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는 디자인이 생명이다.
아름다운 외양은 물론 인체에 미치는 영향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정경원 카이스트 디자인학과장
현대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가구를 꼽으면 의자가 단연 1순위가 될 것이다. 책장이나 책상 등 눈으로만 보는 가구와 달리 의자는 우리 몸의 대부분을 올려 놓고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하루 종일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특히 잘못 디자인된 의자는 몸과 마음이 쉽게 지칠 뿐 아니라 허리와 등뼈의 질병인 추간판탈출증이나 척추만곡증 등 흔히 '척추 디스크'라는 질환에 걸리기 쉽다.
따라서 가구회사들은 저마다 더 편하고 저렴한 의자를 개발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의 가구업체인 허만 밀러 Herman Miller는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디자인된 의자들을 계속해서 선보이는 모범 기업이다. 이 회사는 5,800여 명의 종업원이 동참하는 '사원 주주제' 덕분에 지속 성장하였으며, 2011년 총매출은 16억 달러(약 1조 7, 600억 원)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업무용 가구회사이다.
▶ 편안한 디자인 가구로 정평
1923년 미국 미시간 주 질랜드에서 설립된 허만 밀러는 꾸준히 우수한 제품을 만들고 있는 가구 전문업체이다. 초창기에는 주거용 전통 가구 제작을 주로 했으나, 점차 사무용 혁신가구 전문업체로 변신하여 의자, 데스크, 테이블, 파일과 보관장, 조명 등 오피스 가구시스템을 생산하고 있다. 허만 밀러는 1940년께부터 저명한 산업디자이너들을 영입하거나 공동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보통 가구 회사'에서 '디자인 가구 회사'로 탈바꿈했다. 먼저 1945년에는 예일 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던 조지 넬슨 George Nelson을 디자인 부문 책임자로 임명했다. 시스템 가구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던 넬슨은 20년 동안 찰즈 임즈 Charles Eames와 이사무 노구치 Isamu Noguchi 등 당대의 저명한 디자이너들과 협력하여 최고 수준의 디자인 가구를 만들어냈다. 특히 임즈는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대선 때 화제가 되었던 '라운지 체어' 등을 디자인했다.
허만 밀러는 1950년대부터 플라스틱, 합판, 알루미늄 등 신소재를 적극 활용하여 실험적인 가구들을 개발했다. 여러 개의 의자들을 쌓아 올리게 디자인한 스태킹 체어 stacking chair도 그 과정에서 개발되었다.
▶ 인체공학적 디자인의 성과
1994년 허만 밀러는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사람의 몸에 꼭 맞는 인체공학적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 도날드 채드윅과 윌리암 스텀프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그들은 정형외과 의사와 혈관학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몸의 구조는 물론 앉는 습관, 생활 문화까지 면밀히 연구하여 모든 구조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에어론 의자(Aeron Chair)를 디자인했다. 이 의자는 정교한 서스펜션 장치에 의해 척추와 근육에 가해지는 힘을 최소화하고, 몸무게가 좌판과 등받이로 골고루 퍼지게 디자인되었다. 특히 등받이에는 '메시 mesh'라는 신소재를 사용해 체중이 등받이에 골고루 분산되고, 그물 같은 구멍으로 공기가 순환되므로 오래 앉아 있어도 쾌적하다. 에어론 의자는 출시되자 수십만 개가 팔렸다. 특히 사무용가구의 최고라는 명성을 얻게 되자, '계급 없는 사무환경'을 추구한 미국의 수많은 닷컴 기업들이 이 의자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모든 사원들에게 평등하게 나눠주었다. 우리나라에서도 NHN이 전 직원에게 에어론 의자를 제공해주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어 허만 밀러는 독일의 스튜디어 7.5에 의뢰하여 좀 더 대중적인 의자인 '미라 의자(Mirra chair)'를 개발했다. 이 의자 역시 사용자의 신체조건, 자세, 동작에 따라 높낮이, 각도 조절, 강도 조절 등 미세한 조율이 가능하게 디자인되었다. 소재는 메시 대신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으며 탄력적이고 유연한 등받이는 허리를 받쳐주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쾌적함을 제공한다. 2003년 12월 '포춘' 지가 선정한 올해의 상품 25선에 뽑힌 이 의자는 사용자의 행동을 거울에 비춘 것처럼 의자의 표면이 몸에 딱 맞게 반응한다고 해서 '미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5분이면 조립 가능한 미라의자에 사용된 모든 소재와 고무 중 96%가 재활용될 수 있다.
▶ 더 저렴하고, 편한 의자
에어론과 미라 의자의 뒤를 이을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허먼 밀러는 아트센터디자인대학 출신인 이브 베하 Yves Behar와 함께 2007년부터 퓨즈프로젝트 fuseproject를 추진했다. 디자인팀은 앞서 출시된 의자들의 기능보다 월등하면서도 가격은 저렴한 의자를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3년간의 개발기간 동안 70여 개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할 만큼 정성을 들여 디자인된 '세일 의자 (Sayl Chair)'는 등받이의 프레임을 없앤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베하는 샌프란시스코 태생답게 세계 최초의 현수교이자 빨간색으로 유명한 '금문교'로부터 디자인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현수교의 원리를 본받은 그물 모양의 구조를 우레탄으로 제작하여 부품, 재료, 무게, 공정, 가격 등을 크게 낮추었다. 또한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한 방법들이 총동원되었는데, 저렴한 재료 사용, 생산비가 싼 지역에서의 역외 생산, 무엇이든 절약하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역외 생산의 경우, 단지 비용을 줄이려고 중국에 보내지 않고 미시간 공장에서 주로 제작하되 특수한 부위만 외부에서 조달했다. 일찍이 찰스 임즈가 가르쳤던 대로 소재를 잘 선택하고 조립방법을 단순하게 하는 등 디자인을 잘해서 탄소 이력을 30%가량 줄이고 제작비용도 현저히 낮추었다. 그 결과 가격이 399달러로 다른 인체공학적 의자들보다 훨씬 저렴하며, 2011년 미국 우수산업디자인상(IDEA) 은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 디자인 마당'의 성과
이상 세 가지 베스트셀러 의자들은 하나같이 외부 전문가들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그렇다면 '회사 내에는 디자인 전담 부서가 없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허만 밀러의 디자인 활성화는 게리 스미스 이사가 책임지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스미스는 20여 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 재능이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혁신적인 제품디자인 개발을 도모하고 있다. 사내외를 가리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디자이너들과 일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허만 밀러의 본사에는 '디자인 마당(Design Yard)'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있다. 이 마당은 사람들이 만나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배우는 곳이다. 디자이너, 엔지니어, 작가, 연구자, 기획자, 마케터 등 만나는 사람들이 다양한만큼 다채로운 아이디어들이 나온다. 이 시설을 오래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참여의 문화'가 조성되어 끈끈한 관계와 소통이 촉진된다. 새로운 사무실 환경이나 작업장은 물론 신제품을 개발할 때 브레인스토밍과 '타운 홀 미팅'부터 갖가지 실험과 모형 제작 등 많은 작업들이 여기서 이루어진다.
2004년부터 CEO로 일하고 있는 브라이안 워커 Brian Walker는 "위대한 디자인이란 시대, 세대, 지역 등을 초월하여 선호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으며, 디자인 마당에도 자주 들러 개발업무에 동참한다. 오래 사용해도 물리지 않고, 대를 이어 물려받아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허만 밀러의 가구들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디자인되고 있다.
정경원 교수는…
한국 디자인 진흥원장을 역임한 정경원 교수는 국내 산업디자인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 본부장(부시장)을 지냈으며 현재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