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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성무 저 “방촌 황희 평전” 민음사, 2014.
정구복 (한국학 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이 책은 고려 말 공민왕 대에 태어나서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찬란한 역사를 개창한 세종 대에 국정자문의 최고 책임자로 활약한 방촌(尨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업적을 구체적 사료의 제시를 통해 살핀 책이다. 저자는 이미 “조선초기의 양반연구”, “조선양반사회연구”, “조선왕조사” 등의 책을 출간하면서 원 자료를 깊이 있게 연구한 원로 학자로서 최근에는 “재상열전-조선을 이끈 사람들,” 청아출판사, 2010, 그리고 “영의정의 경륜”(지식산업사, 2012) 등에서 최고위의 경륜을 남긴 위대한 재상들에 대한 집필을 한 업적을 바탕으로 한 후속 작업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의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조선시대를 보는 균형 잡힌 시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읽다보면 독자로 하여금 조선왕조의 역사의 얼개를 손쉽게 이해하게끔 하여주는 안내서와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서문에서 우리나라 역사에서 위인들의 업적을 발굴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한국사에서 위인 만들기를 해야 한다. 지도자를 거론할 때마다 외국의 위인들을 들먹이고, 그들의 행적과 발언을 인용한다. ····· 우리에게도 위인은 많다. 다만 찾지 않았을 뿐이다.” 이는 저자가 한국사를 연구한 성과 중 일반인에게 전하고 싶은 강한 메시지이다. 한국사에서도 생생한 인간 지도자를 찾아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 책의 본문은 여섯 파트로 되어 있다. 그 중 1. 은 ‘격동의 시대, 황희의 탄생’을 다루었다.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건국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문제를 짚어가는 부분으로 마치 배경설명과 같은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중요한 전환이 파노라마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즉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실패를 상세히 소개하고 당시 지도층의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 우왕 대에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 정권에서 권신배의 발호, 두 무장 세력인 최영과 이성계의 등장과 대립 위화도 회군, 전제개혁,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상세히 다루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서술하였다.
2.는 ‘태종에게 발탁되어 요직에 중요되다’는 제목 하에 태종의 시대에 있어서 잦은 정변을 통해 최후의 권좌에 오른 태종 조의 역사를 단락으로 구분지어 서술하였다. 태종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 그리고 세자의 문제로 양녕대군을 세웠다가 폐위하는 과정, 그리고 왕실 외척이 앞으로 세력을 떨칠 것을 염려하여 그 세력의 가지치기 등 정치적 사건의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이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태종은 안정된 왕권을 세종에게 넘겨주면서 자신이 찾은 심복 황희를 함께 넘겨주었다.
황희가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되는 것은 태종이 도승지(지신사)였던 박석명에게 그대와 같은 사람을 추천하라 하였고, 이에 따라 황희가 지신사에 임용되게 되었다. 그는 의로운 일을 주장하여 때로는 유배생활을 당하기도 했고 언관이었을 때에는 강경한 자신의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리고 양녕대군의 세자 폐위에는 반대하여 남원에 4-5년간 유배생활을 하기도했다.
3.은 ‘세종을 보좌해 태평성대를 열다’이다. 이에서는 세종이 군주로서의 위대한 점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술하여 개인적 삶, 학문에서 경전과 역사를 체용으로 중시함, 유교를 통한 정치를 하면서도 신앙적으로는 불교를 신봉함, 말년의 개인적 질병까지를 흥미진진하게 자세히 살피고 있다. 그리고 집현전을 설치, 운영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예악의 정리사업과, 한글창제 등에 대한 저자 자신의 해석을 담아 재미있게 설명하면서 세종대에 황희가 내치에 기여한 점을 실록 자료를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즉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31년에 영의정에 올라 18년간 정무를 총괄하였음을 밝혔다.
4.는 ‘조선의 위상을 다진 노련한 외교술’ 이라는 제목으로 세종대의 외교적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 세종이 명나라와 여진족 사이에서 4군6진을 개척하여 이를 우리영토로 만듦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를 구체적 사료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때로는 여진 족장을 회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군사적 힘으로 정벌하여 진압하기도 하였으며, 명나라 황제의 개입을 막으려는 고도의 완전한 외교전을 수행하였다. 압록강 가의 4군 지역에는 광활한 산간에 살고 있는 본국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남쪽 백성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도 신중하게 추진되었다. 두만강 가에 설치된 6진은 세종에게는 선조의 유적이 있는 곳으로서 이를 점유하여야할 명분은 더욱 분명했다. 두만강 가를 확실하게 점유하려면 지리적으로 압록강 이남을 확보함이 반드시 필요함을 올바르게 파악했다.
이 지역을 우리 강역으로 확보하게된 것은 세종의 깊은 관심이 끊이지 않았고, 현지 임명한 관료들이 현지 사정을 정확하고 민첩하게 보고했으며, 왕과 대신들은 그 내용을 치밀하게 분석하였다. 이후에 닥칠 문제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는 황희 정승의 건의와 세종의 결단이 함께 행해졌다.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의 현지에서의 고투와 상세한 적정의 보고가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과 정승들과의 그 대책 마련에 대한 논의를 읽노라면 마치 거대한 지도를 펴 놓고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을 상정할 수 있을 정도로 현지의 지리적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현지 담당 관료가 급하게 보고한 내용을 함께 공유하고 논의하였기에 합의점을 쉽게 도출할 수 있었다.
세종 8년(1425) 64세에 우의정에 오른 후 87세로 영의정에서 퇴임하기까지 24년간 재상 직을 맡았고, 18년간 수상격인 영의정을 맡은 그의 뛰어난 인품과 능력을 상세히 서술하고 특히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마지막에 요점을 정리함으로써 논의 과정에서 황의의 의견이 거의 채택하였음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5.에서는 ‘명재상 황희 세상을 떠나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마지막 삶을 서술하면서 특히 그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 누린 관직을 상세히 서술했다. 이에는 과거급제자의 합격 자료인 방목자료를 이용하였고, 주로 황씨가문의 족보 자료를 거의 전적으로 수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친인척으로 얽힌 조선 후기의 양반의 한 줄기 큰 가닥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장수황씨가 조선조에 최대의 명문 양반가문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그를 봉안한 서원 등의 유적 등에 대한 설명은 그가 지냈던 지방관과 또 조선조 사림들이 추앙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6.은 마지막으로 ‘황희를 논하다’라는 결론 부분이다. 그가 오랜 동안 고위 관직을 누렸기 때문에 때로는 시기와 모함도 있을 수 있었고 당시 청탁을 받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가 최장의 수상직을 수행하게 된 것은 세종이 작은 문제로 재상의 큰 직을 흔들 수 없다는 철저한 신임과 지지에 힘입은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당시 사관의 평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그에 대한 역사적 총평을 내리고 있다.
이 책은 황희를 중심으로 한 조선 왕조의 역사를 실감나게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는 고려말의 멸망과정과 조선의 건국과정, 특히 태종과 세종대의 정치적 현실을 정확히 설명함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그에 관한 기록을 정확한 연대와 월, 일까지 들어 서술하고 있음은 왕조실록 중에서도 아주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세종실록을 통하여서라고 할 수 있다. 황희 관련 자료를 실록에서 검색 발취하여 제목을 새롭게 달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후주로 근거를 밝혔지만 부록으로 붙인 연보도 실록 자료를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황희를 검색하여보면 1175번이 나오고 있다. 태조 대에는 15번, 태종 대에 199번 세종 대에 812번이 기사화되었다. 이들 검색한 자료를 황희 중심으로 사료를 상세히 정리하여 제시하여 주고 있다. 즉 정치가나 일반지식인에게 알리고 싶은 저자의 역사학적 관심이 잘 드러난 자료의 소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연구가 대단히 많이 깊이 있게 연구된 것 같지만 실제 이런 정치적 인물에 대한 연구가 미진함을 보완하려는 저자의 노력이 이 책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간결한 문체로 조선왕조의 역사의 맥락을 잘 짚고 있다. 특히 저자의 탁견이 돋보이는 저술이다. 한국사를 통해 특히 조선조의 양반문화와 정치행태의 실제 모습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어 다른 분야의 학문을 하는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더구나 현재 한국사의 연구풍토가 민중사라는 허울 속에서 지배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풍토가 학계에 풍미하고 있다. 그러나 영의정이라는 직책이 왕의 자문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왕의 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점에서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비록 조선왕조실록의 검색이 일반 국민에게 공개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이런 연구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재상이라는 한 것을 의정부 우의정 이상을 재상으로 본 것 같은데 이는 삼공, 또는 삼정승이라고 칭하였으며 ‘재상’이라는 명칭은 2품 이상의 중앙의 고급관료에게 칭하였던 학설과의 차이는 앞으로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황희가 영의정이라는 최고위의 관직을 그토록 오래 유지하였음을 오직 그의 개인적 능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지, 당시의 삼정승이 왕의 자문기구로서의 기능을 가졌고, 이런 경우 노인의 학식과 판단력을 소중하게 여겼던 세종 대, 또는 조선조의 정치 구조적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의 후손을 족보자료를 인용하여 지배층의 관료 직을 밝힌 것은 황희의 관직 생활과 연계된 것인지, 어떤 관계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음이 아쉬운 점이다.
이런 개인적 연구가 문중사학의 한 유형으로서의 폐단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에 관한 자료설명과 연구에 대한 정리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희 문중에서 실록 자료를 뽑아 상세한 연보를 만든 것 같은데 본서에서 인용한 연보에서도 사료를 자의적으로 이용한 점이 발견된다. 그 구체적 예를 들면, 본서 503쪽의 연보 1430(세종 12년 68세)4월 25일 “태종실록을 감수하다”. 8월 10일 “공법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하다. 가 7만4149인 불가 9만8657인” 로 되어 있어 이 자료만을 보면 여론조사를 마치 황희가 실시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록 자료에는 이런 찬부표시 외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 사람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는데 황희 등은 공법의 실시를 반대하면서 보완할 점을 개진하고 있다. 물론 이는 본문에서 옳게 설명한 내용과 서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이런 예만이 아니라 본문에서 실록 자료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번역본의 잘 못을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정했는가를 좀 더 상세히 기록해주었더라면 이 방면 연구자가 오역된 것을 거듭 이용하는 폐단을 주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요컨대 이 책은 황희 정승을 통해서 조선조의 양반사회의 정치 행태와 문화 행태, 외교적 운영 등에 관한 상세한 실상을 요령 있게 서술한 책이다. 즉 조선왕조의 깊은 문화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조선조에는 중국에서 달성한 유교문화의 수준을 완전히 따라잡았다. 그런 기틀이 세종대왕 대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세종 대에는 우리의 강역이 현재의 것으로 확정하게 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는 사람이 살지 않는 상황에서 자주 태도를 바꾸는 여진족을 회유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현안이었다. 노성의 정승을 모시면서 중국인이 달성한 지혜와 경험, 그리고 현실에 적합한 판단을 하게 한 황희의 역할이 왜 소중한 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에게는 황희와 같은 지도자가 필요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조선시대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좋은 책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첫댓글 국사 전공자가 아니라도 쉽게 알 수 있고 구독을 청하게 하는 친절한 서평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건강에 최고의 보약입니다.
조목 조목 구체적으로 쓰신 서평을 잘 읽었습니다. 특히 "현재 한국사의 연구풍토가 민중사라는 허울 속에서 지배층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풍토가 학계에 풍미하고 있다" 라는 지적에 동감합니다. 그러고보니 5세조 문숙공 박석명을 이렇게 접하게 되어 장단에서 4월에 있을 시제로 마음이 옮아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일선생 평안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