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여덟 달의 존재 증명
이재욱|문학뉴스 대표
1978~2024. 따지고 보니 46년 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너무 오래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거부해 왔던 것처럼 비칠는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왔던 셈이다. 그런데 남정국 시집 『불을 느낀다』를 출간하면서 시인의 마지막 여덟 달 동안 가장 가까운 물리적 거리에서 시인과 부대꼈던 사람으로 지목되어 1978년 그 시절로 돌아가야 할 핑계를 얻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마지막 여덟 달의 존재 증명은 가능할까? 범죄로 살았던 기간이 아니니 ‘현장 부존재 증명’에 해당하는 ‘알리바이’는 아니다. 오히려 알리바이와는 반대로 마지막 여덟 달 동안 시인과 함께 만나고 어울렸던 사건과 상호관계에 대한 존재 증명이 필요할 터이다.
46년의 세월 탓이 아니더라도 형편없는 기억력으로 완벽한 존재 증명은 어불성설이다. 얼키설키 모아본 기억의 파편들은 고분에서 깨진 조각들을 발굴하여 이리저리 땜질한 박물관의 토기나 한쪽 귀퉁이의 이빨이 빠진 채 길가에 버려진 막사발처럼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구석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더구나 민망스러운 노릇은 시인 남정국의 생애를 한 부분이나마, 그것도 마지막 부분을 복원한다는 거창한 명분임에도 실은 필자의 어지러운 발자취만 더듬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남정국을 떠올리면 우선 ‘겅중겅중’이란 표현부터 생각난다. 1978년 3월 말경, 의지가지없이 교양관으로 교양 영어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 키가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녀석이 ‘겅중겅중’ 다가와선 대뜸 ‘당신이 그 사람이냐?’고 물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는데, 끝나고 기다리라는 말까지 덧붙였던 것은 물론이다.
‘의지가지없이’라고 한 데는 까닭이 있다. 1975년 3월 3일 입학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3월 31일에 첫 시위가 있었는데, 며칠 지나자 휴교령을 동반한 긴급조치 7호가 내려지고, 군인들이 교정에 주둔하여 학교에는 출입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바람에 휴학계도 제출하지 못한 채 군에 입대해야 했는데, 군 복무 중에 ‘제적 조치’를 했다고 통보받고는 혼비백산하여 휴가를 나와 ‘제적 조치’는 복학이 가능하다는 언질을 받기까지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그렇게 꽉 막힌 촌놈이다 보니 1978년 복학했을 때 입학 동기들은 모두 4학년이거나 입대했고, 교양학부 수업 시간에 아는 사람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게 의지가지없을 때 남정국이 처음으로 찾아와 아는 체를 하는 바람에 얼마나 든든했는지 모른다. 건장한 허우대에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느껴지는 말투가 그렇게 반갑고 믿음직스러울 수 없었다. 뿐인가. 모교 문예반 아지트였던 학교 앞의 중국집 ‘치미루’에서 고량주 마셨다는 고등학교 문예반 후배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니, 교양 영어 수업 끝나자마자 그날 일과를 작파하고 막걸릿집으로 직행했던 것은 불문가지였다.
고등학교 문예반의 인연으로 고대문학회의 문도 작당하여 함께 두드렸다고 기억한다. 모교 문예반 한 해 후배로 입학 동기인 이남호(문학평론가, 고려대 부총장 역임)가 고대문학회에서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교지 《고대문화》의 편집장을 맡고 있을 때여서 고대문학회 활동은 정해진 길처럼 받아들여졌다. 특히 남정국은 문과대 인문계열에서 철학과를 지망했고, 필자는 철학과 복학생이었으니 그야말로 ‘아삼륙’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문학회의 단골집 ‘학사주점’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안주라고 해봐야 생두부나 노가리 수준이면 금상첨화이고, 대개는 안주 없이 마시는 강술로 막걸리나 소주가 보통이었다. 오전부터 저녁 느지막할 때까지 언제든 학사주점으로 가면 고대문학회 회원 한두 사람은 만날 수 있었다. 교련 군사훈련을 위해 문무대로 입소하는 바람에 중단되긴 했지만, 두 달 넘도록 하루도 거르지 않는 고주망태였으니 필자에게 학사주점은 강의실보다 훨씬 가까웠던 셈이다.
굳이 학사주점을 거론한 까닭이 있다. 1978년 봄학기에 필자 역시 학사주점을 무대로 진을 치고 마시던 단골 중의 단골이었고, 바늘 가는 데 실 가듯이 남정국도 자주 자리를 지켰다. 학사주점을 지키기는 해도 남정국이 고주망태로 추태를 보이거나 민폐를 끼친 적은 없었다. 선배랍시고 주정뱅이 뒤치다꺼리하느라고 통금 걱정하며 귀가하는 날이 많았지 싶다.
‘겅중겅중’하며 씩씩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술을 마시더라도 동패들을 챙겨 업어줄망정 남에게 업혀 갈 일은 결단코 용납하지 않았고, 무예 수련이라도 하는 고수처럼 스스로 자신을 다잡았던 기억이 난다. 음주 후유증에 대한 남정국의 표현으로는 ‘노란 위액이 목구멍으로 올라올 정도로’ 마셨다는 말이 전부였던 듯싶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남정국을 진심의 호위무사나 보호자처럼 의지하고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문예반 선후배라는 인연에서 비롯하여 고대문학회에 함께 속해 있으면서도 작품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지는 않았다. 문학 또는 시를 두고 속내를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불을 느낀다』에 실린 작품들의 상당수가 1978년에 씌어졌다는 사실로 미뤄볼 때, 남정국이 씩씩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자기 작품을 남들에게 내보이는 행위를 자못 쑥스러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부분에서는 필자의 책임도 크다. 군에 가기 전의 습작들로 문학회 활동을 메꾸면서 술 마시기에만 급급했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매주 금요일에 합평회가 열렸는데, 언젠가 남정국의 작품이 도마 위에 올랐다. 어떤 작품이었는지 내용은 떠오르지 않고 시어(詩語)에 대해 설왕설래했던 기억이 난다. 팬티냐, 빤스냐, 빤쯔냐를 두고 서로 실랑이를 벌였는데, 남정국은 ‘빤쯔’가 맞는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 근거로 해운대나 광안리 바닷가에서 사제 내복을 입고 해수욕하는 악동(惡童)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기발한(?) 고집에는 아무도 당할 재간이 없었다. 사실 필자 역시 여름이면 거의 발가벗다시피 강물에서 보내던 하동(河童)의 경험이 있는지라 남정국의 주장에 박수를 치기도 했다.
남정국과의 긴밀한 동행이 다소 느슨해진 것은 문무대 입소 이후부터였다. 문무대 훈련을 다녀온 뒤로 곧장 여름방학이 되기도 했지만, 방학이 끝나 가을 학기가 시작된 다음부터는 남정국의 거동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고대문학회에 발길이 뜸해지면서 어딘지 ‘공부’를 하러 다닌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당시만 해도 조금 행동이 수상(?)하거나 사회과학 서클 근처에 얼쩡거리면 굳이 아는 체하지 않고 눈 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이념 서클의 ‘공부(Study)’가 유행하던 참이었고, 알게 모르게 응원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남정국이 대성리로 엠티를 가서 사고를 당한 날은 고대문학회의 시화전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남정국은 해마다 열리는 시화전에 작품을 내놓지도 않았다. 11월 3일 시화전은 막을 내렸고, 뒤풀이를 위해 우이동에서 밤새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고대문학회 회원들 여럿이 북부경찰서로 연행되어 다음 날 학생처에서 인수하러 오는 등 한바탕 활극을 벌이고 있을 때 사고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주검을 뒤따랐던 과정들이 건성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남정국을 기억으로부터 망각의 감옥으로 유폐하기 위한 일련의 가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굳이 스스로 도망치려고 몸부림치지 않더라도 이렇게 『불을 느낀다』라는 시집으로 부활하는 모습을 보게 마련이다. 비록 46년이란 시공을 건너뛸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