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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 大用無盡
오늘 48쪽 화엄경 48쪽 중간에 대용무진(大用無盡)이라고 하는 그 과목부터 할 차례인데 저 앞에서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아서 그 광명에 대한 여러 가지 공덕, 그 광명을 본 사람들 광명을 입은 사람들의 이익, 이런 것을 쭉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계속 지금 이어지고 있습니다.
광명(光明)이라고 하는 것은 두말할 것 없이『우리 마음이 환희 밝아진 그런 부처님의 지혜 그것을 우리 마음이 밝아질 수 있는 데까지 밝아진 상태 더 이상 밝아질 수 없을 그런 최상의 밝은 상태』를 광명이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태양이 이 세상 광명 중에 빛 중에 가장 밝은 빛이다 라고 그렇게 하는데 우리 마음의 빛은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 이다.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 같은 그런 밝은 상태다. 그렇게 표현을 해요. 지금 우리 공부하는 여기에 이 화엄경에 입법계품에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화엄경 안에 그런 말이 있어요. 유여천일출(猶如千日出)이라. 천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 같은 그런 상태 그렇습니다. 마음이 밝아지면 그늘도 없죠. 태양은 그늘이 있고 또 태양이 뜬 저 편에는 밤이고 그런게 있는데 마음의 광명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또 우리 수행과 마음가짐, 자기가 닦은 공덕, 또 자기의 마음씀씀이, 여기에 따라서 개인의 마음의 빛이 마음의 밝음의 정도가 각양각색입니다. 차별이 아주 많아요. 우리 등도 조그마한 5촉짜리 3촉짜리도 있고 뭐 10촉짜리 20촉짜리 50촉 100촉 200촉 뭐 이런게 이제 전구에도 밝기가 다양하듯이 우리의 마음도 근본은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아요. 하나이지마는 그러나 이제 우리가 얼마만치 갈고 닦느냐에 따라서 우리 마음의 밝기는 각양각색입니다. 그래서 기도다 참선이다 염불이다 온갖 수행방법을 부처님이 소개를 하는데 결국은 그 각양각색의 수행방법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자고 하는 것이냐? 결국은 우리의 마음의 밝기를 극대화 하자고 하는 것, 마음을 한껏 밝게 하자고 하는 것, 뭐 그런 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국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면 다른 문제는 다 그 속에 포함되어 있어요. 마음이 밝으면은 무엇이 소중한 것이고 무엇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고 하는 것도 알 수가 있고요. 어떤 것이 값진 것이고 값지지 않은 것도 알 수가 있고, 이런 것을 그냥 다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태양이 이렇게 밝고 밝으니까 길과 길 아닌 것을 알고요. 낭떠러지와 평탄한 길을 알고, 험한 길과 또 그렇지 아니한 길, 막혀있는지 트여있는지, 이런 것을 전부 알 수 있습니다. 또 뭐 길에 뭐 돌이 떨어져있는지 돈이 떨어져있는지, 돌과 돈도 분별할 줄 알아요. 빛이 있음으로 해서 그게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지혜의 광명이 있을 때, 우리 인생의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것이 소중하고 어떤 것이 소중하지 않은지, 무엇이 값지고 무엇이 값지지 않은지, 이런 것들을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뭐 마음만 밝혀내면 마음만 환하게 밝혀버리면 사실 모든 문제 해결이 그 가운데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천 번 수만 번 마음의 밝음 다시 말해서 지혜의 빛을 밝히는 문제에 대해서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여기 뭐 수 없이 그렇게 했죠. 아마 이 저 한 권의 경전 안에 지혜지자를 찾아내기로 하면 수천 번 수만 번 나올 거야 아마. 그만치 지혜를 강조하고 그만치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기본이고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렇게 이해를 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큰 작용이 다함이 없다 그래요. 우리 마음의 큰 작용에 대해서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한계가 있는게 아니에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함이 없는 큰 작용, 결국 우리 마음밖에 없어요.
가끔 말씀드리지마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그 다음 저녁에 잠들기까지 그 쓴 마음의 양이 도대체 얼마겠습니까? 이루 말할 수 없어요. 한 시간에 사용한 마음의 양만하더라도 사실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뭐 한 달 두 달 일년 이년 일생 이생 수만 생을 거듭하면서 그 많은 마음을 썼는데 그 마음의 작용 그것은 그야말로 무진(無盡)입니다. 무궁무진(無窮無盡)이죠. 그래서 대용무진(大用無盡)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이제 부처님이라고 하는 이름, 보살이라고 하는 그런 이름을 빌어서 표현을 하고 있지마는 결국은 우리 마음의 끝없는 작용, 그야말로 그 끝을 모를 깊이와 끝 모를 높이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삼매광명(三昧光明)의 현상(現相)이라.
1. 三昧光明의 現相
삼매광명, 삼매(三昧) 그 자체가 마음의 광명이기 때문에 삼매가 있음으로 해서 마음의 평정을 찾으면 어느 정도 지혜가 생기게 돼 있어요. 대개 물에 흔들려버리면 그 물속에 뭐가 있는지 또 그림자가 잘 안 비치죠. 그래서 삼매(三昧)와 광명(光明)은 둘로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선 삼매를 마음의 평정이다 안정이다. 선정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런 마음이 지극한 안정에 들어갔을 때 저절로 광명 지혜는 나게 돼 있다.
다시 말해서 물이 어떤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고 누가 흔드는 그런 영향도 받지 않고 안정된 상태로써 고요히 며칠 있으면은 저절로 흙탕물은 가라앉고 아주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환하게 밝아지는 거지요. 그것을 삼매광명 이렇게 이해를 해도 좋을 것입니다. 밝으면 저절로 안정이 되면 밝으면 저절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도 안정이 되면은 그나마 우리의 지혜는 나타나게 돼있지요. 지혜가 안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우리가 뭐 어떤 현상에 의해서 막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삼매광명을 이해하는 거지요.
爾時에 彼諸菩薩이 以佛三昧光明照故로 卽時에 得入如是三昧하야 一一皆得不可說佛刹微塵數大悲門하야 利益安樂一切衆生호대 於其身上一一毛孔에 皆出不可說佛刹微塵數光明하며 一一光明이 皆化現不可說佛刹微塵數菩薩하니 其身形相이 如世諸主하야 普現一切衆生之前하야 周帀遍滿十方法界하야 種種方便으로 敎化調伏하니라
이시에 피제보살이 이불삼매광명조고로 즉시에 득입여시삼매하야 일일개득부가설불찰미진수대비문하야 이익안락일체중생호대 어기신상일일모공에 개출불가설불찰미진수광명하며 일일광명이 개화현부가설불찰미진수보살하니 기신형상이 여세제주하야 보현일체중생지전하야 주잡변만시방법계하야 종종방편으로 교화조복하니라
그 때에 제(諸) 모든 보살들 시방(十方)에서 모인 보살입니다. 저 앞에서 시방에서 보살이 모여오고, 그들이 또 뭐 게송으로 찬탄을 하고, 거기 우두머리보살은 누구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저 앞에서 있었죠. 그럼 이제 여기서 시방에서 모여온 보살 그들이 부처님의 삼매광명의 비침을 쓴 고로 부처님의 삼매광명(三昧光明)이야. 부처님의 삼매광명이 비침을 쓴 까닭에 즉시(卽時)에 득입(得入)했다. 어디에 득입했느냐? 들어갔다 얻었다 이 말인데 여시삼매(如是三昧), 부처님의 삼매광명 그와 같은 삼매에 득입해서 낱낱이 다 얻었다.
무엇을 얻었는고 하니 불가설불찰미진수대비문(不可說佛刹微塵數大悲門)을 얻었다. 여기서 불가설불찰미진수(不可說佛刹微塵數)라고 하는 말이 앞에서도 나왔고 뒤에도 아주 여러 번 계속 나올 겁니다. 그렇게 계속 나오는데 이건 무슨 말인고 하면은 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그 숫자의 최대단위다.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수(數)를 이야기할 때 불가설(不可說), ‘아이고 말로 다 할 수가 없어’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한 단위의 일종이에요. 불가설이라고 하는 것도. 말뜻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렇게 돼 있지마는 그건 불가설이란 뜻이고, 불찰(佛刹)이라는 말은 세계 이 지구하나를 가지고 불찰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러면 미진(微塵)이라는 말은 뭔 말이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세계 그 세계를 먼지로 만들었을 때 부숴서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먼지 숫자 그 미진숫자와 같은 그런 수를 불가설불찰미진수(不可說佛刹微塵數) 그럽니다.
불가설불찰(不可說佛刹)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밤하늘을 쳐다봤을 때 그 수많은 별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많은 별들을 그렇게 이해해도 좋아요. 그러면 그 수많은 별들을 먼지로 미진(微塵)으로 만들었을 때 그 미진의 숫자와 같은 그런 숫자. 그런 많은 대비문(大悲門) 대자비의 문을 얻었다. 이 보살들이.
전부 그렇게 우리는 자비도 뭐 한두 번 쓰면 바닥이 나지요. 어쩌다 마음 한번 내서 쓰면 뭐 한두 번 쓰고 조금 이제 보살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래도 좀 더 쓰고 뭐 아예 없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용을 써야 자비심이 좀 나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살들은 부처님의 그런 삼매광명(三昧光明)을 입은 까닭에 불가설불찰미진수(不可說佛刹微塵數)의 대자비(大慈悲)의 문(門)이 있다 이거야. 그런 것을 얻었다.
그래가지고 이익안락일체중생(利益安樂一切衆生)한다. 일체중생들을 이익하게 하고 안락(安樂)하게 이익만 있으면은 즐겁다는 뜻은 아니죠. 물론 이익 때문에 즐거울 수도 있습니다마는 이익 그 자체가 즐거움은 아니에요. 그래 이익도 주고 안락도 줘야 돼. 일체중생(一切衆生)을 이익(利益)하게하고 안락(安樂)하게 하되 어기신상일일모공(於其身上一一毛孔)에 그들의 신상(身上) 낱낱 모공에 개출불가설불찰미진수광명(皆出不可說佛刹微塵數光明)하며 그 보살들 보살들의 신상 몸 모공(毛孔)에 불가설불찰미진수의 광명을 또 내어가지고서 그 낱낱 광명이 다 화현(化現)한다. 이거 변화해서 나타낸다. 화현(化現). 우리가 화현이란 말 하지요. 뭐 불보살님이 화현했다. 무슨 나한님이 화현했다. 이런 말을 잘 씁니다. 불교에서는 화현(化現)이란 말을 잘 써요. 실재하지 않는 또는 뭐 과거에 지나가신 성현들이 어떤 그 모습을 나타냈을 때 그것을 우리가 화현 이런 표현을 하지요. 그러면은 낱낱 광명에서 불가설불찰미진수 보살을 또 화현을 해. 그 보살을 낱낱 모공에서 불가설불찰미진수 광명을 내고 그 낱낱 또 광명에서 불가설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을 또 화현(化現)을 해 나타내.
기신형상(其身形相)이 여세제주(如世諸主)하야, 그런데 그 보살들의 모습이 세상의 여러 주인들과 같아. 세상주인(世上主人)과 같다라고 하는 말은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이라고 해서 화엄경 39품의 첫 품이 세주묘엄품인데 거기는 이제 모든 존재가 세상의 주인이에요. 그러나 말뜻만 가지고보면 예를 들어서 한 단체의 단체장 한나라의 대통령 뭐 왕 또 어느 한 지역의 도면 도지사 이런 정도를 가지고 세주, 세상의 주인 뭐 말뜻은 그러나 근본 뜻은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전부 세상의 주인이다 그렇게 볼 수가 있어요. 그래 세주묘엄품에 보면 온갖 사물들, 뭐 바람, 물, 불, 뭐 이런 것까지 전부 세주(世主)로 세상주인으로 이야기를 하는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 이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데도 뒤에 조금 있으면 그게 나와요.
그 모습이 그와 같아서 보현일체중생지전(普現一切衆生之前)하야 일체중생의 앞에 널리 이제 나타나서 주잡변만시방법계(周帀遍滿十方法界)라. 시방법계에 두루두루 가득히 차서 종종방편(種種方便)으로 교화조복(敎化調伏)한다. 가지가지 방편(方便)으로써 교화(敎化)하고 조복(調伏)한다. 가지가지 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의 성격이 각각 다르고 그때그때 또 마음의 상태가 또 다르고 중생의 업이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다르고 모두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적합한 방편이 필요하지요. 그러니까 가지가지 방편이야. 그래 불교에는 참 방편이 많아요. 별별 방편들이... 별별 방편들이 있는데 그런 방편을 종종방편(種種方便). 그런 방편으로써 교화(敎化)하고 조복(調伏)한다. 교화(敎化)는 잘 가르친다 사람되게 化자는 될 화자거든요. 뭔가 만들어가는 것을 화(化)라고 하고. 가르쳐서 되게 하고 또 조복(調伏)이라고 하는 것은 잘 다스린다. 그리고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 사람이 탈 수 있도록 하는 상태를 조복 그래요. 뭐 말이 잘못된 건 아니죠. 그러나 말이 말을 잘 듣고 지멋대로 하지 않고 사람을 다치지 않고 하는 그런 상태를 조복한다. 교화하고 조복한다.
2. 種種門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諸天宮殿無常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一切衆生受生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一切菩薩修行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夢境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菩薩大願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震動世界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分別世界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現生世界門하니라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제천궁전무상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일체중생수생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일체보살수행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몽경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보살대원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진동세계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분별세계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현생세계문하니라
그래 종종문(種種門)을 여기서 소개하는데 그래서 그 보살들이 혹현(或現), 나타낸다. 어떤 것을 나타내는고 하면 중생을 교화(敎化)하느라 나타내는 거에요. 종종문(種種門)하고 밑에 또 십바라밀(十波羅密)과 지혜의 문(智慧의 門) 이런 것들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나타내는 문(門)입니다.
혹현(或現) 혹은 나타낸다 무엇을? 불가설불찰미진수제천궁전무상문(不可說佛刹微塵數諸天宮殿無常門), 모든 하늘의 궁전이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 그 화려한 궁전 하늘의 천상에 있는 궁전이 무상하다고 하는 도리를 현(現), 나타낸다 이거에요. 너무 우리가 좋은 곳에 빠져있어도 그것도 문제가 되지요. 그 훌륭한 하늘의 궁전이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또 혹현(或現) 불가설불찰미진수일체중생수생문(不可說佛刹微塵數一切衆生受生門)을 나타낸다. 일체중생이 수생(受生), 생(生)을 받는 문(門), 태어나는 문이에요. 중생들 따라서 사람은 뭐 태로 태어난다면은 알[卵]로 태어나는 중생, 화(化)로 태어나는 중생, 온갖 그런 그 살아가는 문(門), 삶을 태어남을 받는 뭐 수생(受生)이라고 하는 단순한 뜻은 그런데 살아가는 모습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혹(或)은 불가설불찰미진수일체보살수행문(不可說佛刹微塵數一切菩薩修行門)을 나타낸다. 보살 수행문(修行門) 뭐 다른 거는 생각할 것 없고 수생문(受生門), 보살 수행문(修行門) 그 말의 끝에만 줄을 그어놓으면 무슨 뜻인지 알지요. 보살이 수행하는 것도 각양각색이니까 그래서 보살들의 광명 가운데 보살의 수행하는 방법도 나타내고 또 불가설불찰미진수 몽경문(夢境門)하며, 꿈속의 경계와 같다고 하는 그런 도리(道理)도 혹은 나타낸다.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의 보살대원문(菩薩大願門) 보살은 큰 대원(大願)을 세우는 것이 보살이거든요. 그 범망경(梵網經)에 보면은 보살이 원력(願力)을 세우지 아니하는 것도 보살로서 도리(道理)가 아니다 그런 말이 있어요.
이 원력(願力)이라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이 모든 사람은 자기 어떤 꿈과 기대와 희망이 있어야 돼요. 그것을 불교에서는 원(願)이라고 그래요 대원(大願). 그 꿈과 희망이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더욱 좋은 것이고 뭐 자기만 이익하고 자기가족만 이익하게 하는 것도 그것도 일종의 원(願)은 원이에요. 그러나 그건 이제 너무 좁은 원이라면 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또 내가 많은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어떤 지혜를 달고 다닌다든지 뭐 돈을 벌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도 이것을 이제 많은 사람에게 회향(回向)하겠다 라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지위가 높아지고 돈을 벌고 하는 그런 것들도 역시 보살의 대원(大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그 많고 많은 보살의 대원(大願)을 나타내기도 한다.
또 혹현(或現) 불가설불가설불찰미진수 진동세계문(震動世界門), 세계를 진동(震動)하는 거에요. 세계를 진동하는 막 이렇게 뒤흔들어가지고 사람을 정신나게 한다든지 하는 그런 모습도 나타내고.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분별세계문(分別世界門), 세계를 분별하는 그런 문도 나타낸다.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현생세계문(現生世界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의 어떤 그 세계 그런 것도 이제 나타낸다.
그 다음에 이제 계속돼요. 과목이 이제 하나 십바라밀(十波羅密)하고 지혜의 문(智慧의 門)이라고 이게 과목을 넣었습니다마는
3. 十波羅密과 智慧의 門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檀波羅蜜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一切如來修諸功德種種苦行尸波羅蜜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割截肢體羼 提波羅蜜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勤修毘梨耶波羅蜜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一切菩薩修諸三昧禪定解脫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佛道圓滿智光明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勤求佛法에 爲一文一句故로 捨無數身命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親近一切佛하야 諮問一切法호대 心無疲厭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隨諸衆生의 時節欲樂하야 往詣其所하야 方便成熟하야 令住一切智海光明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降伏衆魔하고 制諸外道하야 顯現菩薩福智力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知一切工巧明智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知一切衆生差別明智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知一切法差別明智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知一切衆生心樂差別明智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知一切衆生根行煩惱習氣明智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知一切衆生種種業明智門하며 或現不可說佛刹微塵數開悟一切衆生門하니라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단바라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일체여래수제공덕종종고행시바라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할절지체찬제바라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근수비리야바라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일체보살수제삼매선정해탈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불도원만지광명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근구불법에 위일문일구고로 사무수신명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친근일체불하야 자문일체법호대 심무피염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수제중생의 시절욕락하야 왕예기소하야 방편성숙하야 령주일체지해광명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항복중마하고 제제외도하야 현현보살복지력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지일체공교명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지일체중생차별명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지일체법차별명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지일체중생심락차별명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지일체중생근행번뇌습기명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지일체중생종종업명지문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개오일체중생문하니라
3. 十波羅密과 智慧의 門
또 혹현(或現) 그 현신은 같지요. 혹은 나타낸다 무엇을? 불가설불찰미진수 단바라밀문(檀波羅蜜門)을 나타낸다. 단바라밀(檀波羅蜜)이라고 하는 것은 단나바라밀(檀那波羅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을 말하는 거에요. 단나(檀那), 보시(布施)하는 바라밀문(波羅蜜門)을 나타내고. 혹현(或現) 불가설불찰미진수 일체여래수제공덕종종고행 시바라밀문(一切如來修諸功德種種苦行 尸波羅蜜門) 요건 또 이야기가 긴데 모든 부처님이 여러 가지 공덕을 닦는 여러 가지 공덕을 닦는데는 아무래도 좀 괴롭죠. 그래서 종종고행(種種苦行)이라고 그랬습니다. 시바라밀(尸波羅蜜)이라는 것은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을 말합니다. 지계바라밀문을 계(戒) 지계바라밀문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할절지체찬제바라밀문(或現 不可說佛刹微塵數 割截肢體 羼提波羅蜜門) 요건 이제 지체(肢體)를 우리 몸뚱이를 할절(割截)한다 칼로 오려내고 자르고 하는 그렇더라도 참는다 이거야. 찬제(羼提)는 인욕(忍辱)입니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이죠 순서상. 그런 인욕바라밀문(忍辱波羅蜜門)을 나타내기도 하고.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근수비리야(勤修毘梨耶) 요건 이제 부지런히 닦는다라고 하는 그런 말이 있으니까 정진(精進)입니다. 정진(精進)은 계속하는 거에요. 그 계속하는 것을 정진이라고 하는데 그게 이제 중요하죠. 뭐든지 계속하는 것. 그게 이제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계속해야 자리가 잡혀요. 자리가 잡히면 조금씩 조금씩 자기도 모르게 발전이 있어요. 성장하고 발전하고 뭔가 진전이 있다고요. 그래서 정진(精進)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 인생14대 교훈이라고 하는데 보면 사람에게 제일 부족한 것이 정진이다. 그런 말이 있지요. 제일 필요한게 정진이다. 계속하는 것 시작은 잘 하죠 누구나. 좋다하면은 일단 시작은 해요. 시작은 하는데 그것을 계속하기는 참 어려우니까 그래서 여기서 이제 정진을 부지런히 닦는 정진바라밀문(精進波羅蜜門)을 나타내며.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일체보살수제삼매선정바라밀문(一切菩薩修諸三昧禪定解脫門) 그러니까 선정(禪定)이라고 하는 것은 곧 삼매(三昧)하고 통하죠. 그래서 일체보살들이 모든 삼매를 닦는 선정해탈문(禪定解脫門) 선정을 통해서 해탈이 얻어지니까 그래서 같이 쓰기도 해요. 선정해탈문을 나타내기도하며.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불도원만지광명문(佛道圓滿智光明門) 불도(佛道), 부처님의 도가 원만한 지혜의 광명문(光明門)을 나타낸다. 그 불도는 결국은 불도(佛道)가 원만한데는 지광명(智光明)이여. 지혜광명이라고요. 다른거 없어요.
이제 내일모레가 초파일(初八日)인데 부처님 오신 뜻을 왜 등불을 켜서 표현하느냐 이거야. 부처님 오신 뜻은 오로지 지혜광명(智慧光明)이야. 우리 마음으로부터 지혜의 광명을 밝히는 그런 일이라. 법화경에 보면 부처님은 아무것도 이 세상에 와서 한 일이 없다. 기껏해야 설법(說法)을 했다. 가르침, 법문만 했지 그 외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그랬어요. 강의외 여사(餘事)는 다른 일은 한 적이 없다. 뭐 그분이 무슨 뭐 무슨 다른 일 했다는 기록 없어요. 절을 지어도 딴사람이 제자들이 다 했고 당신이 한 건 아니고 무슨 뭐 묘목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기계를 만든 사람도 아니고, 뭘 관리하는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인간에게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제거하기 위해서 그저 간곡히 간곡히 또 일러주고 또 일러주고 어떻게 하더라도 일러줘서 지혜의 광명을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하는 그런 일을 했다 하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래서 불도가 원만한 것은 지광명(智光明)이다. 부처님 오신 뜻을 지혜 광명을 표현하는 등 등불을 밝힘으로써 부처님 오신 뜻을 부처님오신데 대한 모든 의미를 그걸로 나타내는 거죠. 그래서 초파일에 등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른 뜻이 아니에요.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 근구불법(勤求佛法)에 부지런히 불법(佛法)을 구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일문일구(一文一句)를 위한 까닭에 일문(一文) 하는 것은 한 문장을 말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서 여기서 한 단락을 나눴는데 한 단락을 보면 몇 개의 문장으로 되기도 하고 그랬죠. 하나의 문장, 일구(一句)라고 하는 것은 한 구절. 요거 뭐 다섯 자를 한 구절이라고 한다든지, 네 자를 한 구절이라고 한다든지, 아니면 일곱 여덟 자 혹은 뭐 스무 자까지 한 구절이 된 것도 있지요. 고 토달아놓은 토와 토 사이의 글을 한 구절 일구(一句)라 그래요. 그것만을 위해서 사무수신명문(捨無數身命門)하며 무수한 신명을 버리는 그런 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 이제 생각나는게 있죠. 일문일구(一文一句)를 버리는 까닭에 무수한 신명(身命)을 버린다. 이 몸의 목숨을 버린다 이거야. 부처님 과거의 生에 설산동자가 되어가지고 한 구절 얻어듣기 위해서 몸을 나찰에게 던져서 보시했다고 하는 그 열반경의 이야기가 유명하지요. 열반경 이야기는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야 이것은 생(生)하고 멸(滅)하고 생하고 멸하고 이 세상의 순환의 법칙이다. 이 소리가 어디서 떡 들려온다고요.
어떤 그 설산동자라고 하는 수행청년이 있었는데 그 부처님의 과거전신이죠. 그 들으니까 기가 막히거든 이 도대체 이 이야기를 누가했는가하고 뚤레뚤레 살펴보니까 아주 험상궂게 생긴 나찰이 그 말을 한 거야. 그래서 당신이 이 법문을 했느냐고 하니까 그렇다는 거야. 그런데 그 말이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다음구절이 틀림없이 있을 텐데 다음 구절을 왜 안하냐? 다음 구절 할라니까 내가 배가 고파서 더 못하겠다 이거야. 법문하는데 힘이 얼마나 드는지 아느냐고 보통 말하는 거하고 다르다 이거야. 그럼 당신 배를 채워드릴 텐데 뭘로 어떻게 하면 좋겠냐 하니까 난 나찰이라서 사람이 살아있는 뜨거운 피라야 배가 찬다 이거야. 그게 나는 식사다 이거야. 그러냐고 그런데 내 이 몸을 보시하는 것은 좋은데 마저 듣고 내 몸을 던질 테니까 당신도 수고스럽지마는 마저 좀 힘들더라도 일러주면은 틀림없이 이 몸을 보시하겠다. 그렇게 약속을 했어요. 좋다 그럼 내가 힘 있는 데까지 일러줄 테니까 듣고는 꼭 약속 지키자고 말이지 그렇게 약속을 딱 했어요.
그래서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생(生)하고 멸(滅)하고 생하고 멸하고, 이 세상이 전부 계속 우주가 돌아가고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바뀌고,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바뀌고, 생주이멸(生住異滅)로 바뀌어가고 이게 전부 생멸(生滅), 생멸, 생멸 두 자로 표현하면 생하고 멸하고 생하고 멸하고, 생겼다 없어지고 생겼다 없어지고 늘 그렇거든요. 이 세상 현상은요. 전부 그겁니다. 다른 것 없어요.
그러면 그것이 일어나기 이전 또 그것이 일어난 이후, 그 변화의 저편에는 적멸(寂滅)한 자리가 있다. 근본자리는 적멸한 생멸이 없는 적멸의 자리가 있다. 그 적멸의 자리야 말로 참으로 즐거움의 경지다. 적멸위락(寂滅爲樂). 이렇게 설명을 했어요. 그 내가 이제 다 일러줬으니까 당신 몸을 내한테 보시(布施)하라고 그러니까 이 설산동자가 내 몸을 주고 얻은 이 훌륭한 법문(法門)을 내 혼자 이렇게 듣고 말면 되느냐. 잠깐만 기다려 달라 해 가지고서 바위에다 막 썼어요. 그 구절을. 그 네 구절을 막 썼어요. 써놓고는 그때사 이제 바위에서 떨어지죠. 나찰을 위해서 나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제 떨어질 테니까 떨어지거든 내 몸 받아먹으라고 이렇게 하면서 떨어지는데 결국은 그 나찰이 제석천(帝釋天)이 이 수행자를 시험하기 위해서 나찰의 모습으로 그렇게 나타났다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떨어지니까 사뿐하게 받아서 내려놓으면서 내가 당신의 수행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랬노라 하는 그런 이야기도 있고 그렇습니다. 고게 이제 위일문일구고(爲一文一句故)로 사무수신명문(捨無數身命門) 그 말이에요.
일문(一文)이나 한 구절을 위한 까닭에 무수한 몸을 버린다. 이 한 구절 얻어듣기 위해서 무수한 신명을 이렇게 버리는 그런 예들도 많은데 오늘 뭐 어떻게 된 심산인지 사람들이 안 오네요. 이 법문보다는 노는게 더 좋은 모양이네.
또 혹현 불가설불찰미진수 친근일체불(親近一切佛)하야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불을 친근해서 자문일체법(諮問一切法) 일체법을 자문(諮問)한다. 묻는다 이거야. 그럼 모든 깨달은 사람을 친견하고 그리고 법에 대해서 어떤 도리에 대해서 자꾸 물어. 자문한다는 말은 물을 자(諮), 물을 문(問)자 거든요. 자꾸 묻되 심무피렴(心無疲厭)이야. 마음에 피로해 하거나 싫어하는게 전혀 없어. 조금 이제 묻다가 에이 그까짓 거 알아 뭐하나 하고 좀 궁금했는데 그만 그거 알면 뭐하나 하고 이래 버린다고요. 그게 이제 중생들은 싫어하고 지치고 피곤해하고 싫증내고 그러는데 그런 게 없는 그런 문(門)을 나타낸다.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수제중생(隨諸衆生)의 시절욕락(時節欲樂)하야 왕예기소(往詣其所)하야 방편성숙(方便成熟)하야 영주일체지해광명문(令住一切智海光明門)한다. 요건 이제 요기까지가 이제 한 문장이지요. 아까 일문일구(一文一句) 할 때, 「혹현(或現)부터 광명문(光明門)하며」하는 요런 두 줄에 가까운 요것이 이제 한 문장이에요. 요건 이제 모든 중생들이 시절욕락(時節欲樂), 시절 따라서 욕락(欲樂)이 다 달라. 봄에는 뭐 꽃 보러 쫓아다니고 무슨 뭐 여름엔 시원한데 찾아다니고 겨울엔 뭐 따뜻한게 좋고, 또 음식도 계절 따라서 또 즐기는게 또 다르고 부처님이 잘 아시지. 그래서 시절욕락이라고 그랬어. 시절(時節) 따라서 욕락이 다르다. 하고자하는 것 하고 즐기는게 이제 달라. 그러면은 왕예기소(往詣其所)야. 중생들이 무엇을 어느 철에는 무얼 좋아하고 어느 철에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중생은 또 같은 봄인데도 또 물을 좋아하고 이게 각양각색이야. 그러면은 전부 거기에 다 나아가 왕예(往詣), 그곳에 다 나아가서 방편(方便)으로 그 사람들을 성숙(成熟)시켜. 방편으로 그 사람들 자꾸 제도(済度)해 가지고서 일체지해광명문(一切智海光明門)에다가 머물게 한다 이거야. 지해(智海), 지혜 지자(智) 바다 해자(海) 좋지요. 지혜의 바다, 그런 광명문(光明門)에 머물게 한다. 그 중생들을 성숙시켜서 결국은 지혜만 있으면은 지가 알아서 간다 이거야. 아 눈이 밝고 태양빛이 밝으면 즈그집 다 잘 찾아가듯이 요는 마음으로부터 어떤 지해(智海)의 광명문(光明門)만 드러나게 해주면은 그럼 끝이니까. 그 나머진 자기가 알아서 하거든요. 그런 것을 하게한다.
또 혹현(或現)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 항복중마(降伏衆魔)하고 많은 마구니들 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마구니 좋지 않은 부정적인 것을 항복받고. 제제외도 모든 외도들을 제압해. 제압해서 현현보살복지역문(顯現菩薩福智力門)하며, 보살의 복과 지혜와 힘을 현현(顯現)하는, 나타내는 그런 문을 나타내며 혹현(或現)하며. 또 혹은 혹현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공교(一切工巧)를 아는 명지문(明智門)을 나타낸다. 일체공교(一切工巧)라고 하는 말은 여기는 이제 재주입니다. 재주 기술 이런 것을 공교(工巧)라고 그래요. 어떤 기능. 그런 여러 가지 그런 기능과 재주를 아는 그런 명지문(明智門), 밝은 지혜(智慧)의 문(門)을 나타내.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중생의 차별(差別)을 아는 명지문(明智門), 밝은 지혜의 문을 또 나타낸다. 결국은 뭐 이 지혜(智慧)가 제일 많아요. 그냥. 광명(光明)이야기니까. 결국 광명이 곧 지혜, 지혜 곧 광명, 등불 곧 지혜, 지혜 곧 등불,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그래서 지혜라고 하는 말이 이렇게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명지문(明智門), 밝을 명(明) 지혜 지자(智). 또 혹현 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법차별(一切法差別)을 아는 또 명지문(明智門) 계속 명지문 명지문 뒤에 와서는 명지문(明智門)이란 말이 많지요. 명지문을 나타내며.
또 혹은 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중생심락차별(一切衆生心樂差別)을 아는 마음에 좋아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 차별(差別)하다. 다 다르다 이거야. 그 다른 것까지 다 아는 그런 것도 또 역시 명지문(明智門)이야. 밝은 지혜의 문을 나타낸다. 내가 가끔 말하지마는 일체법차별(一切法差別), 일체중생차별(一切衆生差別), 그랬지요 그 다음 일체중생심락차별(一切衆生心樂差別) 그랬어요. 금방 본 세 구절이 일체중생차별(一切衆生差別), 일체법차별(一切法差別), 일체중생심락차별(一切衆生心樂差別) 마음에 즐겨하는 차별(差別),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제일 열쇠가 되는 것이 뭔고하면 모든 사람들은 너무너무 다르다고 하는 사실. 자기자식이든지 한 솥에 밥 먹는 사람이든지 형제든지 뭐든지 전부 어떤 조건의 사람이던 간에 너무너무 다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너무너무 다르다 라고 하는 것을 알면 그 사람 어지간히 철 든 사람이에요. 인생 어지간히 살 줄 아는 사람이야. 그래 되면. 그걸 우리는 인정을 못 해. 그건 그만치 어리석어서 그런 거야.
여기 보십시오. 일체중생차별(一切衆生差別), 일체법의 차별(一切法의 差別), 일체중생심락차별(一切衆生心樂差別), 일체중생들이 마음에 좋아하는 게 다 달라. 할 수 없어서 그저 맞춰주는 거에요. 할 수 없어서 맞춰주는 거지 다 속에는 다 달라. 전부 다른 생각 가지고 있어요. 그 다르다고 하는 것 이걸 인정 안하면은 그 사람은 영원히 어리석게 사는 거에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고. 그거 인정해 줘야 됩니다. 이거 하나 인정해 주면 그 사람은 철 든 사람이에요 사실은. 일체중생심락차별(一切衆生心樂差別)이라. 이건 뭐 어떤 저 아이고 우린 형제인데 다르면 되느냐고.. 천만에 형제나 남이나 똑같아요. 결국은 전부 하나하나 독립된 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러면 독립된 한 세계야.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이런 차별이라고 하는 말을 또 자주 씁니다. 경전에서요. 경전에 차별(差別)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참 대충 이렇게 보면요.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세밀히 따져보면 전부 다르다고 하는 사실.
또 혹현 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중생근행번뇌습기(一切衆生根行煩惱習氣)를 아는 일체중생의 근행(根行)과 요건 이제 육근(六根)의 행위, 또 번뇌(煩惱) 거기서 일어나는 번뇌 또 익힌 버르장머리, 이게 습기(習氣)거든요. 뭘 익혀왔는지. 이런 것을 전부 아는 명지문(明智門)이야. 여기 또 또 그런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밝은 지혜밖에 없지요. 밝은 지혜의 문을 나타내며. 또 혹현(或現) 또 혹은 나타낸다. 무엇을? 불가설불찰미진수의 일체중생의 종종업(種種業)을 아는, 여기도 뭐 차별업(差別業)이죠. 결국은 종종업(種種業)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중생들이 각각 다른 가지가지의 업을 아는 명지문(明智門)을 나타낸다.
전부 지혜(智慧)지요 결국은. 업(業)이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천차만별입니다. 쌍둥이도 천차만별이에요. 쌍둥이도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그런 어떤 업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알면 돼요. 쌍둥이가 되기까지는 제일 업(業)이 제일 가깝죠. 같은 업이죠. 그러니까 공업(共業)이라고 그래. 쌍둥이라고 하는 것은 공업이야 형제도 공업이고. 그런데 그 다음에 또 세밀히 들어가면 또 다르거든요. 고건 이제 별업(別業) 그래요. 별업 다른 다를 별자(別). 그럼 공업(共業) 중에 별업(別業)이 있고 별업 중에 또 공업이 있고.
예를 들어서 우리가 대한민국에 산다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은 전부 공업(共業)이라. 그럼 서울서 사는 사람하고 부산 사는 사람하고 요건 이제 별업이야 또. 또 부산에 사는 것은 공업이지. 그런데 또 부산에 살면서 또 동네가 다 다르고 이건 또 별업이고. 이런 식으로 자꾸 공업 별업 공업 별업 천 조각 만 조각으로 이렇게 나눠져요. 그래서 제일 가까운 것이 뭐 형제겠지 형제. 형제가 제일 가까운 업(業)이다. 형제가 되기까지 그건 뭐 한 집안의 한 부모 또 뭐 한 지역에 얼마나 같은게 많습니까? 그런데 거기까지는 같았어. 그 다음부터는 달라. 또 개인적인 업이라고. 보면 키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머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소질도 다르고, 이런게 이제 별업이 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가지가지 업이 다르다. 그 다른 업을 아는 명지문을 나타낸다. 보살들은 그런걸 다 안다 이 말입니다.
또 혹현 불가설불찰미진수 개오일체중생문(開悟一切衆生門) 일체중생을 개오(開悟), 깨닫게 하는 그런 문(門)을 나타냄이라.
4. 利益處處衆生
以如是等不可說佛刹微塵數方便門으로 往詣一切衆生住處하야 而成熟之하니 所謂或往天宮하며 或往龍宮하며 或往夜叉乾闥婆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宮하며 或往梵王宮하며 或往人王宮하며 或往閻羅王宮하며 或往畜生餓鬼地獄之所住處하야 以平等大悲와 平等大願과 平等智慧와 平等方便으로 攝諸衆生하니 或有見已而調伏者하며 或有聞已而調伏者하며 或有憶念而調伏者하며 或聞音聲而調伏者며 或聞名號而調伏者며 或見圓光而調伏者며 或見光網而調伏者라 隨諸衆生心之所樂하야 皆詣其所하야 令其獲益케하니라
이여시등불가설불찰미진수방편문으로 왕예일체중생주처하야 이성숙지하니 소위혹왕천궁하며 혹왕용궁하며 혹왕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궁하며 혹왕범왕궁하며 혹왕인왕궁하며 혹왕염라왕궁하며 혹왕축생아귀지옥지소주처하야 이평등대비와 평등대원과 평등지혜와 평등방편으로 섭제중생하니 혹유견이이조복자하며 혹유문이이조복자하며 혹유억념이조복자하며 혹문음성이조복자며 혹문명호이조복자며 혹견원광이조복자며 혹견광망이조복자라 수제중생심지소락하야 개예기소하야 영기획익케하니라
이익처처중생(利益處處衆生)이라. 처처중생을 이익하게 한다. 그 많은 보살들이요 시방(十方)에서 모인 보살들 또 그 보살들은 부처님의 광명(光明)의 공덕(功德)을 입은 사람들. 그런 뜻이에요. 그걸 늘 염두에 두고 요걸 봐야 연결이 돼요.
이와같은 등 불가설불찰미진수방편문(不可說佛刹微塵數方便門)으로 수없는 방편문(方便門) 그런 여러 가지 중생의 속성에 따라서 그것을 다 알고 또 아는 대로 거기에 맞추는 그런 특별한 어떤 방법을 강구해야 하니까 그렇다면은 각양각색의 방편(方便)이 필요하겠죠. 그러면 불가설불찰미진수의 방편문(方便門), 수많은 방편문으로 뭘 하느냐? 일체중생이 주처(住處) 일체중생이 있는 곳에. 왕예(往詣), 갈 왕(往)자 나아갈 예(詣)자, 간다 거기 간다 이거야. 중생이 머물고 있는 곳에 다 간다 이거야.
중생이 머물고 있는 곳에 다 나아가서 이성숙지(而成熟之)하니 그들을 성숙(成熟)시켜. 참 이렇게 가르치고, 만들고, 교화(敎化)시키고, 그래서 성숙(成熟)이라고 하는 것은 뭐지요? 과일이 달렸으면은 그게 아주 영글어가는 상태 아주 향기가 나고 맛이 나고 빛이 나고 좋은 그런 그... 따서 먹기 좋은 그런 과일이 되도록 이렇게 하는 것을 성숙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뭐 밥도 마찬가지... 뭐 뭐든지 성숙이 되어야 돼요. 중생(衆生)들을 성숙(成熟)시킨다는 말은 그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진 그 모습 그걸 뭐 부처라 그러죠.
하니 성숙(成熟)하니 소위혹왕궁전(所謂或往宮殿)하며 그럼 그렇게 가는데 어디로 가느냐? 혹은 천궁(天宮)에 간다. 또 혹왕(或往) 용궁(龍宮)에 간다. 용궁에도 간다. 혹왕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夜叉 乾闥婆 阿修羅 迦樓羅 緊那羅 摩睺羅伽)들이 있는 그런 궁전(宮殿)에도 가고, 혹은 범왕(梵王)의 궁전에도 가고, 혹은 인왕(人王)의 궁전에도 가고, 혹은 염라왕(閻羅王)의 궁전에도 가. 보살들 어디 안 가는데 없어요. 중생이 있는 곳에는 뭐든지 어디든지 다 간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 혹은 축생(畜生)에게도 가. 아귀(餓鬼)에게도 가고. 지옥(地獄)의 주처(住處)에도 간다 이거에요. 축생아귀지옥(畜生餓鬼地獄)의 주처(住處)에 까지도 간다.
가서 뭘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평등대비(平等大悲)와, 평등대비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누구에게는 덜 베풀고 그게 없이 평등하게 골고루 베푼다는 뜻에서 평등대비. 또 평등대원(平等大願)이야. 원(願), 중생을 건지겠다고 하는 원(願)도 평등해. 중생에겐 똑 같다 이거야. 우리는 뭐 아 이 사람한테는 좀 신심(信心)이 더 나고 저 사람한테는 신심이 덜 나고... 걸핏하면 그렇죠. 그런데 이제 보살의 원력(願力)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없지요. 그런 차별(差別)이 없이 평등대원(平等大願)이야. 그 다음에 평등지혜(平等智慧)야 누구에게든지 똑같은 지혜를 발휘한다 이거에요. 평등지혜. 그 다음 평등방편(平等方便)이야. 방편(方便)도 뭐 이 사람에게 얼마 베풀었으면 저 사람에게도 거기에 맞는 방편을 그렇게 베푼다.
그러한 평등대비(平等大悲), 평등대원(平等大願), 평등지혜(平等智慧), 평등방편(平等方便), 이것으로써 섭제중생(攝諸衆生)하니 모든 중생을 섭(攝)하니, 포섭(包攝)한다 이건 잘 교화(敎化)한다 이 말이죠.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니. 혹유견이(或有見已)하고, 혹 어떤 이는 중생들이 말입니다. 혹은 그 보살을 보기만 하고 보고나서 그만 조복(調伏)되는 사람도 있어요. 이건 참 빠른 사람들이죠. 혹은 법문(法門)을 듣고, 혹유문이(或有聞已)하고 이조복자(而調伏者)야. 듣고 법문을 듣고 이제 조복(調伏)되는 사람도 있어. 척 보기만 해도 조복되는 사람이 있어야 되지요. 듣기만 하고 조복되는 사람이...
혹유억념(或有憶念)하고 조복(調伏)되는 사람이 있어. 억념(憶念)이라고 하는 것은 법문(法門)을 다 기억하는 거야. 가서 집에 가서 뭐 복습하고 필기하고 다시 검토하고 이렇게 해 가면서 이제 그때사 이제 뭐가 되는 사람이 있는 거야. 조복(調伏)하는 사람도 있고. 혹문음성이조복자(或聞音聲而調伏者)야, 음성만 듣고 조복되는 사람도 있고. 혹문명호이조복자(或聞名號而調伏者)야, 혹은 관세음보살 하면은 관세음보살하는 그 이름만 떡 듣고는 그만 벌써 관세음보살의 그런 덕화(德化)에 감화(感化)가 되는 사람도 있다.
혹견원광이조복자(或見圓光而調伏者)야, 혹은 뚜렷한 광명 원만한 광명을 보고는 그만 거기에 조복되는 사람도 있다. 혹견광망이조복자(或見光網而調伏者)라, 요건 이제 광망이라고 하는 것은 광명 그 자체를 원광(圓光)하면은 그런 광명에서 밖으로 퍼지는 그런 어떤 그 광명의 지엽(枝葉) 가지 이것을 광망(光網) 그래요. 그물 망字(網) 써가지고. 그런 광망(光網)을 보고 참 희한(稀罕)하지요. 빛 그 자체를 보고 조복 받는 사람도 있는데 그 빛 자체는 아니고 빛 저 끄트머리 그 뭐 어떻게 보면 좀 밝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데는 좀 어두침침하기도한 그런 부분으로 조복(調伏)되는 사람도 있어.
절에 다니는 것도 보면은 꼭 암자에만 다니는 사람이 있고, 꼭 큰 절에만 다니는 사람이 있고 그래요. 각자 자기 업(業) 따라서 편안한데가 따로 있어. 기도 잘 되는 데가 따로 있다고요. 업 따라서. 아 나는 뭐 죽어도 마 큰 절에는 안 되겠더라 하는 사람이 있고, 나는 죽어도 뭐 작은 절에는 너무 싫더라마. 큰 절이라야 뭐 속이 시원하고 뭐 기도도 되는 것 같더라.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에 그런 것들을 쭉 이렇게 나열했다 이렇게 보면 돼요.
수제중생심지소락(隨諸衆生心之所樂)하야, 중생의 마음에 즐겨하는 바를 따라가지고서. 중생은 이 중생은 이것을 좋아하고 저 중생은 저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데를 따라가지고서. 개예기소(皆詣其所)하야, 모두다 그들이 있는 곳에 소字(所)는 처소(處所)지요. 그들이 있는 곳에 나아가서 영기획익(令其獲益)케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전부 이익(利益)을 얻게 한다. 그 나름대로 다 이익을 얻도록 그렇게 해 준다. 보살들이 시방에서 모인 보살들이 많은 부처님의 그 광명(光明)을 입어서 그렇게 한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보살중의 종종......
그것을 그렇게 한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보살중의 종종분신 그랬어요. 보살들이 분신을 하는 그런 내용이 여기서 이제 나옵니다.
5. 菩薩衆의 種種分身
佛子야 此逝多林一切菩薩이 爲欲成熟諸衆生故로 或時現處種種嚴飾諸宮殿中하며 或時示現住自樓閣寶師子座하야 道場衆會의 所共圍遶으로 周遍十方하야 皆令得見이나 然亦不離此逝多林如來之所하니라 佛子야 此諸菩薩이 或時示現無量化身雲하며 或現其身이 獨一無侶하니 所謂或現沙門身하며 或現婆羅門身하며 或現苦行身하며 或現充盛身하며 或現醫王身하며 或現商主身하며 或現淨命身하며 或現妓樂身하며 或現奉事諸天身하며 或現工巧技術身하야 往詣一切村營城邑王都聚落諸衆生所하야 隨其所應하야 以種種形相과 種種威儀와 種種音聲과 種種言論과 種種住處로 於一切世間에 猶如帝網하야 行菩薩行하며 或說一切世間工巧事業하며 或說一切智慧照世明燈하며 或說一切衆生業力所莊嚴하며 或說十方國土建立諸乘位하며 或說智燈所照一切法境界하야 敎化成就一切衆生호대 而亦不離此逝多林如來之所하니라
佛子야 이 서다림 일체보살(逝多林 一切菩薩)이 여기 있는 서다림 모든 보살들이 위욕성숙제중생고(爲欲成熟諸衆生故)로 모든 중생들을 성숙하게 이 성숙(成熟)이란 말은 교화 뭐 성숙, 포교, 성불, 뭐 이 여러 가지 의미가 다 포함이 돼 있지요. 근데 성숙이란 말이 좋죠. 하나의 곡식으로 치면 아주 탄탄하게 비바람이 내려줘 가지고 잘 익도록, 과일 같으면 과일이 아주 햇빛과 바람과 수분과 이런 모든 것들이 조건이 잘 갖춰져 가지고 참 멋진 과일이 되게 하는 그런 의미의 성숙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을 그렇게 성숙시키기 위한 까닭에. 서다림에 모인 모든 보살들이 그렇단 말이야.
중생들을 위한 까닭에 혹시(或時)에는 현처종종엄식제궁전중(現處種種嚴飾諸宮殿中) 종종으로 ...... 또 혹시(或時)에는 자루각보사자좌(自樓閣寶師子座) 자기의 누각(樓閣,) 자기가 살고 있는 누각, 보배로 꾸며진 사자좌(師子座), 보배로 꾸며져 있는 그 자리, 거기에 주어 있는 것을 시현(時示)하기도 하고. 시현도 나타낸다 보인다 이 말이야. 해서 道場衆會의 所共圍遶. 시현은 저 밑에 가서 해석하는데 사자좌에 머물러서 도량중회(道場衆會) 소공위요(所共圍遶)라. 도량에 많은 대중들이 모였는데 결국은 전부 에워쌓였어. 그래서 주변시방(周遍十方)이야. 시방에 두루두루했어. 그래서 개령득견(皆令得見)이나,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게하나. 그러나 또 이 서다림의 여래가 계시는 이곳에서 떠나지 아니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을 시현(時示), 시현 거기다 새겨요. 시현(時示), 나타내보임이라.
佛子야 이보살이 或時에는 무량화신운(無量化身雲)을 시현(示現)하기도 하며. 화신(化身), 무량 한량없는 화신, 변화의 몸이죠 그러니까. 어떤 보신(報身)이 하나 있으면은 그것을 여러 천배만배로 어떤 변화의 몸을 나타내는 그런 것을 시현(示現)하기도 하고.
혹현기신(或現其身)이 혹 그 몸이 독일무려(獨一無侶), 혼자 그냥 아무 벗도 없고 짝도 없고 뭐 중생도 없고 혼자 이렇게 있는 그런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소위 혼자 있는 몸은 어떤 몸이냐?
소위 혹현 사문신(所謂 或現 沙門身)하며 사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문(沙門)은 이제 수행자, 인도에서는 사문이란 말은 불교에서만 쓰는 용어가 아니에요. 그 당시 출가 수행자를 무조건 사문(沙門)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이제 불교에서 많이 쓰다보니까 불교 출가수행자를 사문이라 그렇게 이제 표현합니다. 사문의 모습을... 부처님도 대사문 그래요. 부처님을 사문(沙門)이라고 표현한 그런 경전도 많이 있습니다.
사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바라문(婆羅門)의 몸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현고행신(或現苦行身), 고행(苦行)하는 바싹 마른 그 고행상 있지요? 그런 몸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현충성신(或現充盛身), 충성신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뭐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살도 아주 넉넉히 쪘고 포대화상처럼. 그런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현 의왕신(或現 醫王身)이라. 의사의 몸을 나타내기도 한다. 혹현 상주신(或現 商主身)이라. 혹은 장사하는 주인, 뭐 회사 사장의 몸을 나타내기도 한다. 상주(商主)란 말은 그런 뜻이에요. 큰 상업을 하는 그 주인의 몸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현정명신(或現淨命身)이라. 요건 이제 정명신(淨命身)이라고 청명할 정자(淨) 어떤 직업을 하는데 아주 바른 직업(職業)을 가진 그런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혹현기악신(或現妓樂身) 이건 이제 악사 무슨 저기 음악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이런 사람의 모습을 나타내. 춤추는 사람 음악하는 사람 그런 모습이 보살의 모습일 수도 있다.
또 혹현봉사제천신(或現奉事諸天身) 여러 천신들을 받들어 섬기는 그런 사람의 몸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현공교기술신(或現工巧技術身) 공교기술(工巧技術) 하는 것은 아주 기술에 뛰어난 어떤 뭐 특별한 기술을 갖은 사람, 기술자의 몸을 나타내기도 해. 그러니까 잘 살펴보세요. 여러분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게. 그게 어떤 보살의 화현이다 하는 것이죠.
해서. 나타내서, 일체촌(一切村)과 영(營)은 이제 무슨 뭐 막사 같은데 성읍(城邑) 왕도(王都) 성이죠. 취락(聚落)은 작은 마을 그런 모든 중생들이 곳에 왕예(往詣), 나아가서 중생들이 있는 곳에는 뭐 어디 촌이나 읍이나 왕도나 작은 마을이나 이런데 전부 다 나아가 가지고 수기소응(隨其所應)하야 그들에게 무엇이 맞을까? 그 사람들에게 맞는 것을 따라 수기소응(隨其所應)이란 게 참 좋은 말인데 그들에 맞는 바를 따라서 이종종형상(以種種形相)과 가지가지 형상과, 그러니까 아버지의 모습이 필요한 사람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아저씨의 모습이 필요한 사람은 아저씨의 모습으로 여러 가지의 형상 가지가지 형상(形相)과, 가지가지 위의(威儀)와, 또 가지가지 음성(音聲)과, 가지가지 언론(言論)과, 말, 또 말도 가지가지야. 가지가지 주처(住處)로써
어일체세간(於一切世間)에, 모든 세간에. 유여제망(猶如帝網)하야, 제석천(帝釋天)의 그물과 같이 얽히고섥히고 그리고 전부 서로서로 다 나타내는 것, 그것이 이제 제망(帝網)이거든요. 제석천의 그물 이렇게 씁니다. 거기에 대해 설명하면은 제석천에 궁전이 있는데 그 궁전을 덮고 있는 그물이 있어요. 그 그물에는 아주 영롱한 구슬로 그 그물이 짜여져 있어요. 수억만 개의 구슬로 그물을 만들었는데 그 구슬에는 서로서로 그 구슬의 빛이 반사 돼 가지고 아주 기가 막히게 참 빛난다 하는. 서로 연결이 돼 있고 서로 반사하고 그래서 서로 관계를 맺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체세간(一切世間)에서 마치 제석신의 그물과 같이해서 행보살행(行菩薩行)하며 보살행을 행하며. 혹은 일체세간공교사업(一切世間工巧事業)을 설해.
그 뭐 꼭 불교이야기만 하는게 아니에요. 뭐 컴퓨터 이야기도 하고, 무슨 뭐 재봉 옷 만드는 이야기도 하고 무슨 뭐 별의 별 기술에 관한 뭐 천 만드는 이야기도 하고 공교사업(工巧事業)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기술사업(技術事業)이에요. 세간(世間)의 기술사업들을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게 그 사람에게 교화(敎化)의 조건(條件)이 된다고 하면 하는 거에요.
그 다음에 혹설일체지혜조세명등(或說一切智慧照世明燈) 혹은 일체지혜(一切智慧)로써 세간(世間)을 비추는 등불을 이야기도 한다.
或說 혹은 일체중생업력소장엄(一切衆生業力所莊嚴), 이 참 기가 막힌 말이야. 업력(業力)으로 장엄했어 여기는. 일체중생의 업력으로 장엄한 바를 이야기 해. 왜 얼굴이 우리는 각각 다르냐? 어떻게 해서 그렇게 다르게 나타났느냐? 업력으로 장엄한 거야. 전부 우리는 업력으로 자기 얼굴을 장엄하고 있어요. 자기 사는 모습들 전부 자기 업력으로 자기 사는 모습을 나타내고. 아무리 딴 사람 흉내 낼라고 해봐야 잠깐이야. 결국은 자기의 본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 그래 잘 뜯어보면은 그 사람 업력을 알 수 있는 거지. 업력소장엄(業力所莊嚴) 일체중생의 업력으로 장엄했다. 참 무서운 말입니다. 중생은 업력으로 장엄했다. 일체중생은 업력(業力)으로 장엄(莊嚴)했다고 하는 사람사람 따라서 업력 장엄이 다 달라. 그것도 장엄(莊嚴)이라고 표현하니까 좋네요. 일단. 그냥 업력이 아니고 장엄이니까 그건 그대로 또 장엄이에요. 소는 소대로 또 장엄이고 말은 말대로 또 이 세상 장엄이고 돼지는 돼지대로 장엄이고 꼭 있어야 돼 또. 업력(業力)을 장엄한 바를 설하기도 하고.
혹은 시방국토(十方國土)에 건립제승위(建立諸乘位) 제승위諸乘位)라고 하는 것은 모든 소승대승(小乘大乘)의 지위점차(地位漸次) 이것을 이제 건립하는 것을 설하기도 한다. 우리가 수행해 가는데 뭐 또는 그 사람의 지위점차 지위, 뭐 세속의 지위든 불교 수행의 지위든 간에 그런 것을 설하기도 하며.
或說 지등소조일체법경계(智燈所照一切法境界)라. 지혜의 등불로 비추는 바 일체법의 경계를 이야기도 한다. 지혜의 등불로... 이 지혜의 등이라고 딱 나와 있지 않습니까. 지등(智燈)이라고. 초파일 켜는 등이 다 지등(智燈)이에요. 지혜의 등불을 밝히는 거지 다른게 아니다. 지혜의 등불로 밝히는 일체법(一切法)의 경계(境界)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해서 교화성취일체중생(敎化成就一切衆生)호대 일체중생을 교화(敎化)하고 성취(成就)하고 여기는 이제 성취라고 했어요. 어떤 때는 성숙(成熟) 또 교화(敎化) 뭐 전부 같은 뜻입니다. 교화한다 성취한다 성숙한다.
그렇게 하되. 그렇지만은 이 보살들은 서다림이라고 하는 그 장소 또 부처님이 계시는 서다림 그 장소를 떠나있지 않다라고 하는 사실. 그럼 그건 뭐냐?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서다림은. 그럼 부처님이 계신다고 하는 말은 부처님의 정신에 어디를 가든지 간에 부처님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지를 않다. 부처님의 감호(監護) 속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부처님의 교화방법(敎化方法)에 있어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 뜻입니다. 그래서 불이차서다림여래지소(不離此逝多林如來之所) 이 서다림의 여래의 처소에서 떠나있지 않다 하느니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이 보살들은 지금 앞으로 선재동자를 중심으로 해서 53선지식을 친견하게 되는 그런 내용의 서장 서막이 이제 여기까지 에요. 이건 열다섯 번 열여섯 번째 지금 하는 이 과정에 비로소 이제 아직도 선재동자 나올라면 멀었어요. 그런데 이제 지금까지가 하나의 분위기 조성이야. 분위기 조성을 하는데 이렇게 걸린다고 이렇게. 부처님이 삼매(三昧)에 들고, 광명(光明)을 놓고, 보살(菩薩)들이 시방(十方)에 모여오고, 그래가지고 그 보살들이 어떤 이익(利益)을 얻고, 보살들은 어떤 중생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하는 그런 일들. 그런 일들을 하는데 그 사이사이 구절구절 대목마다 우리가 엿볼 일들이 그런 내용들이 참 너무나도 많긴 많았어요.
그러나 아직도 이제 여기까지가 이제 말하자면 근본법회(根本法會)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여기서부터는 지말법회(枝末法會)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은 내용상으로 보면 앞으로 이야기되어질 다시 말해서 선재동자가 53선지식에게서 들을 법문의 내용이 사실은 요 앞에 지금까지 공부로써 어지간히 알뜰하게는 소개가 됐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부분 부분의 이야기가 지금부터지요. 그래서 그걸 이제 지말법회(枝末法會)다 어떻게 보면 지엽적(枝葉的)인 법회다 지금까지는 근본법회다 어떤 줄거리, 내용, 핵심이 되는 그런 법회다. 요렇게 이제 나눠서 이야길 할 수가 있습니다.
十方法會의 五十三 善知識
그 53선지식 53선지식하는게 여기서부터 비로소 나오는 거에요. 시방(十方)의 법회(法會)의 53선지식(五十三 善知識) 제목이 그렇죠. 그럼 53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요건 이제 오늘 나눠드린 인쇄물을 한 번 보겠습니다. 보살지위와 53선지식 참단 요약(五十三 善知識 參團 要約) 이렇게 나와 있는데 번호로 보면 1, 2, 3, 4해서 54명이 나와 있어요. 그러면은 그 선지식의 내용에 보면 1번 선지식 이름을 보면 문수보살 이렇게 돼 있지요. 그 다음에 53번에 가서 보면은 재대문수(再對文殊) 그래 돼 있어요. 선지식 이름에. 문수를 재차본다 이 말입니다. 그래 놔서 53이 되는 거야. 다시 본다 이거지 재차본다. 짜이젠(再見) 중국말로 하면. 그리고 또 엄격히 따지면은 55명이에요. 문수보살이 두 번 나오고요. 그 다음에 고 위에 문수 재대문수 위에 미륵보살 있고 미륵보살 위에 보면 덕생동자유덕동녀(德生童子, 有德童女) 요건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역할을 하는 거야 또. 그래서 문수보살이 두 번나오고 이 사람들이 둘이고 그렇게해서 55선지식인데 그걸 그래도 역할 상으로 보고 문수도 두개로 나눴으니까 이래저래 다 추려버리면은 53명이 된다. 그래 이제 알겠죠?
그러면은 제일 위에 다시 올라가서 일번에는 십신(十信) 그랬어요. 그러면 53선지식(五十三 善知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십신(十信), 열 가지 믿음에 관한 것. 그 다음 십주법문(十住法門), 십행법문(十行法門), 십회향법문(十回向法門), 십지법문(十地法門), 등각법문(等覺法門), 묘각법문(妙覺法門), 요렇게 이제 우리가 수행점차(修行漸次)를 요렇게 막 나열을 했어요. 그 다음 보살지위(菩薩地位)를 고걸 이제 세분화해서 이야기 하자면 십신위(十信位) 거기 이제 한 마디로 그냥 요약을 해요. 십신(十信)은 본래 믿음은 말하자면 믿음이 충실하면은 초발심주(初發心住)가 된다. 그래가지고 그 다음에 십주(十住)에 낱낱이 나눠진다 했어요. 발심주 치지주 수행주하고 그 다음에 십행도 이거는 낱낱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문수보살이 지금 제일문수보살 책에 그래 돼 있는데 말할 것도 없이 문수보살이야. 이 문수보살은 십신위(十信位)의 법문이 되고 그 다음에 설법장소는 복덕성의 선주누각(善住樓閣)이다. 누각에서 법문을 하고 설법내용은 보조법계수다라법문 이렇게 돼 있어요. 요런 것들 이제 뒤에 쭉 나올 겁니다. 고 옆에 비고란이라 하는 것은 고 밑에 이야기가 있었지마는 60권 화엄경에는 요렇게 조금씩 이름이 달리 표기되기도 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 비고란은 구태여 볼 필요가 없어요 사실은. 이 80화엄경에서는.
그래 여기 이 명단, 이 말하자면 53선지식의 명단이고, 보살지위고 그 사람에게 해당되는 보살지위고 설법내용이고 설법한 장소고 이거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요거는 꼭 책에다가 잘라 가지고 붙여요 그걸 요렇게 이 보십시오 요렇게. 항상 언제든지 펼쳐서 볼 수 있도록 이렇게...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다 이렇게 한다고요. 그러니까 보면 펼쳐보면은 아 지금은 몇 번째 선지식이고 무슨 뭐 예를 들어서 대광왕이라 하면 대광왕이 도대체 뭐냐? 여기 딱 보면 일목요연하게 지금 어디쯤에 가고 있다... 뭐 십행법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디다. 그래 무슨 내용이다. 그래서 우리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도록 도표로 딱 이렇게 그려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 인제 ... 오늘 안 온 사람은 참 좀 곤란하겠네요. 보니까. 여기 지금 설계도인데요. 설계도에 의해서 건축은 어떻게 지을 것인가. 지도와 마찬가지에요. 정말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것의 지도와 마찬가지라. 그 중요한 거에요. 그 다시 아까 그 거기로 되돌아가서요. 지금 도표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고 앞으로 계속 우리가 만나게 될 선지식의 명단이고, 법문 내용이고, 장소다 하는 것이고요. 여기 오늘 이제 처음 문수보살을 친견해 놓고 그러고 뭐 공부를 마치던지 어쩌던지 그렇게 해야 되겠어요.
보면 십신 선지식(十信 善知識)그랬지요? 두 번째 작은 줄. 그러면 십신위(十信位)하면 저 도표(圖表)하나 딱 맞아 떨어져요. 그리고 문수보살은 십신위 선지식(十信位 善知識)이다. 그 이제 한자로 일(一)하면 53선지식의 그 번호순위로 쭉 나가요. 1. 문수보살(文殊菩薩). 이렇게 돼 있고. 그 문수보살항에 말하자면 문수사리동자의 나눔이라. 왜 문수사리동자(文殊舍利童子)라고 하느냐? 여기 설법이 있어요. 그 다음에 보면 동행들입니다. 문수사리동자가 혼자 가는게 아니야 문수보살이. 혼자가는게 아니라 많~~~은 대중들을 데리고 가요. 이건 이제 자기가 데리고 가고 싶어서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 따라 나섭니다. 따라나서는데 좀 어떻게 보면 뭐 이상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부처님을 놔두고 떠났어요. 부처님을 놔둔 채 문수보살을 떠나.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또 부처님에게 “아이 부처님 문수보살 따라서 우리도 같이 공부하러갑니다.”하고 부처님께 하직인사를 하고 떠난다고요.
이런 경우가 다른 경전엔 없습니다. 전부 부처님에게 공부하고 그렇게 돼 있지. 화엄경엔 부처님은 놔두고 문수보살 따라서 딴 선지식 찾아가는 거야. 이건 무슨 뜻이냐? 우리가 지금 공부하지요? 공부하는 것은 뭐냐?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성불을 위해서 한다. 부처님 되십시오. 그러잖습니까? 성불을 위해서 한다. 성불을 위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계시는 곳에 이르기 위해서 간다 이거야. 출발했어요. 그런데 가긴 왜 가느냐 이거야. 부처님이 그 자리에 있는데 그 뜻이라. 우리가 지금 성불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데 사실은 출발을 하는 수행을 시작하는 나 자신이 이미 부처라.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엉뚱한 수행을 하잖아요. 지금. 해 가는데 결국은 제자리에 돌아와요. 제자리 부처님한테 합류를 하지만은 그래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부처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까먹어버리고 자기 부처는 놔두고 딴 부처님 찾아서 떠나는 거지. 그 이치가 참 기가 막히게 돼 있어요. 그래가지고 여기보면은 문수동자가 문수보살이 부처님 놔두고 부처님께 하직인사하고 떠나는 거야. 그런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수행한다고 하는 이 일이 우리 안에 부처님 놔두고 다른데 가서 지금 공부하는 거에요. 이거 괜히 여기 뭐하러 왔어요? 여러분들 집에서 자기 부처보지. 자기부처님 지키고 앉아있으면 될 텐데. 일부러 여기까지 왔잖아. 이렇게. 이렇게 우리가 하고 있잖아. 이게 말하자면 문수보살이 하는 일하고 같은 거야. 문수보살은 부처님을 놔두고 떠나는 것이 말하자면 그런 내용을 뜻을 가지고 그런 상징을 하고 있습니다. 참 재밌게 짜여져 있어요 이게. 전체적으로 보면은.
枝末法會의 五十三善知識
十信位의 善知識
1. 文殊師利童子의 南行
(1) 同行大衆
爾時에 文殊師利童子가 從善住樓閣出하사 與無量同行菩薩과 及常隨侍衛諸金剛神과 普爲衆生供養諸佛諸身衆神과 久發堅誓願常隨從諸足行神과 樂聞妙法主地神과 常修大悲主水神과 智光照耀主火神과 摩尼爲冠主風神과 明練十方一切儀式主方神과 專勤除滅無明黑暗主夜神과 一心匪懈闡明佛日主晝神과 莊嚴法界一切虛空主空神과 普度衆生超諸有海主海神과 常勤積集趣一切智助道善根高大如山主山神과 常勤守護一切衆生菩薩心城主城神과 常勤守護一切智智無上法城諸大龍王과 常勤守護一切衆生諸夜叉王과 常令衆生增長歡喜乾闥婆王과 常勤除滅諸餓鬼趣鳩槃茶王과 恒願拔濟一切衆生出諸有海迦樓羅王과 願得成就諸如來身高出世間阿修羅王과 見佛歡喜曲躬恭敬摩睺羅伽王과 常厭生死恒樂見佛諸大天王과 尊重於佛讚歎供養諸大梵王으로 文殊師利가 與如是等功德莊嚴諸菩薩衆으로 出自住處하사 來詣佛所하사 右遶世尊하야 經無量帀하며 以諸供具로 種種供養하고 供養畢已에 辭退南行하야 往於人間하시니라
爾時에 문수사리동자(文殊師利童子)가 이 문수보살 했다가 문수사리 했다가 문수사리보살 했다가 때로는 보살 때로는 동자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왜 동자라고 하느냐? 저 오대산에 가면 문수동자상이 있죠. 그 문수보살상이 있고 문수동자상이 있고 그래요. 그 참 문수동자 이야기가 참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세조가 악정(惡政)을 베풀었잖아요. 단종을 그렇게 막 세조가... 단종을 그렇게 참 그 천하의 못할 짓을 인륜으로 보면 못할 일이지만 또 정치적인 상황에서는 또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가지고 결국은 문둥병이 걸려가지고 저기 법주사 복천암에도 가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거기도 다녀갔어요 틀림없이 다녀갔어요. 거기도 흔적이 있고 그래요. 거기 이제 뭐 향로도 하사한게 하나 있고 그래요. 요령도 있고. 그러다가 오대산까지 갔지요.
오대산 월정사가고 상원사 부처님 사리를 모셔놓은 보궁에 참배를 하고 기도를 할려고 가서 상원사에 오래 머물면서 기도를 할려고 하는 판인데 하도 몸이 문둥병이 있어놓으니까 하도 갑갑해서 여름날이었던 모양이라. 말하자면 목욕을 하는데 임금님의 벗어놓은 알몸을 보면 안 된다고 그래. 보면 무조건 사형이라. 본 사람은 무조건 사형이야. 그때는 법이 그랬던 모양이야. 그런데 관을 이렇게 걸어놓고 흐르는 물 거기 이제 우리가 늘 건너다니는데 ... 지금은 그 저 찾기가 쉽지. 그냥 지나가 버리면 잘 몰라. 우리는 알지. 관덕걸이라고 하는 곳이 있어요. 물이 이렇게 흐르는데... 그냥 관을 임금의 관을 걸어놓고 목욕을 한 그 장소야. 관덕걸이라고 하는 말이. 근데 그냥 관을 떡 걸어놓고는 그전에 관덕걸이가 아니지. 그냥 이름도 없었던 장소지. 목욕을 하는데 임금이 혼자 와서 목욕을 하는 거야.
그런데 마침 어린 동자가 이쁘장하게 생긴 동자가 마침 그 물을 건너갈려고 하는 거야. 그런데 왕이 말이지 뒤로 손을 들어서 아무리 씻어봐야 시원치 않죠. 남이 씻어주는 것 하곤 아무리 안 되니까 그래서 마침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순간에 어린 동자가 하나 승복을 입고 지나가는데, ‘아 쟤 불러서 좀 등을 밀게했으면 좋겠다’ 해 가지고 “동자야 이리와서 등좀 밀어달라”고 하는 거라. 그래 등을 밀어주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는 거야. 온 몸에 병이 다 낫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거라. 그래 다 밀고 간다고요. 떠나는데 이제 “얘야 국법에 임금의 몸에 손을 댔거나 임금의 모습을 보면 사형에 처하는데 평민으로서는 니 절대 임금 몸 씻어줬다고 하지마라.” 그렇게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마라고 왕이 이제 지 딴엔 자비한 마음으로 그렇게 일러줬어요. “네 알겠습니다.”하고 가면서 돌아보면서 “임금님은 문수동자 친견했단 소리 어디가서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을 딱 하고 사라졌다는 거에요.
그러고 이제 몸이 다 나았죠. 그래서 상원사 머물면서 중대기도도 하고 그러는데 보궁에 기도하고 그래서 몸이 나아가지고 거기 저 뭐야 상원사에다가 논을 많이 드렸잖습니까. 그리고 그 문수동자상을 조각을 하는데 자기가 어떻게 한 번 본 동자 얼굴을 조각할라고 하니까 그게 어떻게 조각이 됩니까? 사진 찍어놓은 것도 아니고. 그래서 천하에 명공들을 명조각가를 다 모집해 가지고 조각을 시켰는데 마음에 안 들고 마음에 안 들고 해서 최후에 어떤 노인이 조각을 하는데 딱 자기가 본 얼굴모습 그대로에요. 문수동자상을 그대로 조각해놓는다 말예요. 그 동자상이 지금 상원사에 모셔져있지요. 말인 즉은 문수보살이 화현을 해서 문수동자 자기의 상을 조각을 했다 하도 왕이 꼭 그 상을 조각하고 싶어하니까 할 수 없이 당신이 화현해서 그렇게 했다. 그런 말이 있어요.
그래 거기 이제 세조를 죽이려고 반대파에서 탁자 밑에 여기 탁자 바로 밑에 숨어서 세조를 노리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자꾸 왕의 도포를 물고 그냥 사정없이 끌어당기는 거라. 그래서 하도 이상해 가지고 조사해보라 하니까 이 탁자 속에서 검객이 나왔잖아요. 칼을 들고 이제 노리고 있었던 거라. 왕을 죽일려고. 그래 그 사람들 붙잡고 거기에 고양이 은혜 갚는다고 고양이 상을 두 마리를 이렇게 상을 조각해서 놓고 그 때 해 놓은 거에요 그 때. 해 놓고 고양이 답이라고 하는 거를 고양이 논이 수백 마지기를 그 절에다 길렀어요. 세계적으로 고양이를 먹여살릴려고 고양이답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에서 거기뿐이야. 그래 문수동자 문수동자... 문수보살은 가끔 동자라는 말을 잘 쓰는데 여기는 문수동자가 나오는데 그 상원사가 문수동자가 있어요.
그래 그 대게 힘 좋은 사람이 오면 고양이 상을 드는걸 가지고 힘자랑을 하기도 하고 해요. 그 전에 살던 어떤 스님은 그걸 안고 문수동자를 안고 마당을 한바퀴 돈 스님도 있었어. 아주 힘이 좋은 스님이. 그런 스님도 있고 그랬는데 어쨌든 문수동자는 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그런 상이고 또 상원사가 그런 유래가 이건 뭐 틀림없는 사실로 전해 내려온 그런 이야기가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왜 동자라고 하느냐? 문수보살을. 또 동자는 가끔 문수보살은 왜 동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나타나느냐? 보현장자 문수동자 그래요. 보현보살은 장자 큰 아들로 그렇게 표현이 되고 문수는 동자로 표현이 되고 그래요. 이건 이제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수행의 첫 단계인데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심성이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요. 순수하지 않으면... 그래서 동자 혹은 동진은 그야말로 순수한 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순수하지요. 어른들이 때가 묻어서 그렇지. 어린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하다고요. 그래서 동자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인의 81은 여든 한가지의 행동이 있는데 그 중에도 동자행 무아행이라고도 그러는데 어린아이의 행을 제일로 쳐요. 도인이 뭐 예를 들어서 보시를 잘 한다. 아니면 안 좋은 건 잘 잊어버린다. 여러 가지의 행을 81가지의 도인행을 이야기할 때 그 중에 무아행 또는 동자행을 제일로 쳐요. 그만치 천진무구하고 순수하고 영혼의 때가 하나도 안 묻은 그런 의미를 동자란 말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는 거지요.
여기서 이제 문수사리동자가 종선주루각출(從善住樓閣出)하야, 선주누각(善住樓閣) 이건 이제 누각이름인데 선주누각으로부터 나와 가지고서 자기가 있던 자리에요. 여무량동행(與無量同行)의 菩薩과, 한량없는 동행보살들 있죠. 동행대중(同行大衆) 그랬잖습니까? 한량없는 동행보살과 그리고 상수시위제금강신(常隨侍衛諸金剛神)과 항상 따라다니면서 문수보살을 시위해. 시위하는 여러 금강신. 그리고 또 널리 중생을 위해서 공양하는 중생을 위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제신중신(諸身衆神) 우리가 뭐 여러 가지 신을 우리 화엄성중(華嚴聖衆)에 여러 가지 신(神)을 이야기 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신(神)의 이름입니다. 그 신중단의 신중들 이름이에요. 그걸 신중신(身衆神). 그냥 보통 신중단(神衆壇)에 할 때는 이 몸 신자(身)가 아니고 귀신 신자 신(神)이에요.
신중신과 구발견서원상수종제족행신(久發堅誓願常隨從諸足行神)과. 옛날에 서원을 발해가지고서 큰 서원을 발(發)해 가지고 항상 따라다닌다 수종(隨從)한다 이거야. 항상 따라다니는 족행신(足行神).
그리고 묘법(妙法) 듣기를 즐겨하는 주지신(主地神) 땅을 맡은 신 그 말이야.
그 다음에는 상수대비(常修大悲) 항상 큰 자비를 닦는 주수신(主水神).
지광(智光)이 조요(照耀), 지혜의 광명이 항상 비치는 주화신(主火神). 불 화자(火), 불(火)도 그런 뜻이에요. 지광조요주화신(智光照耀主火神) 해 놨지요.
그 다음에 摩尼爲冠 마니주 구슬로써 보관을 머리에 쓰는 의관을 한 그런 주풍신(主風神).
그 다음에 명련시방일체의식(明練十方一切儀式) 일체 시방의 모든 의식이라고 하는 의식은 전부 잘 단련을 해서 명련(明練), 밝게 단련을 한 주방신(主方神)과.
전근제멸무명흑암(專勤除滅無明黑暗) 무명흑암을 온전히 부지런히 지혜로 소멸하는 주야신(主夜神)과.
일심비해천명불(一心匪懈闡明佛), 일심으로 잘못된 그런 그 게으르고 잘못된 그런 것과 어두운 그런 것을 보고 없애는 그런 불(佛), 부처님의 태양 주주신(主晝神)과. 법계를 장엄하는 일체 허공의 주공신(主空神)과.
또 널리 일체중생을 제도해서 제유(諸有)해서 초월하는 제유(諸有)는 생사에요. 일체생사(一切生死)에서 초월하는 주해신(主海神)과, 생사의 바다에서 초월하는 주해신(主海神)과.
상근적집취일체지(常勤積集趣一切智) 그러니까 항상 부지런히 일체지혜를 집성 적집성(積集性), 그러니까 모으는 그런 그 조도선근(助道善根) 도(道)를 돕는 선근(善根)이 고대(高大)하기가, 높고 크기가 山과 같은 주산신(主山神)과.
상근수호일체중생(常勤守護一切衆生) 일체중생을 항상 부지런히 수호(守護)하는 보살심성주성신(菩薩心城主城神)과 신(神) 이름인데 뜻을 새기면 그렇게 복잡하게 새겨진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상근수호(常勤守護) 항상 부지런히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수호(守護)하는 무상법성(無上法城)의 제대용왕(諸大龍王)과.
그 다음에 상근수호일체중생제야차신(常勤守護一切衆生諸夜叉神)과. 일체중생을 항상 부지런히 수호하는 그런 모든 야차신(夜叉神)과.
또 항상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歡喜)가 증장(增長)하게 하는 건달바신(乾闥婆神) 건달바는 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한다는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중생의 환희를 증장시킨다 그랬어요. 건달바왕(乾闥婆王)과.
상근제멸(常勤除滅) 항상 부지런히 아귀취(餓鬼趣)를 제멸하는 구반다신(鳩槃茶神)과 구반다(鳩槃茶)가 뭐 아귀를 잡아먹는다고 그래요.
그 다음에 항원발제일체중생(恒願拔濟一切衆生) 일체중생을 항상 건지기를 원해서 건져서 유해(有海) 모든 존재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는 가루라왕(迦樓羅王)과.
또 원득성취제여래신고출세간아수라왕(願得成就諸如來身高出世間阿修羅王)와 요건 이제 원(願)이 모든 여래(如來)의 원이 높이 세간(世間)에 높이 나타나기를 원하는 나타나는 것을 원하는 그런 원이 성취(成就)되는 그런 아수라왕(阿修羅王)과.
그 다음에는 견불환희곡궁공경(見佛歡喜曲躬恭敬) 부처님을 보면 늘 기뻐하고 곡궁공경(曲躬恭敬)해. 허리를 그냥 깊이 숙여가지고서 공경하는 마후라가왕(摩睺羅伽王)과.
그 다음에 상염생사항락견불(常厭生死恒樂見佛) 항상 생사(生死)를 싫어하고 부처님보기를 항상 즐거워하는 대천왕(大天王)과.
그 다음에 부처님을 존중(尊重)하고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하는 모든 범왕(梵王)과 큰 대범왕(大梵王)과. 범왕으로 더불어.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이와 같은 등 공덕장엄(功德莊嚴) 모든 보살중(菩薩衆)으로 더불어 출자주처(出自住處)하사 자기가 머물던 곳에서 나와 가지고서 내예불소(來詣佛所)야. 자기 있던 곳에서 또 부처님 처소에 왔어요. 내예불소(來詣佛所)야. 부처님 처소에 내예(來詣)해 가지고서 그 다음에 우요세존(右遶世尊)입니다. 세존을 이렇게 오른쪽으로 돌아요. 우리가 이 탑돌이가 이런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법당에 부처님을 이래 도는 것도 그런데서 나온 것이고요. 부처님을 오른쪽으로 이렇게 돌기를 경무량잡(經無量帀)이라. 한량없이 돌고는 이제공양구(以諸供養具)로 여러 가지 공양구(供養具)로써 가지가지로 공양하고 공양필이(供養畢已)에 공양을 올리기를 다 마친 뒤에는 사퇴(辭退)하고 남행(南行)했다. 부처님에게 사퇴했어. 부처님하고 이별하고 물러나가지고서 사퇴(辭退)란 말이 그 말이지. 부처님에게서 사직하고 물러나 가지고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는거에요. 이제 남쪽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왕어인간(往於人間)하시니라. 사람이 사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남쪽으로 향해서 계속 가고 있었다. 오늘 이제 일단은 문수보살이 이렇게 남쪽을 향해서 가요.
남쪽을 향해서 가는데 중간에 여기 보면 바로 밑에는 사리불 존자(舍利弗 尊者)와 육천 비구 그렇게 해서 육천비구가 따라나서요. 그 다음에 또 보면은 오백동자와 오백동녀 뭐 이런 사람들이 또 따라나서고 그래서 대중들이 가는데 단순하지가 않아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동참을 하는데 그 가운데 대표가 선재동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 했듯이 이 문수보살이 문수동자가 부처님과 사퇴(辭退)하고 부처님에게서 물러나서 하직을 하고 남쪽을 향해서 인간세상으로 간다. 왕어인간(往於人間). 요게 이제 상당히 의미있는 거지요. 인간 세상으로 간다. 그러면 부처님 경지에서 말하자면 자기의 본래부처를 두고 다시 이제 인간으로부터 새카만 인간으로부터 성불하기위해서 출발하는 그런 그 이야기의 줄거리로 그렇게 짜여져 있습니다. 그런 숨겨져 있는 의미 왜 인간으로 가느냐? 왜 문수보살이 부처님을 하직하느냐? 아니 부처님한테 계속 매달려있어야지 왜 부처님을 떠나서 가느냐? 요런 것들이 의미하는 게 다 있지요. 그런 것들을 깊이 이해하면서 봐야 그런 재미가 있는 거지요.
오늘은 광명(光明)을 통해서 나타난 가지가지의 문(門) 그리고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는 것 또 보살대중들이 가지가지로 분신(分身)을 하는가 그리고 이제 그런 근본법회(根本法會) 다 끝나고 지말법회(枝末法會) 53선지식이 소개가 되는데 그 중에 이제 현 십신위(十信位)를 뜻하는 문수보살이 남행(南行)이라고 그래요. 남쪽으로 남쪽으로 많은 대중과 더불어 부처님을 하직하고 남쪽으로 출발하는 그런 그... 일단 출발을 딱 해 놓고 이제 다음시간에 또 계속되겠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첫댓글 나무마하반야바라밀다 !!!!!!!!!!!!!!!! 고맙고 고맙습니다, 항상 맛나게 화엄경을 공양받고 있네요 ^^..............._()_
기수급고독원에 모인 수많은 보살공덕찬탄 청법 부처님해인삼매의 법계장엄찬탄 십방에서 모인 대중들과 그들의 찬탄 화엄경을 보지 못하는 인연 부처님지혜의 찬탄 보살의 원과 공덕...기억에는 온통 찬탄과 공덕..이런 말씀들이 장광하게 펼쳐졌던것 같은데...아직 이런 개요만 잡아놓고 찬찬히 몇번이고 보아야겠습니다ㅎ 드이어 여기서 이제 지말법회로 넘어가네요 53선지식이 나오시나요?
그토록 어렵다는 화엄 법문을 이렇게 편히 들으니 너무나도 고맙습니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지나 갑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안타깝고 또 안타깝고...무비스님의 화엄강의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움을 금할 수 없는 이 이율배반()...제가 문제가 있는 건지, 또는 오해인지, 아니면 제 생각이 옳은 건지...오늘 이 경전 내용도 전부가 다 보현행원이거든요 그런데 한번도 스님 입에서 보현행원이란 말씀이 아니 나오지요 그러니 제가 답답하고 안타까운 거랍니다. 물론 나중에 보현행원이란 말씀을 구체적으로 해 주실지는 모르지만, 그런 일은 아마 없을 듯...
스님의 화엄경 강의는 무척 애를 쓰시긴 하지만, 아직도 교학적 수준에 참 많이 머물러 계십니다. 보현을 모르시는 것 같아요. 가령 본문에 나오는 4 가지 평등심은 바로 보현행 광수공양의 3번째 법공양인 섭수중생공양과 연결시킬 수 있습지요 그리고 지혜 제일인 듯 말씀하시지만, 오늘 강의 첫 부분에 바로 대비문의 가르침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런 걸 다 놓치신단 말입니다...
보현을 아신다면매광명의 현상도 이렇게 해석을 하셔야 해요 그 후에 설해지는 여러 이야기, 즉 문, 십바라밀과 지혜문, 이익처처중생, 보살의 분신 등이 모두 매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란 말입니다 이런 걸 놓치시면 안 되는데...보현행 자체가 바로 매행이거든요 매에서 바라본 행이 보현행인 겁니다...
'교화성취일체중생하되 불리차 서다림지소'라는 부분도 그렇게 해석하시면 안 됩니다. 서다림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화엄의 굉장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인데, 이걸 이런 식으로 넘어가시면 안 됩지요 세주묘엄품부터 이런 가르침이 나오는데, 이런 걸 연관시켜 설명을 꼭 하셔야 하는데, 잊어 버리신 건지 시간이 없어 그러신건지 아니면 모르셔서() 그런 건지...그 떠나지 않는 자리,그게 바로 일심이요 부처의 자리며 바로 보현행원의 자리란 말입니다. 그 자리에서 모든 세간 조화, 세간 장엄이 나오는것을 꼭 지적하고 가셔야 합지요
부처님의 보리도량을 떠나 남쪽으로 이어지는 문수의 행열도 물론 오늘 스님처럼 해석할 수 있지만, 저는 다르게 봐요 즉, 이항처차보리좌 즉 보리좌를 떠나지 않고 일체 세간, 구법이 전개되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선재의 모든 구도행이 본래가 '돈오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거란 말입니다 이건 입법계품이 끝나는 부분에서 아주 부드럽게 조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오늘 강의하신 부분 전체가 보현의 소식입지요 이런 걸 조금이라도 언급하셔야 하는데, 경전 자구만 해석하고 가시지요 보현과 화엄을 연결시키지를 못하시는 겁니다 대비문, 대원문, 이익중생, 성취중생, 중생 성숙, 심무피렴, 근구불법, 친근일체불 자문일체법...아게 전부 보현행원 아니고 뭡니까 행원품에도 그대로 나오지 않습니까 이러니 제가 자꾸 답답해질 수밖에...우리 불자님들도 겉만 보시지 말고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시고 나중에라도 꼼꼼히 읽어 주시길 꼭 바랍니다. _()_
스님의 53 선지식과 수행 52위를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한 말씀---이건 전형적인 중국 화엄의 해석입니다. 본래 화엄 수행 52위 자체가 입법계품의 선지식 수에 맞춰 인위적으로 조작한 거라는 것을 우리 불자님들은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인위적으로 조작했기에 화엄경에 십신이 없는 거에요
문수가 십신위 법문이고 그 다음 선지식은 십주법문이고...등등 이렇게 말하는 건 제가 보기에는 전부 억지입니다. 교학적, 이론적, 현학적으로 나타내기 좋아하는 학자들의 전형적 모습이지요. 그러니 중국 화엄이 실천의 파가 되지 못하고 이론의 파로 끝나는 겁니다 중국 화엄은 끝까지 화엄의 실천 부분을 정립하지 못하고 멸하고 말았거던요 에고...답답해라...
고맙습니다. 쉽고도 어려운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숲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나무만 보다가요..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언젠가 선생님께서 행원과 수행위를 풀이해 주신 글이 있었는데 어디 있는지 못찾겠습니다 ...너무도 명쾌한 해석으로 환희했었는데~~~^^**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