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백양사 고불매
백양사의 백암산, 내장사의 내장산은 가을이면 울긋 물들고 불긋 어울려 온 세상이 단풍이다. 하지만 가을 내장, 봄 백암이니, 백암산의 봄을 봐야 두 그림은 마침내 한 폭이 된다.
백양사는 백제 무왕 33년(632)에 여환이 처음 지었다. 이때 이름은 백암산 백양사, 고려 덕종 3년(1034) 중연이 다시 지어 정토사라 했다. 그러다 조선 선조 7년(1574)에 환양이 백양사라 이름을 바꿨다. 이는 환양의 법화경 독경 소리에 백학봉의 흰 양 떼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양을 부른다’는 뜻의 환양(喚羊)이 법명이 된 연유이다.
역사가 천년이 넘은 만큼 여러 이야기가 백양사에 쌓여있다. 그중 백암산 꼭대기 상왕봉 암반 위 고려 시대의 암자 운문암 이야기는 그저 하는 허투루 이야기가 아니다.
이 운문암이 정유재란에 불에 탄 뒤, 새로 지을 무렵이다. 이때 훗날 진묵대사로 높임을 받은 일옥(1562~1633)은 아직 어린 사미승으로 차를 끓이는 ‘다각’이었다.
어느 날 여러 스님의 꿈에 호법신장이 나타났다. ‘나는 불보살을 보호하는데, 오히려 불보살의 예를 받으니 황송하다. 다각을 바꿔달라’고 했다. 이 똑같은 꿈에 서로 놀랄 때, 마침 마을 나무꾼이 찾아왔다 ‘제가 비자를 따는데 어떤 남녀가 운문암으로 가더니 곧 울고 불며 내려왔다’ 이유를 물으니 ‘영원히 살려고 운문암에 갔는데, 일옥이 뜨거운 불로 막아서 쫓겨온다’고 했다. 이에 여러 스님은 일옥을 불을 마음대로 다루는 불보살로 받들었다.
‘북쪽은 금강산 마하연이요, 남쪽은 백양사 운문암이다’라고 했다. 겨울엔 북서쪽, 여름엔 남서쪽 구름이 이곳을 지나가니 운문암은 ‘구름의 문’이다. 눈앞의 광주 무등산에서 순천 조계산, 광양 백운산이 이어지고 주위의 산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니 뭍 산신을 거느린 암자이다.
또 작은곰자리 북두칠성의 일곱째 손잡이 별이 바로 운문암 위에서 반짝인다. 이 별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며 하늘의 힘을 내보내고 들이는 일을 맡은 파군성이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 삶이니, 이 오묘한 천지자연의 조화를 어찌 짧은 이치로 설명하랴?
여기 운문암에 몸에 금을 입히지 않은 흙부처가 있었다. 진묵이 운문암을 새로 짓고 모신 뒤 ‘내가 다시 불사하기 전에는 몸에 손을 대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 흙부처이다.
6·25 전쟁 때이다. 인민군의 은신처가 될 것을 우려해 국군이 백양사의 모든 암자를 불태웠다. 운문암만은 남기자고 한 군인이 간곡히 말했으나, 결국 한 줌 재가 되었다. 이때 한 스님이 불길에 쌓인 운문암에서 황급히 흙부처를 업고 나왔으나, 어느 틈에 사라져버렸다.
또 이때 산에서 내려오는 국군을 인민군이 기다리고 있었고, 운문암 태우는 걸 반대했던 군인만 살았다. 그 군인이 80년 무렵까지 백양사를 찾아와 참회했으니, 동족상잔의 비극이 보태는 아픔이다. 그럼에도 그 흙부처가 어디선가 진묵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여기 백암산 백양사에 이르는 길에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7백 살 갈참나무가 있다. 그리고 3천여 그루 고로쇠, 5천여 그루 늘푸른 비자는 이곳을 봄 백양이 되게 하는 연유이다.
또 여기 1700년경에 심었다는 홍매는 철종 14년(1863)에 현재의 자리로 절을 옮길 때 옛터에서 옮겨왔다. 이때는 홍매와 백매 두 그루였는데, 지금은 홍매만 만날 수 있다.
백양사를 고불총림이라고 한다. 총림은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 강원, 율원의 기능을 모두 다 갖춘 절이다. 또 고불은 인간의 참모습을 뜻한다. 그러기에 여기 백양사 고불매를 보고서야 아름다운 봄 백양의 완성이라 할 수 있으니, 화룡점정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