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출판할 우리 책이다. 두 가지는 ‘풀기’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까 이제 나올 우리 책은 ‘풀기’에 대한 책이다.
‘풀기’를 달리기 돌리기로 표현함으로써 더 직관적으로 의미가 다가오길 기대한다.
우리가 말하는 ‘풀기’가 단지 release는 아니다. release와 connect 둘 다 포함한다.
즉 '풀기'는 얽혀있는 것을 풀고 끊겨있는 것을 이어 하나로 만드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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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이르기까지 많이 헤맸다.
우리는 항상 소수 교육보다 다수 교육을 추구했다.
한국처럼 저녁 없는 사회에서 이런 노력은 곧장 어려움에 처한다. 사람들이 운동하기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주류가 아니다. 어떤 분야든 주류의 의견과 생각은 설명이 간단하다.
예를 들어 《이기적 유전자》는 책 제목 6글자만으로 설명이 된다. ‘사람들은 지독히 이기적이야.’ 이것이 세간의 상식, 지배적 생각이다.
이런 관점을 반박하는 일이 더 어렵다. 훨씬 더 많은 글자나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휘트니스의 목표는 다이어트라는 것이 세상 일반의 상식이고 이런 생각에 기대면 근육질 남녀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움직임의 학교’ 라니. 훨씬 낯설고 더 긴 설명이 필요하다.
〈딴지일보〉 벙커1에서 우리는 '왜 운동보다 움직임이 먼저인가.' 라는 제목의 강연을 2시간 동안 해야 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어마어마한 움직임 능력을 보여준다면 상황이 더 잘 풀릴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우리 다운 이유는 우리 자신이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재능도 있는데 어려서 시작해 대단한 능력을 수월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굳이 이런 탐색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는 ‘풀린’ 사람들에 대한 선망 역시 훨씬 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망과 열망 그 자체는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보장되는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잘 할 수 있나요?” 프로 선수에게 묻자 “다시 태어나야 됩니다.” 라고 답했다. 이번 생애에는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고급의 움직임은 십대 초반을 넘어서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거의 그렇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대신 우리는 ‘풀기’에 대해 알게 되었다. ‘풀기’가 그들의 비결이다. 어쩔 수 없이 성인은 도달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그래도 예전의 자신보다 나아질 수 있다.
그렇다면 ‘풀기’는 고급의 움직임, 그 비밀을 찾아 나서는 여정의 이정표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한편에서 우리는 다수 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는 덕분에 끝없는 압박을 받고 있다 ―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나아지고 좋아질까?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연구하고 실험하는 것은 우리에겐 직업윤리와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지 우리 자신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건장해 보이기, 날씬해 보이는 데에서 정신적 만족을 얻거나 측정하고 비교하기 좋은 수치들(중량, 시간, 거리, 횟수 등)로 결과가 나오는 운동들에 끌리는 것이 주류적인 태도다.
그러나 움직임은 역동적일수록 인체의 장점을 잘 활용할수록 입체적이고 순간적이다.
황홀한 순간들은 거의 대인적, 집단적 움직임 속에서 빛난다.
진정한 움직임은 입체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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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의 존재로서 인간이 등장한 계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직립’ 또는 ‘직립보행’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체육 시스템은 거의 항상 달리기를 포함했다.
‘걷기’는 오랜 세월 동안 인류에게 주된 이동수단이였기 때문에 굳이 체육 훈련에 집어넣을 이유가 없었다.
현대의 우리에게 더 많은 걷기가 필요한 것은 일종의 재활이나 회복의 의미다. 그러니 걷기만 한다면 아직 재활 단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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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를 더 얘기할 수 있다.
첫째, 많은 것들이 ‘직립’에서 비롯됐다.
인간 움직임 아니 인류의 특징들이 ‘직립’에서 비롯됐다. 잘 직립할수록 인체의 동역학이 빛을 발한다.
더 좋은 직립이 더 좋은 기반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잘 직립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검토해야 한다.
둘째, 달리기는 우리에게 강력한 욕구였다.
본성이란 표현도 적절하다. 태어난 이후 움직임이란 본성이 향한 중대한 지점이었다.
이것은 여러 방향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은 ‘놀이’ 가 동물이든 인간이든 어린 것들의 '도약' 욕구에서 유래한다고 했다.
실제로 많은 언어들에서 ‘놀이’ 라는 단어의 어원은 '도약' 과 관련이 많다.
‘달리다’를 ‘뛰다’로 바꿔 써보자.
dash, sprint, run, hop, skip, jump, stomp, leap, bounce 모두 ‘뛰다’다. '도약'의 움직임들을 다 포괄하고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제로 달리는 움직임에는 두 발이 모두 지면에서 떨어져 공중에 떠 있는 순간이 들어가 있다.
연속사진을 찍어보면 그 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달리기 자체가 '도약'이다.
대여섯 살의 아이들을 보라. 달리기는 그들의 기본 욕구다.
물론, 잘 기억도 나지 않을 그 시절에 대해 “나는 그때도 달리기 싫어했어.” 라고 부인하는 어른도 있을 것이다.
첫째, 이미 말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 시기다. 그래서 후에 각색된 기억일 수 있다.
둘째, 어른의 시각으로 달리기를 보고 있다. 트랙이나 운동장에서 일정 거리를 달리는 것만 달리기가 아니다. 그 나이에 그럴 아이들은 거의 케냐에만 있다. 아이에게는 뛰노는 것 자체가 달리기다. 우리보다 훨씬 작고 덜 자란 존재 아닌가.
셋째,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이미 사회적 존재다.
한두 살 아이의 행동에도 이미 사회적 영향이 보인다. 서너 살이면 아이 자신이 남들보다 뒤처지는 능력을 의식할 수 있다. 그래서 달리기를 창피해 하거나 꺼려할 수 있다. ‘여자 답게’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도 아이 스스로 욕구의 순위를 변경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 거의 모든 아이들이 신이 나면 미친 듯이 방방 뛰어다닌다. 도약의 욕구는 그만큼 강력한 것이다.
미세 먼지 피하랴 층간 소음 피하랴 가만히 앉아 있어야 칭찬 받는 사회에서 아이들의 도약 욕구는 너무 일찌감치 억압 당하고 있다.
130조 규모의 거대 산업, 즉 게임 산업이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나가 뛰놀지 않고 게임에 빠져들지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있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눗방울, 찌그러진 공, 조야한 물총 따위가 게임을 물리치고 아이들을 밖에 나가 뛰놀게 만든다는 사실이 더 놀라운 반전이다.
공터 따위가 어떻게 130조를 이긴단 말인가. 뛰노는 움직임은 거의 본성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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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그렇게 대단하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울트라 마라톤 선수가 되는 것일까?
그들이 가장 많이 달리는 사람들 아닌가. 울트라 마라토너들이야말로 잘 ‘풀린’ 사람들인가?
아니다. ‘풀기’가 목적이고 달리기는 수단이다.
오래 달리기, 빨리 달리기, 거리나 시간은 목표도 기준도 아니다.
따라서 기록을 위한 ‘폼’도 요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다.
먼 옛날부터 어떤 체육 훈련을 시작하려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과정이었다. 그렇지 않은 게 더 예외적이었다.
앞에서 정리한 것처럼 달리기를 ‘도약’ 움직임 영역까지 확대하면 예외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여전히 복서, 낙무아이(태국에서 무에타이 선수들을 일컫는 말), 투수 등은 열심히 달린다. 복서와 낙무아이는 과장하면, 거의 매일 밥 먹듯이 달린다. 축구나 육상 선수도 아닌데 왜 그럴까?
‘풀기’ 위해서다.
축구나 육상은 물론이고 유도나 레슬링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서서 단번에 파워를 쏘아내는 사람들이다.
체축을 바르게 세우는 감각과 (회전의) 파워 움직임이 결합될 때 서로 상승 효과가 있다.
물론 퍼포먼스가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풀릴 필요가 있다. 좋은 움직임을 위해서도 몸의 되살림을 위해서도 가장 해볼 만한 운동 과정이 바로 ‘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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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기 가장 힘든 곳, 콘크리트 정글. 오, 이런, 전력을 다해야 해. 발목에는 사슬이 없지만 난 자유롭지 않아. " ―Concrete Jungle(1973), Bob Marley & Wailers
1973년에 나온 노래다.
그러나 가사가 주는 울림은 여전하다.
지금 여기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이 자기 연민과 때로는 결기까지 불러들인다.
우리가 언제 어디 있는 지를 빼고 우리 삶을 얘기할 수 있을까? 주제가 건강과 움직임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는 어떤 주제도 그럴 자신이 없다.
건강과 운동 관련해 너무 많이 강조되는 것이 운동과 음식에 관한 개인의 노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록 중에서 한 가지 항목이다. 건강을 위한 전체 목록은 훨씬 더 사회적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건강 문제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거의 모두 사회와 연결돼 있다.
여러 건강 문제들은 대부분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다. 현실의 조건들이 개인들에게 가하는 영향력은 예상보다 크다.
그래서 이 책에는 두 가지가 공존한다.
첫째, 움직임의 연구자로서 좋은 움직임에 대한 선망과 열망. 집필을 이끈 원동력의 밑바탕에는 이런 개인적 취향이 존재한다.
둘째, 그러나 우리는 곳곳에서 현실의 씁쓸함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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