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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평론 2020년 8월 칼럼
제목: 비대면(非對面) 시대의 철학 ㅡ하이데거와 죽음의 개념
비대면(非對面) 시대의 철학 ㅡ하이데거와 죽음의 개념.hwp
저자 : 안재오
◉ 비대면(非對面) 시대의 철학 ㅡ하이데거와 죽음의 개념
1. 서론 : 멈추지 않는 코로나 확산
세계는 여전히 코로나 바이러스와 전쟁 중이다. 우리 나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한국 방역이 좋다” 라고 말한지 오래 되었고 그 덕분에 4. 15 총선에서도 큰 덕을 보았지만 정작 그가 말하는 K방역은 날이 갈수록 맥을 못추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집단 감염의 위험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래도 현재 코로나가 가장 크게 번지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美 코로나 확진자 300만명...보건 전문가들 "미국은 자유낙하 중"
조선비즈
입력 2020.07.07 08:39 | 수정 2020.07.07 10:41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재확산에도 독립기념일 연휴를 맞아 해변에 몰려든 인파를 본 보건 전문가들이 미국이 "자유낙하 하고 있다"며 개탄했다고 CNN이 6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이던 지난 3월 미국 플로리다 해변에 몰려든 인파. /NBC뉴스 방송화면 캡처
미 국매사추세츠 제너럴호스피털의 감염병 전문가인 로셸 월렌스키 박사는 이날 CNN 인터뷰에서 "우리(미국)는 자유낙하하고 있다"며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 모르거나 아니면 체념하고 무시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코로나19가 가파르게 확산하는데도 독립기념일 연휴였던 주말 새 사람들이 해변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장면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월렌스키 박사는 최근 미국에서 하루 코로나19 신규 환자가 5만명 넘게 나온 것을 언급하며 "그들이 젊은이들이라면 그중 500명이 사망할 수 있다. 그들이 나이 든 사람들이라면 그중 7천500명이 죽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는 이어 "설령 (감염된) 개인이 개인적으로는 해를 안 입는다고 해도 그들은 이 질환으로 해를 입을 수 있는 다른 사람 2∼3명을 감염시킬 잠재력이 있다"며 "따라서 큰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우리가 이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해 행동을 바꿀 때까지는 이 전염병은 계속해서 치솟을 것"이라고 덧붙였다.한편 이날 통계 사이트 월드오미터 집계를 보면, 미국의 코로나19 확진자는 302만 명으로 3백만 명을 넘겼다. 미국 전체 인구의 약 1%가 코로나 19에 감염된 것. 존스 홉킨슨대 기준 감염자 수는 291만명으로 3백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 · · · )미국 내 사망자는 13만명을 넘어섰다. 전세계 사망자 53만 명의 약 25%에 달하는 숫자다.
미국인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을 경시한다. 심지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마스크를 쓰지 않기로 유명했으나 최근에는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암울하다.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구에서는 기저질환도 없는 17세 소년이 폐렴으로 죽었다. 우리 국민 모두 감염병을 극복하고 다시 밝은 날을 맞이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사회적 거리두기” 이다.
단체 생활, 사회 생활은 가급적 자제하고 집에만 있는 것이 이런 경우 가장 바람직한 생활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회적 거리두기다 쉽지는 않다. 인간의 근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모습
2. 본론 : 사회적 거리두기와 철학적 변형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를 떠나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그 밖에도 많은 이유 때문에 인간들은 모이기를 좋아하고 사교와 환담 그리고 같이 먹고 마시기를 좋아한다. 위의 미국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 위험에도 불구하고 독립기념일을 즐기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해변으로 모였다. 미국인들은 질병의 위험보다는 인생의 즐거움을 택한 것일까? 거기에 비해 한국인들은 좀 더 조심을 하는 듯하다.
이런 때 한번 묵상해 싶은 사상이 바로 실존주의(existentialism)이라는 철학이다. 실존주의는 전반적으로 인간의 사회성 보다는 개인성, 고립성 등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본다. 즉 사회적 교류와 환락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상실하고 대중화, 평균화, 세속화 된다는 것이다. 한 때 이 철학은 일본과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었다. 그 후 포스트모던 철학이 일대 광풍을 일으키더니 이 역시 잠잠하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1889-1976)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마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철학은 흔히 실존철학이라고 불리어진다. 실존(Existence)개념은 원래 중세 철학의 개념이었으나 현대에 와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있다. 중세에서 실존의 뜻은 본질(essence)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유한한 존재자는 그 구성에 있어서 본질과 실존이 합성되어 있다. 즉 내가 돈 100만원에 대한 완벽한 개념이 있어도 그것이 실제로 내 앞에 존재하는 것은 별문제라는 것이다. 이처럼 일견 당연하게 보이는 실존(existence)개념은 근래에 와서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 때문이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의하면 유한적인 모든 것은 항상 실존과 본질이 분리될 수 있고 그 반면 무한한 존재인 신(神)의 경우는 본질이 바로 실존이다. 따라서 양자는 분리될 수 없다. 예를 들면 필자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그러나 필자는 그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즉 어머니의 본질은 필자의 마음에 남아 있으나 실존을 없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과 실존의 관계이다.
이런 중세적 스콜라 철학적인 실존의 개념을 하이데거를 비롯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실존에서 인간 존재의 특별한 양상을 찾았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만이 고유한 실존적인 존재이다. 그 반면 중세에서는 모든 사물이 실존을 가지고 있었다. 하이데거의 실존 개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된다. 이런 면에서 하이데거 역시 근세 철학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코기토 원리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는 주관성의 원리이다. 하이데거의 실존 혹은 존재 개념은 이런 “인간 중심주의” 혹은 “나” 중심주의를 반영한다. 인간은 실존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본다.
이런 면에서 실존 개념은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창문과 같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
이런 관점에서 하이데거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를 썼다.
“존재와 시간”에 의하면 인간의 존재가 모든 사물의 기초가 된다. 여기서 인간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체를 지닌 일상생활적인 인간이 아니라 그 이전의 존재 즉 세계와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자신을 던진 존재를 말한다. 이런 인간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Dasein)이라고 한다.
현존재 분석을 통해서 여타 학문들의 토대를 추구하는 것을 하이데거는 실존론적ㅡ존재론적 분석이라고 한다.
이런 실존론적ㅡ존재론적 분석의 일차적인 대상은 현존재이다. 현존재(Dasein)의 의미는 그 자신을 앞서있고 세계 안에 있고 존재자 옆에 있다.
(Sich-vorweg-schon-sein-in-(der-Welt)-als-Sein-bei innerweltlich begegnendem Seienden) 라고 한다.
이를 하이데거는 실존의 구성틀이라고 한다.
“앞서 있다“ 라는 말도 하이데거의 중요한 개념으로서 인간은 항상 미리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몸은 여기 있어도 마음은 항상 다음 일을 향해 있다는 점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인간 이해는 어쩌면 상당히 긴장되고 초조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즉 놀거나 즐길 때, 우리는 앞을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인 현실에 만족한다.
어쨌든 하이데거는 인간을 이렇게 긴장되고 염려하는 존재로 본다.
사실 이것이 하이데거류의 실존 철학의 근본적인 특징이다. 그들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중시한다. 즉 죽음이나 질병 혹은 고통 혹은 죄(罪) 같은 사건을 무척 중시한다.
그 다음 세계내 존재(In der Welt Sein)에 대해서 말하면 이렇다. 인간의 근본 존재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계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즉 외부 세계를 향해서 열린 존재를 말한다. 하이데거의 세계(Welt)지구나 달이나 별같은 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즉 인간의 세계개방성 때문에 우리는 환경이나 자연 등에 대해서 그들과 교섭할 수 있고 연구할 수도 있고 따라서 자연에 대한 학문도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존재자 옆에 있다” 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특수한 존재 형식을 잊고 마치 나 역시 하나의 사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 역시 잘못은 아니다. 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우수성을 모르고 일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적 특성은 하이데거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겨우 알려진다. 이를 하이데거는 퇴락(Verfall)이라고 한다. 퇴락 혹은 타락이나 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존재 방식을 말한다.
위와 같은 인간의 현존재에 대한 실존론적인 분석의 결과 하이데거는 불안(Angst)과 신경씀(Sorge)라는 더 깊은 범주를 파해쳐 낸다. 염려는 인간의 전체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즉 위에서 말한 “앞에 있음(먼저 있음)”, “안에 있음” 그리고 “옆에 있음” 이란 세 가지를 아우르는 인간존재(현존재)의 종합적인 모습이 불안과 염려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신경씀”이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걱정이나 염려와는 다른 범주로서 존재론적 실존론적 의미를 가진다. 즉 “신경씀(Sorge)"인간의 마음이 항상 어디 어디로 향해 있다는 말이다. 이 신경씀의 현상은 불안의 심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신경씀을 수반하지만 보통은 이를 잊고 있다가 불안의 감정 가운데 이것이 제대로 포착이 된다. 이런 차원에서 “신경씀(Sorge)"을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로 본다.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신경씀(Sorge)은 현존재(Dasein)의 존재(Sein)“라고 한다.
“신경씀(Sorge)"의 현상과 더불어 죽음(Tod)의 개념이 다루어 진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죽음은 우선 타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체험이 된다. 당연히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아무것도 없으니 타인의 죽음을 먼저 경험하게 된다. 타인의 죽음 즉 부모나 친척 혹은 친구들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은 죽음의 의미를 반추하게 된다. 특히 시체를 보면서 슬퍼하고 고인의 인격을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서 죽음은 물리적 사건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메멘토 모리 라는 속담을 언급할 수 있다. 위의 그림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는 말은 옛날 로마에서는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이 시가 행진을 할때 노예를 시켜 행렬 뒤에서 큰소리로 외치게 했다고 한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인데,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너무 우쭐대지 말라. 오늘은 개선 장군이지만,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니 겸손하게 행동하라.'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풍습이라고 한다.[위키백과사전]
하이데거의 죽음 이론 역시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위에서 말한 “신경씀(Sorge)"의 현상을 통해서 파악된다. 즉 ”끝“ 혹은 ”마지막“ 이란 사건에 “신경씀(Sorge)이 죽음이다. 실존론적-존재론적 죽음의 의미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다. 하이데거의 죽음 분석은 철저히 내세계적(innerweltlich)이다. 즉 죽음 이후의 삶, 영생, 극락 등은 다루지 않는다. 이런 차원에서 하이데거는 ”죽음의 형이상학(Metaphysik des Todes)"을 구상한다. 현존재는 죽음으로의 존재(Sein zum Tode)이며 죽음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즉 “인간은 죽음을 산다“. 죽음은 삶의 마감이나 삶의 완성이 아니라 실존의 특유한 방식이다. 죽음은 단순한 사건이나 소여(주어짐)가 아니라 "각자의 것(Jemeinigkeit)" 와
"실존(Existenz)"을 통해서 비로소 파악이 된다.
이처럼 하이데거는 죽음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사도 바울이 “나는 매일 죽노라” 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생각이다. 죽음 속에서 인간은 철저히 개체화되고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보게 된다. 이런 것을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선구적인 결단이라고 한다. 죽음에로의 선구적인 결단을 통해서 인간은 일상성 속에 함몰된 타성적인 삶을 버리고 고유한 가능성과 만나게 된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인간은 죽음으로의 자유를 맛보게 된다.
이는 상당히 영웅적인 삶을 의미한다. 보통의 일상적인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철학적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사는 현대인의 생활철학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죽을 용기 없이는 삶의 질적인 변화를 누리기 힘들기 때문에 하이데거의 죽음의 선구적 결단이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3. 결론
위에서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의 죽음과 실존에 대한 논구를 살펴보았다.
미국의 휴양지의 모습처럼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데도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여 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필요한 사회적인 덕목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非對面)이다. 자신과 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가능한 만나지 않고 가능한 타인들과 멀리 하기를 요구받고 있다.
이런 기회에 우리는 죽음으로의 묵상을 통하여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Eigentliches Seinkönnen der Existenz)를 발견할 수도 있다.
사람은 늘 어울려 살고 얼굴을 마주 보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족의 경우는 그게 바람직하지만 잘 모르는 친척이나 친구 들은 비대면으로 연락하는 게 낫다. 즉 전화난 통신 혹은 SNS등으로 소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코로나 사태를 예방하기 위한 비대면 업무 처리
사람은 사회적 관계망을 빠져 나와서 비로소 죽음에 대해 숙고하고 또 사후의 세계나 신에 대해서 묵상을 할 수 있다.
교회 역시 코로나 감염의 온상으로 지목되어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다.
이런 때 집단과 접촉을 떠나 진정한 자아와 신앙에 대해 성찰해 본다면 비대면 시대의 실존철학은 제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