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눈 지독한 사랑
『전작주의자의 꿈』, 조희봉, 함께읽는책, 2003.
번역가 김화영은 알베르 까뮈의 전작주의자이다. 김화영은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까뮈론을 연구했고 까뮈 전집 번역에 평생을 헌신한다. 고려대 불문과에서 30년을 재직한 그에게 문학계는 ‘불문학계의 거장(巨匠)’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줬다. 『전작주의자의 꿈』(2003)의 저자 조희봉은 김화영교수가 스물여섯부터 지금까지 까뮈를 연구했다는 점에 감명 받고 전작주의를 실천하게 된다. 김화영은 “내게 진정으로 중요한 관심의 대상은 한 '작가'의 의식과 그 모험이다.(p27)"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을 말한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세계를 알고 싶다면 한 권으론 부족하다.
전작주의로 얻어지는 독서효과는 <이방인>을 읽고 까뮈를 말할 때와 까뮈전작을 읽고 까뮈를 안다는 간극과 같다. 작가의 전작에는 작가조차 모르는 일관되게 흐르는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작품 안에서 찾는 건 독자의 몫이다. 이 흐름을 작가세계, 작가정체성, 작가의식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 작품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메세지나 사유는 다른 작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작주의를 통해 작가의식이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그걸 찾는 과정이 전작을 읽는 기쁨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전작을 읽는 이유다. 어느 한 부분으로 보고 전체-부분의 연관 속에서 파악할 때 더욱 깊이 있는 분석이 가능한 것이다.(p23)
단, 전작읽기에도 원칙은 있다. 우선, 당대까지 살아남은 고전작품을 추천한다. 탁월하게도 조희봉은 고전을 번역하는 번역가를 선택했다. 1990년대 미국 서구자본주의가 한국을 휩쓸며 맥도날드, 코카콜라, 헐리우드 영화를 대중에게 뿌릴 때 끝까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물으며 천착했던 두 작가를 발견한다. 바로 이윤기와 안정효이다. 이윤기는 1978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200여 권이 넘는 작품이 있다. 그는 ‘소설, 저술, 번역이라는 세 요소의 균형있는(p58)’ 삶을 걸어왔으며 신화와 문학 번역을 통해 결국 소설쓰기에 매진하는 작가다. 조희봉은 <하늘의 문> 첫 작품을 만나고 이윤기 전작을 읽고 싶다는 ‘책읽기의 욕망’을 꿈꾼다. <하늘의 문>을 통해 고독한 인간을 봤고 자신의 삶을 바꿔도 된다는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윤기는 자신의 작품을 읽고 찾아온 전작주의자를 보고 ‘조희봉 현상’(p45)이라고 격찬하며, 1호 제자로 삼는다.
이윤기가 내게 뜨거운 불덩이와 같다면 안정효는 한없이 차가운 얼음덩어리와 같다. (p100)고 고백한다. 안정효는 <백년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150여 권의 책을 번역했다. 저자는 <하얀전쟁>(1989)을 시작으로 안정효의 작품을 한권씩 읽기 시작한다. 안정효의 정교하고 꼼꼼한 번역 탓에 속도가 나지 않았지만 쾌감은 높았다고 한다. 전작주의자는 안정효와 이윤기라는 거대한 산을 통해 창작의 고통으로 많은 작품을 탄생시킨 두 작가의 세계를 정복하길 꿈꿨다.
조희봉(1970-) 화천 출생으로 책을 지독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책을 보며 밥을 먹고, 군대에선 정성일 영화평론 방송을 적고, 대중음악가 강헌을 스크랩하고, 예술평론가의 글을 읽어 왔다. 전작으로 알게 된 서정주, 고종석, 평론가들의 작품을 흠모하며 열심히 책을 읽었다. 무언가에 미친다는 것은 축복이다. 전작주의자 조희봉은 전작읽기를 하며 헌책수집에 시간과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 결과물이 『전작주의자의 꿈』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안타깝게 절판되었다. 저자의 흔적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전작주의를 실천했지만 『전작주의자의 꿈』은 꿈으로 끝나 버렸다.
전작주의의 목적은 작가의 전체적인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사유를 완성하는데 있다. 전작주의자 조희봉이 꾼 ‘꿈’ 그곳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방대한 책을 읽었던 저자의 재능과 열정이 안타까운 지점이다. 헌책방에서의 에피소드가 『전작주의자의 꿈』의 반을 차지하는 목차 구성은 아쉽다. 동네 책방도 사라지는 요즈음 헌책방 순례기는 다소 공감대가 떨어진다. 종이책, 종이신문도 위기에 있고, 대형 중고서점 ‘알라딘’, 온라인 중고서점들이 매출을 장악하고 있는 실태 속에 ‘숨어있는 책’ 동호인들의 헌책사랑 이야기는 정보는 유익했으나 유용성이 적었다. 저자는 지금도 어느 헌책방에서 묵묵히 책을 찾고 있을까? ‘전작주의자의 꿈’을 실현하여 조희봉이 ‘세상을 건너는 법’을 다시 한 번 들고 나오길 기다려본다.
<서평-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