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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정일의 경호원이였다] 제3부 인간 생지옥 ‘요덕 정치범 수용소’
제1장 악마의 소굴에서 인간 생지옥으로
이영국
1. 관리소에서 살아 나오면 영웅이다
1995년 4월 24일. 이날은 내가 악마의 소굴 보위부 예심국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살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몸무게가 94kg에서 54kg로 줄어 완전히 해골이 되어 있었지만 살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예심국 사람들은 “예심국이 생겨난 이후 정치범이 살아서 세상 밖으로 나간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침 9시경 계호원이 찾기에 평소와 같이 무릎을 꿇고 손에 족쇄를 차고 나갈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족쇄도 채우지 않고 문을 열면서 계호원이 하는 소리가 “1번 너는 이제 살았다. 그냥 네 스스로 예심과장 방에 가서 자리에 앉으라”고 하면서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가”하면서 웃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자유에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예심과장 방에 가니 김승철은 “이제부터 관리소에 가서 살아 나오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총 네 가지였는데 기억을 더듬어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살자면 일을 부지런히 하고 풀이라도 닥치는 대로 먹어야 한다. 게으르면 몇 날 못 가서 죽는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보이는대로 먹어라. 체면이고 뭐고 볼 것 없다. 그래야 네 놈이 살아남는다. 둘째로, 김정일의 경호원을 했다는 말을 하지 마라. 경호사업 비밀을 잘 지키는 것이 내가 사는 도 하나의 길이다. 담담 보위지도원이 되었든 그 누구에게라도 모른다고 하라. 셋째로, 다른 정치범들과 말을 하지 말라. 다른 것 신경쓰지 말고 나는 이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풀이든 쥐든 뱀이든 개구리든 많이 잡아먹고 ‘살 것만’생각하라.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베풀 필요도 없다. 넷째로, 예심국에서의 일을 일체 비밀로 하여야 한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라. 누구누구를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 것이며, 특히 도주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갖지 마라. 그러면 곧 사형이다.” 그러면서 김승철은 “내가 여기서 너를 살려 내보낸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하라. 그리고 거기서 살아 나오면 정말 영웅이다.”고 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 집에서 올라온 이불과 작업신발, 작업복, 현금 천원을 건네주었다.
“관리소 안에 들어가서 빚을 지면 빚을 다 갚아야 나올 수 있다” 는 것도 가르쳐주고 “어디 한번 10년 동안 잘 살아보라”고 등을 두들겼다. 내 감방으로 들어온 후 계호원들이 방송으로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였다. 관리소에 가면 무조건 이악하게 살아 나오라, 여기 예심국에서 고문도 많이 당했는데 복수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우리도 상관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다. 대개 이런 말들이었다. 나는 그렇게 예심국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이곳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 잠도 오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지옥 같은 곳을 경험하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아무튼 그때는 밀폐된 공간을 나간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아침 10시에 예심과장과 예심국장, 계호과장을 만나고 러시아제 신형 지츠(러시아 트럭의 상표)에 오르게 되었다. 트럭 적재함은 외관을 방수천으로 덮어씌우고 내부는 펄판으로 둘레를 막았다. 적재함 앞부분은 3분의 1정도를 막고 나머지 공간에 호송원들이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나 혼자 차에 실려 평양시 연못동을 출발하였고 나중에 평양시 보위부에서 ‘정수현’이라는 사람이 차에 올랐다. 호송원 4명이 완전 무장한 상태에서 밖을 보지 못하게 봉쇄하고 그 사람과 단 둘이 정처 없이 정치범 수용소로 향했다. 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비포장도로에서 차가 좌우로 심하게 기우뚱거리자 오줌까지 찔끔거렸다. 도중에 한번 호숫가에 차를 세워놓고 계호원들이 권총을 빼들고 있는 상태에서 소변을 보았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산천이 오늘은 너무도 새로워 보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물에 세면을 한 뒤 다시 차에 올라탔다. 사실 그때 나는 어떻게 하면 호송원들을 물리치고 도망치겠는가 하는 생각에 틈만 생기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호송원들은 여간해서 틈을 주지 않은 채 감시를 철저히 했고 나 역시 몸이 허약한지라 도망간다하더라도 성공을 보장하지 못했다.
2. 도주하겠다는 말만 해도 총살
저녁 8시쯤 되었을까? 요덕 정치범 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려보니 왠지 모르게 으스스했다. 예심국보다 낮은 담장에 전기철조망이 쳐져 있는 자그마한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담당 보위지도원이 기다리다가 호송원들로부터 문건을 넘겨받고 짐을 방에 넣게 하였다. 그리고는 내일 만나자며 옆의 외래자 숙소 책임자에게 밥을 주라고 하고는 어디론가 휙 달아났다.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느라고 집에도 못 간 채 한참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그들이 주는 밥을 받아먹었다. 밥상을 보니 숟가락이 있고 사발에 밥을 담아주었다. 반찬도 있었다. 강냉이죽 같은 밥이었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사발에 숟가락을 놓고 반찬까지 있으니 이제야 사람 사는 곳을 만난 듯했다. 밥을 먹으면서 숙소 책임자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니 여기는 요덕 관리소 대숙농장인데 처음 오는 사람들의 몸을 회복하고 정신을 풀어주면서 구역 안의 질서를 가르쳐주고 익숙하게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목소리에 힘을 실어 강조하는 말이 “여기서 도주하겠다는 말만 해도 총살당한다”면서 “집 주변 산에 경비대들이 잠복을 많이 서니 도망갈 생각을 마라. 도주하다 성공한 사람이 없고 잡히면 다 사형 당한다.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때서야 나는 이 ‘관리소’라는 곳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통제구역임을 알았다. 그날 저녁은 6개월 만에 편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6시에 기상을 시켰다.
세면과 식사를 하고 나니 ‘외래자 책임자’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라고 하여 가봤다. 처음에는 보위지도원인 줄 알았는데 국가보위부 5국에서 책임지도원을 하다가 입덕으로(입을 한번 잘못 놀려)관리소에 들어온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두 명의 신 죄인을 신입자 대상에 기록하였다. 신상을 구체적으로 적고 우리들의 소지품을 창고에 가져다 넣었다. 그러면서 자기 소지품을 찾으려면 분주소(한국의 ‘파출소’에 해당)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면서, 그 원인은 도주자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돈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왜 돈이 필요한가 하면 관리소에 처음 들어가면 일을 못하기 때문에 몸보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국가에서 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일하기 전까지 국가에 빚을지지 않고 집에서 보내온 돈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만약 돈을 하지고 오지 않으면 하루 수당을 돈으로 계산되는데, 그것을 갚지 못하면 형기가 늘어나 10년형을 받았다 하더라도 제때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돈을 내고 마지막으로 소지품 검사를 하자 모든 검사가 끝났다. 관리소 안에는 죄인들에게 내놓은 규정이 아주 많았다. 죄인들이 규정을 어기면 경우에 따라 총살을 하거나 심하게 처벌했다. 외래자 책임자는 다음으로 이러한 규정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우선 정치범들 속에서 사회 생활에 대한 이야기나 제도 비난, 특히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무조건 총살이라는 것이다. 물론 도망자도 이유를 불문하고 총살이다.
총살은 매달 2~3건정도 된다고 했다. 또한 작업현장에서 10분 늦으면 주위 사람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찾게 되며, 다른 작업반 사람들을 만나거나 지정된 일자리를 이탈하면 구역이 비상소집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위협적인 말을 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죄수들이 보위지도원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하며 허리를 숙여 인사해야 한다. 특히 선생들이 기르는 짐승에 손을 대면 안 되는데, 만약 그런 짓을 하면 도주자로 몰리게 된다고 했다.
또한 선생들의 짐승먹이(사료)를 훔친 사람 역시 도주기도자로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보위부 지하 감방에서 예심이 끝나고 나가게 되었을 때 ‘관리소’에 간다고 하여 노동현장에 가는 줄 알았다. 예심과장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많이 했지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여 귀담아 듣지 않앗다. 실제로 트럭을 타고 이곳에 오는 순간까지 이제 앞으로 자유롭게 햇볕도 쪼이고 시원한 공기도 마실 것이다, 그러 것 쯤이야 10년이든 20년이든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북한 사람들도 잘 모르는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독자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떻게 북한 사람이 ‘관리소’에 대해 모를 수가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관리소- 한국에서 말하는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는 북한 사람들보다 남한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을 탈출한 강철환이나 안혁 같은 탈북자들의 증언에 의해서 말이다. 북한 사람들은 세계를 향해서 문이 닫힌 채로 살고 있고, 내적으로도 서로 벽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래서 관리소가 어떠한 곳인지 태반이 알지 못한다. 나 역시 앞서 말한 대로 ‘죄를 지은 사람들이 노동교화형을 사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교화소(교도소)보다는 관리소에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관리소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인간 생지옥이다. 앞으로 차차 그 실태를 이야기 할 것이다. 나보다 일찍 그곳을 탈출하여 한국으로 온 강철환이나 안혁이 쓴 책도 읽어보길 권한다. 또 한가지 독자들에게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독자들이 뒤이은 나의 증언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내가 있었던 ‘요덕 15홀 관리소’는 다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곳이다. 그런데 기막히고 살떨리는 것은, 실상 요덕 15호 수용소는 북한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 중에도 비교적 죄가 가벼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 와서 나는 북한에는 내가 있었던 요덕 관리소말고도 10여 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더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 있는 수인은 20만 명에 달한다. 요덕보다 더 잔인한 수용소가 술하게 있다니, 김정일은 정말 그 죄를 어찌 다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구류장에서 나와 조금이나마 살았다는 마음의 여유를 가졌지만 정작 이곳 요덕 관리소에서 생활한 정치범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여기가 쉽지 않은 곳이며 정말 살아서는 나가기 힘든 곳이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러고 보니 예심과장이 “관리소 안에 들어가면 송장이 도어 나올 수 있으니 항상 긴장하고 살 것이며 누구도 믿지 말고 무조건 먹고 자기를 보호하면서 살아야 자기 형기에 나올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날 저녁 이러저러한 말들을 들으면서 이들의 말처럼 그렇겠는가 하고 의심도 하고 스스로를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쓰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는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겠는가 걱정이 되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오전 8시부터 분주소장의 담화가 있었다. 순서대로 한 명씩 담화실로 들어갔다. 조금 앉아서 기다리니 내 순서가 되엇다. 분주소장이라는 사람이 나의 개인 문건을 보면서 관리소에 들어온 경위를 물었다.
나는 죄명을 말하기가 어색하여 법령 45조, 46조, 47조에 의하여 들어왔다고 하엿다. ‘무슨 일을 하였는가’하는 질문에 당 지도원으로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구역 내 질설을 잘 지키라면서 자그마한 종이에 ‘사회의 돌아가는 형편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이전 직책을 밝히지 않는다, 자기 죄명에 대한 비밀을 지킨다’는 내용의 서약을 쓰도록 하고 서명과 손도장을 찍게 했다. 그들은 필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분주소장은 뒤통수에 대고 “야 이 자식아! 너는 이곳에서 10년이면 나갈 수 있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10년’이라는 말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있을까?
4. 외래자 30일
‘외래자’라는 것은 정치범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자에게 수용소 내 질서와 습관을 익히게 하고 구류장에서 허약해진 몸을 회복시키는 준비기간에 붙여지는 명칭이다. 이 기간에 신입자가 많이 들어오면 그만큼 기간이 짧아진다. 죄수들은 구류장에서 나오게 되니 바깥 세상에 온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사람 접촉을 못하던 자들이 몇 명씩 모이니 궁금증에 못 이겨 이것저것 알기 위하여 애를 쓴다.
그러나 말을 조심하여야한다. 만약 입을 잘못 놀려 발언이 빗나가면 총살이기 때문이다. 이런 속에서 또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날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외래자 책임자는 조기운동을 시키고 매사람당 구간별로 청소를 시켰다. 청소가 끝나자 모여서 아침 식사 할 준비를 하였다. 식사 준비는 60대의 여 죄수 김재숙 할머니가 하였다. 그 할머니는 고향이 남조선이라는 딱지 때문에 황해도 어느 농장에서 평생 양몰이를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밤사이에 양 20마리가 죽어버렸다. 이 일이 의도적인 사건으로 몰려 관리소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우리들의 몸을 보며 이런 데 와서 과연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 하며 자기 자식처럼 걱정하였다. 할머니는 이곳은 식당에서 주는 밥만으로는 안되니 나가서 풀도 뜯어먹고 쥐나 뱀도 잡아먹어야 모자라는 단백질과 영양분을 조금이라도 보충하고 살아나갈 수 있다고 말해줬다.
그는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가르쳐주며 강냉이밥 한 그릇, 시래기 된장국에 자기가 마련한 무김치를 대접해 주었다. 그는 우리를 둘러보면서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자기 밥까지 니누어주며 오늘부터 일하는 것을 잘 배워 가지고 요령 있게 써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구류장에서 주먹밥 한 덩어리로 6개월을 살았는지라 외래자 숙소에서 주는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일어났다.
그래도 할머니의 관심어린 눈길을 보니 고향에서 어머니가 퍼주는 밥처럼 맛있게 느껴지면서 내 어머니가 그리워졌다. 몰래 흘쩍이며 하염없이 울었다. 우리는 아침밥을 먹고 작업 준비를 하였다. 외래자 책임자가 매 사람당 지게를 하나씩 메라고 하였다. 그때 시간이 아침 7시경이었다. 난생처음 지게를 지니 보기에도 멋지게 보이고 신기하였다. 지게를 지고 전기 철조망을 친 외래자 숙소를 벗어나 20m 정도 가니 처음에는 기분이 좋던 것이 걸어갈수록 다리가 정상적으로 놀지 않고 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식은 땀이 나오면서 대열에서 조금씩 떨어지자 책임자가 앞의 선두를 천천히 걷게 하여 겨우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려 어떻게든 도망갈 곳을 찾고 싶었지만 내 지친 몸을 생각할 때 정신력만으로는 안 되는 문제였다. 체중이 절반으로 줄었고 반년 동안을 구류장에서 앉아만 있다보니 근육이 다 풀리고 몸에는 뼈밖에 없어 이미 지난날의 내가 아니었다.
그날 할 일은 패놓은 장작을 지게에 실어 나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지게를지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지게에 장작을 담아주는 일만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첫날부터 외래자 책임자한테 상욕만 먹었다. 그날 내가 지게에 담은 나무는 불과 다섯 지게밖에 안 되었다. 나무를 담는 일마저 내가 힘들어하자 책임자는 내게 분주소 짐승먹이 가마와 각 방에 불을 때는 일을 시켰다.
분주소 안에 들어가보니 돼지 먹이와 개 먹이가 있었는데 그것이 사람 먹는 것처럼 더 거창하였다. 개 먹이에 돼지비계 한 덩어리가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입에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먹으니 살 것 같았다. 건강이 약한 탓인지 먹을 생각밖에 없었다. 불을 지피느라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분주소의 구조를 대강 알 것 같았다. 면적은 약 400평 정도 되었으며 분주소장 방과 기호문건 방, 지도원들 방, 세면장, 식당, 침실, 차고, 김치움, 창고, 담화실, 체육실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개 15마리 정도에 돼지 10마리 사육하고 있었다. 짐승에게 먹이 주는 이과 불때는 일은 외래자 숙소에 오는 제일 허약한 사람에게 맡기는 일이었다. 그날 6개월만에 처음으로, 비록 개 먹이이긴 하지만 손바닥만한 돼지고기 비계를 먹게 되니 나는 참 행운이 따르고 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먹으라고 부탁해도 절대 먹지 않겠지만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맛있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그날 오후에는 선생들이 피우다 던진 담배꽁초를 가지고 들어와서 외래자 숙소 화장실에서 피웠다.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날 저녁은 누워서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듣기만 하면서 보냈다.
5. 빠른 적응이 곧 사는 길
외래자 책임자 말을 들으니 외래자로 있는 동안 나오는 하루 식사는 강냉이 600g이라고 했다. 그나마 분주소장이 짐승먹이(오리, 닭, 거위, 개) 사료로 쓴다고 하여 일주일에 20~30kg이 빠져나간다고 한다. 다시 말하여 한끼 식사는 강냉이 180g인 것이다. 중대에 배치되면 160g이며 그것도 농사를 잘 지을 때의 일이고, 농사를 잘못 지으면 80g으로 줄 때도 있다는 것이다. 강냉이 80g이면 정말 한 주먹도 안 되는 양이다. 더군다나 일하는 정도에 따라 양이 다르다고 했다.
경제범 교화소에서는 그래도 콩을 주지만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콩 1g도 주지 않고 강냉이만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마구 넘어져 죽으니 외래자 기간에 자기 몸을 추스르지 않으면 1년도 못 가서 죽고 만다고 했다. 그날 저녁 이런 이야기를 듣다보니 잠자리에 들어서도 오직 도망을 쳐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내가 정치범 수용소에 있었던 4년 5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물론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밤에 자다가 밖에 나갈 때는 경비를 서는 사람이 경비실에서 벨을 눌러줘야 숙소 문이 열린다. 이때 벨소리가 난다. 소변 또는 대변을 보자면 창문을 열고 알려주어 경비병과 함께 나갔다 와야 한다. 정말 도망갈 틈이 없었다. 첫날에는 책임자도 좋게 알려주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음날부터는 기상을 시켜서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 소리를 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면서 이전과는 다르게 요구가 많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류장에 있을 때보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아침 5시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외래자 숙소 책임자가 소리를 지르며 늦게 일어난다고 나를 걷어차자 나는 순간 반발심이 나서 같이 소리를 질렀다. 책임자는 나를 다시 걷어찼다. 몸이 허약한 탓에 뒤로 넘어져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책임자가 하는 말이 이제 중대에 배치되고 나서 선생에게 대꾸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고 단단히 잡도리했다.
그때에야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해이해지면 안 된다, 여기 생활방식을 빨리 익혀야 한다, 이곳을 만만하게 보지 말자,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한다. 어찌되었든 그 책임자가 내가 정치범 수용소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을 깨우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책임자의 말대로 얼마 안 남은 기회에 어떻게든 몸을 추스를 생각부터 해야했다. 우선 걱정되는 것은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몸무게였다.
그래서 내가 수용소를 올 때 가지고 들어온 미원 10봉지 중 한 봉지(50g)를 닭 한 마리와 바꾸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북한에서 미원은 상당히 귀중한 물건으로 비싸게 팔린다). 나는 아침운동을 한 다음 조기청소를 할 때 외래자 책임자를 불러 조용히 이것을 부탁했다. 그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거절을 하더니 나중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했다. 그를 믿기로 하고 미원 한 봉지를 먼저 건네주었다.
6. 미원 한 봉지와 바꿔 먹은 닭 한 마리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일어나서 분주소 온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동안 나만 분주소에 들어와서 개, 돼지 사료 주고 불때는 일을 하는 줄 알았더니 웬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어디에서 왔는가”하고 묻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에게 “왜 이곳에 들어왔는가”하고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자기 죄 때문이 아니라 동생이 비행기를 몰았는데 남한으로 넘어간 것이 죄가 되어 자기 친척들 모두가 같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들이 미그기를 타고 한국으로 귀순한 이웅평 씨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나하고 남다르게 가까이 지내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쳐 주고 강냉이 꼬장떡까지 남몰래 매일 가져다주면서 남달리 나를 아껴주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귀인을 만나게 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아주머니는 이 구역에서 살아남자면 입이 무겁고 몸 관리를 잘해야 하며 특히 먹는 것에 첫째로 주의를 돌리고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
그는 무엇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내게 주고 자그마한 정보가 생겨도 알려주면서 친누이처럼 지냈다. 매일 분주소에 나가면 마주앉아 바깥소식도 전해주고 수용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물론 내가 못하는 일도 대신 해주었다. 중대에 배치도었을 때도 몰래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고, 나중에 그 가족과 수용소에서 헤어질 때까지 나와 제일 가까이 지내던 누이다. 내가 살아 일어나도록 많은 도움을 준 은인으로 그 누이를 잊지 않으며, 지금도 매일 그의 앞길에 행운이 있기를 기도 드린다.
며칠 후 다른 아주머니가 돼지 물 끓이는 칸에 찾아와서 바구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주었다. 닭이었다. 닭 속에 쌀을 넣어 만든 통닭곰을 주면서 이곳에서 다 먹고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가라고 했다. 외래자 책임자에게 미원 한 봉지를 준 대가가 드디어 되돌아왔다는 기쁨이 스쳐갔다. 내가 이것이 무엇인가고 물어보자 외래자 책임자가 주는 것이며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했다.
책임자도 고향이 함경도이며 보위부 수사국에 있었는데 김일성 초상 배지를 팔아먹다 걸려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까지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분주소 남새(채소)밭을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통닭을 뼈 하나 남김없이 먹었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내적으로는 서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관리소에 들어가기 전에 몸보신을 많이 한 사람들이 오래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옷도 아끼고 절약해야 벗지 않고 살며 겨울에도 춥지 않다는 것을 그날 들었다. 이렇게 하여 외래자 숙소에서 두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방조(도움)를 많이 받았다. 나는 분주소에서 외래자 기간 동안 남새밭 관리와 나무를 나르고 짐승 먹이를 끓이면서 분주소 난방문제를 보는 것이 일의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몸이 빨리 회복되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은 한달 만에 중대로 배치되었지만 나만은 두 달 동안 외래자 숙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나는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개별방침대상’이라는 딱지 속에 그렇게 회복시킨 것이라 했다.
7. 한 오라기 희망이라도 붙잡고
외래자 숙소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분주소 남새밭에서 남새를 심고 있는데 웬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행색이 조인 같지 않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니 “이름이 영국인가”하면서 “어디서 왔는가”하고 묻기에 나는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는 “나는 3중대 보위지도원이다, 앞으로 다 알게 될 것이다”고 했다. 내가 함경도에서 왔다고 하자 경호부대에는 얼마나 있었는가, 그곳에서 직책이 무엇이었는가 등을 물어보고는 다시 만나자고 하고 사라졌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일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힘들어서 누워 있는데 웬 차 소리가 나더니 분주소장이 찾는다는 것이다. 준비하고 담화실로 들어가니 “힘들지 않는가”, “오늘 3중대 선생님을 만났는가” 하고 낮에 있었던 일을 물었다. 분주소장은 “여기까지 왔으면 모든 것에 대해 입다물라”고 하면서 “경호사업한 것을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어느 선생님도 알 자격이 없다”, “이제부터 누가 물어보아도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하라고 지시했다.
“다시 한번 경호문제에 대하여 발설할 때는 너뿐만 아니라 나도 끝장”이라면서 “여기는 사회가 아니라 정치범 통제구역”이라고 다시 한번 상기시켜줬다. 그리고 앞으로는 알아서 주의하고 부지런히 풀이라도 뜯어먹어 건강을 회복하여 하루빨리 중대에 나가라고 하였다. 또한 풀을 먹는 방법과 먹는 풀을 잘 가려내는 방법, 쥐와 뱀을 잡아먹는 방법을 먼저 들어온 사람한테서 배우고 수용소 생활에 익숙해야 하며 생활과 일에서 비밀을 잘 지킬 때 자기가 범한 죄를 벗고 사회로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다 듣고 침실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그렇게 호의를 베풀며 다른 사람과 달리 관심을 가져주는지 알수 없었지만 뒤에서 누군가가 도와주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분주소 남새밭에서 일하는데 3중대 선생이 또 나타나서 “힘들지 않는가”, “건강이 회복되면 자기 중대에 올라가서 일하자”고 했다. 3중대 선생은 갑작스레 내 사존 동생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가를 물었다. 그 질문에 나도 놀랬다.
순간 분주소장의 말이 생각나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며 본 지도 몇 년이 된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 대답에 3중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으며 “건강이 회복되어 하루빨리 중대 현장에 나와서 일을 해야 자기 죄명이 없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정말로 나의 뒤에서 사촌 동생이 움직이는 듯한 예감이 들었으며 나도 모르게 힘이 나고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참으려 애썼다.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사촌 동생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을 느꼈다. 북한 사회에서는 믿을 만한 종교도 갖지 못하는 사회라 사실 그러한 희망만으로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데 조그만 힘이 된다. 나는 사촌 동생을 내 마음속의 하나님 삼아 의지하며 하루하루 용기를 내었고, 나주에는 3중대에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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