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울산서 창립한 애국단체
박병호·오덕상·김좌성 주축으로
지역발전·후진양성 등에 팔걷어
왜성복원, 왜경의 회유·협박에도
개원식 불참…민족 자존심 지켜
민우회의 용기와 명분 되새겨야
새해들어 울산 중구청이 조선시대 정유재란 최대격전지였던 울산왜성의 복원계획을 발표했다. 중구청은 성을 복원하면서 울산왜성의 전투 이야기도 찾아내어 울산왜성을 울산 시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본인들까지도 찾는 관광지로 개발한다는 계획이다.
울산왜성은 정유재란 당시 가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설계하고 오오다(太田一吉 )가 축성의 감독을 맡았다. 성 쌓기에 동원된 병력은 1만6000여 명으로 이들은 대부분 왜병들이었다. 울산왜성은 일본인들이 쌓았지만 이 성에는 왜병을 몰아내기 위해 우리 조상들이 흘린 피와 땀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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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왜성은 정유재란때 가토오 키요마사가 축성한 성이다. 울산사람들에게는 울산학성공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돼 있었으나 일제 관련 문화유산에 대한 정부차원의 조처로 인해 울산왜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지방문화재 자료로 강등됐다. |
종류별로 보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성을 가진 도시가 울산이다. 병영성과 읍성이 있고 다른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왜성만도 울산왜성과 서생성 등 2개나 된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이 세웠던 산성과 조선시대에는 조정에서 말을 키우도록 한 마성까지 있는 도시가 울산이다.
특히 중구처럼 한 지역에 병영성과 읍성이 같이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성은 그 하나하나가 역사의 매듭이고 사람의 발자취다. 유난히 외침이 잦았던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나 성을 만날 수 있고 따라서 성 앞에 설 때마다 우리들은 조상들의 고달팠던 삶을 생각하면서 머리를 숙이게 된다.
최근들어 성이 귀중한 문화재가 되면서 지방자치 단체들이 앞 다투어 성 복원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왜성 복원에 대해서는 아직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예로 90년대 말 울주군이 울산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을 위해 서생포왜성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자 많은 군민들이 우리 문화재들 중에도 복원해야 할 유적이 많은데 왜 군민들이 낸 세금으로 울주군이 왜성 복원을 서두르냐면서 반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생포 왜성이 단지 일본인들이 쌓은 성이라는 이유로 복원을 반대했다는 것은 명분이 약했다.
이와는 달리 일제강점기에도 울산왜성 복원을 놓고 울산의 애국 단체가 반대한 적이 있는데 그 때는 명분과 용기가 있었다. 1928년 3월 31일 동아일보에는 울산군이 울산왜성을 거액의 군비를 들여 복원하려고 하자 울산의 애국 단체인 민우회가 이 사업이 군민 정서상 맞지 않다면서 반대한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민우회가 성 복원을 반대한 것은 울산왜성이 왜장인 가토오 키요마사에 의해 세워졌고 성 복원 후 이 성에서 죽은 왜병들의 초혼제를 올리려는 계획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우회는 1927년 1월 울산에서 창립된 애국단체다. 3·1 운동 후 울산 군민들은 군민의 단결만이 일제의 착취에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해 군민 단결을 촉구하는 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민우회 역시 그동안 울산에서 조직된 청년단체들이 지역 사회 문제와 일제 착취에 너무 방관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우려해 만들어졌다. 울산지역 장년층이 중심이 된 이 단체는 창립 후 우선 청년들의 해이한 정신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들은 창립총회에서 지역발전과 민중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고 특히 후진 양성을 위해 청년들의 교육에 힘쓸 것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당시는 일제 암흑기로 이들의 이런 결의 속에는 일제가 펼치는 각종 식민지 정책을 반대하는 뜻이 숨어 있다.
이들은 회의 장소도 시내 공공장소로 정하지 않고 백양사와 해남사 등 울산 인근 사찰로 정하고 회의도 회원들 집에서 개최했는데 이런 행동 속에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려는 깊은 뜻이 있다.
이들은 이후 울산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전달하고 또 당시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울산전기회사가 충분한 전력을 공급하지 않으면서도 전기료를 인상하고 요금을 강제로 징수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는 시민운동을 벌였다. 또 당시 수리조합이 지주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를 반대하는 군민 성토대회를 여는 등 일제의 강압·착취 정책에 맞섰다.
이 단체는 이후에도 지역활동에 적극 참여해 울산청년동맹과 신간회 울산지회와 함께 1920년대 후반 울산지역 사회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민우회는 당시로는 획기적 사업인 경로당과 유치원 설립을 추진했는데 당시 울산의 거부 오덕상이 나중에 울산에서 사설 유치원을 처음으로 설립한 배경에는 민우회의 이런 노력이 있었다.
민우회를 이끌었던 인물로는 박병호와 오덕상, 김좌성이 있다. 민우회 총무였던 박병호는 당시 동아일보 울산지국 기자로 농촌순회 좌담회를 개최하고 지역 유지들과 함께 직접 농가를 돌면서 어려운 농민들의 실상을 언론을 통해 대외적으로 알리는 등 농민들의 권익보호에 앞장섰다.
박병호는 또 울산에서 청소년 교육을 위한 학교를 운영했는데 이 학교가 혜영학원이었다. 그는 이무렵 일제의 침략 흉계를 폭로·고발하는 <혈가사>라는 탐정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책이 왜경에 의해 압수되기도 했다.
일제 말 울산의 체육발전을 위해 체육인으로도 활동했던 박병호는 아들 태일(泰一)이 해방 후 울산청년단 훈련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후 6·25 직전 벌어졌던 옹진전투에서 전사했다. 따라서 아들의 미망인과 자녀들이 최근까지 복산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번에 글을 쓰면서 유족들을 찾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오덕상과 함께 일제 강점기 울산을 대표했던 부자 김좌성은 일제 강점기 울산농고를 건립할 때 거금을 희사했던 인물이다.
1928년 3월 경 울산군이 ‘울산성지보존회’라는 민간단체를 앞세워 울산왜성을 복원하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울산성지보존회는 이 계획에서 임진왜란 때 울산왜성에서 죽은 왜병을 추앙하는 불망비를 세우고 또 이들을 위한 초혼제도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민우회 회원들이 일어나 울산왜성이 임란 때 일본 장군인 가토오 키요마사가 축조한 성으로 이 성을 보존하기 위해 거액의 군비를 들여 공사를 한다는 것이 지역민의 정서에 맞지 않다면서 반대했다. 민우회는 나아가 이 성이 일본 왜장이 세워 문화적 가치가 있는 유적이 아니라면서 군청이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즉시 거두어야 한다고 성토했다.
울산군은 이 사업에 당초 6000원의 거액을 투입할 계획을 세워 놓았다. 그러자 민우회는 군청이 군민들의 어려움은 생각지 않고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면서 나무랐다. 아울러 민우회는 울산군이 이 사업을 꼭 하려면 군민들의 여론을 확인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자 울산군 관계자는 “울산왜성을 복원하는 것이 읍지에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귀중한 고적을 보존하자는 뜻이며 더욱이 최근 공원용지를 제공한 김홍조옹의 유지를 살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려는 것이지 초혼제는 계획하지 않고 있다”고 한 걸음 물러섰다.
또 울산왜성이 행정구역내에 있는 울산면도 공원과 성지는 별개 문제라면서 1만3000여명의 인구를 가진 울산면으로 볼 때 적당한 공원용지가 필요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울산면은 또 울산왜성은 읍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오르내릴 수 있는 장소로 김홍조옹이 이 땅을 기증해 공원 용지와 산림의 대부분이 군유지가 되어 사업 추진에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변명하고 있다.
민우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울산왜성 복원은 공사를 마치고 개원식을 거행했다. 물론 이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민우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왜경들은 회유와 협박을 계속했다. 그러나 당시 보도를 보면 민우회 회원들 모두가 이 사업을 반대하는 뜻으로 개원식에 참여하지 않아 민족의 자존을 지켰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경찰은 물론이고 행정관서 고위직은 대부분 일본 사람들이 차지해 지역의 사회단체가 행정관청이 벌이는 사업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더욱이 왜장이 쌓은 성을 복원하고 이 싸움에서 전사한 왜병들을 추모한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말한다는 자체가 용기가 필요했다. 민우회 회원들이 이 사업을 막지는 못했지만 사업 자체를 반대하고 개원식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중구청이 이번에 울산왜성을 복원하면서 외형적인 복원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민우회의 이런 용기 있었던 행동도 복원 계획에 담는 것이 청소년 교육과 후손들에게 애국심을 심을 수 있는 바람직한 복원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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