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한 채 자리만 차지한 책들과 읽고 싶어 사놓은 책들이 서로 자리다툼을 하는 책장을 손봐주기로 했다. 안보는 책을 쭉 뽑아놓고 인터넷 중고서점 가격을 알아보니 어떤 책은 벌써 그 효용가치를 잃었는지 매입불가다. 어떤 책은 간신히 천 원으로 몸값을 유지한다. 신간들은 오천 원 넘게 받을 수 있는 책도 있다. 스무 권 넘게 쌓아놓으니 6만원 정도 받을 수 있겠다. 이걸로 또 사보고 싶은 책을 사면 책장정리도 되고 일석이조다. 정리하다보니 구석에서 먼지 캐캐 쌓인 책 두어 권이 나왔다. 내가 있던 곳에서 만들어졌던 책.... 낯설다. 잊고 살고 싶었던 애인과 초라한 모습으로 불쑥 마주한 느낌. 미완성된 기억의 꼬리를 잡고 과거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생각을 모으는 집, 집사재, 홍대, 서교동 뒤쪽, 3층 건물의 이층 한쪽, 아담한 출판사, 내 기억 속 k사장님...
사실 k사장님을 만난 출판사를 말하기 이전에 갓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아는 선배 하나가 급히 아는 사람이 일자리를 구한다며 경험삼아 해보라고 소개해주어 동대문에 있는 한 계간지 만드는 곳에 다닌 적이 있었다. 복잡한 동대문 시장 거리를 지나 상가 골목 안의 낡은 건물을 올라가면 있는 영남일보라는 편집실이다. 거기서 내가 한 일이란 지역 유지의 이력을 과대해서 짜집기하여 ‘국내 최초로 무얼 성공시킨 ~ 회장님’ 이라던가 하는 짤막한 기사를 쓰고 편집하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시다바리다. 아침 일찍 사무실 문을 열어두고 손님이 오면 요구르트를 내오고 커피를 타오고 심지어 은근히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화장실 청소까지 권유하던 이기적인 노처녀들과 고리타분한 아저씨들이 모여 말도 안되는 고성이 오고가던 사무실이었다. 몇 달 못가 당연히 그만두려했고 나대신 새로 사람을 구했으나 나보다 영리했던 그 아이는 내가 인수인계를 해주기도 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난 그 아이에게 전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전했다는 이유로 계속 거기 있기를 강요받았으며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열쇠를 두고 도망나오는 것이었다. 무섭고 두려운 마음에 집에서 전화도 받지 않은 채 두문분출했었다.
시장 잡배의 편집실 경험에서 벗어난 후 두 번째로 찾은 출판사가 바로 k 사장님이 있던 그 곳이다. 들어서자 마자 특유의 문학적 향기로 설레게 해주던 곳. 원두커피향이 배어나오던 사무실, 두툼한 원고뭉치를 들고 찾아오던 작가들의 모습에서 알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k사장님은 오십대 후반쯤 다소 마른듯한 체격에 흰머리가 섞여 오히려 세련된 회색빛으로 보이는 단정한 머리, 울림이 좋은 목소리, 커보이는 안경 건너의 인자한 눈웃음이 깊었던 분이었다. 자연스레 드리워진 주름은 호탕한 웃음과 쑥쓰러운 미소를 적절하게 만들어내고, 반면 착착 한치도 흐트러짐없이 원고를 넘기시던 그의 손끝에서 표준어와 사투리, 분명하지 않은 문장배열, 애매한 띄어쓰기, 잘못쓰인 낱말 들은 손쉽게 제 자리를 찾고 본래의 정갈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렇게 시인이었고 홍대 어느 구석 작은 출판사의 사장이었던 k사장님. 중년의 여유로움과 소년의 천진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던 그 모습에 간혹 영화속에 등장하는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얘기가 현실에서 나타난다면 사장님 정도 분위기의 늙은 남자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홍대 근처의 크나큰 출판사의 사장님 친구분들로 늘 사무실은 북적였고 그들이 모여 문학적 낭만인지 뭔지 질펀한 농담을 즐기기도 했다. j시인은 여전히 여대생과의 연애를 즐기는지 모르겠다. k교수님은 노래방에서 그렇게 여전히 점잖치 못하게 노시는지 문학이란 한때의 명성만으로도 오래오래 만족시켜주는 특권층의 힘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 사장님은 한번도 그런 저속한 얘기에는 끼어들지 않으셨다.
책정리를 하다 집사재를 일깨웠던 책은 당시 tv에 한두번 얼굴을 비추던 여자가 낸 에세인집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여자’ 다. 표지는 화려한 인상의 작가얼굴을 전면에 장식하고 뒤로 꼬리까지 그려놓았다. 아마 진열되었을 때 한번 집어보고 싶게 만드는 표지라 골랐을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여자는 꼬리가 아홉 개인 여자라는 제목과 고민 끝에 채택한 제목이었다. 신혼시절 방귀뀐 얘기부터 잡다한 성공스토리가 담긴 책, 그리고 레이몬드카바인가 이름도 생각안나는 번역소설들과 직접 삽화까지 그린다는 어느 여대생의 예쁘장한 외모와 과장된 시적 감수성에 기대를 걸고 시집까지 공들여 내주었다.
책 한권 베스트셀러만 내면 돈방석에 앉는 출판 로또의 꿈, 책한 권 잘 만나면 망해가던 출판사가 일어났다는 신화가 심심치 않게 들리던 시절이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 나길 기다리듯 이것저것 소소하게 단행본들을 내며 그 책이 초판을 지나 몇쇄 쯤 더 찍어대는 좋은 일이 일어나길 학수고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이 발간되면 초기에 바람을 잡는 일이 중요하다. 일단 책이 서점에 깔리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영업부장의 로비가 시작된다. 가뜩이나 순둥이였던 곰돌이를 닮았던 우리 출판사의 y부장님은 늘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땀을 많이 흘렸다. y부장님 지시에 따라 나는 대형서점을 돌아다니며 매일 대 여섯권씩 갓 출간된 우리 책을 사들였고, 그 신간 아직 안나왔냐고 카운터에 주문을 넣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우리 책이 잘 안보이는 대열로 밀리면 슬쩍 자리를 바꿔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계란에 바위치기였으나 그만큼 절실했다.
우리는 실속이라곤 없는 환상의 드림팀이었던가 싶다. 책을 팔기위한 반짝 광고효과 때문에 아님 광고쟁이들의 압박 때문에 사장님은 한귀퉁이에 몇 백만원 호가하는 광고들도 거절하지 못하고 마구 내셨고 입에 발린 듯 치켜세우며 인심 쓰던 광고쟁이들은 나중엔 빛쟁이들 독촉전화로 바뀌어 차마 내가 전화를 받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험악한 분위기속에 늘 인자한 웃음을 담았던 사장님의 얼굴 주름엔 그늘까지 함께 담게 되었고 한층 고요해진 사무실은 위트 있었던 사장님의 말도 줄어든 채 책상 위로 볼펜만 굴리며 불안한 시간들을 견뎌야했다. 믿었던 지인들 모두 등 돌리고 남은 휑한 사무실, 멋모르고 그곳에 들어가 맛본 쓰디쓴 출판의 기억. 그렇게 나의 출판에 대한 인상도 회색빛으로 바래고 있었다.
아무튼 그건 나의 기억일 뿐 k사장님에겐 남다른 인생의 도전이었고 아마 계획하시는 많은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인 내가 공유하기엔 택도 없는 것들이었으니 이런 실패의 기억 또한 나의 것이고 나의 입장에선 무작정의 동경을 접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인 셈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지내왔던 시절이 내 인생의 거름이 되기에는 발효가 좀 못 미쳤던 것 같고, 나의 열정도 부족했으며 단지 그때엔 우물 안의 개구리였을지언정 그게 제일인줄 알았으니 영리하지 못했던 그런 맹목적인 날들이 부질없더라도 새삼 그리워진다.
첫댓글 뒤늦게 올리고 나니 요 글 세번째 숙제로도 비슷한데 이걸로 때우면 안될까요.ㅎㅎ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사회의 한 단면이 잘 나타나있는 글이고 참신한 면이 있어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지네요^^ 훌륭한 이야기감인것 같아요
아리영님, 이걸로 때우면 될까요에 대한 대답은 '안돼요'^^
가슴 한 편이 짠해지면서 공감되는 글이네요.
순수하고 열정이 가득했을 이십 대의 경험, 그렇게 풍요롭진 않았지만 그 아프고 쓴 기억들이 지금의 자산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앞으로의 자산이 될 수도...
세번 째 과제 에피소드는 이것과는 색깔이 다를 것 같은데요. 기대합니다^^
김연수의 <원더보이>의 한 부분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아리영님의 분위기와 말투가 느껴지네요. 글 속에 그 사람의 색깔이 있다는거 신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