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건물을 지으며 중창불사를 하는
LA 영산법화사 자상스님
파르라니 깎은 머리, 잿빛 승복에 몸을 가리고 있을 지라도 노 비구니 스님들에게서는 궁극적 모성이 느껴진다. 대자연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편안함이 스님들의 존재에서도 흘러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담근 된장 좀 싸줄까?”
당신 찾아온 중생을 빈 손으로 보낼 수 없어 뭐 하나라도 손에 들려 보내려는 자상스님(慈常 영산법화사 LA 도량 주지, 세수 80)의 마음은 서울로 시집가 오래간만에 고향집 찾은 딸을 향한 친정어머니의 사랑에 다름 아니다.
모든 것은 인연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상스님이 법화경과 영산법화사를 만난 것도, 영산법화사 LA 도량을 세운 것도, 출가해 스님이 된 것도 시작은 한 스님과의 조우였다.
세수 25세 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2년째가 되던 해였다. 평소 마음 공부에 열심이던 스님에게 친구들이 마치 벗꽃놀이라도 가자는 것처럼 들썩였다.
“진해에서 법문 잘 하시는 스님이 한 분 오셨데. 우리 법회에 같이 가자.”
그 분이 지금은 열반하신 영산법화사의 종정이자 법주인 법화스님이었다. 과연 소문대로 스님의 법문은 자상스님의 가슴팍을 때릴 만큼 감동적이었다. 법화스님과 인연을 맺으며 자상스님은 본격적인 불자생활을 시작했다. 그전에도 물론 절에 다니기는 했지만 일년에 몇 차례 법회에 나가 촛불 켜고 연등 다는 수준이었으니 진정한 불교신자로서의 삶은 법화스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승 스님인 법화스님이 영산법화사의 종정이었기에 제자된 자상스님의 종단은 자연스레 결정지어졌다. 영산법화사는 법당에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본존불로 모시며 그 뒤에 법신불로 만다라를 모시고 이 본존만다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민간신앙을 수용하기 위해 다른 종단의 사찰에 의례 포함되어 있는 산신각 칠성각 등을 두지 않으며 예불 때는 꼭 북을 친다. 영산법화사와 다른 종단들과의 커다란 차이점은 이렇게 요약해볼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영산법화사를 한국의 남묘호랑게교(일명 창가학회)와 혼돈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창가학회도 예불 때 영산법화사처럼 북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겨난 게 아닐까. 미국 내에서 일연정종으로 불리는 창가학회는 법당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지도 않고, 일본의 일연스님을 그 신앙의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영산법화사와 다른 종단의 가장 큰 차이를 꼽자면 영산법화사의 소의경전이 법화경(묘법연화경)이라는 것이다. 스님을 비롯해 영산법화사의 불자들은 법화경을 최상경으로 여기고 이처럼 좋은 경전을 만난 소중한 인연을 감사하며 공부하고 나눌 수 있음을 행운으로 여긴다. 이 귀한 말씀을 접해보지 못한 불쌍한 중생들을 향한 연민은 자연스러운 포교의 발원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 다른 종단과의 커다란 차이는 참선 대신 경문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구절 속에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등 모든 주력이 포함돼 있다고 신앙하는 것이다. 또한 사경에도 열심이어서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면 신심과 공덕이 생긴다고 믿는다. 영산법화사의 종정스님인 법화스님은 말법시대에 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것은 법화경 밖에 없다는 소신을 가지고 법화경의 정신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치셨다.
자상스님도 처음 절에 다니기 시작할 때는 외울 것도 공부할 것도 너무 많아 어렵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영산법화사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기를 정말 잘 했다, 여기고 있다. 하지만 운명은 자상스님을 한국 땅에 그냥 머물게 두지 않았다. 1965년, 스님은 10명의 친청식구들과 함께 남미 파라구아이로 이민을 떠난다. 파라구아이에서 4년간 친정아버지의 사업을 도와드리던 스님은 1969년 12월 25일, 때마침 성탄절날, 여행 길에 올라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파라구아이도 좋았지만 남가주의 따뜻하고 햇살 찬란한 날씨는 정말 멋졌다. LA에 매혹된 스님은 잠시 이곳에 머문 뒤 1970년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가 4년 후인 1974년 6월, 영주권을 받고 합법적인 신분으로 미국 이민 길에 오른다. 이민 이후에는 줄곳 샌페드로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했다.
자상스님(당시에는 아직 출가를 하지 않아 엄무진행보살이었다.)은 스승이신 법화스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미국 내 영산법화사의 도량을 건립하길 바란다’던 소망을 가슴에 안고 다녔다. 그러던 가운데 인연은 스님을 미국 땅으로 이끌었고 법화스님의 다섯 제자(5불형제, 엄기동, 정보리월, 안관음행 보살 등)들이 마음을 모아 LA 도량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30여 년 전 현재의 사찰 건물을 처음 구입했을 때, 주변상황은 형편 없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서인지 온통 가시덩쿨 천지인 집 주변은 마녀가 살고 있는 기괴한 성 같았다. 궁극적 모성이란 것이 따뜻하고 편안함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때로 모성의 궁극은 여전사처럼 무기를 들고 인류를 위해 싸우기도 한다. 자상스님 역시 사찰 주변의 가시덩쿨을 직접 자르고 다듬어가며 비로소 사람 살 만한 곳으로, 부처님 모실 만한 곳으로 다듬어 나갔다. 여자와 집은 꾸며야 한다고, 스님의 정성어린 손길이 더해지자 건물에는 따뜻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앞채와 떨어져 있는 뒷채에 부처님을 모셔 법당으로 꾸미고 앞채는 요사체와 신도들의 모임공간으로 삼았다. 마당에는 석류나무, 대추나무 등 과실수를 여러 그루 심었고 작은 텃밭도 가꾸었다. 그때 심은 과실수에선 지금도 매해 가을마다 풍성한 자연의 결실을 주렁주렁 메달아준다. 지난 가을에도 빨간 대추를 수확해 뜨거운 햇살 아래 땟갈 좋게 말려 차로 끓여마시고 있다.
그렇게 갈고 닦고 준비한 법당에서 역사적인 개원법회가 열린 것은 1981년 10월 18일. 법주 행산스님 묘현스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개원법회에는 국내외 영산법화사 신도들이 참가해 새로운 신앙의 장이 생긴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그 후 약 2년 동안, 영산법화사 LA 도량에는 묘현스님이 주지로 계시면서 초기 사찰의 구조를 탄탄히 하는데 많은 공을 들이셨다. 1984년부터 약 2년간은 자현스님께서 그 바톤을 이어받았다. 그후 한동안 주지스님 자리는 공석이 된다. 한국 영산법화사에 관리를 필요로 하는 신도와 사찰이 급속도로 늘어, 이곳에 계시던 스님들까지 귀국하는 사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LA 도량은 한동안 주지스님 없이 자상스님(엄무진행 보살)을 중심으로, 임병호 신도회장과 신도회 회원들의 협조체제로 운영됐다.
구심점이 되는 스님은 없었어도 자상스님(엄무진행 보살) 외 이묘광화, 이묘법화, 김마하행, 서해담, 구순덕화, 유대명심 등의 신도들은 10년을 한결같이 영산법화사 LA 도량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큰 공헌을 했다. 가고 오는 스님은 없지만 항상 곁에 있는 법화경 말씀이야말로 신도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결속력으로 작용했던 날들이었다.
오직 부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깊은 신앙심의 소유자, 엄무진행 보살은 머리만 깎지 않았지 이미 스님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큰스님은 자상스님을 볼 때마다 출가할 것을 권고했다. 스님만 바라보고 있는 가족이 없었다면 아마 훨씬 오래 전에 출가를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피붙이를 두고 구도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선뜻 내리기 힘든 결단이었다. 그래서 큰스님께는 “지금 안 해도 후일에 꼭 출가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큰스님께 드렸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더니 어느새 불법에 입문한지 30년이 훌쩍 지나갔다. 큰스님도 이미 입적하신지 오래. 세월이 흐른 만큼 스님 나이는 더해지고, 어느날 이러다간 정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출가를 결정했다. 1999년 7월에 머리를 깎았으니 올해로 출가한 지 12년째를 맞는다. 일단 출가를 하고 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란다. 좀 더 빨리 출가했더라면 모든 면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 아닌 후회도 몰려왔다.
그때 이후로 자상스님은 영산법화사 LA 도량의 주지로 활동하고 있다. 이미 엄무진행 보살 시절부터 스님 될 만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신도들 사이에서의 잡음은 일지 않았다.
쉽지 않은 신도들의 교리 교육은 서울에서 펴내는 종단기관지 월간 ‘법화’의 보급으로 많은 부분을 충당하고 있다.
영산법화사 LA 도량에는 한국에서부터 법화경을 신앙하던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40-50대의 장년들은 약 10명쯤이고 대부분은 나이 많은 노보살들이다. 현재 등록한 신도의 수는 100여 세대. 일요 법회 때면 20~30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다. 매달 세번째 일요일은 천도날로 평소보다 많은 신도들이 법당에 나온다. 스님은 때론 자리를 함께 한 신도들과 함께, 때론 혼자서 매일 새벽 5시, 오전 11시, 오후 5시, 세 차례 예불을 드리고 있다. 지금 현재도 100일 기도 중인데 해야하는 축원이 많다.
영산법화사는 3월 말부터 증축공사를 시작하고 있다. 현재 단층인 건물을 3층으로 올려 주차장, 요사체, 법당을 각 층마다 들여놓을 계획이다. 이를 위한 모금은 이미 완료된 상태. 본지에 소개된 바 있는 서예가 서혜정씨도 자신의 작품전에서 조성된 기금을 전액 증축공사 기금으로 내놓았다. 다른 신도들도 오랜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자신들의 사찰을 아끼는 마음으로 정성껏 기금을 내놓았다.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신앙심도 깊고 공동체 의식도 투철한 알짜배기 신도들이에요.” 라는 자상스님의 신도 자랑이 과장은 아니어 보인다.
“하루 하루 우리 신도님들의 일이 잘 되기를 기도하면서 살아갑니다. 신도들의 문제가 곧 제 문제이잖아요. 지금은 오래된 불경기로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크죠. 하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이런 상황 저런 상황 다 일어날 수 있잖아요. 인연 따라 흘러가는 거죠.”
예불 드리랴, 기도하랴, 텃밭 가꾸랴 바쁜 스님의 일상은 증축공사를 시작하고부터 눈코뜰 새도 없어졌다. 요즘 스님은 “바빠요, 바빠.”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신다.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5시 예불 시작해, 6시 반에는 내려와서 공양드리고 사찰 안팎을 청소하고 나면 어느새 11시다. 또 법당 올라가서 예불드리고 내려오면 점심 때. 공사감독과 그 외 절의 사무를 처리하다 보면 금방 오후 5시, 또 예불 들어갈 시간이다. 기도 마치고 6시엔 저녁 공양하고 잠깐 쉬다보면 잘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란 것이 뭐 뾰족히 다른 것이 있을까. 매일 반복되는 예불과 공양, 청소, 업무, 이런 일상들을 항상 깨어 바라보며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법이 아니던가.
시작은 완성의 반을 의미한다. 3층으로 증축된 영산법화사 LA 법당이 그 위용을 드러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2011.4>
영산법화사 LA 도량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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