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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입법의회와 국민공회(5)
5. 에베르와 당통의 몰락
지롱드당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산악파는 상퀼로트의 요구에 응하는 적절한 조치들을 하나하나 실시하엿다. 6월 3일법은 망명자의 재산을 10년 연부로 매각하기로 하고, 6월 10일법은 약 6억 리브르의 공유지산 판매 규정을 제정하고, 6월 24일에는 철저한 민주주의 헌법을 국민투표로 확정하고, 7월 10일법은 치안 위원회를 설치하여 공안위의 활동을 돕게 하고, 7월 17일법은 영주 토지에 대한 농민의 소유권을 무상으로 확보하게 하였다. 말썽 많던 되사기 제도와 같은 농민의 토지 문제가 완전한 해결을 본 것이다. 그리고 6월 24일에 인준된 헌법이 이른바 1793년 헌법으로서, 직접 보통선거제와 절대다수의 원리 및 선거인단에 의한 공무원 선거제 등을 규정한 가장 철저한 민주 헌법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실시되는 것이 보류되었던 것인데, 전쟁은 결국 끝나지 않고 자코뱅당이 몰락하게 되자 그 헌법은 한 번도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방데의 반란이 혁명정부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공포정치로 제1보를 내디디게 했다면 지롱드파의 연방제 반란은 결정적으로 공포정치로 제2보를 내대대게 했던 것인데, 이제 그 제3보를 불가피게 한 사건이 일어낫다. 바로 마라의 암살이었다. 7월 14일에 벌어진 마라의 암살은 산악파에게 자파의 간부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마라의 뒤를 이어 로베스피에르가 산악파의 지도자로 등장하면서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절정에 달한다.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 위원이 된 것은 마라가 암살된 지 2주일 뒤인 27일이다. 당시의 정세는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영국인 스파이가 체포되면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혁명파 외국인들에 대하 ㄴ반혁명의 혐의가 짙어져 가고, 혁명파 의원들이 동인도회사 청산 위원회의 뇌물 사건에 연루되는 독직 사건이 일어나고, 정신적으로는 염전(厭戰) 사상과 반공화주의의 기분이 번져가고, 경제적으로는 식량 소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혁명 정부의 큰 위기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로베스피에르의 집권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였다. 그의 집권은 하나의 새 시대를 열었다. 냉철한 성격과 대담한 요기, 예리한 통찰력과 사람들을 압도하는 웅변, 탁월한 조직력과 완전한 공평무사. 이러한 것들이 로베스피에르의 희귀한 개성이었는데, 그 개성이 이제 공안위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상퀼로트의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이 되었다. 민중은 그를 절대로 부패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인물이라고 불렀다.
그는 파리코뮌과 국민공회의 사이, 국민공회와 자코뱅 클럽의 사이, 파리와 프랑스의 사이를 잇는 살아 있는 유대로서 코뮌과 국민공회를 둘 다 수호하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공안위원회 휘하에 매점 감시 위원회를 만들어 식품의 매점을 엄중이 다스리고, 종래 치안 위원회에 맡겼던 체포권을 공안위원회에게 장악시켜서 한층 더 강한 독재권을 수립하고, 의회로 하여금 국민 총동원령을 재정하게 하여 인적 물적, 자원 이체를 공안위원회가 휘어잡게 하였다.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는 파리 상퀼로트의 신뢰와 지지를 바탕으로 강화되었다. 그런데 상퀼로트는 6월에 체포된 지롱드파와 부패 의원들에 대한 재판이 지지부진한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한편 8월 26일에는 투롱 항구에 영국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이 파리로 전해졌다. 군사적 위기는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에도 임박했다.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하여 9월 5일 반혁명 분자들의 재판을 촉구하는 상퀼로트의 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서 공안위원회는 지체 없이 혁명재판을 4부로 분담시켜서 신속히 진행시키는 한편 에베르가 영도하는 극좌파의 추진에 따라 혐의자법을 제정하고 공안위원회의 절대 우월권을 확립하였다. 혐의자법은 다음 사상에 해당하는 자는 반혁명의 혐의자로 간주한다는 것이었다.
첫째, 행동이나 말이나 교제 관계나 문서에 의하여 폭정이나 연방제를 지지함으로써 자유의 적으로서의 태도를 나타낸 자.
둘째, 자기의 생활 수단이나 시민의 의무 이행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자.
셋째, 선량한 시민이라는 증명서의 발행을 얻지 못하는 자.
넷째, 국민공회나 그 파견 의원에 의하여 공직이 정지되었거나 파면된 자와 재임명되지 않은 자.
다섯째, 귀족과 그들의 부모형제와 처자식 및 망명 귀족의 대리인으로서 항상 혁명에 열의를 보이지 않은 자.
여섯째, 1789년 7월 1일에서 1792년 3월 30일 사이에 외국으로 망명한 일이 있는 자.
혐의자법은 지금까지 반혁명 혐의자에 관한 정의가 없었던 결함을 법적으로 보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의가 매우 추상적이고 광범위했으므로 무고한 국민까지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컸다. 혐의자법은 공안위원회의 무서운 독재 수단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또 혐의자법이 제정되기 4일 전인 9월 13일의 국민공회 명령은 치안 위원회 위원들의 경질과 위원들의 명단 작성을 공안위원회에 위임하기로 결의하고, 치안 위원회 이외의 다른 위원회들도 공안위원회에 종속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공안위원회는 이제 최고 권력기관이 되었다. 9월 25일령은 공회가 지방과 군대에 파견한 파견 의원도 공안위원회의 명령에 따르게 하고 공안위원회가 그들을 소환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사병 출신 장군들을 일선 사령관에 임명하여 혁명의 아들들에게 군 지휘권을 줌으로써 군부를 반혁명으로부터 수호하였다. 이 혁명의 아들들은 공안위원회의 독재를 전적으로 지지하였다.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 독재는 정치기구적인 장치를 완비한 셈이었다. 이제 그 장치가 가동하기 시작하면 누구의 힘으로도 걷잡을 수 없는 자체의 운동 법칙에 따라 폭주할 터였다. 10월 3일에 국민공회 의원 136명을 제명하고 그중 41명을 혁명재판에 회부하고, 14일부터 3일 사이에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재판하여 사형에 처하고, 24일부터는 지난 6월에 투옥했던 지롱드파 의원 21명을 재판하여 30일에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혁명재판소는 지난 3월 파리 국민 방위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설치되어 있었다. 그것은 판사도 배심원도 공회가 임명하고, 일체의 반혁명적 기도나 공화국의 불가분성과 안전을 침범하는 모든 음모와 왕정의 회복, 자유, 평등 및 인민주권을 침해하는 일체의 음모를 재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혁명재판소의 재판은 단심으로서 상소가 허락되지 않았고 사형이 확정된 자는 재산이 몰수되었다. 내란과 전쟁이 벌어진 나라에서는 간첩과 음모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약식 재판에 호소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는데, 자코뱅 독재의 혁명재판은 그넷 사상 초유의 모델이었다. 자코뱅의 혁명재판소는 설치 후 별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고 있었는데 9월 5일의 시위 이후 갑바기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혐의잡버과 공안위원회의 독재권을 공포정치로 구체화한 기구가 바로 이 혁명재판소였다. 공포정치의 처절상을 보여주는 사례를 살펴보면, 리옹 시에서는 1793년 12월 초부터 익년 2월 초까지 1, 667명을 총살했고, 낭트 시에서는 로아르강에 빠뜨려 죽이는 익사형의 방법으로 최소한 2,000명을 처형하였다.
한편 혁명정부는 혁명력(공화력)을 제정하여 전해인 1792년 9월 22일을 새 역법의 설날로 정하였다. 1년을 열두 달, 한 달을 30일, 한 주일을 10일로 나누고 그 끝날을 휴일로 하고, 연말의 5일을 상퀼로트의 날로 정하여 공휴일로 하였다. 달의 명칭도 전통적인 이름을 버리고 계절의 특징을 따라 붙였다. 1월 포도의 달(방데미에르Vendemiaire), 2월 안개의 달(브뤼메르Brumaire), 3월 서리의 달(프리메르Frimaire), 4월 눈의 달(니보즈Nivose), 5월 비의 달(플뤼비오즈Pluviose), 6월 바람의 달(방토즈Ventose), 7월 파종의 달(제르미날Germinal), 8월 꽃의 달(플로레알Floreal), 9월 목초의 달(프레리알Prairial), 10월 수확의 달(메시도르Messidor), 11월 더위의 달(테르미도르Thermidor), 12월 결실의 달(프뤽티도르Fructidor)이었다.
혁명력의 재정에는 최소한 두 가지 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역법의 불합리성을 합리적으로 고친다는 생각이었다. 달마다 날수가 다르고 7일을 일주일로 할 때 빚어지는 복잡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은 수학적 과학 정신의 소산이었다. 또 하나는 공화정의 선포를 인류 역사의 획기적 사건으로 생각한 혁명 정신이었다. 역사를 인간 이성의 발달과 과학적 진보의 과정으로 이해햇던 계몽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 이성의 몽매의 산물인 왕정을 타도하고 계몽주의의 산물인 공화정을 수립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뜻깊은 혁명적 사건이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몽매한 역사이고 이지ㅔ부터의 역사는 이성의 역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서 공화정이 시작되는 날을 혁명력의 설날로 잡았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공화파의 혁명적 열광이 얼마나 진지하고 투철한 역사의식에 뿌리박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 열광은 단순한 흥분이나 광기가 아니었다. 적어도 혁명정부의 지도층에 대해서만은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란 합리주의자들이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인간 역사도 그렇게 합리적으로 진보만 하는 역사가 아니었다. 더구나 혁명과 전쟁과 내란이 뒤범벅이 된 마당에서는 한결 더 인간 이성은 흥분과 광기에 압도될 가능성이 컸다.
공안위원회는 10월 1ㅈ일 일반 최고 가격법을 제정하고 22일에는 공안위원회 안에 세 명으로 구성된 식량 위원회를 두어 경제 독재권마저 잡았다. 그러나 혁명파 안에는 내분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우익의 당통파는 공안위원회를 개편하여 로베스피에르파를 누르고 정권을 쥔 다음 전쟁을 그만두고 혁명을 청산할 계획을 세워놓고 이를 실현하고자 매진하고 있었다. 당통파는 혁명의 이념과 전진을 지키고 있는 상ㅌ퀼로트의 지도자들을 외국의 앞잡이니 극좌파니 욕하면서 좌파를 압박하였다. 당시 좌파는 에베르가 대표하고 있었다 .당통파와 에베르파의 싸움은 파리에 국한되지 않고 전국으로 번졌다. 그들은 서로 상대방의 비행을 폭로하고 음모와 고발을 주저하지 않고 도처에서 물고 찢고 충돌하였다. 이러한 혼란과 난투 속에서 혁명정부가 발밑에 파여 있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양파의 난투를 누르면서 공포정치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단호한 태도와 용기와 웅변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혁명파가 분열하고 혼란에 빠진 중요한 원인은 외국의 음모와 선동에도 있었다. 외국 스파이의 파괴 활동 범위는 광범하였다. 그들의 활동은 경제 질서의 교란이나 반교회 운동처럼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1793년 11월 10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공화제가 거행되었을 때 기독교 폐기 운동이 폭발하여, 교회당을 약탈하고 폐쇄하여 공화주의 전당으로 쓰는 운동이 벌어졌다. 이 운동은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서 내란을 야기하려는 외국 스파이들이 꾸민 음모의 소산이었다. 17일 로베스피에르는 그 점을 명백히 지적하여 성당을 파괴하는 자들은 공화주의 선전가로 위장한 반혁명 분자들이며 외국 스파이의 손에 놀아난 자들이라고 공격하였다.
혁명파를 분열시키는 외국의 또 다른 책략은 휴전 제안이었다. 연합국들은 제각기 편리한 통로로 통하여 비밀리에 주로 당통파에게 평화 회담을 제의해 왔다. 공안위원회는 이 평화 제안을 혁명 파괴의 음모로밖에 보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의 동지 바레르(Bertrand Barere)는 이렇게 연설했다.
강화라는 말을 염치 없이 입에 담는 자는 누군가. 그자들은 외국의 군대와 폭군에게 인민의 피를 빨게 하고 식량 보급을 회복시키고 군대를 퇴각시킬 시간을 벌게 하여 반혁명을 몇 개월 아니 몇 년 더 연장시키기를 바라는 작자들이다. ……왕정에는 강화가 필요하나 공화정에는 군사의 기력이 필요하다. 노예에게는 강화가 필요하나 공화파에게는 자유의 비등이 필요하다.
바레르의 동지 쿠통도 같은 시기에 비슷한 말을 했다.
전제군주들과는 평화도 휴전도 없다. 음모가와 배반자에게는 특사도 대사도 없다. 이것이 바로 국민의 소리이다.
혁명파에게는 전쟁이 필요했다. 아직도 적군에게 점령되어 있는 국토의 해방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공화국 안ㅇ르 굳게 다지기 위해서도 전쟁이 필요했다. 그러나 전쟁을 계속하려면 민주으이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했다. 민중을 적극저긍로 참여하게 하려면 민중의 궁핍을 덜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과감한 사회정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과감한 사회정책은 반드시 돈 많은 당통파의 반대에 직면하게 될 터였다. 일반 최고가격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당통파였다. 공안위원회는 당통파의 반대를 각오하고 드디어 2월 21일에 바레르가 작성한 일반 최고가격표를 공회에 제출하고, 26일에는 생쥐스트가 새 혁명 프로그램이 될 날카로운 연설을 하였다. 생쥐스트의 주장에 의하면, 공포정치는 전쟁이 끝나면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의 건설에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이 주장은 공포정치에 대한 전혀 새로운 해석이며 새로운 입장이었다. 즉 공화국은 시미의 소행을 바르게 하고, 그 소행을 고결하게 하는 시민 제도(institution civile)를 동반할 때에 비로소 장래가 보장될 수 있으며, 시민 제도가 없는 공화국은 공허한 공화국으로서 공포정치는 시민 제도가 확립될 때까지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민 제도가 없는 공화국에서는 국민들이 각자 자기의 열정과 탐욕이 제한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여 모두가 지배욕과 이기주의를 발동하는데, 이러한 자유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고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국민의 마음에서 이기주의를 뿌리뽑고 시민 제도를 확립할 때까지 공포정치는 필요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시민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빈곤한 애국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그는 “지금 많은 재산이 혁명의 적의 수중에 있다. 민중은 살아가기 위해 적에게 기대어 일하고 있다. …..애국자의 재산은 신성하나 음모자의 재산은 빈민의 것이다”라고 연설하면서 공회로 하여금 “공확구의 적으로 간주된 자들의 새산은 몰수한다”고 결의하게 하였다.
이 결의를 실시하기 위하여 공회는 3월 3일 또 하나의 명령을 가결했는데, 그것은 전국의 모든 코뮌에게 가난한 애국자의 명단을 작성케 하고, 코뮌의 모든 감시 위원회에 1789년 5월 1일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구금된 자들의 명단을 관련 문서와 함께 치안 위원회에 제출케 하는 것이었다. 이 명단을 작성하면 거기에 근거하여 반혁명 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려는 계획이었다. 당시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자는 약 30만으로 추계되고, 재산이 몰수될 위험성이 있는 가구가 약 30만이었다. 혁명은 일찍이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여 국민에게 판매했고 또 망명 귀족의 재산을 몰수하여 경매한 바 있으나, 그때에는 살 돈이 있는 자만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방대한 수의 반혁명 혐의자와 재산마저 몰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돈 없는 애국자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극좌의 에베르파나 앙라제파도 감히 구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사회혁명 프로그램이었다. 이 혁명 프로그램에 의하여 시민 제도가 확립되고 그 시민 제도에 의하여 시민정신이 뿌리를 박을 것이었다. 거기서 비로소 이기주의와 지배욕과 탐욕이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허위의 자유는 사라지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것이었다. 이 위대한 사업을 성취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공포정치이기 때문에 생쥐스트에게 공포정치는 결코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의 도덕이었다.
이제 공포정치는 하나의 제도가 되었다. 그 제도는 낡은 질서에 연결되어 있었던 일체를 훨훨 태어버리고 그 폐허 위에 새 민주주의를 건설할 붉은 용광로였다. 공안위원회는 지난 두 달 동안 좌익의 에베르파와 우익의 당통파의 중간에서 갈 길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우익을 탄압하고 좌익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에베르파는 공안위원회의 주위에 굳게 뭉쳐서 당통파와 싸워야 할 때가 왔다. 그런데도 에베르와 그 일파는 생쥐스트의 사회 프로그램과 같은 과학적인 프로그램은 채택하지도 않으면서 오로지 일체의 잘못을 사재기 상인들의 죄로 돌리고 유일한 길은 단두대뿐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들은 언행이 난폭하고 과격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도 문제의 해결 방법도 유치하고 거칠었다. 그들이 정치의식과 정치적 판단은 정확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생쥐스트의 사회 프로그램의 실현에 협력하지 않고 당파적 야심과 개인적 원한을 푸는 데만 초조했다. 에베르파의 코르들리에 클럽은 자코뱅파에 반기를 들고 민중 봉기를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허나 에베르파와 로베스피에르파의 대립은 결국 당통파에게 어부지리를 줄 것이 분명하였다. 그렇게 되면 혁명이 수포로 돌아갈 것은 명백하였다. 거기서 두 파는 화해하여 굳은 동맹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에베르파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2의 9월의 학살, 군부의 장악, 공안위원회와 치안 위원회의 소각, 독재관의 임명 등 쿠데타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3월 13일과 14일에 에베르파의 간부 18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21일에 재판에 회부되고 24일에 처형되었다. 문제 해결의 유일한 길을 단두대에서 찾던 그들은 스스로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다.
그들을 혁명재판소로 보낸 생쥐스트의 13일 명령에는 이미 당통파에 대한 숙청이 암시되어 있었다. 그 명령은 망명 귀족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자들과 감옥의 문을 열어서 혐의자들을 석방하려고 한 자들을 모조리 조국의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당통과 그의 일파 전부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규정이었다. 사흘 후 16일에는 1793년 10월 이후 계류 중이던 동인도회사 청산 위원회 독직 사건에 연좌되어 수감 중이던 당통파의 데글랑틴과 샤보에 대한 고발이 가결되었다. 이것은 바로 당통파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로베스피에르파의 비요 바렌(Jean Nicolas Billaud-Varenne)은 공안위원회와 치안 위원회에게 당통의 체포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사실 당통은 동인도회사 뇌물 서건의 공범자이고 온갖 기회를 이용하여 거액의 돈을 모아 호사한 생활을 즐기는 부패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다. 비요 바렌은 당통을 모든 반혁명의 초점이라고 규탄하였다. 당통은 로베스피에르에게 자신의 청렴과 애국심을 눈물로 호소하여 스스로 구명 운동에 나섰다. 로베스피에르는 당통의 회개의 눈물을 보고 체포를 지연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통파는 베스테르만(Francois Vestermann)을 중심으로 하여 로베스피에르파에 대한 역습을 기도하다가 오히려 3월 30일 공안위원회에 체포되었다.
당통파에 대한 숙청은 에베르파에 대한 것보다 훨씬 어려운 싸움이었다. 에베르파의 숙청 후 당통파가 크게 진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쥐스트는 당통 일파가 저지른 뇌물 사건의 공범 관계뿐 아니라 당통의 더러운 과거까지 낱낱이 고발하였다. 미라보와 꾸민 음모, 루이 16세와 벌인 암거래, 반역 장군 뒤무리에와 공모한 술책, 지롱드파와 맺은 타협, 8월 19ㅇ 서건과 지난 5월 31일 사건 등 위기가 있을 때마다 취한 수상쩍은 행동들, 루이16세와 왕족의 구명 운동, 적국과의 비밀 강화 교섭에서 취한 교활한 반역 행위, 모든 혁명 수단에 대한 음흉한 반대, 데글랑틴과 샤보 같은 사기꾼들과 벌인 공동 범죄, 외국인 혐의자들과 맺은 깊은 교제, 혁명정부에 대한 비난 공격 등 고발의 내용은 가히 혁명의 역사 전부였다. 생쥐스트의 고발은 그간 오랫동안 과장된 것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사료들이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모두가 진실이었다. 어쨌든 국민공회는 당통, 들라크루아(Jean Francois Delacroix), 데물랭 등 14명의 체포 명령을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4월 2일부터 3일간 이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그러나 피고들의 항변이 매우 완강하여 재판은 그리 순조롭지 않았다. 4월 4일 공회는 “국가의 재판에 ㅈ항하거나 재판을 매도하는 피고에게는 변론을 금할 수 있다”고 가결하여, 이튿날 변론의 기회를 봉쇄한 채 14명을 모두 단두대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