 

1653년  마자랭 정부의 재무경이 되어 왕국의 재정을 담당하고부터 궁정의 경비를 자가자산(自家資産)으로 꾸리기도 하였으나 프롱드의난을 잘 이용, 왕실재정에 기생하여 부정축재로 갑자기 거부가 되었다.

 

이렇게 거부가 되자, 그의 세습영지 보의(Vaux le-Vicomte)에는 어느 제왕의 궁전에 못지 않는 호화 장대한 성관(城館)을 세우고,

 

1만 3000권의 문헌을 가진 도서관과, 수 많은 미녀(美女)들과, 당대 일류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해 놓았고, 그 곳의 살롱에는 많은 예술가나 문인들을 무상 출입케 하였다. 결국 푸케는 이들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 출입자들 중에는 푸생, 르 노트르,  르 브랑, 몰리에르 등 우리들에게까지 낯익은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야심 만만한 콜베르는 어떻게든 이 푸케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 하기 위해서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런 험악한 판에 푸케는그의 성관에서 꿈의 나라 같은 대축제를 열고 국왕을 초대했다.

 

초대를 받고 성관을 둘러본 루이 14세는 자신의 궁전보다 화려하고 장대한 모습에, 찬사는 커녕 굴욕과 불안을 동시에 느꼈으며, 왕의 이런 의중을 간파한 콜베르는 국왕을 움직였고, 1661년 9월 푸케는 체포되었다. 죄목은 공금횡령죄....루이 14세로서는 자기보다 앞선 푸케의 명성과 재력이 싫었고, 여기에 자극 받아 베사유에 자신의 초호화 궁전을 지을 것을 명령했다.

 

주도 면밀한 콜베르의 계획은 여기서 거치지 않고, 푸케의 저택을 수색, 반역 쿠데타의 음모를 찾는데 성공했다. 콜베르의 보고를 받고 격노한 루이 14세는 여론과는 아랑 곳 없이 반역죄라는 꼬리표를 하나 더 달아 그를 종신 금고형에 처했다(1664) 그래서 그는 밝은 햇볕을 보지 못하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1680)

 

푸케의 실각으로 재무장관의 직책은 폐지되었으나, 재정에 관한 일을 콜베르(Colbert, Jean-Baptiste / 1619 ~ 1683)가 맡게 되었고,1665년부터는 그를 공식적으로 재무총감으로 불렀다.

 

이후 그의 출세 가도는 탄탄대로를 만난 듯, 거침없이 뻗어나가 이 후 재무 뿐만 아니라 상공업, 농업, 토목, 식민지, 해군의 업무까지 담당하여 실질적인 재상의 역할까지 수행, 중상주의에 바탕을 둔 콜베르티슴(Colbertisme)이라는 말까지 생겨 났다..... 다음호에 계속..............

다음 이야기 - 콜베르의 정책들, 낭트 칙령의 폐지,파리의 경찰 총감제 설치와 지방에서의 앵탱당의 권력 확대, 네 차례의 국제전쟁,베사유 궁전의 건축과 루이 14세의 애정 편력 등.....

 

 

 

세계는 지금.....Mon. 9. Oct. 2001

남부 프랑스에서는 환경단체(그린피이스) 들이 도로를 막고
환경 파괴에 대한 항의 데모가 한창이고.......

 

카리브해 연안 도미니카 공화국에는거친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

미국과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대한 보복 공격은 드디어 시작되었고...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가는 미국 미사일은 그 목표가 어디쯤일까?.....

 

같은 이슬람국가 파키스탄에서는,
테러도,아프가니스탄 침공도 반대하는..
격렬한 반미 데모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