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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 스님 |
20대 초반에 <무소유>를 처음 접한 후 40대 후반에 다시 들추어본다. 막연히 좋은 책 정도로만 기억에 남아 있었는데 원고청탁을 받고 다시 읽게 되었다. 담배 한 갑만 있으면 하루가 괜찮다고 느끼던 20대를 보내서 그랬는지 몰라도 ‘무소유’는 내게 그다지 어려운 요청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외람되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도는 내가 충분히 실천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다시 읽어본 <무소유>에는 역시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글들이 모여 있다. 수십 년이 지난 수필인데도 세월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다. 구체적인 마음과 구체적인 현실을 담아내고 있어서 그런 것일 게다. 세월 지난 스님의 평범한 글이 왜 마음에 닿는지는 스님의 다른 책 <버리고 떠나기>서문에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내 삶 자체가 구체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글은 써지지 않는다. 활자화된 글은 물론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이 읽게 되지만, 나는 글을 읽을 대상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가까운 친지에게 편지를 쓰듯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쉬운 단어를 골라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청빈한 수도자와 동시대를 호흡했다는 것은 큰 복이라고 생각하며 고마움을 느낀다. 스님의 글을 읽어 보면 스님은 역시 출세간의 수도자였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얼마나 많은 대중과 호흡했는가와 관계없이, 산 속에 있거나 세간에 있거나와 관계없이, 스님의 자세와 실존은 항상 세간과는 어느 정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글 속에서 보이는 스님의 모습은 청정하고 고고하다. 수도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수도자로서 세상과 접하는 스님의 글은 명징하며 읽는 이의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스님의 글은 구체적이고 고상하나, 예토(穢土)와 어느 정도 간격이 있음을 느낀다.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속까지 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나 다름없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다."(<무소유>, 135쪽)
한국불교에 청정한 수도자는 많이 있을 것이고, 이웃종교들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은 그분들 중 한 수도자였다고 생각한다. 치열한 수도자였을 것이나 나는 스님이 새로운 현상이라고까지 보지는 않는다. 글을 통해서 본 스님의 삶의 자세는 고요하고 여유로우나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구석은 그렇게 많지 않다.
▲ 지율 스님 |
현대 한국불교에서 지율 스님과 명진 스님은 새로운 현상이다. 지율 스님과 명진 스님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스님들은 작정하고 예토로 뛰어든 출세간의 수도자들처럼 보인다. 이분들에게는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가 그렇게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율은 도롱뇽과 자기의 몸을 동일시하여 타협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극단까지 몸으로 밀어붙인 용감한 스님이다. 스님은 지금도 4대강 개발 전후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면서 자연과 아픈 교감을 나누고 있다.
스님이 남기는 교감의 흔적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며, 분노를 일으킨다. 소유란 집착과 같은 말일 터인데,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자기 몸을 도롱뇽처럼 작게 했다가도, 강물처럼 크게 넓히는 스님은 무소유의 화신이 아닌가 싶다. 도롱뇽이 되었다가 강물과도 하나가 되어 사는 스님과 같은 분을 보면 불교의 수도생활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스님을 통해서 고통 속에서의 자유로움을 훔쳐본다.
명진 스님은 참으로 독특한 현상이다. 지율 스님의 발언이 간곡하다면, 명진 스님의 발언은 직접적이다. 자기가 속한 교단과의 설전도 피하지 않을 만큼 직접적이다. 자칫하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 될 수 있는데도 거침이 없다. 큰 믿음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발언이다. 근자에 명진 스님과 대립각을 세운 정치인들은 이미 끝난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스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동관과 안상수가 압력을 넣었다거나 넣지 않았다는 사태의 진위여부는 이 싸움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명진 스님은 삶의 근본과 닿아있는 자리에서 발언하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정치적 이해타산을 가지고 발언하기 때문에 그렇다. 법적 판결과는 무관한 게임이다.
한동안 안상수의 ‘묵언수행’이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는데, 그는 역시 노련한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묵언도 정치적으로 한다. 이른바 묵언을 하는 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제스처와 정치적 수사를 고민하고 있었겠는가는 너무 빤히 보여서 상상하기도 싫다. 이러한 상황을 법정 스님은 어떻게 미리 아셨는지 이미 1974년에 쓴 글에서 이렇게 충고를 하고 있다.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이다. 비겁한 침묵은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무소유>, 105쪽)
명예훼손으로 명진 스님을 고소했다는 이동관은 더욱 가관이다. 훼손될 명예가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고소를 함으로써 그나마 가능태로만 존재했던 명예마저 탕진해버렸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기대는 것은 그저 부패한 권력과 금권밖에 없는 것 같다. 이미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 싸움이라는 것을 본인만 모르고 있다.
▲ 명진 스님 |
명진 스님은 예토로 뛰어들어 범벅처럼 뒤섞이기로 작정한 보살처럼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봉은사의 신도들과 함께 용산에 참배를 가고, 천안함 장병들과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스님의 마음은 평범한 어머니의 마음처럼 느껴진다. 봉은사는 강남을 위한 구원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가는 것 같다.
지율 스님과 명진 스님은 시궁창보다 더 끔찍한 예토의 막장 정치인들 곁으로 다가온 세간적 수도자들이다. 스님들에게는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가 모호하다. 스님들이 있어서 한국정치는 더욱 지저분해졌고, 스님들이 있어서 한국정치는 더욱 깨끗해졌다. 스님들이 저토록 용감할 수 있는 것은 집착이 없기 때문이라고, 소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무소유를 실천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본다. 지율과 명진의 한국불교에 무한한 축복이 내리기를 기원한다.
강창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