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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원
변장술의 진화 외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변장술부터 배운다 모태를 통한 변장술 미디어로부터 알게 된 아름다움이란 위대한 창조력 번식력은 창조의 힘이다
방어 수단이 아니라 공격적인 얼굴 화장법 커다란 눈을 더 크게 서클렌즈와 고양이 눈매로 바꾸는 변장술 메이크업이 성업 중이다
코코아를 마신 컵 주둥이에 찍힌 동그란 입술자국 멋들어진 데칼코마니 잘 구은 베이글 모양으로 앙증맞게 챕스틱 모이스처 틴트 자국 선명하다
예전에 외할머니가 빼놓은 틀니 같다
합죽이 할머니가 히죽히죽 웃는 틈새에 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내 얼굴에 적힌 유행 지난 표정들 진화론을 읽는 요즘 아이들은 지금 열심히 진화 중이다 -------------------------------------------------
나무늘보
느림의 미학 게으름뱅이 나무늘보가 된 나의 애인은 지금 유칼립투스 나무 위에 한가하다
한 끼에 겨우 한 두 이파리씩 소량의 나뭇잎으로 소식小食 소심한 배를 채운 뒤 그늘 푸른 나무를 끌어안고 온종일 잠만 잔다
게을러터진 평화주의자
태평한 나의 애인 그는 오늘도 느린 시간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초고속으로 변하는 세상사 따위엔 관심도 없다
바쁠 거 하나 없는 이 한량은 몸을 축 늘어뜨리고 세 시간이든 열세 시간이든 깨어 있다 하더라도 만사가 다 귀찮다
나무 아래 아랫동네가 온통 뒤집힐 정도로 거창한 배변 똥마려우면 그까짓 똥 한번 푸짐하게 나무밑둥치가 썩어 문드러지도록 목숨 걸고 싸 제친 뒤 나무 위로 올라가 자신도 모르는 깊은 잠속에 다시 파묻힐 수 있단다
려 원 2015년 《시와표현》으로 등단. 시집 『꽃들이 꺼지는 순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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