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초.중.고동문체육대회는 매년 개최된다.
중학교 졸업기수를 중심으로 한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진 않았지만 24기다.
24기, 34기, 44기가 주관기수이다.
강원도 영월군 북면 마차리, 그곳엔 초.중.고가 있다.
어릴 때 북면엔 국민학교가 마차, 솔치, 밤치, 문곡, 공기, 연덕, 북쌍,덕상 등 여덟개 있었다.
왜정시대엔 마차는 일본인이나 공무원 자녀 등만 다녔고 서민은 문곡을 다녀야 했다.
8개 초등학교 졸업생이 마차중학교나 영월읍이나 제천시 또는 원주, 춘천 등으로 나갔다.
1960대, 영월광업소가 흥할 때는 영월읍보다 규모가 컸던 면소재지였다.
1학년 입학하였을 때 8개반으로 2부제 수업을 했다. 오전, 오후반으로.
내 기억엔 내가 4학년때부터 4개반으로 줄었다. 졸업할 때도 4개반이었다.
나는 마차중학교 입학, 1개월 다니다가 부산의 경남중학교(당시 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중학교 1학년, 사춘기의 시작일 때 향수병에 걸렸다.
떼를 써서 방학 때면 꼭 고향엘 갔다.
그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던 세월이 40여년이다.
이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놓아야겠다.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도 간 곳을 모르겠다.
마차초등학교 다리를 건너면 이정표가 있다.

마차1리가 장사꾼이 모였던 중심가였다. 마차1리에서 아버지는 세탁업을 하셨다.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광업소 과장이나 계장들이 고객이었다.
1960년대 가장 취업하고 싶었던 직장이 <대한석탄공사>였다.
고급스럽던 동네는 광업소 과장이나 계장이 살던 사택1리와 2리였고....
반장급이 살았던 곳은 응달사택이다.
막장이나 선탄부에서 일하던 사람들, 대다수 외지인이다.
그들은 요봉이란 곳에서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탄가루 날리는 곳으로 마차1리와는 다른 곳.

초등학교 앞 다리. 옛날에도 버스가 다녔으니 다리가 넓었다.

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가 본다.

교실옥상엔 작년에 없던 태양광 전지판이 설치되었다.



내일, 이곳에선 동네아주머니들이 국밥도 끓이고 전도 부친다.
물은 맑고 1급수이다.

끊임없이 물이 솟는 곳이다.
예전엔 이곳에 건물을 짓고 펌프로 산중턱에 있는 물탱크로 용출수를 보내어 저장하였다.
사택과 마차1리 사람들은 상수도를 이용, 이 물을 마셨다. 여과나 약품처리 없이.
대도시에도 상수도시설이 변변치 못한 시절에.

교실과 운동장 사이를 흐르는 냇가.
예전엔 운동장 쪽에도 교실이 있었다. 2개동. 시멘트건물로 2부제 수업해소를 위하여 지었다.
4학년때 수업했던 교실이었다. 지금은 없다.

'샘물공원'이라고 명칭을 정했지만, 원래 모습은 네모졌었다.
도회지 사는 사람이 이 연못을 사서 양어장을 하려고 하였으나 마차리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을 매립하였다. 마차출신들에게 씻지 못할 치욕이었다.
후에 영월군에서 매입, (주)일진글로벌 영월공장 지을 때 다시 연못을 조성하였단다.
마차국민학교 출신들에게 이 연못은 고향이고 어머니이다. 상징이다. 랜드마크였다.


이 건물이 있었던 곳은 앞뒤로 8~10칸 교실 2동이 있었다. 왜정시대 지었던 송판교실.
여름날 해질 무렵, 건물의 바람구멍으로 박쥐들이 수도 없이 나왔다.
5,6학년 때 수업했던 곳, 교무실도 있었다.

교가에 나오는 접산, 그 능선이 보인다.

이 화단이 있었던 곳에도 8칸짜리 송판교실이 있었다. 내가 1,2,3학년때 수업했던 곳.

210년된 비슬나무. 이 나무보다 더 오래된 비슬나무가 있었는데
1960년대말 벼락으로 꺽여졌다.
아침에 등교해서 보니 속이 빈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소문엔 새벽에 나무 속에 있던 용이 승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벼락 맞은거라고.

아버지에게 심일이란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하신다.
하지만 전사(戰史)에 그렇게 기록되었으니,,,,국민학교 때 이 분에 대하여 들은 바가 없었다.

내 가족이 다녔던 마차감리교회, 마차2리에 있다. 몇년전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지었다.
새 건물이 들어선 후 나는 이곳에 가질 않는다. 종탑만 그대로이다.

전야제 무대가 설치된 로타리. 마차리의 중심부라 할 수 있다.
지서(파출소), 소방서, 우체국 등이 있었고
버스가 이곳에서 회차하였다. 여관이며 기생집이 있었던 번화가(?)였다.

차부(車府), 버스표 발권하였던 상점. 건물은 예전 그대로이다.

로타리가 예전엔 놀이터였다. 지금은 소공원이다.

가운데 하얀집, <우리세탁소>란 이름으로 세탁업을 하였던 나의 집이다.
지금은 나 혼자 누워도 좁은 것 같은데 일곱식구가 어떻게 그곳에서 살았을까?

내가 살던 맞은편 태일상회, 간판은 예전 그대로이다.
탄광이 서기 전에는 마을이름이 없었던 곳이라고 한다. 5~6가구 살던 화전민촌이라고.
1920년대 호랑이가 마을에 출몰하였다고 한다. 태일상회아저씨 말씀에.
옛 문헌에 나오는 곳은 문곡이고 마을 훨씬 컸던 모양이다.

미탄은 평창군이었다가 정선군이었다가 지금은 평창군이다.
제천시에서 정선읍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비행기재가 있다.
1968년 울진으로 침투한 무장공비 김신조일당이 이곳, 미탄에서 사고를 처음으로 쳤다.
(내 기억에는.....기관단총소리도 들었고 원주의 3군단이 마차중학교 교정에 주둔,
당시 통행금지시간은 오후4시였다. 정찰비행기로 시끄러웠고.)

마차중.고등학교는 마차2리에 있다.

골마차 입구에서 본 접산(接山).
골마차, 문곡리, 공기리, 연덕리, 덕상리, 마지리,,,,가느골, 강구(江口), 노루골, 분덕재, 절골
요봉, 골요봉, 밤치, 솔치.....정겨운 마을이름이다.
밤치, 고개마루는 영월군과 평창군의 경계지. 양쪽 다 밤치라고 한다.
미탄쪽 밤치에는 영화 '동막골'의 마을세트장이 있다.

나, 박재창, 진강식...친구들.
내가 전학 후 편지 등으로 왕래한 친구가 박재창, 안성호, 김상헌이었다.
박재창은 지금은 해양경찰로 인천에 살고
안성호는 서울에 있다. 이번에 같이 만났다.
김상헌은 마차에 살고 있지만 동기회에 안나온다. 군청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찌져지게 가난하였던 박재창, 김상헌.
그 판자집과 오두막집을 떠올리면...아, 예전에 다 그랬나?
그래도 광업소에서 일하고 월급 받았던 안성호는 그리 가난하지 않았고
세탁업으로 교사봉급의 몇 배를 벌었던 아버지 덕에 나도 잘 먹고 컸다.

늘 내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고향, 마차.
이젠 그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야겠다.
1년 한번 보는 고향친구들,,,만나도 그리 할말이 없다.
이젠 내 주위에 있는 이들과 남은 세월, 추억을 만들어 가야겠다.
첫댓글 고향에 대한 옛 이야기와 오늘날의 모습까지 근현대에 이르는 변화를 잘 정리하셔서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것 같습니다.
부산에서 쭉 자란 저로선 고향이란 말이 주는 이미지, 묘한 향수가 없어 낯설기만 합니다.^^