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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군단으로 말하는 고대사’ 글 집을 펼치며
4년 전 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글을 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2012년도 근무처의 양성자가속기 사업 참여로 경주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방을 얻은 곳이 하필이면 첨성대가 빤히 보이는 동네였다. 퇴근하고 할 일이 없으면 고즈넉한 대릉원 주변을 걷곤 했는데 무료하다싶어 들여다본 것이 신라 역사였고 그래서 거듬거듬하다보니 책 한 권이 꾸며졌다. 그런데 ‘신라 천년의 자취소리’ 라는 그 책은 내게 행운을 안겨주었다.
뜻하지 않게 세종도서로 선정이 되는 바람에 출판사가 덤으로 책을 공짜로 하나 더 내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고구려로 입문했다. 그리고 펴 낸 책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 라는 책이다. 이 책은 내게는 아주 큰 축복이었다. 물론 초판이 다 팔려서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우리의 고대역사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애착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고 그로 알파고 인공지능처럼 많은 발전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젊은 시절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6년도던가, 지금은 고인이 된 최인호 작가가 카메라 들쳐 메고 고구려 옛 성터를 누비며 찍은 다큐 물을 TV에서 우연히 볼 때부터였다. 최인호가 쓴 ‘왕도의 비밀’이란 소설은 단순히 소설로서가 아닌 우리의 고대 역사를 제대로 직시한 사학적 근거로서도 충분했다. 나는 그 다큐 물을 어렵게 다시 구하여 내 글의 지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내 글의 시작을 그가 쓴 소설을 재추적하는 형식으로도 꾸며 나갔다.
그가 찾던 井문양, 나 역시도 그 문양을 쫓고 그를 쫓았다. 그 글 집을 덮었지만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갖고 그들에게 묻고 있다. 역사는 물음이다. 왜 일까. 침잠한 과거는 ‘왜’ 라는 의문의 갈증으로 아스라한 형체를 서서히 드러내고 알른거리듯 어느 부참을 살포시 펼쳐 보인다. 부참(符讖):뒷날에 생길 일을 미리 적어 감추어 둔 글)을 올바로 읽고 찾아보자는 게 바로 역사다.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우리나라. 켜켜이 감추어둔 그 질기고 긴 부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알 수 없는데 알 것 같고 또 알 것 같기도 한데 여전히 모른다고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고대역사다, 조선의 선비들은 우리 고대역사를 어찌 바라보았을까. 나의 의문은 또 시작됐다. 사기나 유사는 늘 대한 것이고 그들의 일상 속에서는 어찌 꿈틀대었던 것일까.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요동 땅에서 거침없이 토해내는 그의 역사관은 누구보다 확고부동했다. 매료된 나머지 나는 더 주체를 할 수 없었다. 열하일기는 문학 장르상 당연 수필이라 할 것이고 그 수필이라는 말을 그가 일신수필이라 하여 또 맨 처음 쓴 분인데 정작 수필가들이 그에 대한 글 집을 보고 느끼며 쫓는 수필형식의 글 집으로는 여태 만든 적은 없었다.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조선의 꽃 열하일기’ 라는 글 집을 만들었다. 그런데 역사는 파악하면 할수록 의문이 꼬리를 문다. 청나라 때 열하일기가 그렇게 말하였다면 명나라 때 일상 속에 배어난 글에서는 과연 또 어떠했을까.
그래서 탐독한 것이 1488년을 배경으로 한 조선선비 최부의 표해록이다. 그 역시 요동 땅을 경유해서 한양으로 들어왔다. 요동에서 그는 무엇을 느끼고 무슨 말을 했을까. 당연 우리 땅 인양 하는 것이 그 역시 연암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밖에도 많은 의식으로서 최부 선생은 투철한 조선인이었다. 발간을 대기 중인 그 책을 곁에 두고 마음을 굳혔다. 이것은 거반 확신이었다.
혹여 여러분들은 매소성 전투를 기억하시는지. 신라는 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루고,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 중·남부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무려 군마 3만 380마리와 3만 여명 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믿기지 않는 엄연한 사실이 우리에게 있다. 고구려가 지금의 북경 근역까지 영역을 넓혔다는 것 또한 분명한데 아쉽게도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있지 않다.
‘당시 고구려는 세계최강 기마군단이었다. ’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작정한 ‘기마군단으로 말하는 고대사’ 이야기다. 알다시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구려나 신라에 대해서는 세계 역사서에 한 줄도 나와 있지 않다. 분명 정복과 승리의 전투가 우리에게 있으며 이는 바로 힘으로서 나타난 증표이건만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부터 제대로 알자. 이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기마군단으로서 설명이 가능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 고인돌 문화, 빗살무늬 토기, 비파형동검, 황금 문화 금관, 등등 황하문명으로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많은 유물과 흔적을 논리에 근거하여 제대로 논해보고 싶었다. 흡사 중국 땅을 붕 날라서 지붕을 타고 택배 배달을 온 것 같은 우리의 고대역사. 그 의문의 실마리에 동참하고 싶었다. 고구려가 그렇게 말을 잘 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고구려 책을 낼 때 일부러 무용총의 수렵도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보루로서도 그렇고 보다 광범위하게 확증을 갖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수렵은 먹거리를 얻기 위한 단순한 생산 활동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지닌 행위였다. 정기적으로 열렸던 고구려의 ‘樂浪會獵’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듯 수렵대회는 군사훈련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행위이기도 했다. 수렵 터의 상황에 대한 사전조사, 몰이꾼과 사냥개를 이용한 짐승몰이, 창을 쓰는 도보수렵, 활에 의존하는 기마수렵, 매를 이용한 매수렵 등이 한꺼번에 이뤄질 때의 수렵은 적진탐색과 정보수집, 전략·전술의 토의 및 수립, 수색, 기마전과 도보백병전의 효과적 배합과 전개, 전략적 전진과 후퇴, 매복, 역공, 다양한 기구를 이용한 攻城 등으로 이뤄지게 마련인 군사작전과 내용상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바로 유흥을 즐기는 단순한 수렵도가 아닌 것이다. 거기에 말에 얽힌 비밀까지 제대로 안다면 다시는 우리 기갑군단 고구려나 매소성의 신라에 대하여 의문을 갖거나 과소평가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본고는 기병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고대 이후에도 기병은 늘 존재하였지만 고대역사로 한정을 지었다. 세계를 아우르는 방대한 터전이기에 근무처 동료들이 할당하여 글을 썼다. 김민진 박사가 메소포타미아를 박근배 박사가 로마를 맡았고 안기정 부장이 몽고를 맡았다. 나는 전체를 조정하고 우리나라와 동양 쪽을 맡았다. 도와준 그 분들께 본 글을 빌어서 감사의 마음 전한다. 아무튼 부족한 글이다. 그 밖에도 맥락이 끊길 것 같아 참고한 분들의 명함을 일일이 새기지 않았는데 끝내 마음에 걸린다. 역사는 캐면 캘수록 금이 쏟아진다. 노다지 광산이 가는 곳곳 즐비한 것이다. 그 길잡이를 해준 학자님들 정말 감사하다.
글구멍을 채웠지만 지금도 나는 궁금하고 알고 싶다. 고대 역사에 대한 여러분의 상상은 무조건 자유다. 거기서부터 추적은 시작되는 것이다. 계획 이전 상상이고 꿈이다. 차도 없던 시절 정말로 인류의 족적은 넓고도 광활하였다. 마치 개미가 부지런히 뭔가를 나르듯 본능과도 같이. 그들에게는 말이 있었다. 인류는 하얀 비단 길을 따라 때로는 추운 초원의 길을 따라 오래전부터 분주히 오갔다. 나 역시 그 길을 따라 늘 꿈같은 여행을 하고 싶다. 우리 꿈속의 길은 어디든 희망으로 하얗게 존재하며 열려 있다. 지두우를 지나 몽골을 지나 저 멀리 서역까지. 아니 지구상 끝까지. 그들이 그렇게 태양 빛나는 동으로 동으로 태양 닮은 황금을 찾기라도 할 양으로 전진하여 우리를 찾아왔듯이 새로움을 찾아 상상의 세계로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머리 글
1. 기마군단으로 말하는 고대사 1
2. 우르의 자개상자
3. 메소포타미아의 흥망은
4. 전차의 위용과 유럽어족의 출현(히타이트, 미탄니, 카시트)
5. ‘마리안누’라는 귀족 신분과 kikkuli 교본
6. 이집트 파라오 그리고 투랑카멘
7. 투탕카멘의 신비로움
8. 투탕카멘 전차로 본 이집트 전차
9. 인류의 전쟁, 그 시발
10. 카데시 전투는
11. 고대 문자 그리고 문명 전쟁
12. 지구상 기병의 첫 출현 , 앗시리아
13. 히타이트 멸망
14. 기병대의 출현(페르시아)
15. 페르시아의 Akhal-Teke 말과 니사에안 군마
16. 페르시아의 기마 (고삐와 재갈)
17. 키로스 대왕과 크세노폰
18.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살라미스 해전)
19. 그리스의 원조 에게문명에 대하여
20.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플라타이아 전투)
21. 스파르타 그리고 영화 300 제국의 부활
22. 그리스 내전 그리고 마케도니아 기병
23. 마케도니아 기병대
24. 알렉산더 대왕 1
25. 알렉산더 대왕 2
26. 바람의 나라 스키타이 1
27. 바람의 나라 스키타이 2
28. 바람의 나라 스키타이 3
29. 흉노와 한나라 1
30. 흉노와 한나라 2
31. 흉노와 한나라 3
32. 흉노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33. 말을 사랑한 한무제
34. 문무왕이 흉노족이라는
35. 우리나라 역사 재발견
36. 빗살무늬 토기로 본 우리 고대사
37. 나는 난하를 주목한다
38. 한반도 역사는 부여인으로 부터가 아닐까.
39. 나폴레옹의 기병과 로마 기병.
40. 로마의 기병 1
41. 로마의 기병 2
42. 로마의 기병 3
43. 로마 보조군(auxilia)에 대하여
44.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
45. 로마의 적들은 1 세고비아
46. 로마의 적들은 2
47. 전투에서의 로마 기병 1
48. 전투에서의 로마 기병 1
49. 전투에서의 로마 기병 1
50. 전투에서의 로마 기병 1
51. 그 무렵 로마 동편 고구려에서는 1
52. 그 무렵 로마 동편 고구려에서는 2
53. 그 무렵 로마 동편 고구려에서는 3
54. 고구려 군사는 세계 최강이었다. 1
55. 고구려 군사는 세계 최강이었다. 2
56. 고구려는 싸워야 산다.
57. 초원의 전사들 1
58. 초원 전사의 말
59. 초원의 전사들 2
60. 초원의 전사들 3
61. 몽골인
62. 디지털을 닮은 몽고군
63. 징기스칸
EPILOGUE
읽어 본대로 본고는 기병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고대 이후에도 기병은 늘 존재하였지만 고대역사로 한정을 지었다. 이를테면 중세의 폼 나는 기사는 왜 안넣느냐는 것인데 그에 대한 나의 변은 장황하지만 대충 이러하다. 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양은 중세로 넘어가게 된다. 지중해 문명권의 전투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초원지대 동쪽과 흑해의 동남쪽 전사들은 그들의 적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초원지대 서쪽과 흑해 남서쪽 전사들은 근접무기가 닿는 곳까지 접근하여 육박전을 전개했다. 게르만 전사들은 후자에 속했다. 그들은 장거리 무기 ,대표적인 것으로 활과 화살을 비겁한 것으로 치부하고, 그러한 것을 사용하는 것은 전장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자면, 중세 초기에 개발된 석궁(Crossbow)은 너무 잔인한 무기라는 이유로 ‘크리스트 교인에게 사용을 금지’되었다. 사실 석궁은 훈련받지 않은 사람도 쉽게 기사를 쓰러트릴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고, 이것은 기사가 가지고 있는 전쟁의 법칙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 이러한 조약은 파기되었지만, 갑옷의 발달로 인하여 장궁(LongBow)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장거리 무기들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기사는 이러한 두 전통 , 그리스/로마의 기병에 대한 우대와 게르만의 전사의식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AD 7세기 경만 하더라도 유럽의 대부분 군대는 보병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특히, 733년 포이티에에서 사라센 군대를 격퇴한 샤를마뉴 대제의 프랑크 군대는 거의 완전히 중장보병을 근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이티에 전투로부터 얼마 후에 프랑크 족은 대량의 기병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샤를마뉴는 774년에 롬바르디를 점령하고 대량의 롬바르드 족을 군대로 징집함으로서 8세기에 이르러 정예 장갑기병이 사회적/군사적 양측의 의미에서 창출되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기사’가 최초로 탄생했다.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은 자들은 샤를마뉴 궁정의 기사들이었다. 이들은 궁전(Palatium)에서 기거하고 생활했다하여 팰러딘(Paladin)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라틴어로 에쿠에스(Eques;복수형은 에퀴테스Equites)작위를 받았다. 이 에쿠에스 작위야말로, 로마에서 기병을 가리키던 말이었다. 팰러딘은 프랑크 왕국에서 황제를 섬겼던 잘 무장된 기마병이었다. 이 때까지는 기사들은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봉사하는, 게르만 전사적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샤를마뉴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황제의 중앙집권은 미약해지고, 제국의 외곽 요새 방어는 점점 더 제국의 제후들과 제후들의 요새, 그리고 그들의 말탄 가신(기사)들의 손에 맡겨졌다. 바로 이 시기에 귀족 제도, 그리고 봉건 제도가 생겨났다. 이 시기에 토지는 왕의 동료들에게 소유권과 함께 증여되었다. 이렇게 토지를 받은 왕의 동료들이 후대에 귀족이 되었다. 사회적 지도자를 의미하던 말인 duces(단수형은 dux)는 공작(Duke)이란 말의 어원이 되었고, 왕의 동료 혹은 고문(顧問)을 가리키던 comites(단수는 comes)는 백작(Count)이 되었다. 국경지대(marches)를 방어하던 귀족들은 후작(margrave, marquis)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귀족들 휘하에 있던 가신들, 즉 기사들은 분규 혹은 전쟁에서 그들의 주군을 지지하는 대가로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 토지는 사망과 같이 봉사기간이 종료되면 다시 본래의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이것이 바로 장원제도의 시작이다. 최초의 기사도 이야기(Romance)는 바로 이러한 가신들의 삶을 둘러싸고 짜여졌다. 샤를마뉴의 신뢰받는 팰러딘인 ‘롤랑’을 다룬 ‘롤랑의 노래’나 혹은 더 옛 이야기이지만 많은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아더 왕과 그의 기사들’은 아마도 비슷한 기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10세기가 되면 중세 기사의 주요 특성들이 나타났다. 기사는 지위와 권위를 가진 기마 전사였고, 타인과 비교되는 그들 계층의 위치와 관계는 명확해졌다. 기사들이 그보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행해야 하는 의무와 복종은 장원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마찬가지로 그보다 낮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는 기사에 의하여 의무와 복종이 부과되었다. 기사는 그의 출생 신분과는 상관없이 그의 무력과 용맹에 의하여 귀족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모든 귀족들이 그들의 지위와는 상관없이 기사였다는 점 때문에, 기사 개개인의 출신 신분과는 관계없이 기사라는 계층이 가지는 사회적 위신은 대단히 높았다. 기사가 행동할 때 따라야 하는 제약은 형식화 되어 기사도의 계율이 되었다. 기사도는 기사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그들과 필적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를 담고 있었지만, 약자에 대한 자비와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이라는 종교적인 규정을 제외하고는 그보다 낮은 계급에까지 강요되지는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기사는 그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서 ‘기사도’에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말도 된다. 예의바르고 충성스러운 전사, 혹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도둑 떼라는 상반된 평가는 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초에 기사작위는 다른 기사에 의해 부여될 수 있었지만, 점차 이것은 군주만의 특권이 되었고 점점 종교적인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기사 없이는 지배자는 그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없었다. 기사의 지위, 신분, 부는 그의 영지의 크기에 달려 있었다. 서유럽 왕국 안에서 땅이 점점 드물어지자, 기사가 부와 지위를 더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에 의해서 혹은 용병이나 프리랜스로 고용되는 것 뿐이었다. - 노르망디공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군대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용병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가신들에게 영지에 대해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12세기에 이르러, 기사라는 지위와 기사도는 고귀한 태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말은 평민이 기사가 될 수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평민들은 자신의 무용을 전쟁이나 마상시합에서 증명함으로서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서전트(sergeant)라고 불리웠으며, 하급기사로서 전장에서 싸웠다. 이들 중 특별히 공을 세운 이들은 더 높은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13세기에 이르러, 기사도는 하나의 삶의 양식이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AD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게르만 전사들의 윤리의식인 전쟁에서의 용맹, 명예에 대한 숭배, 주인에 대한 충성 등에 후대에 로마가 멸망하던 시기에 크리스트 교가 전파되면서 이러한 교리의 일부를 접목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13세기에 와서 완전한 틀을 가지게 된 것이다. 기사도의 근간은 경건함, 정직함, 사심없음, 공정함, 명예로움, 용감함, 순종스러움, 동정심 많음, 자비로움, 고결함, 그리고 여성에 대해 친절함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기사들은 복잡한 규칙 속에 살았으며, 같은 종교에 기반하는 국제적 ‘형제애’를 따랐다. 같은 종교를 믿는 ‘형제Brother'라는 인식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가치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 역시 그러한 명분으로 뭉쳤고, 그 이후에도 ’이교도‘에 맞서야 할 때마다 사회의 지배계층은 ’형제애‘를 부르짖었다. 물론, 이러한 기사도는 모든 기사들에 의하여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높은 계층에 있어서 기사도는 민중들에게 크리스트 교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 만큼이나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나, 지위가 낮은 기사일수록 기사도라는 하나의 이상보다는 직접적인 실리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아쉽게도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당연하게도, 실리를 추구하려는 기사들이 훨씬 많았다. 일반적으로 중세의 사고는 종교적 개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찬가지로 보다 제한된 영역, 즉 궁정과 귀족 계급 내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사고 속에 기사도적 이상이 가득 배어 있었다. 귀족 계급에 기초한 이 드높은 열망은 어떤 일정한 정치사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여러 왕들의 연합에 기초한 만국 평화의 수립과 예루살렘 정복 및 터키 족 축출을 위한 싸움 같은 그들이 바라는 이상의 구현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기사도에 기초한 사회라는 이 같은 환상은 기묘하게도 현실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다. 14세기~15세기의 연대기 작가들은 대부분 기사도적 덕행과 명예로운 투사의 행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글을 집필하려고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배신행위와 잔혹 행위, 권력의 탐욕스러운 남용뿐이었다. 삶의 이상(理想)으로서의 기사도의 개념은 매우 특별하다. 본질상 그것은 환상과 영웅적 감동에서 나온 것으로, 윤리적 부분에 대한 하나의 미학적인 이상이었다. 중세적 사고는 기사도의 개념을 종교와 미덕에 결부시키면서, 기사도적 개념에 귀족적 위치를 부여했다. 사람들이 이상적인 기사에게 부여한 감정은 경건과 엄격함과 충실함의 감정이었지만, 난폭함과 탐욕은 기사계급에게는 너무나 흔한 것이었다. 결국 기사도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 규정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란다는 이상이었고, 어떤 귀족들은 그 자신의 명예에 대한 갈망으로 철저하게 시행한 반면, 또 다른 어떤 귀족은 편리할 때만 기사도를 찾기도 했던 것이다. 기사도의 이면에는 위험 한 가운데서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나 동료의 용기에 감동을 느끼는 것, 충성심과 희생정신과 같은 원시적인 금욕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기사도는 수 세기동안 하나의 이상적인 사상이었으며, 또한 기사라는 존재가 가지는 난폭함과 탐욕을 가리고 있는 가면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시대의 전쟁은 한마디로 성과 기사로 요약할 수 있다. 동로마제국은 강력한 요새와 중갑기병단으로 게르만족과 이슬람세력을 격퇴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하여 서유럽에서도 기사와 성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닫아걸고 수성을 하겠다는 소극적인 대응, 그 시기에 중갑 기사의 주무기는 기다란 랜스다. 중장갑에다가 이 커다란 창을 제대로 쓸려면 오랫동안 전사로서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몽고군과 투르크에게 여지없이 붕괴되고 만다. 몽고군은 처절한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적이 돌격해오면 화살을 쏘면서 도망치다가 적의 진영이 흐트러지면 다시 공격하는 행위를 반복하여 적을 무너뜨렸다. 우리도 마찬가지지만 몽고군의 이러한 공격양식은 몽고특유의 유목 문화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유럽국가에서는 이러한 전술을 흉내 낼 수는 없다.
이후 중세를 무너트린 것은 투르크다. 투르크는 기마민족이었다. 그들은 몽고군에게 한번 무너지고 다시 재기한다. 그리고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해 강력한 보병대를 만든다. 예니체리는 투르크술탄의 직속부대. 강인하고 열성적인 광신자들인 이 노예군단은 기마민족의 국가였던 투르크를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대포와 총기류의 화약무기의 발달로 인해서 예니체리들의 공격력은 더욱 강해진다. 유럽의 왕국들은 이것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자신들 또한 강력한 화승총부대를 만들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기마군단으로서 세상을 평정했다. 하지만 그때부터서는 전쟁의 운명이 바뀐다. 더 이상 합성궁을 장착한 기마병이 별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기병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도 그렇고 폴란드 기병은 아주 유명하다. 하지만 예전 기마군단으로 말하는 시대는 더 이상 연속되지는 못했다. 코르테스라는 인물, 나는 그가 거의 건달 수준이 아닌가 싶다. 백여 명의 뜨내기를 이끄는 스페인에 안달루시아 촌뜨기 코르테스는 인구 수백만에 수만의 군대를 가진 대제국을 털어서 황금을 잔뜩 뜯어낸다는 미친 발상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게 있는데 이들이 고작 중대나 대대 정도에 불과한 규모의 촌놈들 집합체로 저 장대한 대제국과 맞설 생각을 하려고 했던 것에는 그만큼 자기들이 믿을만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게 다름 아닌 화약. 즉, 총과 대포였다. 제 아무리 제국이라지만 기껏해야 돌로 만든 창과 나무 몽둥이가 주력무기인 놈들 상대로 총과 대포라는 결전병기라면 숫자에 상관없이 해볼 만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금 못지않게 헤집고 다니면서 찾아 헤맨 광물이 다름 아닌 원주민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초석이었는데 이 초석이 화약의 원료였기 때문이었다. 아즈텍 제국에서는 산꼭대기에 가야 있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별 시답지 않은 낮은 부가가치를 가진 저질 광물 나부랭이가 이렇게 무서운 물건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창도 같은 창이 아니었다. 아즈텍 제국은 흑요석으로 날을 만든 창이라 단단한 곳에 부딪히면 깨지기 일쑤였는데 코르테스의 창은 무려 철로 만든 창이다. 단단함과 날카로움에서 비교가 안 된다.
화약이 엄청나게 무서운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강철판도 마치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뚫듯 마구 뚫어버리는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력은 맞는 게 곧 즉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추가로 무서운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화약을 쏠 때 내는 소리다. 뻥뻥 터지는 게 마치 천둥치는 소리를 연상케 할 만큼 크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화약에 맞아도 무섭고 안 맞아도 무섭다. 우리가 임진왜란 때 애를 먹은 게 또한 조총이라는 총의 출현 아닌가.
스페인의 코르도바는 자국의 군대가 프랑스에게 매번 분패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승총과 머스킷 총을 도입한 후 당시 군대의 모습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렸다. 그러니까 본고는 기사도로 변신한 말의 전사와 화약이 출현하고 머스킷이 활보하기 바로 그 이전이 아주 적절한 시간 타이밍이 아닌가 싶다. 시간을 더 늘여서는 책 부피가 커서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활개 친 기마병의 귀족 변신이 이루어지고 주특기가 실종되어가는 마당에 괜한 헛바람 날리며 달리는 기마병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아무쪼록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주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