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피
2013.05.05 황금모
새벽에 안개가 짙었다. 카메라를 들고 근처 저수지로 나갔다. 밤을 지새운 강태공들이 어슴푸레 윤곽만을 드러낸 채 여기저기 풍경의 일부가 되어 웅크리고 앉아 있다. 밤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목적으로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
행여 방해가 될까봐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물속에 허리까지 잠긴 채 새 잎을 막 피워 올린 버들이 안개에 묻혀 마치 신기루처럼 허공에 떠있다. 자연이 빚어낸 수묵화, 그 누구도 만들어 낼 수 없는 명작 중의 명작이었다. 이리 저리 홀린 듯이 셔터를 눌렀다.
갑자기 저만치서 푸득 푸득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제법 큼직한 붕어가 펄떡이고 있었다. 낚시꾼들이 잡아넣은 그물망에서 탈출한 것인가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조금 먼 거리였다. 그러고 보니 붕어들은 그 곳뿐만이 아니라 언덕 위 아스팔트 포장 도로 위에서도 몇 마리가 퍼덕거리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물가로부터 제법 떨어진 거리인데..
일단은 그들이 살아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 끼고 손으로 붙잡아 물기로 가서 던져 넣었다. 삶을 향한 붕어들의 필사적인 힘이 손끝에 강하게 전해졌다. 대여섯 마리는 족히 됨직한 녀석들을 하나하나 잡아다 물속으로 들여보내고 나니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잠깐 동안의 일이었지만 참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었다. 한편에서는 밤을 새워 고기들을 낚아 올리고, 나는 한 마리라도 살리겠다고 물가에 놓아주고. 만약에 그것들이 낚시꾼들이 건져 올린 망에서 도망친 것이라면 돌려줘야 되는 건 아닌지, 아니야, 물속으로 살려 보내길 정말 잘했어 하는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 했다.
하지만 한 쪽으로 훨씬 더 기우는 마음은 역시 살려주기를 잘 했다는 쪽이었다. 시야가 밝지 않아서 확인을 못했지만 상처는 없었는지, 물속으로 돌아가서도 제대로 살 수는 있을지 걱정스런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낚시가 일반인들이 즐길 수 있는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심신을 단련하는 건전한 레저로 인식이 된다 하더라도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언제부턴지 집 안에 들어온 거미 한 마리도 그냥 밖으로 몰아내게 되었다. 또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도중에 그쳐버린 삶을 보면 오래도록 마음이 쓰였다. 어떤 종교적인 이유나 거창하게 생명의 소중함을 논해서도 아니다. 그냥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작년 가을에 구피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관상어를 열여덟 마리 분양받았다. 부화한 지 열흘 된 것이었는데 내 눈으로는 형체는 보이지 않고 다만, 검정 볼펜으로 백지위에 콕 찍어놓은 것 같은 점 두 개만이 보였다. 바로 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피의 몸체 중 가장 큰 부분이 눈이었고 한 쌍의 까만 점이 한 마리의 개체였다. 어항을 들여다보면 까만 점 열여덟 쌍이 부유물처럼 떠다녔다. 머리가 어디고 몸체가 어디며 그 아름다운 꼬리는 대체 어디에 숨어있단 말인가.
한 달 쯤 지나니 검은 점 뒤로 어렴풋이 투명한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5mm 쯤 되던 것이 1cm 쯤 되면서부터는 일부러 들여다보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여전히 색은 띄지 않고 투명한 채로 조금 더 자라더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그 뾰족하던 몸통 끝에 하늘하늘 부채꼴 모양의 꼬리가 생겨난 것이다. 가슴이 뭉클했다. 새삼스럽게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그 후로 조금씩 푸른색과 붉은색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몸체에 검은 반점도 생기고 꼬리는 점점 화려하게 커졌다.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몸 전체의 길이가 3cm 정도로 자랐고 꼬리지느러미는 얼마나 아름답게 변해 가는지 하루하루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같다. 점 하나에서 시작해 몸체가 생기고 꼬리가 생기고 지느러미도 생기고 화려한 색깔도 나타나고, 그것들을 들여다보면서 어찌 생명이 경이롭지 않고 소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이가 들면서 살아있는 것에 대해 애틋함을 더해가게 될 무렵, 구피와의 만남은 내게 무관심에서 관심으로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작은 것에도 눈길을 주고 보이지 않는 것에도 마음이 머물 수 있게 되었다.
해 저물녘에 다시 저수지에 나가 보았다. 여전히 레저를 즐기는 사람들이 저수지를 찾았고 아랑곳없이 산벚꽃은 흐드러졌다. 멀리 산비둘기들도 구구구 울었다. 며칠 전 내가 놓아 준 물고기들의 그 후의 삶이 궁굼해 잔물결지는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첫댓글 정말 선생님 수필은 읽기도 편하고 마음에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